집으로 돌아오자 윤하경은 임수연과 마주쳤다.그 시간에 윤수철과 윤하연은 이미 출근한 뒤라 집에는 그녀와 임수연만 남아 있었다.어제 그 남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자 윤하경의 눈빛이 싸늘해졌다.하지만 임수연은 그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가슴 앞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경아, 어제도 밤새 집에 안 들어왔더라? 참, 내가 이런 계모 역할 하기가 참 어렵다. 몇 마디만 하면 네가 화를 내니. 세상에 어느 집 딸이 이렇게 밤늦게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덧붙였다.“네 아버지가 화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니?”하지만 이번에 윤하경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임수연이 입고 있는 비단 소재의 잠옷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아줌마, 솔직히 이런 옷은 별로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웃음 섞인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기억하기로는 아줌마가 간병인으로 우리 엄마를 돌보던 그 시절 옷차림이 더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요?”임수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과거, 간병인으로 일할 때 그녀는 소박한 옷차림을 했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길거리에서 음식을 팔았다. 옷 한 벌 사는 것도 신중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하지만 윤씨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좋은 것만 찾으며 온몸을 치장하는 데 몰두했다.그녀는 이제 부잣집 아내 행세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 겉모습은 명품으로 치장한 졸부처럼 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부잣집 부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외면받는 처지였다.윤하경의 말은 그녀의 아픈 과거를 정확히 겨눴다. 임수연은 차마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윤하경, 도대체 네 눈에는 내가...”임수연이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윤하경이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빠?”임수연은 순간 입을 다물었고 표정은 순식간에 온화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윤하경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임수연은
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헛소리 그만해. 내 앞에서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차분히 말했다.“다른 이유가 있으니까 탐정 연락처나 보내줘.”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온지우 같은 사람은 비밀을 지키기 어려웠다. 모든 게 명확해지기 전까지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온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그는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그나저나 구지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넌 한 번도 안 갔다며? 정말 끝낸 거야?”윤하경은 그를 흘겨보며 대답했다.“그만하라고 했잖아.”온지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참 우습지 않냐? 네가 구지호한테 매달릴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구지호가 너한테 매달리네. 요즘 구지호의 SNS를 보면 온통 감성적이고 오글거리는 글들뿐이야.”그러더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아, 그리고 트위터에도 비슷한 글 올리더라.”윤하경은 이미 강현우의 SNS 계정을 차단한 상태라 이런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고 하지만 솔직히 흥미도 없었다.온지우가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사람들이 너랑 구지호가 다시 만날지 두고 내기를 했대.”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으며 말했다.“그럼 내 이름으로 2,000만 원 걸어. 절대 안 돌아간다고.”그녀는 덧붙였다.“그리고 탐정 연락처 꼭 보내줘. 난 먼저 가볼게. 요즘 회사 일로 바빠서.”온지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윤하경이 구지호를 완전히 잊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카페를 나와 택시를 잡은 윤하경은 소지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왜? 무슨 일이야?”윤하경은 차 문을 열며 전화를 받았고 소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날카로웠다.“강한 그룹에서 연락이 왔어. 계약을 취소하겠대.”윤하경은 순간 멍해졌다.“뭐라고? 이유가 뭔데?”“글쎄 전화로는 이유를 안 알려줬어. 계약을 취소하고 위약금은 지급하겠다고 했고 우리가 남은
비서는 윤하경을 힐끔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강현우를 만나러 온 여자들은 많았지만 단 한 명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대부분 비서한테서 막혔고 일부는 아예 끌려 나가는 수모를 겪었다.강현우는 그를 하루를 꼬박 기다린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윤하경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강현우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머리 위로 비추는 조명은 그의 윤곽을 한층 부드럽게 돋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카펫 때문에 윤하경의 발걸음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윤하경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여기는 무슨 일이야?”‘뻔뻔한 자식, 알면서 왜 묻는 거야.’윤하경은 속으로 씩씩댔지만 겉으론 차분하게 다가갔고 강현우라는 상대는 함부로 부딪힐 수 없었다.“강 대표님, 저희와의 계약을 왜 갑자기 취소하셨나요?”드디어 고개를 든 강현우의 얼굴은 조명 아래에서 한층 더 부드럽게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전문가가 아닌 사람들과 협력하는 건 서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그랬어.”“네?”윤하경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고 자신 넘치게 대답했다.“우리 회사는 작지만 저와 팀원 모두 전문성을 갖추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점만큼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그녀의 말에 강현우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에는 분명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설마 회사 얘기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그녀는 아침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얼굴이 뜨거워졌다.그가 말하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건 팀이 아니라 자신을 말한 것이 분명했다.윤하경은 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강현우는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놓치지 않았고 비웃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윤하경 씨, 내가 처음 제시했던 조건을 잊었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면 협력을 끝내는 게 맞지 않겠어?”그의 직설적인 말에 윤하경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
