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자 윤하경은 임수연과 마주쳤다.그 시간에 윤수철과 윤하연은 이미 출근한 뒤라 집에는 그녀와 임수연만 남아 있었다.어제 그 남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자 윤하경의 눈빛이 싸늘해졌다.하지만 임수연은 그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가슴 앞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경아, 어제도 밤새 집에 안 들어왔더라? 참, 내가 이런 계모 역할 하기가 참 어렵다. 몇 마디만 하면 네가 화를 내니. 세상에 어느 집 딸이 이렇게 밤늦게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덧붙였다.“네 아버지가 화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니?”하지만 이번에 윤하경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임수연이 입고 있는 비단 소재의 잠옷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아줌마, 솔직히 이런 옷은 별로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웃음 섞인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기억하기로는 아줌마가 간병인으로 우리 엄마를 돌보던 그 시절 옷차림이 더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요?”임수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과거, 간병인으로 일할 때 그녀는 소박한 옷차림을 했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길거리에서 음식을 팔았다. 옷 한 벌 사는 것도 신중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하지만 윤씨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좋은 것만 찾으며 온몸을 치장하는 데 몰두했다.그녀는 이제 부잣집 아내 행세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 겉모습은 명품으로 치장한 졸부처럼 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부잣집 부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외면받는 처지였다.윤하경의 말은 그녀의 아픈 과거를 정확히 겨눴다. 임수연은 차마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윤하경, 도대체 네 눈에는 내가...”임수연이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윤하경이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빠?”임수연은 순간 입을 다물었고 표정은 순식간에 온화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윤하경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임수연은
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헛소리 그만해. 내 앞에서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차분히 말했다.“다른 이유가 있으니까 탐정 연락처나 보내줘.”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온지우 같은 사람은 비밀을 지키기 어려웠다. 모든 게 명확해지기 전까지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온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그는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그나저나 구지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넌 한 번도 안 갔다며? 정말 끝낸 거야?”윤하경은 그를 흘겨보며 대답했다.“그만하라고 했잖아.”온지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참 우습지 않냐? 네가 구지호한테 매달릴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구지호가 너한테 매달리네. 요즘 구지호의 SNS를 보면 온통 감성적이고 오글거리는 글들뿐이야.”그러더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아, 그리고 트위터에도 비슷한 글 올리더라.”윤하경은 이미 강현우의 SNS 계정을 차단한 상태라 이런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고 하지만 솔직히 흥미도 없었다.온지우가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사람들이 너랑 구지호가 다시 만날지 두고 내기를 했대.”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으며 말했다.“그럼 내 이름으로 2,000만 원 걸어. 절대 안 돌아간다고.”그녀는 덧붙였다.“그리고 탐정 연락처 꼭 보내줘. 난 먼저 가볼게. 요즘 회사 일로 바빠서.”온지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윤하경이 구지호를 완전히 잊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카페를 나와 택시를 잡은 윤하경은 소지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왜? 무슨 일이야?”윤하경은 차 문을 열며 전화를 받았고 소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날카로웠다.“강한 그룹에서 연락이 왔어. 계약을 취소하겠대.”윤하경은 순간 멍해졌다.“뭐라고? 이유가 뭔데?”“글쎄 전화로는 이유를 안 알려줬어. 계약을 취소하고 위약금은 지급하겠다고 했고 우리가 남은
비서는 윤하경을 힐끔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강현우를 만나러 온 여자들은 많았지만 단 한 명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대부분 비서한테서 막혔고 일부는 아예 끌려 나가는 수모를 겪었다.강현우는 그를 하루를 꼬박 기다린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윤하경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강현우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머리 위로 비추는 조명은 그의 윤곽을 한층 부드럽게 돋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카펫 때문에 윤하경의 발걸음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윤하경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여기는 무슨 일이야?”‘뻔뻔한 자식, 알면서 왜 묻는 거야.’윤하경은 속으로 씩씩댔지만 겉으론 차분하게 다가갔고 강현우라는 상대는 함부로 부딪힐 수 없었다.“강 대표님, 저희와의 계약을 왜 갑자기 취소하셨나요?”드디어 고개를 든 강현우의 얼굴은 조명 아래에서 한층 더 부드럽게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전문가가 아닌 사람들과 협력하는 건 서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그랬어.”“네?”윤하경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고 자신 넘치게 대답했다.“우리 회사는 작지만 저와 팀원 모두 전문성을 갖추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점만큼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그녀의 말에 강현우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에는 분명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설마 회사 얘기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그녀는 아침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얼굴이 뜨거워졌다.그가 말하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건 팀이 아니라 자신을 말한 것이 분명했다.윤하경은 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강현우는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놓치지 않았고 비웃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윤하경 씨, 내가 처음 제시했던 조건을 잊었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면 협력을 끝내는 게 맞지 않겠어?”그의 직설적인 말에 윤하경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
