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는 강형원이 오니 날듯이 기뻐했다.이미 철이 든 연우는 굳이 어른들이 말하지 않아도 둘째 삼촌이 그녀를 구하면서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강형원을 친동생처럼 돌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형원아,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이야, 이 누나가 지켜줄게.”강형원은 하품을 하더니 곤히 잠들었다.연우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잠이 든 후에야 자리를 떴다.서재에 있는 장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대표님, 경찰이 아무리 고문을 해도 두식이가 사주한 사람을 얘기하지 않아요. 그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요. 어르신이 아가씨를 데리고 외출한 것을 보고 갑자기 대표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라고 하네요.”강지찬이 물었다.“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장형준이 말했다.“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연치곤 너무 이상해요. 절대 아가씨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어르신인데 딱 한 번 데리고 나간 날 만났어요. 게다가 며칠 동안 경찰이 서울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어서 피해 다닐 겨를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우연히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강지찬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두식이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나에게 골칫거리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우리 와이프와 아이들의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줘.”“알겠습니다.”에이프릴 홀.화령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당신 같은 악랄한 부자들, 정말 질투 나요.”강지아는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뭘 질투해요?”화령은 혀를 찼다.“여기 탄산수 하나에 3만 원이에요. 정말 어이가 없죠. 에이프릴 홀 같은 곳에 강지아 씨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짐승은 죽어도 들어오지 못했을 거예요.”“그만 하세요. 술 너무 많이 마셔서 허풍이 심해졌네요?”기분이 좋지 않은 강지아가 가만히 있을 때 뒤 테이블에 있던 몇 사람이 다가왔다.요즘 서울에서 가장 핫한 화제는 단연 강지현에 관한 것이다.“강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 정말로 죽었대요. 이제 30대 초반이죠
강지아는 술을 좀 많이 마셨지만 지난번에 취해서 사고가 날 뻔한 이후로 잘 모르는 곳에 가서는 술을 마실 엄두를 못 냈다.에이프릴 홀의 대표님들은 그녀와 잘 아는 사이였고 그녀가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보고 특별히 부하들을 시켜 그녀와 화령을 집에 데려다주라고 했다.“열심히 돈 벌어서 다음에, 내가 살게요!”곤드레만드레 취한 화령은 월급이 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새 발의 피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다음에 만나는 잘생긴 남자는 반드시 키가 185 이상이고 초콜릿 복근이 있어야 할 거야.”“그래, 호랑이 같은 남자로!”화령은 달려들어 강지아를 껴안았다.“지아 씨, 다음에 술 마실 때 잊지 말고 나 불러요. 부르면 바로 갈 테니.”“그럼요, 우리는 좋은 친구니까.”화령의 머리를 쓰다듬는 강지아는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차에 오르려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어? 이게 누구야? 지아 아니야?”강지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에이프릴 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바로 온유한의 사촌 동생 최금혁이 있었다.“최금혁 씨, 이렇게 예쁜 동생도 알아요? 우리는 왜 모르는데?”“최금혁, 이 사람 누구야?”서울이라는 곳은 아주 재미있는 곳이다. 함께 노는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예를 들어 강지찬은 대부분 대가족의 준 상속인이라든가, 가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젊은 인재들과 같이 어울리고 최금혁 같은 사람은 대부분 가문에서 소외된 나이가 어린 사람들과 같이 어울린다.무리와 무리 사이에 교류는 별로 없다.최금혁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옆에 있는 건달 친구들에게 말했다.“너희들 몰라? 강씨 집안 아가씨, 강지찬 동생 강지아잖아!”“뭐, 강지아라고? 이렇게 예뻐?”“강지아가 바보 아니었어?”“강지아 씨, 이렇게 생겼구나. 최금혁이 강씨 집안 사람들과 알고 지낼 줄은 몰랐네.”최금혁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어이, 내 사촌 형이 강지찬과 어릴 때