강현우는 늘 냉정하고 말이 적었다.윤하경은 잠깐의 대치 끝에 결국 힘없이 손을 들면서 항복했다. 대항할 의지도 체력도 바닥났고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해 버렸다.그 순간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차갑게 눈을 마주쳤다.“집중하든가 아니면 나가든가.”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어쩌다가 이런 재앙을 불러들였지...’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를 상대해야 했다.모든 일이 끝난 뒤, 강현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만 둘러매고 그녀를 내려다봤다.조명이 어두워 그의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의 눈빛을 애써 알고 싶지 않았고 그녀는 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버텨야 할 남은 시간을 떠올렸다.‘아직 20일이나 남았어. 참아야지.’강현우가 욕실로 향하려던 순간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크고 맑은 눈이 순간적으로 순진한 표정을 담고 반짝였다.“강 대표님, 협력 건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강현우는 가볍게 손을 빼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계속 진행하라고 지시할 거야.”그제야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며 한숨 돌렸다.하지만 그녀는 강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힐끗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 것을 보지 못했다.잠시 후, 강현우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윤하경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지만 그녀는 방금 강현우 때문에 너무 피곤한 탓에 여전히 움직일 힘이 없었다.그런데도 강현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네?”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현우 씨는 원래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에요?”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녀는 대충 샤워하고 나왔다.강현우의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는 그녀를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오래 있을 이유도 없으니 별로 개의치 않았다.‘어차피 여긴 금방 떠날 거니까.’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강현우는 값비싸 보이는 실크 잠옷을 입고 소파에
한선아는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작은아버지 댁 딸이 해외에서 돌아왔대. 둘이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그 말속에 담긴 의도는 너무도 뻔했다. 결혼을 재촉하는 말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강현우 같은 완벽한 남자도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결국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다들 비슷한 처지네.’강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윤하경이 숨은 쪽을 힐끗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엄마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한선아는 얼굴을 굳히다가도 이내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현우야, 엄마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잖니. 진해리는 정말 괜찮은 아가씨야. 해외 유학 박사인 데다 예쁘고 성격도 반듯한 아이야. 네 주변에 그런 이상한 여자들보다는 훨씬 낫잖아. 너 빨리 결혼하면 나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텐데.”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그런 이상한 여자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얘기겠지?’그녀는 더 이상 이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우가 피곤하다며 적당히 핑계를 대고 한선아를 돌려보내는 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윤하경은 커튼 뒤에서 조용히 나왔고 그녀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그녀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운전기사를 불렀다.“데려다줘.”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윤하경은 차에 올라타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걸 느끼며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평소에 담배를 자주 피우지 않았지만 요즘은 손이 자주 갔다.강현우와 얽히게 된 것도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그 후로는 모든 일이 그녀의 통제 밖에서 흘러갔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편은 아니었다.하지만 아까 한선아가 했던 말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집 근처 100미터쯤 남은 지점에서 윤하경은 기사에게 말했다.“여기서 내려주세요.”윤하경은 자신