강현우는 늘 냉정하고 말이 적었다.윤하경은 잠깐의 대치 끝에 결국 힘없이 손을 들면서 항복했다. 대항할 의지도 체력도 바닥났고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해 버렸다.그 순간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차갑게 눈을 마주쳤다.“집중하든가 아니면 나가든가.”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어쩌다가 이런 재앙을 불러들였지...’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를 상대해야 했다.모든 일이 끝난 뒤, 강현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만 둘러매고 그녀를 내려다봤다.조명이 어두워 그의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의 눈빛을 애써 알고 싶지 않았고 그녀는 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버텨야 할 남은 시간을 떠올렸다.‘아직 20일이나 남았어. 참아야지.’강현우가 욕실로 향하려던 순간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크고 맑은 눈이 순간적으로 순진한 표정을 담고 반짝였다.“강 대표님, 협력 건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강현우는 가볍게 손을 빼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계속 진행하라고 지시할 거야.”그제야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며 한숨 돌렸다.하지만 그녀는 강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힐끗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 것을 보지 못했다.잠시 후, 강현우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윤하경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지만 그녀는 방금 강현우 때문에 너무 피곤한 탓에 여전히 움직일 힘이 없었다.그런데도 강현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네?”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현우 씨는 원래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에요?”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녀는 대충 샤워하고 나왔다.강현우의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는 그녀를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오래 있을 이유도 없으니 별로 개의치 않았다.‘어차피 여긴 금방 떠날 거니까.’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강현우는 값비싸 보이는 실크 잠옷을 입고 소파에
한선아는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작은아버지 댁 딸이 해외에서 돌아왔대. 둘이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그 말속에 담긴 의도는 너무도 뻔했다. 결혼을 재촉하는 말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강현우 같은 완벽한 남자도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결국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다들 비슷한 처지네.’강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윤하경이 숨은 쪽을 힐끗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엄마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한선아는 얼굴을 굳히다가도 이내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현우야, 엄마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잖니. 진해리는 정말 괜찮은 아가씨야. 해외 유학 박사인 데다 예쁘고 성격도 반듯한 아이야. 네 주변에 그런 이상한 여자들보다는 훨씬 낫잖아. 너 빨리 결혼하면 나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텐데.”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그런 이상한 여자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얘기겠지?’그녀는 더 이상 이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우가 피곤하다며 적당히 핑계를 대고 한선아를 돌려보내는 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윤하경은 커튼 뒤에서 조용히 나왔고 그녀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그녀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운전기사를 불렀다.“데려다줘.”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윤하경은 차에 올라타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걸 느끼며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평소에 담배를 자주 피우지 않았지만 요즘은 손이 자주 갔다.강현우와 얽히게 된 것도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그 후로는 모든 일이 그녀의 통제 밖에서 흘러갔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편은 아니었다.하지만 아까 한선아가 했던 말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집 근처 100미터쯤 남은 지점에서 윤하경은 기사에게 말했다.“여기서 내려주세요.”윤하경은 자신
