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곳을 떠날 거야.”조예원은 아주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그냥 떠나는 거야.”“어디 가려고?”“저 멀리.”조예원은 정유진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강지현이 없으니 나도 이제 모든 것을 다 놓을 수 있어.”그녀는 이곳을 떠나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이 아이에게...”조예원은 아들을 보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물려줄 게 없어. 강지현이 나에게 남긴 재산들 모두 이 아이 앞으로 돌려줘. 유진아, 내가 못 된 년이라고 생각해. 미안해.”말을 마친 조예원은 캐리어를 끌고 그대로 가버렸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정유진은 미처 조예원을 말리기도 전에 강형원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다. 조예원은 그사이 차를 몰고 떠났다.하인이 와서 한마디 했다.“사모님, 사람을 시켜서 따라가라고 할까요?”정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강지현은 어쩌면 진작 이런 날을 예상했기에 처음부터 조예원에게 그녀가 원하는 결혼을 할 줄 생각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어쩌면 이게 최선일지도 모른다.정유진이 강형원을 안고 돌아오자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다행히 집에 방이 많아 정유진은 하인에게 임시로 한 방을 치워달라고 한 뒤 강형원의 물건을 정리하고 동시에 강형원을 돌봐줄 하인을 모두 구했다.집에 갑자기 아이가 하나 더 생기는 바람에 방경숙은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오더니 어르신이 부른다고 했다.강홍택과 송지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조예원이 아이를 두고 떠났다는 건 모두가 이미 알았을 것이다.강홍식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우리 강씨 가문이 대체 무슨 벌을 받았기에 누구는 감옥살이를 하고 누구는 죽는 거냐고.”아무도 이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강홍식은 강홍택을 가리켰지만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는 바로 형원이를 너의 집으로 데려간 거야? 친할아버지가 이렇게 뻔히 살아
연우는 강형원이 오니 날듯이 기뻐했다.이미 철이 든 연우는 굳이 어른들이 말하지 않아도 둘째 삼촌이 그녀를 구하면서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강형원을 친동생처럼 돌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형원아,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이야, 이 누나가 지켜줄게.”강형원은 하품을 하더니 곤히 잠들었다.연우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잠이 든 후에야 자리를 떴다.서재에 있는 장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대표님, 경찰이 아무리 고문을 해도 두식이가 사주한 사람을 얘기하지 않아요. 그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요. 어르신이 아가씨를 데리고 외출한 것을 보고 갑자기 대표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라고 하네요.”강지찬이 물었다.“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장형준이 말했다.“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연치곤 너무 이상해요. 절대 아가씨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어르신인데 딱 한 번 데리고 나간 날 만났어요. 게다가 며칠 동안 경찰이 서울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어서 피해 다닐 겨를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우연히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강지찬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두식이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나에게 골칫거리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우리 와이프와 아이들의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줘.”“알겠습니다.”에이프릴 홀.화령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당신 같은 악랄한 부자들, 정말 질투 나요.”강지아는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뭘 질투해요?”화령은 혀를 찼다.“여기 탄산수 하나에 3만 원이에요. 정말 어이가 없죠. 에이프릴 홀 같은 곳에 강지아 씨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짐승은 죽어도 들어오지 못했을 거예요.”“그만 하세요. 술 너무 많이 마셔서 허풍이 심해졌네요?”기분이 좋지 않은 강지아가 가만히 있을 때 뒤 테이블에 있던 몇 사람이 다가왔다.요즘 서울에서 가장 핫한 화제는 단연 강지현에 관한 것이다.“강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 정말로 죽었대요. 이제 30대 초반이죠
강지아는 술을 좀 많이 마셨지만 지난번에 취해서 사고가 날 뻔한 이후로 잘 모르는 곳에 가서는 술을 마실 엄두를 못 냈다.에이프릴 홀의 대표님들은 그녀와 잘 아는 사이였고 그녀가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보고 특별히 부하들을 시켜 그녀와 화령을 집에 데려다주라고 했다.“열심히 돈 벌어서 다음에, 내가 살게요!”곤드레만드레 취한 화령은 월급이 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새 발의 피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다음에 만나는 잘생긴 남자는 반드시 키가 185 이상이고 초콜릿 복근이 있어야 할 거야.”“그래, 호랑이 같은 남자로!”화령은 달려들어 강지아를 껴안았다.“지아 씨, 다음에 술 마실 때 잊지 말고 나 불러요. 부르면 바로 갈 테니.”“그럼요, 우리는 좋은 친구니까.”화령의 머리를 쓰다듬는 강지아는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차에 오르려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어? 이게 누구야? 지아 아니야?”강지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에이프릴 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바로 온유한의 사촌 동생 최금혁이 있었다.“최금혁 씨, 이렇게 예쁜 동생도 알아요? 우리는 왜 모르는데?”“최금혁, 이 사람 누구야?”서울이라는 곳은 아주 재미있는 곳이다. 함께 노는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예를 들어 강지찬은 대부분 대가족의 준 상속인이라든가, 가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젊은 인재들과 같이 어울리고 최금혁 같은 사람은 대부분 가문에서 소외된 나이가 어린 사람들과 같이 어울린다.무리와 무리 사이에 교류는 별로 없다.최금혁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옆에 있는 건달 친구들에게 말했다.“너희들 몰라? 강씨 집안 아가씨, 강지찬 동생 강지아잖아!”“뭐, 강지아라고? 이렇게 예뻐?”“강지아가 바보 아니었어?”“강지아 씨, 이렇게 생겼구나. 최금혁이 강씨 집안 사람들과 알고 지낼 줄은 몰랐네.”최금혁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어이, 내 사촌 형이 강지찬과 어릴 때