강지아는 사장님이 직접 집까지 배웅하라고 지시한 사람이었기에 경비원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다.특히 이 사람은 호의를 갖고 다가온 것이 아닌 것 같다.경비원은 가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최진혁에게 차 키를차키를 돌려달라고 했다.그러나 최금혁은 경비원을 밀치며 말했다.“네가 뭔데! 상관하지 마.”이쪽이 소란스러워지자 화령도 가까이 다가왔다.“누구세요. 자꾸 지아 괴롭히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최금혁의 건달 친구들은 이런 소란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화령이 정말로 핸드폰을 꺼내자 그중 한 명이 나서서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떨어뜨렸다.새로 바꾼 휴대전화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본 화령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당신들! 너무한 거 아니야.”술을 많이 마신 여기 사람들은 지금 2차 장소로 옮겨 계속 분위기를 즐기려던 참이었다.강지아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던 찰나에 마침 예쁘고 어린 여자가 왔고 평범한 차림의 화령은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아이고! 손이 미끄러웠네. 미안해. 내가 배상할게.”화령은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누가 당신들의 더러운 돈을 받겠대?”고조된 분위기에 도취한 한 재벌 집 도련님은 드디어 새로운 재미를 찾은 듯 최금혁을 향해 말했다.“최금혁, 강지아 씨 잘 돌봐. 두 예쁜이와 같이 놀자고.”누군가가 화령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예쁜이, 지금 입은 옷 좀 봐. 나와 있으면 매일 명품만 사줄 수 있어.”“오빠가 내일 가방 사줄게.”겉으로는 센 척한 화령이였지만 사실 속은 이미 겁을 먹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쉽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강지아 쪽으로 다가갔다.강지아도 한창 최금혁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아서 오늘 화령이랑 술 마시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최금혁이라는 이런 무뢰한을 만났으니 말이다.그녀는 화령을 뒤로 감싸며 손에 든 가방으로 최금혁을 가리켰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그러니까
강지아는 손바닥을 펼쳐서 온유한에게 보여주었다.빨개진 것을 보면 얼마나 힘 있게 때렸는지 알수 있었다.“안 아파?”이때 옆에 있던 최금혁이 엄살을 부렸다.“형, 나한테 아프지 않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은 그제야 동생이 데려온 무리를 쳐다보았다.이들은 온유한이 무서운지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이때 최금혁이 눈치없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다.“형, 나 봐봐.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상처 났잖아. 할머니랑 고모가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어.”마침 이마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려 소름 끼칠 정도였다.옆에 있던 경찰이 말했다.“에이, 그냥 가죽이 벗겨진 걸 가지고. 걱정되시면 병원에 가서 파상풍 주사라도 맞던가요.”최금혁이 강지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이대로 끝낼 순 없어요. 저 사람을 신고할 거예요.”경찰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소하겠다고요? 오히려 저분이 당신을 성희롱으로 고소할지도 모르는데요? CCTV를 이미 확인해 보았는데 당신들이 먼저 건드린 거 똑똑히 찍혔어요.”이곳에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온유한은 바로 사인하고 이 사람들을 데리고 경찰서에서 나왔다.최금혁이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이대로 끝이라고? 형, 나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고. 피도 나잖아. 내가 얼굴 망쳐서 장가 못 가면 강지아가 책임진대?”온유한이 뒤돌아 차가운 얼굴로 최금혁에게 삿대질했다.“그 입 닥치고 꺼져!”최금혁은 이런 온유한의 모습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어릴때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최금혁은 침을 삼키고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형, 나야말로 형 동생이잖아. 강지아는...”온유한이 그에게 삿대질하면서 말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그러고서 강지아를 이끌고 차에 올라탔다.화령은 그제야 안심하고 택시를 잡아 이곳을 떠났다.최금혁 일행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로 마주 볼 뿐이다.“온유한 형님이랑 강지아 씨 사이, 이
회진을 마치고 돌아온 온유한은 강지아가 베개를 끌어안고 쿨쿨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이불 밖에 나와 있는 하얀 팔다리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그리고 그 티도 강지아한테는 커서 후줄근했지만 아무리 엎드려 있다고 해도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흰색 속옷까지 보일락말락 할 정도였다.온유한은 에어컨 온도를 높여주고는 후다닥 휴식실을 벗어났다.심정은 복잡미묘하기만 했다.이때 전성호가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선생님, 야식 드실래요?”그는 말하면서도 온유한의 휴식실 안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아니.”“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다른 분이 사신 거예요.”온유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너희들 먹어. 