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빠는 구지호랑 윤하연이 아무 관계 없다는 걸 침대 밑에 숨어서 직접 들으셨나 보죠?”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평소에도 그녀가 독설을 잘 날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날이 선 말이었기에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그 틈을 타 윤하경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윤수철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런 불효녀가 따로 없네. 정말 버릇없는 년!”그 순간 윤하연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부축하며 눈물을 글썽였다.“아빠, 죄송해요. 앞으로는 지호 오빠를 만나지 않을게요. 언니가 오해하지 않도록요.”그녀는 흐느끼며 덧붙였다.“하지만 정말이에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언니가 저를 오해한 거예요.”윤수철은 딸의 눈물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부드럽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빠는 네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알아. 언니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다음번엔 내가 반드시 네 억울함을 풀어줄게.”1층은 훈훈한 부녀의 장면으로 가득했지만 2층의 윤하경은 정반대였다.방에 들어온 그녀는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욕실로 향했고 드레스를 벗으려던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췄다.목과 어깨, 몸 곳곳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은 강현우와의 격렬했던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진짜 늑대를 건드렸어. 그것도 아주 위험한 늑대를 말이야.’지금의 강현우는 그녀 눈에 완벽한 포식자였다.더 답답한 건 그녀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도망칠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윤하경은 따뜻한 욕조 물에 몸을 담그며 휴대폰을 들어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프로젝트팀에 말해서 강씨 가문 프로젝트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전해줘. 필요하면 야근도 하라고.”소지연은 약간 놀란 듯 물었다.“강한 그룹 쪽 문제는 해결됐어?”“응.”윤하경은 간단히 대답했다.“
윤수철은 윤하경이 드물게 온화한 목소리로 부르자 잠시 의아해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침 먹고 나랑 같이 나가자.”윤하경은 자리에 앉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어딜 가는데요?”윤수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가보면 알 거야.”윤하경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다 마주 앉은 윤하연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즐거움도 잠시였고 차가 병원 앞에 도착하자 그녀의 미소는 금세 굳어졌다.“아빠, 대체 여기는 왜 온 거죠?”병원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아버지를 차갑게 노려봤다.그들이 도착한 곳은 구지호가 입원했던 병원이었고 그녀가 구지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했던 곳이었다.물론 두려운 게 아니라 단지 그의 존재 자체가 불쾌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아버지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다니 당황스러움을 넘어 짜증이 치밀었다.아까 아버지가 운전기사에게 꽃다발을 사 오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윤수철은 차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철이 없는 거야? 구지호가 이렇게 오래 병원에 있었는데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 오늘 퇴원하는 날이니 당연히 와야지.”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병원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주미나와 마주쳤다.주미나는 윤하경 부녀를 보자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하경아, 왔구나!”그녀는 윤수철에게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오신다기에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잘 오셨어요.”주미나는 윤하경의 손을 잡아 병실 쪽으로 이끌며 덧붙였다.“지호 병실로 가자. 기다리고 있을 거야.”윤하경은 내키지 않았지만 주미나 앞에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따랐다.병실로 가는 길에 주미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물었다.“하경아, 아직 지호한테 화난 거야?”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주미나는 한숨을 쉬며 윤하경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괜찮아. 집에 가면 내가
그들이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강현우가 낯선 여자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여자는 밝게 웃으며 강현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옆으로 비키려 했지만 곧 스스로를 비웃었다.‘내가 왜 피해야 하지? 괜히 졸지 말자.’강현우 역시 윤하경을 알아봤고 그녀와 눈이 잠시 마주치자 차가웠던 시선이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주미나는 강현우를 보자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어머, 현우 씨도 오셨네요.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여유롭고 세련된 태도였다. 반면 구지호는 윤하경의 손을 슬쩍 잡아챘다.그녀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구지호는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며 놓아주지 않았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지호 씨, 퇴원했나 보네요.”구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덕분에 살았죠. 죽이지 않고 살려줘서 고마워요.”윤수철은 강현우와 친분을 쌓아볼 생각이었지만 강현우가 사고의 당사자라는 걸 듣고 한쪽에 서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우는 구지호의 비꼬는 말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주미나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혹시 후유증 같은 게 남았다면 바로 연락하세요. 제 책임이니까요.”주미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그럼 다행이네요.”강현우는 짧게 대답하고 옆에 있던 여자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그럼 우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주미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윤하경과 윤수철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끝내 말을 삼켰다.윤하경은 구지호에게 손을 잡힌 채 답답함이 점점 커졌다.겨우 자리에 앉자마자 구지호는 바짝 다가와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하경아, 요즘 뭐 했어?
