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은 순탄한 삶을 살아왔지만 유일하게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사랑이었다.도윤이 자신을 구해준 순간부터 그녀는 커서 도윤과 결혼하겠다고 맹세했다.어렸을 때부터 어디에 있든 고생해 본 적이 없는 미셸은 모두가 그녀 앞에 굽실거리고 떠받들어주고 존중해 주었다.하늘의 별과 달을 원해도 기꺼이 따다 주려 할 것이다.그런데 여자에게 뺨을 두 번이나 맞다니, 의학 좀 아는 게 대수인가?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자신의 손가락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미셸은 개울로 달려가 맑은 강물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세게 때린 탓에 얼굴이 다 부었다!오늘 맞은 두 대는 천배, 만 배로 갚아줄 것이다.미셸은 멍하니 몰두한 나머지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진봉은 갑자기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조심해.”미셸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반응하기도 전에 뱀이 입을 크게 벌리고 물 밖으로 뛰어나와 자기 다리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았다.미셸은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봉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뱀, 뱀이 있어!”미셸은 말을 더듬었다.진봉은 미셸을 공격하려던 뱀을 공격했고 피가 튀어 몇 방울이 미셸의 신발에 떨어졌다.미셸은 신분 때문에 도윤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야생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도윤과 함께 있을 때도 그녀는 피 주머니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미셸은 남들보다 타고난 신체도 없었기에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당황하며 조금도 침착하지 못했다.미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금 전의 아찔한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누나, 괜찮아?”진봉이 물었다.“아니, 안 괜찮아.”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나.미셸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진봉은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이상하네. 보통 저런 뱀은 사람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데 왜 갑자기 사나워졌지? 설마 근처에 새끼가 있나?”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떤 동물이든 새끼와 함께 있을 때는 다른
사방에 뱀이 점점 더 많아지자 진봉은 미셸을 등 뒤로 던졌고, 미셸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그녀는 버럭 화를 냈다.“뭐 하는...”“닥쳐.”진봉은 근엄한 목소리로 이를 제지하며 급히 자비를 구했다.“꼬마야, 그만 불어. 이미 잘못한 걸 알고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제발 이 뱀들을 멈추게 해 줘!”이윽고 목소리를 낮추며 미셸을 위협했다.“죽고 싶지 않다면 빨리 빌어. 안 그러면 오늘 우리 중 누구도 이 마을을 떠날 수 없어.”사사삭-뱀들의 소리가 숲속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고 미셸은 이런 장면을 처음 보는 데다 보호복도 입지 않았기에 자존심은 뒤로 하고 울면서 빌었다.“미안해, 미안해, 그만해. 내가 정말 잘못했어.”뱀이 멈추지 않자 진봉은 미셸의 높은 포니테일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몇 번 더 박았다.“꼬마야, 네가 너그럽게 용서해 줘. 네 엄마도 네가 이런다는 걸 알면 기뻐하지 않을 거야.”역시나 그 말이 끝나자 피리 소리가 멈추고 뱀들도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하지만 저마다 멀리서 똬리를 틀고 바라보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어린 무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아였다.무무가 처음 힘을 사용한 것은 두 살 때였는데, 지아가 산에 약초를 캐러 갔을 때 너무 오래 머물다 보니 몸에 바른 동물 기피제 가루 냄새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표범 한 마리가 뒤에서 지아에게 달려들었고, 지아는 재빨리 반응했지만 팔에 상처를 입었다.업혀 있던 아이 얼굴에 피가 튀자 무무는 두 눈을 크게 떴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홧김에 알아서 모든 뱀과 벌레, 쥐와 개미, 하늘의 맹수들까지 불러들였다.표범은 산 채로 물려서 결국 하얀 뼈만 남았다.지아는 표범보다 자신의 딸이 더 무서웠다.지금도 무무는 당시 괴물을 보는 듯한 지아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래도 몇 초 만에 다시 자신을 안아주며 괜찮다고 안심시켰지만 무무는 여전히 그 눈빛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그렇다, 엄마는 자신이 능력을 마음대로 쓰는 걸 원하지 않
“그랬지, 하지만 그건 미셸이 사과하지 않았을 때 얘기고 이미 사과했잖아.”진환은 고개를 저었다.“그때 미셸이 진심으로 사과한 것 같아?”“아니겠지. 만약 정말 바네사가 그랬다면 우린 어떡해?”진환은 한숨을 쉬었다.“방울도 단 사람이 풀어야지. 이건 미셸이 직접 사과를 하고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진환이 방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몸이 약해서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진환은 들어올 때마다 미리 인사를 건넸다.“보스, 저예요.”“알아.”도윤은 진환이 생각하는 것만큼 연약하지 않아서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오늘은 좀 어때요?”도윤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렸다.“안 좋아, 두통이 심해.”도윤의 얼굴에 있던 자국이 많이 옅어진 걸 보면 독소가 점점 줄어들고 활력이 넘쳐나야 하는데 왜 저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걸까?“잠깐만요, 바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응.”진환은 미셸 일은 뒤로 하고 약방으로 달려갔다.이때 지아는 약을 달이기 위해 불을 지키며 의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한의학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서의학에도 능통해서 본인이 직접 배합해 병을 치료하는 독특한 방법도 가지고 있었다.