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빠는 구지호랑 윤하연이 아무 관계 없다는 걸 침대 밑에 숨어서 직접 들으셨나 보죠?”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평소에도 그녀가 독설을 잘 날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날이 선 말이었기에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그 틈을 타 윤하경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윤수철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런 불효녀가 따로 없네. 정말 버릇없는 년!”그 순간 윤하연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부축하며 눈물을 글썽였다.“아빠, 죄송해요. 앞으로는 지호 오빠를 만나지 않을게요. 언니가 오해하지 않도록요.”그녀는 흐느끼며 덧붙였다.“하지만 정말이에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언니가 저를 오해한 거예요.”윤수철은 딸의 눈물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부드럽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빠는 네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알아. 언니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다음번엔 내가 반드시 네 억울함을 풀어줄게.”1층은 훈훈한 부녀의 장면으로 가득했지만 2층의 윤하경은 정반대였다.방에 들어온 그녀는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욕실로 향했고 드레스를 벗으려던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췄다.목과 어깨, 몸 곳곳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은 강현우와의 격렬했던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진짜 늑대를 건드렸어. 그것도 아주 위험한 늑대를 말이야.’지금의 강현우는 그녀 눈에 완벽한 포식자였다.더 답답한 건 그녀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도망칠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윤하경은 따뜻한 욕조 물에 몸을 담그며 휴대폰을 들어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프로젝트팀에 말해서 강씨 가문 프로젝트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전해줘. 필요하면 야근도 하라고.”소지연은 약간 놀란 듯 물었다.“강한 그룹 쪽 문제는 해결됐어?”“응.”윤하경은 간단히 대답했다.“
윤수철은 윤하경이 드물게 온화한 목소리로 부르자 잠시 의아해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침 먹고 나랑 같이 나가자.”윤하경은 자리에 앉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어딜 가는데요?”윤수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가보면 알 거야.”윤하경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다 마주 앉은 윤하연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즐거움도 잠시였고 차가 병원 앞에 도착하자 그녀의 미소는 금세 굳어졌다.“아빠, 대체 여기는 왜 온 거죠?”병원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아버지를 차갑게 노려봤다.그들이 도착한 곳은 구지호가 입원했던 병원이었고 그녀가 구지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했던 곳이었다.물론 두려운 게 아니라 단지 그의 존재 자체가 불쾌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아버지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다니 당황스러움을 넘어 짜증이 치밀었다.아까 아버지가 운전기사에게 꽃다발을 사 오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윤수철은 차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철이 없는 거야? 구지호가 이렇게 오래 병원에 있었는데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 오늘 퇴원하는 날이니 당연히 와야지.”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병원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주미나와 마주쳤다.주미나는 윤하경 부녀를 보자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하경아, 왔구나!”그녀는 윤수철에게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오신다기에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잘 오셨어요.”주미나는 윤하경의 손을 잡아 병실 쪽으로 이끌며 덧붙였다.“지호 병실로 가자. 기다리고 있을 거야.”윤하경은 내키지 않았지만 주미나 앞에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따랐다.병실로 가는 길에 주미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물었다.“하경아, 아직 지호한테 화난 거야?”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주미나는 한숨을 쉬며 윤하경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괜찮아. 집에 가면 내가
그들이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강현우가 낯선 여자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여자는 밝게 웃으며 강현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옆으로 비키려 했지만 곧 스스로를 비웃었다.‘내가 왜 피해야 하지? 괜히 졸지 말자.’강현우 역시 윤하경을 알아봤고 그녀와 눈이 잠시 마주치자 차가웠던 시선이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주미나는 강현우를 보자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어머, 현우 씨도 오셨네요.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여유롭고 세련된 태도였다. 반면 구지호는 윤하경의 손을 슬쩍 잡아챘다.그녀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구지호는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며 놓아주지 않았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지호 씨, 퇴원했나 보네요.”구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덕분에 살았죠. 죽이지 않고 살려줘서 고마워요.”윤수철은 강현우와 친분을 쌓아볼 생각이었지만 강현우가 사고의 당사자라는 걸 듣고 한쪽에 서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우는 구지호의 비꼬는 말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주미나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혹시 후유증 같은 게 남았다면 바로 연락하세요. 제 책임이니까요.”주미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그럼 다행이네요.”강현우는 짧게 대답하고 옆에 있던 여자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그럼 우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주미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윤하경과 윤수철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끝내 말을 삼켰다.윤하경은 구지호에게 손을 잡힌 채 답답함이 점점 커졌다.겨우 자리에 앉자마자 구지호는 바짝 다가와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하경아, 요즘 뭐 했어?