강지아는 사장님이 직접 집까지 배웅하라고 지시한 사람이었기에 경비원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다.특히 이 사람은 호의를 갖고 다가온 것이 아닌 것 같다.경비원은 가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최진혁에게 차 키를차키를 돌려달라고 했다.그러나 최금혁은 경비원을 밀치며 말했다.“네가 뭔데! 상관하지 마.”이쪽이 소란스러워지자 화령도 가까이 다가왔다.“누구세요. 자꾸 지아 괴롭히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최금혁의 건달 친구들은 이런 소란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화령이 정말로 핸드폰을 꺼내자 그중 한 명이 나서서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떨어뜨렸다.새로 바꾼 휴대전화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본 화령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당신들! 너무한 거 아니야.”술을 많이 마신 여기 사람들은 지금 2차 장소로 옮겨 계속 분위기를 즐기려던 참이었다.강지아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던 찰나에 마침 예쁘고 어린 여자가 왔고 평범한 차림의 화령은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아이고! 손이 미끄러웠네. 미안해. 내가 배상할게.”화령은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누가 당신들의 더러운 돈을 받겠대?”고조된 분위기에 도취한 한 재벌 집 도련님은 드디어 새로운 재미를 찾은 듯 최금혁을 향해 말했다.“최금혁, 강지아 씨 잘 돌봐. 두 예쁜이와 같이 놀자고.”누군가가 화령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예쁜이, 지금 입은 옷 좀 봐. 나와 있으면 매일 명품만 사줄 수 있어.”“오빠가 내일 가방 사줄게.”겉으로는 센 척한 화령이였지만 사실 속은 이미 겁을 먹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쉽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강지아 쪽으로 다가갔다.강지아도 한창 최금혁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아서 오늘 화령이랑 술 마시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최금혁이라는 이런 무뢰한을 만났으니 말이다.그녀는 화령을 뒤로 감싸며 손에 든 가방으로 최금혁을 가리켰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그러니까
강지아는 손바닥을 펼쳐서 온유한에게 보여주었다.빨개진 것을 보면 얼마나 힘 있게 때렸는지 알수 있었다.“안 아파?”이때 옆에 있던 최금혁이 엄살을 부렸다.“형, 나한테 아프지 않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은 그제야 동생이 데려온 무리를 쳐다보았다.이들은 온유한이 무서운지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이때 최금혁이 눈치없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다.“형, 나 봐봐.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상처 났잖아. 할머니랑 고모가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어.”마침 이마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려 소름 끼칠 정도였다.옆에 있던 경찰이 말했다.“에이, 그냥 가죽이 벗겨진 걸 가지고. 걱정되시면 병원에 가서 파상풍 주사라도 맞던가요.”최금혁이 강지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이대로 끝낼 순 없어요. 저 사람을 신고할 거예요.”경찰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소하겠다고요? 오히려 저분이 당신을 성희롱으로 고소할지도 모르는데요? CCTV를 이미 확인해 보았는데 당신들이 먼저 건드린 거 똑똑히 찍혔어요.”이곳에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온유한은 바로 사인하고 이 사람들을 데리고 경찰서에서 나왔다.최금혁이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이대로 끝이라고? 형, 나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고. 피도 나잖아. 내가 얼굴 망쳐서 장가 못 가면 강지아가 책임진대?”온유한이 뒤돌아 차가운 얼굴로 최금혁에게 삿대질했다.“그 입 닥치고 꺼져!”최금혁은 이런 온유한의 모습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어릴때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최금혁은 침을 삼키고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형, 나야말로 형 동생이잖아. 강지아는...”온유한이 그에게 삿대질하면서 말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그러고서 강지아를 이끌고 차에 올라탔다.화령은 그제야 안심하고 택시를 잡아 이곳을 떠났다.최금혁 일행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로 마주 볼 뿐이다.“온유한 형님이랑 강지아 씨 사이, 이
회진을 마치고 돌아온 온유한은 강지아가 베개를 끌어안고 쿨쿨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이불 밖에 나와 있는 하얀 팔다리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그리고 그 티도 강지아한테는 커서 후줄근했지만 아무리 엎드려 있다고 해도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흰색 속옷까지 보일락말락 할 정도였다.온유한은 에어컨 온도를 높여주고는 후다닥 휴식실을 벗어났다.심정은 복잡미묘하기만 했다.이때 전성호가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선생님, 야식 드실래요?”그는 말하면서도 온유한의 휴식실 안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아니.”“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다른 분이 사신 거예요.”온유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너희들 먹어. 난 다이어트를 해야 해서.”사람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온 전성호를 에워쌌다.“어때요. 보셨어요? 