서둘러 달려오는 진환의 얼굴을 보니 분명 도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왜 그래요?”지아는 아무렇지 않게 책갈피를 놓고 일어났다.“보스한테 문제가 생겼어요, 한번 봐주세요.”말하는 동안 지아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네, 저 대신 불 좀 봐주시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자신의 영역이긴 하지만 지아는 그래도 혹시나 사고가 날까 봐 두려웠다. 도윤의 독이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고 누군가 약을 바꾸면 사람이 쉽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알겠어요.”지아는 발걸음을 가볍게 내디디며 집 안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바네사?”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도윤은 경계하며 먼저 물었다.“네, 저예요.”지아가 희미한 약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도윤의 표정이 미
도윤은 그날 지아에 대한 사소한 기억까지 떠올렸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눈앞에 있는 여자가 바로 지아였다!그 생각에 도윤의 피가 흥분으로 끓어올랐다.지아는 청진기로 도윤의 심장 박동을 살피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지?”지아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의자에 앉아 도윤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맥을 잴 테니까 평소처럼 호흡해요.”지아는 이 순간 도윤의 머릿속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러면서 모든 상황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왜 그 유명한 의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돕기 위해 제때 도착했고, 사흘 밤낮을 꼬박 새워 손수 약을 만들어 주었을까.자신이 안았을 때 짧게 내던 앓는 소리는 분명 지아의 목소리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그날 꿨던 꿈은 아마도 자신이 지아의 진찰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아는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일 테다.도윤의 머릿속에 어린 소녀의 어렴풋한 윤곽이 떠올랐다.아이가 아직 세 살도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설마...도윤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그날 밤 그는 배에서 지아의 약기운을 해결해 주고 A시로 데려갔다. 다음날 하빈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지아가 피임약을 부탁했다는 걸 알렸다.피임약이 몸에 좋지도 않고 당시 지아의 몸 상태가 안 좋은 데다, 언젠가 의사가 몸이 약해 임신이 쉽게 되지 않을 거란 말이 떠올랐던 도윤은 하빈에게 피임약 대신 비타민을 주라고 했었다.그런데 또다시 당첨이다.어쩐지 지아와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 아이 눈은 초록색일까? 자신과 지아의 눈동자는 전부 검은색인데.지아는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고 예쁜 딸까지 낳아주었다. 딸도 곧 세계적인 명의가 될 것이다.도윤은 감격스럽고 행복했다.기뻐할수록 맥박이 빨라지고 지아의 이마에 미간이 찡그려졌다.지아는 도윤을 바라보았다.“지금 마음이 흥분한 건가요?”도윤은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
예전에 한창 서로 사랑할 때 자주 손을 맞잡았었다. 사람의 외모도 가리고, 분위기도 바뀌고, 하다못해 눈빛도 연습하면 감출 수 있지만 유독 손의 크기만은 바꿀 수 없다.그렇게 수없이 잡았던 손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지아의 작은 손은 도윤의 큰 손바닥 안에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다만 손바닥이 예전처럼 평평하지 않고 굳은살이 박인 걸 보아 편히 지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지아가 격하게 손을 뿌리치자 도윤의 얼굴에 죄책감이 번쩍 떠올랐다.“미안해요, 전 부인이 생각나서 당신한테 무례한 행동을 했네요.”지아는 도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안색에 별다른 변화가 없고 눈동자도 초점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괜한 생각이겠지.“괜찮아요.”“전 왜 이런 겁니까?”“아마 약이 너무 독해서 부작용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으니 오늘부터 복용량을 줄이고 다른 약을 몇 가지 더 만들어 줄게요. 뒷산 샘터에 가서 자주 몸을 담그면 좋을 거예요. 우선 약식을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거 먹고 잠시 후에 다시 맥을 재 보죠.”“감사합니다.”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도윤은 한눈에 봐도 무척 약해 보였다.지아는 얼른 뒷방으로 가서 닭을 잡아오고, 버섯과 약재를 딴 다음 닭을 깨끗이 손질하고 재료들과 함께 솥에서 끓여 죽을 만들었다.지금 도윤의 몸은 영양이 필요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보충해서도 안 되니 비율을 잘 맞춰야 했다.도윤은 지아가 가자마자 진환을 불렀다.“보스, 부르셨어요? 아직 약 드실 때는 아닌데.”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문 닫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들어와.”“네.”진환은 진봉보다 더 믿음직스러웠고 일을 마친 그가 도윤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됐어요, 보스. 무슨 일이에요?”도윤은 귓속말로 작게 말했다.“무무가 몇 살인지 정확히 알고 싶으니까 가서 정보를 좀 알아봐.”“갑자기 무무는 왜요?”도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키는 대로 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조용히 움직여야 해.”“네.”진환은 조금 이상