“너 대체 우리 윤씨 가문을 온 경성의 웃음거리로 만들 셈이냐?”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손이 허공을 가르며 윤하경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익숙한 듯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고 대신 그녀의 손이 뻗어 윤하연을 거칠게 끌어당겼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크게 휘둘렀다. “아버지가 묻고 계셔. 넌 윤씨 가문이 경성의 화제가 되길 바라는 거야?” 윤하연은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 순간 충격에 얼어붙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윤수철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화를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말한 거야!” 그러나 윤하경은 콧방귀를 뀌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니 참 이상하네요? 집안이 창피해지는 게 싫다면 몸을 이렇게 만든 딸이 창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그에 대해 따지고 드는 저를 창피해하시는 거 보면 혹시라도 아빠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죠?”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윤수철의 얼굴을 훑었다. “확실히 검사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윤수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윤하경의 말에는 반박할 틈이 없었어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유 집사, 당장 이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유 집사가 황급히 나섰다. “하경 씨, 이제 그만 올라가서 쉬세요. 밤이 늦었잖아요.” 윤하경은 굳이 더 붙잡고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혀를 차며 뒤돌아서는 순간, 뭔가 미련이 남은 듯 되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싸워볼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유 집사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억지로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윤수철과 윤하연만 남았다. 윤하연은 뺨이 화끈거렸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윤수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 윤수철은 길게 숨을 내쉬며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이 일에 대해 누구든 밖에 나가 입을 놀리면 그땐 봐주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강압적이었고 잠시나마 ‘집안의 가장’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연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리고 다시 윤하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너는 따라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윤하경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기서 말하면 안 돼요? 한밤중에 굳이 서재까지 갈 필요 있나요? 내일 회사 출근해야 해서 피곤하거든요.” 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서재로 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고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서재 문을 열었더니 윤수철은 이미 걸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둑한 조명 아래서 더욱 깊어진 주름과 어두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하경은 별로 개의치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고 강현우와의 일로 지친 그녀는 다시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빠, 무슨 이야기든 빨리 해요. 저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그녀가 말하는 태도에 윤수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하연이가 오늘 이런 꼴을 당한 거, 너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저녁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발짝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하연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저도 궁금하네요. 아까 그녀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 모든 건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다’라고 하더라고요.”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끝에 묻어나는 차가운 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 “아빠, 저한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녀의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 역시 윤하연이 어리석고 경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윤하경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며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일부러 하품을 하곤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한밤중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사람이 자야 살지.” 갓 잠에서 깬 듯한 살짝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며 거실을 본 순간, 윤하경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유 집사와 다른 가정부들도 다 깨서 거실에 모여 있었고 윤수철 역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서는 완전히 망가진 윤하연 있었다. 옷은 찢겨 제대로 몸을 가리지도 못했고 여기저기 남은 상처들이 말해주듯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만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강현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걸어 내려가며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데 대체 무슨 꼴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담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가 윤하연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힘없이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윤하경... 너지? 이거 다 네가 한 짓이지?” 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또 시치미 떼네!” 윤하연은 미칠 듯이 화가 나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릴수록, 윤하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거 전부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어!” 