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진을 마치고 돌아온 온유한은 강지아가 베개를 끌어안고 쿨쿨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이불 밖에 나와 있는 하얀 팔다리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그리고 그 티도 강지아한테는 커서 후줄근했지만 아무리 엎드려 있다고 해도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흰색 속옷까지 보일락말락 할 정도였다.온유한은 에어컨 온도를 높여주고는 후다닥 휴식실을 벗어났다.심정은 복잡미묘하기만 했다.이때 전성호가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선생님, 야식 드실래요?”그는 말하면서도 온유한의 휴식실 안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아니.”“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다른 분이 사신 거예요.”온유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너희들 먹어. 난 다이어트를 해야 해서.”사람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온 전성호를 에워쌌다.“어때요. 보셨어요? 온유한 선생님 침대에 누워계시는 분이 강지아 씨에요 아니면 첫사랑이에요?’온유한이 여자를 데리고 휴식실로 왔다길래 다들 궁금한 모양이다.전성호가 고개를 흔들었다.“이미 잠들어버려서 못 봤어요.”“온유한 선생님은 뭐 하고 계시는데요?”“책을 보고 계셨어요.”몇몇 여자들이 혀를 끌끌 찼다.“침대에 눕혀놓고 책을 읽는다고요? 설마... 남자구실을 못 하는 거 아니에요? 32년동안 싱글의 몸으로 살아온 중년남성이 가만히 있었다고요?”“온유한 선생님더러 넘사벽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할 거예요.”전성호는 치킨을 한입 베어 물고는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맛있네요!”온유한은 새벽이 되어서야 소파에 앉아 눈을 붙이게 되었다.6시쯤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또 응급실로 달려갔다.두둥!한참 잘 자고 있던 강지아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뭐지?”눈을 떠보니 방문이 열려있었고, 최신애가 입구에서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다.강지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분명 잘 자고 있었는데 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거지?’“강지아!”최신애가 힘
온유한이 수술실에서 나와 손을 씻고 있는데 전성호가 달려와 보고하는 것이다.“선생님, 큰일 났어요. 어머님께서 지금 선생님 휴식실에 계세요.”온유한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그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달려가 보았더니 최신애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다.“어머니, 어떻게 오셨어요?”최신애가 휴식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먼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온유한은 문을 닫고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제저녁에 좀 일이 있어서 지아를 데리고 왔어요.”최신애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자기 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같이 잤어?”할 말을 잃은 온유한은 의자를 끌고 와 최신애의 맞은편에 앉았다.“어머니, 저도 이제 서른 중반이에요. 제가 뭘 원하는지, 그리고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요.”최신애는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많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쟤야.”“지아는 좋은 사람이에요.”“어디가? 기풍이 문란하고 어른한테도 대드는 걸 보면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것 같은데 너랑 어울릴 일이 있겠어?’“어머니!”온유한은 눈을 감고 말았다.‘지아가 깨어있겠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속상할까.’“지아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옆에서 지켜보셨잖아요. 아끼고 사랑해 주셨잖아요.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온유한은 평온한 말투로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을 내뱉었다.“이런 말 다시는 하지 마세요. 낯설게 느껴지니까.”심장이 쿵 내려앉은 최신애는 슬퍼지기 시작했다.“낯설게 느껴진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아무리 불쌍해도 내 아들 평생의 행복을 망칠 순 없잖아! 난 네 엄마로서 그런 꼴 못 봐!”온유한은 계속 차분하게 말했다.“왜 제가 지아를 만나면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를 배신했던 사람이랑 살면 행복할 것 같아요? 저는 어머니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요.”“그게...”최신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어머니는 그저 유정이가 유학 출신에 유명한 디자이너라서 좋아하는 거잖아요. 그저