난 다이어트를 해야 해서.”사람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온 전성호를 에워쌌다.“어때요. 보셨어요? 온유한 선생님 침대에 누워계시는 분이 강지아 씨에요 아니면 첫사랑이에요?’온유한이 여자를 데리고 휴식실로 왔다길래 다들 궁금한 모양이다.전성호가 고개를 흔들었다.“이미 잠들어버려서 못 봤어요.”“온유한 선생님은 뭐 하고 계시는데요?”“책을 보고 계셨어요.”몇몇 여자들이 혀를 끌끌 찼다.“침대에 눕혀놓고 책을 읽는다고요? 설마... 남자구실을 못 하는 거 아니에요? 32년동안 싱글의 몸으로 살아온 중년남성이 가만히 있었다고요?”“온유한 선생님더러 넘사벽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할 거예요.”전성호는 치킨을 한입 베어 물고는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맛있네요!”온유한은 새벽이 되어서야 소파에 앉아 눈을 붙이게 되었다.6시쯤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또 응급실로 달려갔다.두둥!한참 잘 자고 있던 강지아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뭐지?”눈을 떠보니 방문이 열려있었고, 최신애가 입구에서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다.강지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분명 잘 자고 있었는데 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거지?’“강지아!”최신애가 힘
온유한이 수술실에서 나와 손을 씻고 있는데 전성호가 달려와 보고하는 것이다.“선생님, 큰일 났어요. 어머님께서 지금 선생님 휴식실에 계세요.”온유한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그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달려가 보았더니 최신애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다.“어머니, 어떻게 오셨어요?”최신애가 휴식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먼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온유한은 문을 닫고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제저녁에 좀 일이 있어서 지아를 데리고 왔어요.”최신애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자기 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같이 잤어?”할 말을 잃은 온유한은 의자를 끌고 와 최신애의 맞은편에 앉았다.“어머니, 저도 이제 서른 중반이에요. 제가 뭘 원하는지, 그리고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요.”최신애는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많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쟤야.”“지아는 좋은 사람이에요.”“어디가? 기풍이 문란하고 어른한테도 대드는 걸 보면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것 같은데 너랑 어울릴 일이 있겠어?’“어머니!”온유한은 눈을 감고 말았다.‘지아가 깨어있겠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속상할까.’“지아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옆에서 지켜보셨잖아요. 아끼고 사랑해 주셨잖아요.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온유한은 평온한 말투로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을 내뱉었다.“이런 말 다시는 하지 마세요. 낯설게 느껴지니까.”심장이 쿵 내려앉은 최신애는 슬퍼지기 시작했다.“낯설게 느껴진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아무리 불쌍해도 내 아들 평생의 행복을 망칠 순 없잖아! 난 네 엄마로서 그런 꼴 못 봐!”온유한은 계속 차분하게 말했다.“왜 제가 지아를 만나면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를 배신했던 사람이랑 살면 행복할 것 같아요? 저는 어머니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요.”“그게...”최신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어머니는 그저 유정이가 유학 출신에 유명한 디자이너라서 좋아하는 거잖아요. 그저
강지아가 짐싸고 있을 때, 온유한은 그녀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프라이, 샌드위치, 우유 등.그런데 짐 싸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침먹을 새도 없었다.“비행기에서 간단히 먹으면 돼. 오빠, 올 때 선물 사 가지고 올게!”쿵!그대로 문이 닫히고, 온유한은 할 말을 잃었다.갑자기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된 것만 같았다.그 일이 있은 뒤로 강지아는 감정 기복이 없었다. 사실 이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온유한은 차라리 그녀가 대뜸 화를 냈으면 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한잠 자고 일어난 온유한은 부재중 전화가 열몇 통이나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신자는 다름아닌 온혁진이었다.최신애가 온유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고혈압이 도진 것이다.온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 마당에서 가을이랑 놀고 있던 온미정이 온유한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온유한은 가을이를 번쩍 들어 올렸고, 가을이는 까르륵 웃고 있었다.