강현우가 가까이 다가오자 향기가 코끝을 스쳤고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기대며 말했다.“우리 이미 몇 번이나 잤잖아요. 다음엔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아줘요. 나 정말 깜짝 놀랐거든요.”평소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오늘은 일부러 강현우를 약 올리려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에 일부러 살짝 애교를 얹자, 웬만한 남자는 다 무너질 법했다.강현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깊어졌다.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더니, 한 손으로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추었다.윤하경은 깜짝 놀라 반응할 틈도 없이, 강현우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아직 부족했나 보네.”말을 끝내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거칠게 키스했다.이런 강현우의 공격적인 행동에 윤하경은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왜 그를 건드렸는지 후회했다....회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이때 소지연이 다가오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오늘은 전화도 안 받던데.”윤하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냥 묻지 마.”소지연은 그녀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며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오늘 한 고객이…“그런데 말하다 말고 윤하경의 입술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입술 어쩌다 그랬어? 좀 부은 것 같은데.”윤하경은 책상 위 손거울로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별일 아냐. 개한테 물렸어.”소지연은 잠시 말이 없더니, 몸을 숙여 그녀의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물었다.“솔직히 말해. 어젯밤에 누구 만난 거야?”윤하경은 마지못해 대답했다.“됐고 일 얘기나 하자.”소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업무 이야기를 했다.오전 내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소지연은 같이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지만 윤하경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말했다.“미안해. 점심은 다른 약속이 있어. 저녁에 보자.”그녀는 가방을 챙기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10분 뒤, 그녀는 회사 건너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윤하경은 강현우와 8시에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할 뻔했다.그는 속이 좁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지난번엔 술에 취한 것뿐인데도 바로 프로젝트를 철회하려고 했다. 이번에도 늦으면 어쩌려나 싶어서 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저기... 나 좀 급한 일이 생겨서. 여기서 내려줘. 지금 너무 바빠.”소지연은 그녀가 허둥지둥하는 걸 보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뭔데? 무슨 일이야? 내가 도와줄까?”윤하경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볍게 헛기침했다.“아냐. 그냥 약속이 하나 있어서.”사실은 그 약속이란 잠자리를 위한 것이었고 소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그렇게 서둘러 호텔로 향한 그녀는 약 25분 만에 도착했다.시계를 보니 7시 55분이었다.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한 걸 확인한 윤하경은 안도하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호텔 문 앞에서 그녀는 심호흡하고 노크를 했다.잠시 후 문이 열렸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은 강현우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이었다.다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얇고 단호한 입술은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고 손에는 붉은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들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보세요. 저 늦지 않았어요.”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살짝 몸을 비켜 그녀를 들여보냈다.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뭐 하러 멍하니 서 있어?”강현우가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샤워나 해.”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있는데 문 뒤쪽에서 소리가 났고 돌아보기도 전에 강현우가 이미 욕실로 들어왔다.윤하경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그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왔다.순식간에 욕실은 자욱한 수증기로 가득 찼고 그녀는 이내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어떻게 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저 강현우의 어깨에 기대어 울며 이를 악물었던 기억만 아련하게 떠올랐다.그러고 나서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아줌마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집은 대체 무슨 상황이죠? 이제 좀 들어보고 싶어요.”윤수철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하경아, 네 눈엔 내가 아빠로 보이긴 하니?”윤하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그녀는 속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아마도 그 집에 얽힌 사연이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윤하경은 입을 다문 채 담담한 시선으로 윤수철을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윤수철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매일 내 것만 노리는 거냐? 그 집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아. 내가 알아서 줄 때가 되면 줄 테니.”임수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윤하경과 임수연 둘만 남았다.윤수철이 자리를 떠나자 임수연도 더 이상 꾸밀 필요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참 우습네. 가족한테 얻어낼 생각만 하는 딸이라니.”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보셨겠네요.”“하지만 그건 제 부모님의 재산이에요. 그쪽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그녀는 느긋하게 눈을 흘기며 손에 든 새 차 열쇠를 가볍게 흔들었다.“어쨌든 오늘 새 차를 받아서 기분이 좋으니 이번엔 넘어갈게요.”그 말을 마친 그녀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문밖으로 나갔다.새 차는 저택 앞 도로에 주차되어 있었고 차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운전석에 앉은 윤하경은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연아, 저녁에 나와서 같이 밥 먹자.”소지연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좋은 일 있어?”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새 차를 사줬어. 널 태우고 드라이브 해줄게.”“원하면 이 차로 훈남도 낚으러 다녀도 돼.”소지