온유한 선생님 침대에 누워계시는 분이 강지아 씨에요 아니면 첫사랑이에요?’온유한이 여자를 데리고 휴식실로 왔다길래 다들 궁금한 모양이다.전성호가 고개를 흔들었다.“이미 잠들어버려서 못 봤어요.”“온유한 선생님은 뭐 하고 계시는데요?”“책을 보고 계셨어요.”몇몇 여자들이 혀를 끌끌 찼다.“침대에 눕혀놓고 책을 읽는다고요? 설마... 남자구실을 못 하는 거 아니에요? 32년동안 싱글의 몸으로 살아온 중년남성이 가만히 있었다고요?”“온유한 선생님더러 넘사벽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할 거예요.”전성호는 치킨을 한입 베어 물고는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맛있네요!”온유한은 새벽이 되어서야 소파에 앉아 눈을 붙이게 되었다.6시쯤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또 응급실로 달려갔다.두둥!한참 잘 자고 있던 강지아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뭐지?”눈을 떠보니 방문이 열려있었고, 최신애가 입구에서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다.강지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분명 잘 자고 있었는데 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거지?’“강지아!”최신애가 힘
온유한이 수술실에서 나와 손을 씻고 있는데 전성호가 달려와 보고하는 것이다.“선생님, 큰일 났어요. 어머님께서 지금 선생님 휴식실에 계세요.”온유한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그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달려가 보았더니 최신애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다.“어머니, 어떻게 오셨어요?”최신애가 휴식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먼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온유한은 문을 닫고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제저녁에 좀 일이 있어서 지아를 데리고 왔어요.”최신애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자기 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같이 잤어?”할 말을 잃은 온유한은 의자를 끌고 와 최신애의 맞은편에 앉았다.“어머니, 저도 이제 서른 중반이에요. 제가 뭘 원하는지, 그리고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요.”최신애는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많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쟤야.”“지아는 좋은 사람이에요.”“어디가? 기풍이 문란하고 어른한테도 대드는 걸 보면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것 같은데 너랑 어울릴 일이 있겠어?’“어머니!”온유한은 눈을 감고 말았다.‘지아가 깨어있겠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속상할까.’“지아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옆에서 지켜보셨잖아요. 아끼고 사랑해 주셨잖아요.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온유한은 평온한 말투로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을 내뱉었다.“이런 말 다시는 하지 마세요. 낯설게 느껴지니까.”심장이 쿵 내려앉은 최신애는 슬퍼지기 시작했다.“낯설게 느껴진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아무리 불쌍해도 내 아들 평생의 행복을 망칠 순 없잖아! 난 네 엄마로서 그런 꼴 못 봐!”온유한은 계속 차분하게 말했다.“왜 제가 지아를 만나면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를 배신했던 사람이랑 살면 행복할 것 같아요? 저는 어머니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요.”“그게...”최신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어머니는 그저 유정이가 유학 출신에 유명한 디자이너라서 좋아하는 거잖아요. 그저
강지아가 짐싸고 있을 때, 온유한은 그녀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프라이, 샌드위치, 우유 등.그런데 짐 싸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침먹을 새도 없었다.“비행기에서 간단히 먹으면 돼. 오빠, 올 때 선물 사 가지고 올게!”쿵!그대로 문이 닫히고, 온유한은 할 말을 잃었다.갑자기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된 것만 같았다.그 일이 있은 뒤로 강지아는 감정 기복이 없었다. 사실 이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온유한은 차라리 그녀가 대뜸 화를 냈으면 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한잠 자고 일어난 온유한은 부재중 전화가 열몇 통이나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신자는 다름아닌 온혁진이었다.최신애가 온유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고혈압이 도진 것이다.온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 마당에서 가을이랑 놀고 있던 온미정이 온유한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온유한은 가을이를 번쩍 들어 올렸고, 가을이는 까르륵 웃고 있었다.“지아는 또 서원준이랑 간 거야?”온미정이 묻자 가을이랑 놀고 있던 온유한이 대답했다.“어떻게 아셨어요?”온미정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강지아가 환승하면서 서원준이랑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이다.셀카를 찍고 있는 강지아의 뒤에는 의자에 기대어 강지아를 바라보고 있는 서원준이 앉아있었다.마치 남자친구 몰카를 찍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온미정이 핸드폰을 거두면서 말했다.“왜 왔어? 너희 엄마 병을 몰라서 그래? 나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온미정은 가을이를 가져가 안더니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두 번의 충격으로 온유한은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고모, 먼저 들어가 볼게요.”그러면서 가을이 볼을 꼬집었다.가을이는 포동포동한 것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온유한을 좋아하는 녀석은 안아달라고 팔을 벌렸다.온미정은 가을이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왜 우리 딸 얼굴에 손대고 그래.”거실에는 최신애도, 최금혁도, 그리고 황은숙도 있었다.“외숙모.”온유한이 인사를 건넸다.“어머니, 괜찮으세요?”“유한이 왔구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