“지아는 또 서원준이랑 간 거야?”온미정이 묻자 가을이랑 놀고 있던 온유한이 대답했다.“어떻게 아셨어요?”온미정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강지아가 환승하면서 서원준이랑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이다.셀카를 찍고 있는 강지아의 뒤에는 의자에 기대어 강지아를 바라보고 있는 서원준이 앉아있었다.마치 남자친구 몰카를 찍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온미정이 핸드폰을 거두면서 말했다.“왜 왔어? 너희 엄마 병을 몰라서 그래? 나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온미정은 가을이를 가져가 안더니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두 번의 충격으로 온유한은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고모, 먼저 들어가 볼게요.”그러면서 가을이 볼을 꼬집었다.가을이는 포동포동한 것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온유한을 좋아하는 녀석은 안아달라고 팔을 벌렸다.온미정은 가을이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왜 우리 딸 얼굴에 손대고 그래.”거실에는 최신애도, 최금혁도, 그리고 황은숙도 있었다.“외숙모.”온유한이 인사를 건넸다.“어머니, 괜찮으세요?”“유한이 왔구
최금혁 모자한테 새 차를 줘보내고 온유한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다음날은 휴식일이라 같이 나가서 바람 쐬자는 최의현의 부탁에도 거절했다.강지아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연락 한 통도, 무사하다는 문자 한 통도 없었다.온유한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도착했어?]하지만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그래서 핸드폰을 내팽개치고 1층으로 내려가 온혁진과 함께 바둑을 두기로 했다.점심 식사는 세 식구가 같이 먹었고, 자기 주방이 있는 온미정은 최신애랑 사이가 안 좋아서 따로 먹곤 했다.식사 도중에 강씨 가문이 언급되었다.최신애는 점점 더 강씨 가문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그 집안에는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 엄마라는 사람은 남편이 죽자마자 친아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온혁진은 모자 둘이 또 싸울까 봐 온유한의 눈치를 보았다.“밥 먹어. 그 집안 사정은 우리랑 상관없어.”“왜 상관이 없다고 그래요? 한 집안에 한 사람만 문제 있으면 그 사람만 문제 있다고 생각하겠는데 온 가족이 문제 있으면 온 집안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최신애가 진지하게 말했다.“강씨 가문은 위에 어르신부터 풍기가 문란했어요. 나이가 얼만데 밖에서 또 아들을 하나 낳아서 오고. 자식들은 더 하잖아요. 밖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아세요?’온유한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저는 다 먹었어요. 천천히 드세요.”온유한이 떠나고, 온혁진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이제 만족해? 유한이 오랜만에 왔는데 조용히 밥 좀 먹으면 안 돼?”최신애는 순간 입맛이 뚝 떨어졌다.“밥이 그렇게 중요해요? 어제 아침 강지아가 유한이 침대에 누워있는 걸 봤다고요. 저희가 신경 쓰지 않으면 언제 손자를 안을지 모른다고요!”“좋은 일 아니야?’온혁진은 최신애가 너무 많이 간섭한다고 생각했다.‘유한이가 알아서 하겠지. 뭘 그렇게 간섭해.’온혁진은 최신애가 화를 낼까 봐 후다닥 일어섰다.“오후에 골프 약속이 있어. 저녁은 밖에서 먹고 올게.”부자가 모두 가
공항에는 워낙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서원준의 행동은 단번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내려줘.”강지아는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보는 눈이 너무 많아.”“볼 테면 보라 그래. 내 여자 친구를 내가 안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서원준은 말을 마친 뒤 턱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동하민에게 말했다.“짐은 뒤에 있어요.”말을 마친 뒤 그대로 강지아를 안고 자리를 떴다.오늘 유난히 들떠 보이는데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랐다.서원준은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강지아를 데리고 예약해 둔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갔다.그리고 두 사람만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특별히 동하민에게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뒀다.동하민은 어쩌다 먹어보는 호화로운 저녁에 주스를 마시다가 참지 못하고 SNS에 사진을 올려 자랑했다.[사장님과 맛있는 식사. 회사 복지가 아주 굿굿.]그리고 아홉 장을 꽉 채워서 음식과 아름다운 야경 사진까지 올렸다.멀지 않은 창가 자리에서 서원준은 눈앞에 앉은 여자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은 너무 강렬했고 그의 눈에는 강지아, 오직 그녀만 보였다.그러다가 문득 네모반듯 한 케이스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자 강지아는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서원준은 케이스를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반지가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케이스 안에는 예쁜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반짝이고 있었고 강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예뻐?”