강지아가 짐싸고 있을 때, 온유한은 그녀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프라이, 샌드위치, 우유 등.그런데 짐 싸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침먹을 새도 없었다.“비행기에서 간단히 먹으면 돼. 오빠, 올 때 선물 사 가지고 올게!”쿵!그대로 문이 닫히고, 온유한은 할 말을 잃었다.갑자기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된 것만 같았다.그 일이 있은 뒤로 강지아는 감정 기복이 없었다. 사실 이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온유한은 차라리 그녀가 대뜸 화를 냈으면 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한잠 자고 일어난 온유한은 부재중 전화가 열몇 통이나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신자는 다름아닌 온혁진이었다.최신애가 온유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고혈압이 도진 것이다.온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 마당에서 가을이랑 놀고 있던 온미정이 온유한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온유한은 가을이를 번쩍 들어 올렸고, 가을이는 까르륵 웃고 있었다.“지아는 또 서원준이랑 간 거야?”온미정이 묻자 가을이랑 놀고 있던 온유한이 대답했다.“어떻게 아셨어요?”온미정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강지아가 환승하면서 서원준이랑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이다.셀카를 찍고 있는 강지아의 뒤에는 의자에 기대어 강지아를 바라보고 있는 서원준이 앉아있었다.마치 남자친구 몰카를 찍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온미정이 핸드폰을 거두면서 말했다.“왜 왔어? 너희 엄마 병을 몰라서 그래? 나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온미정은 가을이를 가져가 안더니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두 번의 충격으로 온유한은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고모, 먼저 들어가 볼게요.”그러면서 가을이 볼을 꼬집었다.가을이는 포동포동한 것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온유한을 좋아하는 녀석은 안아달라고 팔을 벌렸다.온미정은 가을이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왜 우리 딸 얼굴에 손대고 그래.”거실에는 최신애도, 최금혁도, 그리고 황은숙도 있었다.“외숙모.”온유한이 인사를 건넸다.“어머니, 괜찮으세요?”“유한이 왔구
최금혁 모자한테 새 차를 줘보내고 온유한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다음날은 휴식일이라 같이 나가서 바람 쐬자는 최의현의 부탁에도 거절했다.강지아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연락 한 통도, 무사하다는 문자 한 통도 없었다.온유한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도착했어?]하지만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그래서 핸드폰을 내팽개치고 1층으로 내려가 온혁진과 함께 바둑을 두기로 했다.점심 식사는 세 식구가 같이 먹었고, 자기 주방이 있는 온미정은 최신애랑 사이가 안 좋아서 따로 먹곤 했다.식사 도중에 강씨 가문이 언급되었다.최신애는 점점 더 강씨 가문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그 집안에는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 엄마라는 사람은 남편이 죽자마자 친아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온혁진은 모자 둘이 또 싸울까 봐 온유한의 눈치를 보았다.“밥 먹어. 그 집안 사정은 우리랑 상관없어.”“왜 상관이 없다고 그래요? 한 집안에 한 사람만 문제 있으면 그 사람만 문제 있다고 생각하겠는데 온 가족이 문제 있으면 온 집안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최신애가 진지하게 말했다.“강씨 가문은 위에 어르신부터 풍기가 문란했어요. 나이가 얼만데 밖에서 또 아들을 하나 낳아서 오고. 자식들은 더 하잖아요. 밖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아세요?’온유한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저는 다 먹었어요. 천천히 드세요.”온유한이 떠나고, 온혁진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이제 만족해? 유한이 오랜만에 왔는데 조용히 밥 좀 먹으면 안 돼?”최신애는 순간 입맛이 뚝 떨어졌다.“밥이 그렇게 중요해요? 어제 아침 강지아가 유한이 침대에 누워있는 걸 봤다고요. 저희가 신경 쓰지 않으면 언제 손자를 안을지 모른다고요!”“좋은 일 아니야?’온혁진은 최신애가 너무 많이 간섭한다고 생각했다.‘유한이가 알아서 하겠지. 뭘 그렇게 간섭해.’온혁진은 최신애가 화를 낼까 봐 후다닥 일어섰다.“오후에 골프 약속이 있어. 저녁은 밖에서 먹고 올게.”부자가 모두 가