그 말에 윤하경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슬쩍 윤수철 쪽을 힐끔 보며 코끝을 찡긋했다. “하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거야 알지만... 네가 겪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다고 나한테 함부로 원망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그녀의 연기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남자는 목을 곧추세우며 끝까지 버텼다. “전부 증거가 있어요. 당신이 보낸 계좌 이체 내역도 있고 문자도 남아 있다고.” 그 말에 윤하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강현우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우지원이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냉소를 머금으며 강현우에게 폰을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보세요. 이게 윤하연 씨가 보낸 메시지입니다.” 윤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삭제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들켜버렸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강현우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대표님, 저... 저를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뭐든 다 할게요. 원하시는 대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문득 비교했다. ‘똑같이 윤씨 집안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클까? 윤하경이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모습조차 매혹적이었는데...’그러다 불현듯 윤하경이 지난번 침대 위에서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야말로 유혹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하연의 울음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윤하연은 강현우의 반응을 보고 그가 넘어왔다고 착각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맞아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말을 듣자 강현우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묶여 있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씨 가문에서 이미 돈도 지불했으니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우리가 윤하경 씨를 찾아서...” 짝! 우지원이 손을 들어 그중 한 남자의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이전에도 윤하연이 밤마다 몰래 남자를 만났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표정이 어두워진 그를 뒤로하고 윤하경은 가볍게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휴대폰을 확인하니 강현우가 보낸 새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아이고 배짱이 제법 커졌네.]‘???’윤하경은 황당한 얼굴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답장을 했다.그러자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내가 네 비서야? 어떤 쓰레기든 다 나한테 보내서 처리해달라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역시 강현우는 머리가 비상했고 어떤 일이든 다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후, 침대에 앉아 차분히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굳이 제 체면을 봐서 살살해줄 필요는 없어요.]이번엔 정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젯밤 그녀를 끔찍한 일에 말려들게 하려 했던 윤하연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어떻게 응징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스스로 구지호의 행방을 물으러 온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강현우를 이용하면 확실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정말 일거양득이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주 독하네.]메시지 뒤에 덧붙은 웃는 이모티콘이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꽤 흥미롭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곧 방 안을 가득 메운 신음이 그의 기분을 흐트러뜨렸다.“대표님! 제발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윤하연이 잔뜩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그녀는 처음엔 구지호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납치당해 끌려오더니 눈앞엔 피투성이가 된 구지호가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문 앞에 서 있던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켜서지 않았다.강현우는 윤하연이 너무 시끄
“정신이 나갔으면 정신병원에 가.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구지호가 어디 갔는지 나한테 묻지 마. 난 몰라.” 윤하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윤하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분명히 네가 먼저 그 얘길 꺼냈잖아! 너 분명히 알고 있지? 어젯밤 너 또 지호 오빠랑 있었던 거 아니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씹고 있는데 네가 꾸민 짓이지?” 윤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진짜 대단하다. 남을 의심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알고 있어. 궁금해?” 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다그쳤다. “장난치지 말고 당장 말해! 지호 오빠 어디 있어?!”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 근데 말이야. 내가 굳이 네가 원하는 걸 그냥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느릿한 말투가 윤하연을 더욱 열받게 했다. “그럼 뭘 원해?” 윤하경은 손톱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뭘 받을까 고민 중인데... 네가 무릎 꿇고 정중히 부탁하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윤하경! 적당히 해!” 윤하연이 소리쳤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무릎 꿇으라고 했잖아. 싫으면 말고.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내 노트북값부터 보내. 총 600만 원. 계좌 여기야.” 그녀는 계좌 번호를 보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 윤하연은 치를 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조건이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지호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건데?” 윤하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너한테 받을 만한 게 뭐가 있겠어. 네 물건은 죄다 더러워서 필요 없고.”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됐어, 그래도 한집에 사는 정이 있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어젯밤 지호 오빠가