“응.”마침 강지아는 오늘 귀걸이를 안 하고 나왔는데 서원준은 재빨리 귀걸이를 가지고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그의 손끝이 너무 뜨거웠는지 강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움직이지 마.”“나 처음으로 여자한테 이런 걸 해줘서 자칫하면 찌를 수 있어.”그의 말에 강지아는 그제야 얌전히 앉아서 서원준의 손길을 느껴보려고 애를 썼다.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는지 서원준의 향수 냄새가 빠르게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는데 참으로 사람에게 안전감을 주는 동시에 남자 매력이 흠씬 풍기는 냄새였다.그러나 여전히
온유한과 현채영이 떠나간 뒤 최의현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표정이 최신애와 다를 바 없었다.“그냥 이렇게 끝나는 거야?”결과가 너무 허탈하고 온유한의 태도에 놀랐다.한규진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런 상황을 보고도 설마...”강지찬도 한껏 어두운 얼굴로 자리를 뜨면서 속으로 생각했다.‘겨우 이거야? 지아랑 비교하면 저건 아무것도 아닌데.’최신애는 화병으로 결국 병원에 실려 갔다.온몸에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바짝 독이 올라와 있었고 깨어나서도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또 한차례의 검사를 받게 되었다.집안일에는 여태껏 신경조차 쓰지 않던 온혁진도 어젯밤 이야기를 듣고 불같은 화를 냈다. 그러다가 최신애의 행동을 먼저 꾸짖었다.“아직도 모르겠어? 유한이는 지금 일부러 당신 말을 안 듣는 거야. 당신이 강지아랑 그 애를 갈라놓는 바람에 지금 일부러 저런 수준의 여자를 데려와서 심기를 건드리는 거라고.”“예전에 지아를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지? 그 애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지금 그나마 유명해지고 온씨 가문에서도 많이 도와줘서 이 바닥에서는 지금 우리 가문이랑 혼인을 맺으려고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는데 괜히 당신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바람에 우리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하고 있잖아.”최신애는 이마를 짚고 그에게 반박했다.“지금 제 탓을 하는 거예요? 그럼 그때 당신은 뭐 하고 있었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요. 3년 전에 당신도 강지아를 엄청 싫어했잖아요.”정곡을 찔린 온혁진은 최신애의 말을 인정하기 싫어 버럭 화를 냈다.“여태껏 집안일은 항상 당신이 결정했고 분명 자기 실수로 집안일이랑 회사까지 말아먹게 만들고는 지금 남 탓만 하고 있잖아. 임씨 가문의 일은 무조건 빨리 해결해야 해. 만약 그 사람들이 손잡고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 거로 결론이 나면 우리 쪽에서 준비한 새 프로젝트는 망하는 건 물론이고 손실도 어마어마할 테니까.”최신애는 그의 입에서 임씨 가문이라는 단어를 듣
최신애는 반평생 살면서 오늘 처음으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고고한 이미지를 다 내려놓은 채 마치 미친 사람처럼 싸워봤다.그리고 온유한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더욱 흥분해서 그에게 물었다.“봐봐, 네가 좋아한다던 여자가 지금 어떤 꼴인지. 더 할 말이 있어?”온유한은 그저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는데 침대는 이미 엉망진창으로 된 채 바닥에는 뜯긴 콘돔이 널려져 있었다.그러나 그는 아주 덤덤하게 현채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샤워 가운을 다시 입혀준 뒤 머리도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 없어요?”현채영은 재빨리 답했다.“아니요.”“그럼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온유한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최신애는 자기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온유한의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끄, 끝이야?”그리고 온유한을 잡고 헝클어진 침대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저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보이냐고! 현장까지 잡은 마당에 넌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나 온유한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이건 저랑 채영 씨 사이의 문제니까 상관하지 마세요.”“온유한!”최신애는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변했어?”온유한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답했다.“지태주 씨와의 일은 채영 씨가 나중에 해명할 겁니다. 저는 저 사람을 믿거든요.”“아직도 믿는다고?”최신애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두 눈으로 직접 다른 남자랑 침대에서 뒹군 꼴을 보고도 믿을 수 있어?”“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죠.”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지태주는 히죽거리며 그에게 말했다.