윤수철은 탁자 위에 놓인 차 키를 집어 들더니 윤하경에게 건넸다.“이건 오늘 너를 위해 산 새 차야. 지난번에 네가 화난 것도 이해해. 네 차도 몇 년 탔으니까 이제 바꿀 때가 됐지. 네가 지호랑 약혼하기로 한 기념으로 아빠가 주는 선물이야.”윤하경은 그의 손에 든 차 키를 무심하게 바라봤다.‘오, 심지어 파나메라네.’윤하연의 차보다는 좀 고급이었지만 가격 차이는 크지 않았다.‘그래도 아빠라고 두 딸을 공평하게 챙기네.’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내 차가 작아서 바꾼 걸까? 아니면 구지호네가 날 학대한다고 생각할까 봐 체면 세우려고 산 걸까?’하지만 이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짱을 끼고는 살짝 흔들었다.“고마워요. 아빠, 역시 아빠가 최고네요.”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애교를 부린 적이 거의 없었다.윤수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기침을 했다.윤하경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윤수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윤하경은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아빠가 이제는 윤하연만 좋아하고 저를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요.”그의 표정이 약간 굳었지만 곧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말도 안 돼. 넌 내 딸인데 내가 어떻게 널 안 좋아하겠니?”“정말이에요?”윤하경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고 윤수철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했다.“아빠, 저는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가 정말 그리워요.”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엄마가 저한테 어른이 되면 성남에 있는 그 별장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결혼해도 언제든 갈 수 있는 제 공간이 되게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아빠, 그 집에 정말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요. 우리 나중에 같이 가요. 어때요?”윤하경은 말은 돌려 했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언제 집을 자신에게 넘길 건지 묻는 것이었다.그 집은 어머니가
윤하경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윤하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구지호는 그녀를 보자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급히 윤하경이 갔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잘 숨은 상태였기에 구지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윤하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엔 짜증이 서려 있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윤하연은 금세 눈가에 눈물이 고이며 말했다.“지호 오빠, 정말 언니랑 약혼할 거야?”구지호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당연히 하경이랑 결혼해야지.”윤하연은 눈물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난? 난 오빠한테 뭐였는데?”그녀의 물음에도 구지호의 표정엔 짜증 외에 다른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처음에 네가 먼저 나한테 다가온 거잖아. 하연아, 우린 그냥 잠깐 즐긴 거야.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이러는 건데?”윤하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오빠... 나한테 이렇게 생각했던 거야?”“나는... 나는 진심으로 오빠를 좋아했는데.”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상황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윤하연, 연기 하나는 진짜 수준급이네. 역시 엄마한테 잘 배웠어.’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조용히 녹화 버튼을 눌렀고 구지호는 윤하연의 눈물에 점점 더 짜증이 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돈이 필요해?”윤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중얼거렸다.“오빠... 어떻게 그런 말을 해?”구지호는 한숨을 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에 만나. 평소에 만나던 그 장소로 와. 그때 얘기하자.”그는 이 상황이 윤하경에게 들킬까 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윤하연은 밤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나도 오빠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말을 마친 윤하연은 아쉬운 듯 몇 번이나
구지호는 기분이 좋은지 운전을 꽤 거칠게 했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이 조심해서 좀 천천히 가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옆 좌석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스스로 사고가 나면 병원에 가겠지. 차라리 내 앞에서 안 보이는 게 나아.’하지만 그의 운전은 예상과 달리 아슬아슬했을 뿐 무사히 쇼핑몰에 도착했다.쇼핑몰 1층에는 보석 매장이 있었다.구지호는 기세 좋게 매장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말했다.“가장 큰 다이아몬드부터 보여줘요.”직원은 대박 손님이 왔다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잠시 후, 직원은 값비싼 보석 반지 몇 트레이를 가져왔다.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자수정 등 다양한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났다.윤하경은 보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크고 투명한 것이 더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구지호를 힐끔 보고는 트레이 위를 가볍게 살피다가 가장 큰 사파이어 반지에 손을 멈췄다.그녀는 반지를 집어 손가락에 끼워 보았고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그녀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윤하경은 미소를 띠며 구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예뻐. 이걸로 하면 되겠네.”구지호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잠시 멈칫하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잖아. 좀 더 보고 네가 진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자.”‘대단하네. 돈 아끼는 말을 이렇게 깔끔하게도 표현하네.’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고 구지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이 반지 가격이 몇십억 원대라는 걸 생각하면 그의 주머니 사정이 벌써 불편해졌을 게 분명했다.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반지를 빼지 않고 손목을 들어 조명에 반짝이며 말했다.“난 한 번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골라야 좋더라. 이건 딱 내 스타일인데.”그러자 구지호는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고 한숨을 쉬는 척하며 말했다.“근데 나 원래 보는 눈이 좀 별로라 가끔 겉만 번지르르한
