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은 마치 백아영에게 내려진 시한부 선고 같았다.만약 스스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면 벌써 하고도 남았을 것이기에 5일 내내 발버둥 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하지만 한태윤은 5일 뒤면 남원을 떠난다. 그때 가서 떳떳하게 함께 있지 못하는 이상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마냥 지켜보는 신세이지 않겠는가?5일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지?결국 고민에 빠진 백아영은 도무지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마스크를 쓰고 몰래 심리상담실을 찾아갔다.심리상담사는 젊은 여성인데 그녀를 보자마자 무슨 일인지 눈치챈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고 백아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태연하게 차 한 잔 따르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아영 씨,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상담은 비밀리에 진행될 예정이라 아영 씨가 했던 말은 절대 유출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갈 일도 없어요. 고민이 있으면 저한테 다 털어놓으셔도 돼요.”심리상담사는 기껏해야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이력이 워낙 화려해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 동종 업계의 걸출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다시 말해서 타고난 재능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백아영은 왠지 모르게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심리상담사의 안내에 따라 백아영도 점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한태윤 씨를 사랑하는 아영 씨의 마음은 확신에 가까워요.”심리상담사가 결론을 내렸다.“물론 이성적으로도 이성준 씨와 재결합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과거에 서로 얼마나 사랑했든 이미 지나간 일에 불과하죠. 아영 씨는 현명한 분이시니까 이성준 씨를 잊는 건 결국 시간문제일 거예요. 하지만 잊기는커녕 한태윤 씨와 접촉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이성준 씨가 생각난다고 했잖아요. 혹시 아영 씨 문제가 아니라 한태윤 씨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백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태껏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고민이었
결국은 둘 다 상처받는 꼴이 된다.뚱보 아줌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고용인 신분이라고 해도 돌아가서 도련님을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심리상담실 창문 앞, 심리상담사와 간호사가 창가에 서서 멀어져가는 백아영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간호사가 의혹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해결된 거 아니었어요?”“해결했지만, 또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야.”심리상담사는 봄바람처럼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데 얘기해주지 않았거든.”간호사가 물었다.“무슨 가능성인데요?”심리상담사가 싱긋 웃었다.“한태윤과 이성준이 동일 인물인 거지.”경악을 금치 못한 간호사가 입을 틀어막았다.“그게 가능해요?”심리상담사의 미소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러니까, 황당하지? 하지만 그분이라면 진짜 가능할지도 몰라.”간호사가 물었다.“그분이 이성준 씨라고요?”비록 백아영이 얼굴도 가리고 선글라스로 완전 무장했지만, 상담 과정에서 심보라는 그녀는 물론 두 남자의 신분을 쉽게 유추해냈다.어쨌거나 이성준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화창한 아침, 백아영은 문득 전화 한 통을 받았다.상대방은 다름 아닌 허씨 일가 사람이었고, 대뜸 악에 받친 욕설부터 들려왔다.“백아영, 이 배은망덕한 년아! 그때 우리한테서 5조를 빌려 가서 성씨 일가를 구해주고, 나중에 50조를 갚겠다고 한 것도 스스로 약속한 일이잖아! 본인이 저지른 일을 본인이 수습하는 게 당연한데 대체 무슨 낯짝으로 되레 우리 가문에 해를 끼치는 거지?”허씨 일가에게 해를 끼치다니?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백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씨 일가가 심은아와 공모하여 상환 시기를 앞당기는 바람에 그녀도 빚을 갚으려고 신약 연구에 올인했을 뿐, 허씨 일가를 해치는 일은 하지도 않았다.“신약을 개발해냈다고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어? 감히 우리 허씨 일가를 짓밟고 일어서서 꼭대기에 앉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건가? 꿈 깨! 허