“온 대표님은 정말 좋은 남자의 표본인 것 같네요.”그의 말에 온유한이 그를 힐끔 쳐다보자 지태주도 같이 매섭게 쏘아보았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이 상황이 그저 답답해서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미쳤어, 진짜 미쳤어.”계획대로라면 오늘 밤 현채영을 바로 쫒아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안에서 나왔다.제일 앞에 서 있던 강지찬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뒤따라오던 최의현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저 사람 현채영 아니야? 저 남자는 누가야? 낯이 익네.”한규진은 호텔 로비에 막 들어선 최신애를 보고 한마디 했다.“쯧쯧, 볼거리가 생겼네.”현채영은 그 남자와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최신애가 뒤따라가자 최의현 일행도 따라갔다.“미친, 생각났어.”최의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저 자식, 그 지씨 가문 셋째 아니야? 추호와 친하던 애 있잖아. 지씨 가문에서 꽤 총애를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지씨 가문 셋째?”한규진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서울에서 지씨 가문은 명성이 높은 집안은 아니지만 구설수는 꽤 많다.예전에 지씨 집안의 막내아들이 밖에서 데려왔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사생아이지만 정실 마누라가 낳은 아들보다 더 총애를 받고 있다고 했다.틀림없이 지씨 가문 셋째 아들 지태주일 것이다.지태주와 현채영이 만난다고?생각보다 재미있는 관계가 될 것 같다.최의현은 당당한 모습으로 최신애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스위트룸 방문 앞에 멈춰선 최신애는 노크를 하는 대신 손목시계만 계속 들여다봤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20여 분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온유한은 강지찬 일행과 마주쳤다.온유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지찬을 슬쩍 쳐다봤다.강지찬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온유한을 시크하게 흘겨보았다. 화가 난 건지 짜증 난 건지 알 수 없었다.옆에 있던 최의현이 온유한 앞에 다가가더니 턱으로 스위트룸 방향을 가리켰다.“어떻게 된 일이야? 현채영이 왜 지태주와...”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온유한의 말에 강지찬 일행은 온유한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남자와 여자가 한밤중에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가서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있다. 설마 철학 토론이라도 하겠는가?하지만 온유한은 그들의 생각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본인
“지찬아, 유한이가 미친 거 아닐까? 임유희를 집에서 쫓아내고 현채영을 온씨 저택에 데려갔어. 최신애가 엄청 화를 낼 것 같은데?”최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현채영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몰랐네... 그때 지아를 신경 쓰는 것보다 더...”강지찬이 힐끗 바라보자 최의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임유희 때문에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이도 안 좋아졌어. 임씨 가문이 체면을 완전히 구겼잖아. 아마 이번 기회에 단단히 복수하려 할 거야. 그 임씨 부부도 생각이 있는 어른들은 아닌 것 같아. 온유한이 임유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딸을 이용해 온씨 가문에 바싹 달라붙어 가문의 지위를 올리려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최신애만 그걸 모르고 어떻게든 유한이와 임유희를 엮어주느라 골머리를 앓았지. 온유한은 임씨 가문의 속셈을 알았을까?”한규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그 자식 계속 약속 펑크내서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것 같아.”경은우가 말했다.“유한이 형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 거야. 유한이 형이 절대 함부로 누구를 대하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최의현이 말했다.“며칠 전 만났을 때 임씨 가문 얘기를 몇 마디 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지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루 종일 잠을 잔 현채영은 가방을 들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잠깐!”거실에 앉아 있던 최신애는 현채영의 화려한 차림을 보고 화를 냈다.온유한이 석식이 있어 집을 비우니 현채영은 한밤중에 외출을 하려 했다.현채영이 뒤돌아서서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어디 가는 거야?”“친한 여자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 오늘 밤엔 안 들어올 거예요.”그 말에 최신애는 바로 화를 냈다. “친한 여자친구들?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밖에 안 하는 날라리 여자들?”현