윤하경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윤수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좋아, 좋아. 하경이 오후에 시간 비어 있어.”두 가문의 어른들은 윤하경의 생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일사천리로 대화를 진행했다.윤하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윤수철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가며 은근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너랑 지호 이 결혼은 꼭 성사돼야 해.”그는 짧게 뜸을 들이더니 날카로운 한마디를 덧붙였다.“네 엄마가 남긴 물건이 아직 내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말고.”분명한 위협이었고 그 말을 들은 윤하경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윤수철은 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의식한 듯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래는 척했다.“그리고 네가 지호를 그렇게 오래 좋아했잖아. 여자란 원래 좀 투덜대다가도 금방 풀리는 거야. 너무 까탈스럽게 굴지 마.”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헛웃음이 터졌다.‘와. 이게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야?’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윤하연이 좋으면 하연이를 지호랑 결혼시키지 그러세요? 딱 어울리잖아요.”윤수철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더니 목소리가 살짝 다급해졌다.“헛소리하지 마! 하연이가 지호랑 결혼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이것 보라니깐.’윤수철도 구지호가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윤하연은 안 되고 자신은 된다는 게 정말 우스웠다.윤하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지호를 좋아해서 결혼하라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지호가 문제가 많다는 걸 알아서 하연이는 안 된다는 건가요?”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윤수철은 순간적으로 눈길을 피했고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드러났고 얼버무리듯 말했다.“지호는 괜찮은 아이야. 헛소리하지 마.”그는 그녀와 더 이상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구지호 앞으로 데려갔다.“지호야, 하경이는 너한테 맡길게. 얘가 좀 고집스러우니 잘 부탁해.”윤하경은 가방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잠시 표정을 다
강현우의 옆모습은 여전히 완벽했고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 없어요.”‘적어도 지금은...’윤하경은 자신이 이 남자 앞에서 왜 이렇게 늘 작아지는지 자책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고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은 뒤 화장실 칸을 나왔다.거울 앞에 서서 메이크업을 고치던 그녀는 거울 속에 약간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방 먹였지.’그녀는 강현우 셔츠 카라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떠올렸다.그 여자가 그걸 보면 어떤 반응일까? 그 생각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윤하경은 발걸음을 가볍게 화장실을 나섰다.강현우가 있는 방의 문을 지나치며 그녀는 무심한 듯 안쪽을 힐끗 들여다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옆에 앉은 여자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참 연기 잘하네.”윤하경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구지호의 아버지 구성수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윤하경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구성수는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하경이는 볼 때마다 점점 더 예뻐지네.”윤하경은 예의상 말했다.“아저씨도 여전히 젊어 보이세요.”그때 구지호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하경아, 어디 갔었어? 화장실 갔는데 안 보이던데.”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윤수철 옆에 자리를 잡았다.“잠깐 옆 슈퍼에 다녀왔어.”구지호는 안도한 듯 웃으며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고 구지호는 그녀에게 다정한 척 음식을 덜어주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남자 친구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덜어준 음식을 손도 대지 않았다.한편, 윤수철과 구성수는 사업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록 윤수철의 인품은 별로였지만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으로서 배울 게 나름 있었다.구씨 가문은 의류 사업을 하고 있었고 윤수철은 최근 그쪽에 손을 대보고 싶어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윤하경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어도 두 사람은
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다름 아닌 강현우였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손을 내렸고 세수하던 것도 잊은 채 그를 쳐다봤다.“여기 웬일이에요?”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데이트 중 아니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뒤돌아 화장실 문을 닫더니, 한순간에 그녀를 세면대에 밀착시키고 거침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그의 차가운 기운과 익숙한 향기가 동시에 밀려들며 윤하경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그를 밀쳐냈다.“여기서 이러지 마세요.”윤하경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사람들 다니잖아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화장실 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이 고급 레스토랑은 화장실마저 세련되고 칸마다 독립적으로 나뉘어 은밀하고 안전했다. 그는 그녀를 칸 문에 밀어붙이고 손으로 문을 단단히 닫았다.윤하경은 그제야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여긴 여자 화장실이에요.”그러나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그래서 구지호랑 다시 잘해보기로 한 거야?”윤하경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에요.”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고 그의 손길이 점점 대담해졌고 등이 드러난 그녀의 드레스를 점점 더 파고 들어갔다. 차가운 손이 윤하경의 피부를 스치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그녀는 깔끔하게 다림질된 그의 셔츠를 힘껏 움켜쥐었다.비록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강현우는 마치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을 다룰 줄 아는 사람처럼 그녀를 휘어잡았고 그녀가 저항할 틈을 주지 않았다.그러나 그 순간 화장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아, 너 거기 있어?”구지호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걸로 보아 화장실 입구에 서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강현우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