백아영은 제 자리에 우뚝 멈췄다.이내 차에서 내리는 이성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검은색 트렌치코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중에서 펄럭거렸다.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뚝 떨어지며 뼈에 사무치는 추위가 느껴졌다.이성준이 손짓하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부숴버려.”네 명의 경호원이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가 철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겁을 먹은 경비원이 아연실색하며 허둥지둥 뛰어가 소식을 알렸다.반면, 이성준은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마치 제집인 마냥 당당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날 들여보내지 않더니, 쌤통이야!”선우경진은 씩씩거리며 철문을 연신 발로 걷어차고는 이성준을 따라갔고,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 웃었다.“역시 성준 씨가 있어야만 저 자식들이 찍소리를 못하는군요.”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선우 일가의 사적인 일인데 선우경진이 왜 이성준에게 도움을 청했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갔다.게다가 허물없이 친한 모습은 결코 한 두 번이 아닌 듯싶었다.그녀와 이성준은 헤어진 지 오래되었고, 심지어 법정 싸움까지 벌인 사이인데 아무리 사적으로 친하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또한, 이성준도 그를 도와줄 명분이 없었다.백아영은 의혹을 가득 품은 채 몰래 따라 들어갔다.거실에 도착했을 때 무릎 꿇고 앉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아무리 권세가 대단한 집안이라고 해도 지금은 마치 고양이를 마주한 쥐처럼 벌벌 떨며 이성준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성준 씨, 저희도 일부러 선우 일가 아가씨를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허씨 일가의 강요에 못 이겨 그랬어요. 우리 집안 아이들을 독살하겠다고, 환불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린다고 협박하는데 어찌 거역할 수가 있겠어요?”이성준이 냉소를 지었다.“허씨 일가는 두렵고, 난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허씨 일가처럼 폭삭 망하고 싶나?”백아영이 흠칫 놀라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허씨 일가를 공격한 사람이 바로 이성준이라니?허씨 일가는 무려 제경의 재벌 가문이지 않은가? 이렇게 짧은 시간
그리고 이성준이 방심한 틈을 타서 몰래 가까이 다가갔다.백아영의 동공이 커지더니 안절부절못하다가 곧장 이성준을 향해 뛰어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저 사람한테 칼 있어!”젊은 남자가 즉시 공격했다.백아영이 경고한 덕분에 이성준은 재빨리 몸을 피하며 단번에 남자를 걷어차고는 몸을 날린 백아영을 품에 끌어안았다.“여기 왜 왔어?”이성준은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주며 말했다.“여긴 위험하니까 나가 있어.”비록 오랜만에 하는 스킨십이지만 낯선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익숙했다.결국 심란한 마음에 그를 밀어내고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옆에 고분고분 무릎 꿇고 있던 중년 남자가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로 단검을 집어 들고 이성준을 향해 찔렀다.백아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다가가 칼날을 붙잡았다.이내 극심한 고통과 함께 피가 뚝뚝 떨어졌다.“아영아!”이성준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중년 남성을 발로 걷어찼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바람에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누가 막아달라고 했어? 어차피 날 못 죽여!”비록 죽일 수는 없지만, 다치게 할지도 모르기에 백아영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막아섰다.그러나 이성준의 손바닥 안에서 재빨리 손을 빼내며 뒤로 물러나 싸늘하고도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이성준, 앞으로 내 일에 신경 꺼줄래? 이 정도 상처는 나 혼자 치료할 수 있어.”그녀는 손에 휴지를 둘둘 말아 대충 지혈했다.“네 도움 따위 필요 없고, 더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이성준은 멍하니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빨갛게 물든 손을 감싼 휴지를 보자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이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물었다.“우리 재결합할 가능성은 없는 거야?”“응.”그를 바라보는 백아영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말투도 딱딱하기 그지없었다.“왜냐하면 난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그러고 나서 단호하게 뒤를 돌아 밖으로 나갔다.그 모습이 어찌나 매정한지 남아 있는