임유희도 온유한에게 쫓겨난 후 몸져누워 열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임유희는 이제 주위에서 웃음거리가 됐다.이 때문에 임씨 부부와 임유희 오빠는 온씨 가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바쁜 일과를 마치고 병원으로 향한 온유한은 문 앞에서 온혁진과 최신애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그때 임유희를 집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싸움에 휘말리기 싫은 온유한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병실에서 최신애가 병상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그럼 내 탓이란 말이에요? 당신 하나뿐인 아들이 현채영 그 여자와 엮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강지아가 어때서?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최신애, 우리 온씨 가문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온혁진의 말을 들은 최신애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평생 사랑한 이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내가 그런 거라고요? 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온혁진은 더 이상 이 일로 최신애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얘기했잖아. 유한이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당신이 기어코 유한이와 지아를 갈라놓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강씨 가문과 원수가 되었고 임씨 가문의 미움도 샀어. 만약 임씨 가문이 그때 강지찬처럼 작정하고 우리를 괴롭힌다면 이번에는 누구에게 부탁해서 도와달라고 할 거야?”집안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도 바짝 긴장했다.“투자자들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투자하는데 임씨 가문 때문에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어요?”“당신이 뭘 알아?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우리보다 우수한 의료 회사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경쟁업체에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새로운 의료기기를 도입했다고 들었어. 우리가 올해 주력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였는데...”온혁진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봤자 당신이 뭘 알겠어.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씨 가
강지아도 명성 빌딩에 오래 묵을 생각이 없었기에 아침을 먹자마자 서원준과 함께 집을 나섰다.현관문 너머로 서원준의 목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그제야 어젯밤에 서원준도 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내리쳤다.한편 기분이 좋아진 서원준은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하기 위해 한마디 했다.“지아야, 이 집 어차피 비어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는 게 어때?”강지아는 서원준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꿈 깨.”서원준이 일부러 다가가서 강지아를 품에 꽉 껴안자 강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뭐 하는 거야?”서원준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 여자친구에게 뭘 하겠어?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중요한 걸 못했네.”강지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함부로 행동하기만 해 봐!”강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무언가를 기대하던 서원준은 순간 주눅이 들었다.이런 상황에 사랑하는 남녀들이라면 분명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다음 진도로 넘어갔을 것이다.놀라움만 가득한 눈빛으로 서원준을 바라보는 순수한 강지아에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하긴 강지아가 왜 고백을 받았는지 서원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온유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서원준은 아쉬운 마음에 강지아의 볼을 꼬집은 뒤 말했다.“내일 나 출장 가. 저녁 비행기인데 같이 갈래? 꽤 재미있는 곳인데.”서원준은 연예계 활동 때문에 출장을 가야 했다. 강지아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거기에 가면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안 가. 요즘 작업실에서 현지 수주를 받은 게 있어서 자리 비우면 안 돼.”“알았어. 그럼 빨리 갔다 올게.”두 사람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만날 수는 없었다.오늘 서원준은 석식 약속이 있었고 내일도 바쁘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야 강지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차에 타기 전에 서원준은 우물쭈물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여기