호텔에 도착한 온유한은 주유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만약 일이 있으면 주유정은 그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심심해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데 강지아한테서 문자가 왔다.그저 무미건조한 한마디뿐이었다.[도착했어.]SNS를 들어가보았더니 역시나 또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메이크업하고 찍은 사진을 올린 것이다.여느 여자 연예인보다도 더 예뻤다. 분위기가 넘치는 것이 우아하기 그지없었다.서원준은 매너 있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최신애한테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온유한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렇게 두 사람 사이는 왠지 모르게 멀어지고 있었다.VIP룸.한 중년의 남성이 주유정에게 박스 하나를 건넸다.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메추리알만 한 파란 보석이 들어있었다.그 와중에 아직 완제품으로 세팅되어 있지 않은 보석이었다. 컷팅한 흔적도 없는 본연의 보석 말이다.마음이 흔들린 주유정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이게 무슨 뜻이죠?”방현호가 보석을 건네면서 주유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선물이에요.”“선물이요?’주유정은 깜짝 놀라긴 했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면서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에요.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 저는 받지 못할 것 같아요.”방현호가 손을 흔들었다.“보석은 미인이 가지고 있어야 그 가치를 알릴 수 있는 거예요. 유정 씨가 직접 설계해서 아름다운 목선이 보이게 착용하고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주유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현호가 외국에 금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통이 클 줄 몰랐다.“사장님 같은 애처가가 있으셔서 사모님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쥬얼리 세트를 선물하시면 엄청나게 좋아하실 거예요.”방현호는 또 한 번 주유정에게 박스를 건네더니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유정 씨도 이 보석의 가치를 알고 있잖아요. 사실 세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분한테 맡기려고 했거든요. 그분의 손을 거치면 가치가
주유정은 방현호를 보내고 온유한의 곁으로 다가갔다.“미안해. 유한 씨, 오래 기다렸지.”“별일 없으면 됐어.”온유한은 별일 없는것 같아 굳이 더 묻지 않았다.이때 주유정이 주동적으로 말했다.“저분이 빨간 보석을 갖고 계시는데 결혼기념일 10주년이라 사모님한테 선물하려고 나한테 디자인을 맡겼거든.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였어. 그런데 사모님 너무 부럽네.”온유한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무표정으로 주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주유정 집 앞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주유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독립해서 온유한이 한번도 집 안으로 들어온 적 없기 때문이다.다음날, 온유한은 출근하자마자 다들 무슨 문제를 토론하고 있는지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전성호한테 다가가 환자의 상황을 물었다.전성호도 이들의 토론을 엿듣고 있었다.“선, 선생님!”그러다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핸드폰을 주워줬다.다름아닌 서원준과 강지아와 관련된 스캔들인 것이다. 쇼에서 찍힌 사진 말고도 함께 호텔로 돌아가는 사진도 찍혔다.서원준이 워낙 잘생겨서 기자들이 연예인처럼 따라다니면서 찍은 것이다.그러는 바람에 강지아와의 스캔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지금은 인기 검색어에까지 올랐다.“회진은 끝내고 여기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거야?”온유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전성호에게 핸드폰을 던져주고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밖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위기를 모면한 전성호는 뒤늦게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강지아 씨와 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요? 