윤하경은 윤하연을 비웃듯이 쳐다봤다. 역시 상대가 악랄하게 나오면 그에 맞서야 속이 풀리는 법이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유 집사에게 간단한 반찬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도 거실로 내려왔고 윤하경의 독이 잔뜩 서린 눈빛을 보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윤하경, 내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너 절대 가만 안 둬. 기다려 봐.”말투만 보면 마치 지금까진 자신이 참아준 것처럼 들렸다.윤하경은 가볍게 눈을 굴리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녀가 반응조차 하지 않자, 윤하연은 발을 쾅 내디디며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녀가 나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더 서둘러. 여긴 상황이 바뀌었어.]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유 집사가 음식을 가져왔다.“하경 씨, 식사하세요.”“고마워요.”윤하경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사실 아침에 강현우의 집에서 뭘 좀 먹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또 이상하게 굴어서 제대로 식사할 기회를 놓쳤다.게다가 어젯밤의 ‘운동’에 이어 아침부터 긴장과 감정 소모가 심했으니 속이 비어 있는 게 당연했다.유 집사는 그녀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경 씨, 방금 전에 하신 일... 혹시라도 회장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요?”“아시면 뭐요?”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유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알기에 그 따뜻한 마음은 감사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착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매번 참고 넘어갔다면 지금쯤 그녀의 존재조차 지워졌을 것이다.“그게 아니라, 이따가 하연 씨가 이 일을 회장님께 말하면... 회장님이 또 하경 씨를 나무라실까 봐요.”“그럴 여유가 있을까요?”윤하경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며
윤하경이 윤하연의 방에 도착했을 때, 윤하연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마도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온갖 난리를 치느라 지쳤는지, 침대 위에서 돼지처럼 늘어져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을 지키다가, 손에 들고 있던 국을 그대로 윤하연의 침대 위로 쏟아버렸다.“아!”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뜨겁진 않지만 식은 국이라도 몸에 닿으면 충분히 따가운 법이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고통에 윤하연은 침대에서 벌떡 뛰쳐나왔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 윤하경이 창가에 서서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윤하경! 너 미쳤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거야?”윤하경은 윤하연이 평소 흘리는 눈물 연기를 그대로 따라 하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누가 보면 또 나한테 억울한 일 당한 줄 알겠네. 아버지가 우리 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오래 자면 배고플까 봐 직접 국까지 떠서 가져왔는데 아차! 내가 그만 손을 미끄러뜨렸지 뭐야. 실수야, 그런데 네가 왜 이렇게 날 오해하는 거야?”윤하경은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윤하연은 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몸이 따갑고 욱신거리는 고통도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윤하경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전날 있었던 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덤볐다가 오히려 윤하경에게 쉽게 제압당했다.윤하경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러 바닥에 깔아버렸다.“윤하경! 당장 놔! 너 죽여버릴 거야!”윤하연은 온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힘이 빠져버린 몸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피부가 얼얼하게 따가운 데다, 혹여나 얼굴에 흉터라도 남게 되면 인생이 망한다는 생각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반드시 윤하경을 없애야 했다.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뒤로 꺾어 고정한
“상처가 더 심해진 것 같네요.”“그렇지. 그래서 네가 책임져야지.”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에 네가 너무 날뛰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까진 안 됐을 거야.”윤하경은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꼭 그런 말만 골라서 하네, 진짜.’그녀는 어젯밤의 장면들을 일부러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는데 강현우가 한마디 꺼내는 순간 그 장면들이 우르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상처 제대로 안 처리돼서 그런 거예요. 제가 다시 치료해 드릴게요.”강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상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피부는 벌어져 있었고 붉게 부어오른 자국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방치한 흔적이 역력했고 예전부터 있던 흉터들까지 더해져 그의 등이 보는 사람조차 아찔할 정도였다.윤하경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뒤, 다시 붕대로 감아 마무리했다. 마치 습관처럼 마지막에 가슴팍에 리본을 묶었는데 그 커다란 가슴 근육 위에 작고 정성스러운 리본이 묘하게도 시선을 끌었다.강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귀찮은 기색이 스쳤지만 윤하경이 열심히 리본을 묶는 모습을 보고는 그 불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됐어요.”윤하경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강현우는 말없이 셔츠를 입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윤하경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복도를 걷던 중, 끝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비명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은 구지호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목소리가 문가 쪽에서 들려왔다.“마음이 쓰이면 말해. 네가 한마디 하면 내가 자비 좀 베풀 수도 있지.”고개를 돌린 윤하경은 문가에 기대 서 있는 강현우를 마주했다. 셔츠 단추를 다 채운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