오늘 기분이 좋은 서원준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강지아는 진수혁의 도움을 받아 서원준을 명성 빌딩에 데려다줬다. 그나마 여기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진수혁은 이미 자신의 물건을 모두 옮겨갔기에 집은 예전 상태로 되었으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두 사람은 서원준을 게스트 룸, 즉 진수혁이 묵었던 방에 데려다 눕혔다.이불을 끌어안은 서원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지아야... 나 너무 좋아... 정말 기뻐...”강지아는 진수혁에게 말했다.“이 집 어차피 비워둘 건데 그냥 있어도 되는데.”“여태까지 묵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워.”진수혁은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전기와 가스 카드는 모두 원래 있던 곳에 놓아뒀어. 비용은 이미 지불했고.”말을 마친 진수혁은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떴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수혁은 온유한에게 명성 빌딩에서 이사를 했기에 더는 가지 않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온유한은 휴대전화를 힐끗 본 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병상에 누워있는 최신애는 최씨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이 자식 머릿속에 온통 그 여자 생각뿐이야. 우리 온씨 가문과 이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봐. 내가 죽어야 본인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내 팔자야! 힘들게 키운 아들이 얼마 전까지 멀쩡했는데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어. 하느님, 제가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얘기하고 계세요. 야식 좀 사 올게요.”황은숙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고 최신애의 하소연을 한참 동안이나 들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됐어. 나도 금성이 집에 가봐야 해. 유한아, 엄마 화나게 하지 말고 잘 모셔.”황은숙과 최금성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병실에는 온씨 모자만 남아 있었다.최신애의 얼굴에 있던 슬픔이 어느새 원망으로 변했다.“왜, 나와 같이 있기도 싫은 거야?”온유한이 말했다.“채영이 집
강지아의 인터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회자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령이 차를 우리면서 잡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서 강지아의 다도 실력도 선보이게 되었다.녹화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어 화령이 강지아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얼마 전에 온씨 집안이 떠들썩했던 거 알아?”강지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령이 말을 이었다.“나도 금성 씨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아직 외부로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국물을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화령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도 않았다.“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 첫 번째는 최신애가 온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보를 현채영이 훔쳤다면서 누명을 씌웠지.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대. 온유한이 최신애와 싸우고 나서 경찰이 갔고 현채영은 별일 없었대. 두 번째 일은 어젯밤 온유한이 현채영을 위해 최신애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임유희를 온씨 저택에서 쫓아냈고 최신애는 한밤중에 화를 내며 병원에 입원했대.”강지아는 국물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잘됐네. 두 사람 다 힘든 것보다 낫네. 적어도 현채영 씨는 힘들지는 않으니까.”강지아가 별 반응이 없자 화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유한이 많이 변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강지아가 말했다.“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지 뭐. 현채영 씨, 괜찮잖아.”화령은 온유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작업실로 돌아온 강지아는 커피 한 잔을 끓였다.서랍을 열어보니 서원준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아직 전달하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휴대폰이 울려서 수신자를 보니 진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새집을 찾았기에 명성 빌딩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다.월세도 내지 않고 강지아의 집에 산 것에 대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남자친구 데려가도 돼?”“당연하지. 단골 술집에서 만나. 사장님더러 십몇 년 동안 간직해온 술을 오픈하라고 해야겠네.”“그래.”강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