서원준 씨랑은 그저 쇼를 보러 간 것 같고요.”“그런데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아요.”온유한은 커피를 들고 문에 기대어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시간을 확인해보니 시차 때문에 강지아가 있는 곳은 아직 야심한 밤이었다.온유한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강지아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강지아는 세날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오자마자 화령을 만나 명품백을 선물했다.“저번에 나 때문에 새로 산 핸드폰이 박살 났잖아. 보상의 의미로 이 명품백을 선물하는 거야.”화령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어머, 정말이야? 이건...”“오랫동안 탐냈던 거지?”친구가 좋아하니 강지아도 따라서 기분이 좋아졌다.“좋으면 됐어.”“너무 좋아! 너무 비싸서 차마 못 샀거든. 고마워. 사랑해. 지아야.”마음에 드는 명품백을 선물 받은 의미로 커피 갚은 화령이 내기로 했다.“내가 밥 사줄게. 한우 어때?”화령은 무안하기만 했다.“커피 한잔으로 되겠어? 밥도 사고 싶은데.”하지만 강지아가 거절했다.“다음에. 조카를 오랫동안 못봐서 보고 싶어서 그래.”연우는 개학해서 이미 어엿한 초등학생이었다. 강지아는 연우를 위해 예쁜 머리핀을 한 아름 사 왔다.연우는 물론, 정유진, 그리고 강지찬 선물도 있었다.강지찬의 선물은 브로치였고 정유진의 선물은 목걸이였다. 커플용이었다.정유진이 말했다.“아가씨 선물만 사면 될 걸. 왜 우리 선물까지 샀어.”“쇼핑에 재미를 붙여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강지아는 저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아직 선물 많아요. 고모랑 가을이 선물도 있어요.”정유진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온씨 가문 선물이 다 있는 거야 아니면 고모랑 가을이 선물만 있는 거야?”“당연히 고모랑 가을이 선물만 있는 거죠.”강지아는 정유진과 똑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입을 삐쭉거렸다.“올케언니, 제가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어차피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을 텐데 뭐 하러 돈 낭비해요.”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만 좋으면 됐어. 아무튼 나랑 오빠는 아가씨 편이니까.”이 말에 감동한 강지아는 정유진을 꽉 끌어안았다.다음날, 강지아는 온미정 집으로 찾아갔다.온씨 가문은 일 있을 때만 갔고 평소에는 밖에서 지내고 있었다.도착했을 때, 검은색 차량 한 대가 온미정의 마당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검
강지아가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매번 귀국하기 전이면 강지찬, 최의현, 그리고 온유한에게 미리 연락했었고 누가 시간 있으면 공항으로 픽업 갔었다.강지찬과 최의현은 늘 바빴기 때문에 제일 많이 데리러 간 사람은 온유한이였다.매번 가다 보니 아예 바로 온유한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할때도 있었다. 예전에는 강지아가 귀국한다면 온유한이 제일 먼저 알았다.그런데 이제는 집에 돌아왔는데 언제 돌아왔는지도 몰랐다.술을 마시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최의현이 사진 한장을 보내왔다.[우리 지아 안목 높은데? 이 브로치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사진을 크게 확대해 보았더니 보석이 박힌 전갈 모양의 브로치였다.[지아 언제 돌아왔는데?][어제 돌아왔잖아. 아, 맞다. 너한테는 무슨 선물을 했는데? 보여줘 봐.]온유한은 또 술을 한 모금 마셨다.‘어제 돌아왔다니...’이때 최의현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빨리. 지아는 늘 너를 더 좋아했잖아요. 너한테 한 선물은 무조건 제일 좋고, 제일 비싸고 제일 특별한 걸 거야. 이미 물어봤는데 지찬이도 똑같이 브로치였어. 형수님이랑 고모는 목걸이였고. 애들은 머리핀.]온유한은 나머지 술을 꿀꺽 다 마셔버렸다.‘돌아온 사실을 제일 늦게 안 것도 나고, 유일하게 선물을 받지 못한 것도 나네?’다음날 온유한은 아침을 들고 강지아를 찾아갔다.한참 동안 벨을 눌러서야 하품하면서 나오는 것이다.“오빠,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야?”온유한이 아침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돌아왔다길래 보러왔지.”강지아가 소파를 짚으면서 말했다.“마침 잘 왔어. 오빠 것만 남았어. 알아서 가져가.”온유한은 눈이 번쩍 떠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뭔데?”“나가서 놀면서 선물 사봤어.”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온유한은 식탁 위에 아침밥을 내려놓고는 선물 박스를 뜯었다.사실 특별한 포장이 없어 뜯어볼 필요도 없었다.온유한은 열어보고서 입꼬리가 내려가고 말았다.선물은 다름아닌 나뭇잎 모양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