닷새째.백아영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정확히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한태윤이 저녁 6시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고 했던 것 같았다.그녀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두 눈은 생기가 없었고, 해가 뜨기 시작해서 쨍쨍 내리쬐고 서서히 저물어 갈 때까지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했다.“아직도 집에 있어요?”벌써 이성준한테서 전화가 아홉 통이나 걸려 왔다.선우경진은 정원에 서서 베란다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아침부터 지금까지 창가에 앉아 꿈쩍도 안 해요. 밥도 챙겨줬는데 먹지 않고...”“안 먹는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어떡해요?”이성준이 버럭 화를 내자 선우경진이 반박했다.“성준 씨 빼고 감히 억지로 밥을 먹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6시 항공편을 예매하는 게 아니었는데!”이성준은 후회막급했다.“청첩장은 도착했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우철이 화려한 청첩장 한 장을 들고 선우경진 앞으로 뛰어갔다.청첩장을 건네받은 선우경진은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도착했어요!”그러고 나서 백아영의 방으로 향했다.걱정이 태산인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픈 나머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여동생 대신 갈등을 해결하고 양자택일의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줄 생각에 단호하게 청첩장을 내밀었다.“아영아, 원래는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고민 끝에 너한테도 알 권리 있다고 봐서 얘기해주는 거야.”백아영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청첩장을 건네받았다.이는 약혼식 청첩장으로 성무열과 어떤 여자가 나란히 서서 찍은 웨딩사진이 눈에 들어왔는데, 예식은 바로 오늘 저녁이다.“성무열이 약혼한대요?”백아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여태껏 성무열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문도 듣지 못했는데 결혼부터 한다니? 너무 경솔한 결정이지 않은가?선우경진이 어설픈 열연을 펼치며 위로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마. 인연은 원래 하늘이 정해주는 거야. 만약 참석하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괜히...”‘상처받지 말고’라고 하기도 전에 백아영은 이미 옷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백아영은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선우경진이 대체 어디서 청첩장을 구했단 말이지?선우경진은 제 발 저린 듯 코를 쓱 닦았다. 이내 고개를 드는 순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멀리서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곧 아수라장이 될 분위기에 괜스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성무열의 청첩장을 얻어낸 목적은 단지 백아영을 단념시켜 공항에 이성준을 찾으러 가게 하기 위해서였지, 약혼식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신랑을 빼앗아 가도록 하는 건 아니었다.그는 서둘러 백아영을 잡아당겼다.“무열 씨는 네가 약혼식에 참석하는 게 싫은가 본데 그냥 돌아가자.”백아영은 선우경진이 오늘따라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라서 미안한 얼굴로 성무열에게 말했다.“약혼 축하해. 그럼 폐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 이만 가볼게.”“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간다고?”성무열이 성큼 다가서더니 그녀를 막아섰다.“이왕 온 김에 약혼식 훼방 놓고 나랑 도망갈래?”선우경진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동안 제일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일이 아니나 다를까 터지는 순간이었다.안 그래도 약혼식에 훼방 놓으러 온 사람에게 하필이면 맞장구를 쳐줬으니 죽이 척척 맞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손에 손잡고 예식장에서 뛰쳐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싶었다.‘불쌍한 성준 씨...’이때, 가까이 다가온 예비 신부와 신부 들러리도 이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했다.그러나 주범인 성무열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백아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가 훼방 놓는 순간 미련 없이 따라나설 기세였다.히죽거리는 성무열의 표정을 보자 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곧 결혼한다는 사람이 아직도 제 분수를 모르고 단정치 못하게 행동하다니.이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훼방을 놓는다고 해도 너랑 도망치는 일은 없어.”성무열이 발끈했다.“백아영, 다시 말해 봐.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어떻게 양심도 없냐?”“성무열! 아, 도련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아니면 대표님? 나를
청첩장을 받지 못한 백아영은 원래 떠나려고 하였으나, 성무열이 막무가내로 조르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 예식장에 들어갔다그제야 선우경진은 뒤늦게 알아차렸다.“아영아, 네가 좋아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성무열이 아닌 거지? 그럼 누구야?!”백아영은 입술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의 시간을 들여다보니 벌써 6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비행기가 곧 이륙할 시간이다.선우경진은 그녀한테서 오랫동안 답이 없자 생각할수록 초조해졌다. 이성준이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 성무열을 결혼시켰는데, 결국 연적을 잘못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 시간까지 백아영이 여전히 여기에 앉아 있는다면...선우경진은 초조한 듯 백아영을 떠보면서 말을 걸었다.“피로연은 참석 안 해도 괜찮아. 지금이라도 공항으로 출발하면 늦지 않아.”그 말에 슬픔이 다시 온 가슴에 번지기 시작했다. 백아영은 거의 안 들릴 정도로 낮게 말했다.“안 가요.”“진짜 안 가? 아니면 네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선우경진은 발을 동동 굴렀다.“그동안 너랑 한태윤이 그 수많은 일들을 같이 겪었고, 둘이 또 서로 사랑하고 있잖아. 그런 감정은 아무나 함부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 너 이대로 포기하면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네가 좋아하는 그 다른 남자가 정말 한태윤보다 더 나아?”백아영은 슬프게 6시를 가리키는 시간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너무 좋은 사람이기에, 그녀는 감히 그의 미래를 그르칠 수 없다.그한텐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어울린다.“작별 편지는 사람을 보내 공항에 가져다줬어요.”집 문을 나설 때 선우경진은 백아영이 사람한테 편지 배달을 부탁하는 걸 봤는데, 그게 공항으로 보내 이성준한테 전달되는 작별 편지일 줄은 몰랐다.‘아영은 이미 그때부터 결정을 내렸구나.’선우경진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많이 슬퍼할 거야, 그 사람.”백아영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음속으로 말했다.‘미안해
“사장님...”위정은 걱정스럽게 따라왔다.이때 선우 일가의 도우미가 비틀거리며 공항으로 뛰어 들어왔다.그녀는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다쳤지만 백아영의 편지를 전달해 주러 병원에도 가지 않고 이를 악물고 겨우 달려왔다.다행히 서둘러 따라잡아 이성준이 떠나기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한태윤 도련님, 태윤 도련님!”그녀는 이성준을 향해 소리치며 동시에 그를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그녀의 고함에도 이성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공항 회전문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도우미는 아픔을 참으며 뒤쫓아가 차에 올라타려는데 위정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위정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뭐야?”“실장님, 저는 선우 집안의 도우미에요, 아영 아가씨가 저를 보내 한태윤 도련님한테 편지를 전달해 주라고 했어요. 이게 그 편지입니다.”도우미는 급히 편지를 꺼냈는데 그 편지에는 피가 좀 묻어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닦느라 했지만 닦이지 않았다.위정은 이 편지를 보고 안색이 매우 나쁘게 변했다. 사람은 안 오고 편지만 딸랑 보내다니, 아마 편지 속의 내용도 별로 볼 게 없고 애꿎은 사장님만 더 괴롭게 만들 뿐일 거라 그는 생각했다.그는 편지를 받아 아예 바지 주머니에 넣고 숨겼다.차에 올라탄 후, 이성준은 위정이 방금 누구와 얘기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으나 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고, 냉기 속에 휩싸여 있었다.위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사장님, 방금 전화를 받았는데 뚱보 아줌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까지 계속 사장님을 만나겠다고 중얼거렸대요, 사장님과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요.”이성준의 미간이 살짝 움직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제일 좋은 의사를 불러 치료 잘해주고, 다 나으면 얘기하자고 해.”약혼식이 끝난 뒤 저녁 피로연도 매우 다양했다.백아영은 떠들썩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도 마음속에는 외로움이 가득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태윤이 지금쯤 제경으로 돌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