지아가 손가락을 잡아 확인해 보니 손가락 끝이 길게 베인 것을 발견했다.“괜찮아요, 전 늘 다쳐서 이건 작은 상처일 뿐이에요.”도윤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손을 빼냈다.“잠깐 기다려요.”지아는 서둘러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지혈했다.“됐어요, 앞으로 이틀 동안은 물 닿지 않게 해요. 내가 부축해 줄게요.”“아니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도윤은 지아를 밀어내고 힘없는 몸을 스스로 끌어올렸다.비록 지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똑똑한 지아는 조금만 방심해도 알아차릴 수 있기에 도윤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일부러 모르는 척 거리를 두었다.지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말했다.“여기선 남녀가 아니라 의사와 환자예요. 계속 저와 거리를 두면 그쪽 독 저도 상관 안 해요.”도윤은 고개를 숙였다.“미안합니다.”지아는 아직 남아있는 삼계탕을 건넸다.“빨리 낫고 싶으면 나한테 협조하세요.”“성가시게 굴어 미안합니다.”도윤은 다시 사과했다.지아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도윤을 바라봤다. 늘 사람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이고 강한 그가 언제 이럴 때가 있었나?지아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괜찮아요, 이해하니까 우선 닭백숙 먼저 먹어요. 오래 끓였으니까.”말을 마친 지아는 당황했다. 마지막 말은 할 필요가 없는데, 괜히 도윤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뼛속 깊이 새겨진 습관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빨리 낫게 하려고 약초를 좀 넣었어요.”지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고마워요.”지아는 도윤에게 한 모금씩 먹여주었고,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가 없었지만 분위기는 다정했다.지아는 떠나던 날 평생 도윤을 피해 다니며 이생에서 더는 그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가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 적은 있어도 이런 식의 재회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도윤은 빨리 낫기 위해서인지 차갑던 사람이 얌전한 아이가 된 것 같았다.도윤은 애써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그동안 도윤은 미셸을 어린 동생으로 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녀를 돌봐주었고, 당시 구해준 것도 얼떨결에 벌어진 일인데 그로 인해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과거 도윤이 작전을 나갈 때마다 미셸은 꼭 같이 가겠다고 고집부렸다. 그때는 어리고 진급을 위해 훈련하려는 줄 알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수혈해 줄 수도 있으니 데리고 다녔었다.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 대한 애정이 더 분명해지자 도윤은 미셸에게 결혼했다는 걸 알렸다.겨우 몇 년 동안 잠잠하다가 자신의 이혼 소식이 들끓자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도윤이 아무리 거절해도 미셸은 계속해서 달라붙었다.도윤은 이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스승의 체면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었다.진환은 서둘러 말했다.“보스, 이렇게 아픈데 치료도 안 하고 돌려보내면 윗사람들한테 한 소리 들을 테고, 그건 보스의 평판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요...”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본인이 자초한 거잖아. 됐어, 신경 쓰지 마.”일어나서 나가려던 도윤이 문 앞에서 문틀에 걸려 넘어질 뻔한 순간, 그를 제때 붙잡은 것은 지아였다.“오두막집은 큰 별장과는 달라서 익숙하지 않으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요.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장례를 치러줘야 하잖아요.”“미안합니다.”지아는 도윤의 손을 잡고 길을 안내했다.“그래도 눈먼 사람한테 화내지는 않아요. 천천히 내려와요.”진환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윤이 부탁한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하자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고 지아가 그를 다시 바라봤을 때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착각이었을까?진봉은 여전히 울부짖었다.“선생님, 저 여자한테 큰일이 생기면 제가 죽습니다! 전 아직 어리고 아내도 얻지 못했어요.”지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며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보아하니 미셸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고, 그녀가 다치면 도윤에게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도윤은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입을 진환에게 말했다.“다 들었지, 나는 남아서 독을 해독해야 해.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니 네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서 수습하고, 미셸도 큰 문제가 없다면 같이 데려가.”진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내를 찾았다고 형제를 버리다니, 곧바로 그들을 내보내고 지아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알았어요, 보스. 그럼 경훈이한테 연락할게요.”오두막집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를 날리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그래, 내 행방은 비밀로 해줘.”“네.”일 핑계를 댔지만 사실 아내와의 재회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도윤이 지아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두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었기에 진환은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물을 붓고 불을 붙이던 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왜 저렇게 빨리 보냈을까, 진환이 떠나면 도윤의 옷은 누가 벗겨주나?무무처럼 새를 시켜 경훈에게 연락할 재주도 없었다.됐다, 지아는 마음속으로 자신은 의사고 도윤은 그저 평범한 환자일 뿐이라고 계속 되뇌었다.“옷 벗어요.”“그럼 돌아서요.”도윤은 꿋꿋이 연기했다.“알량한 살덩어리를 내가 보고 싶어서 보겠어요?”지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뒤에서 도윤이 중얼거리는 듯 말했다.“알량하지 않은데.”지아는 곧바로 얼굴을 붉혔다.‘이 변태가, 아무 여자한테나 이런 농담을 하는 거야?’“자, 다 벗었어요.”도윤이 말했다.전에는 전부 진환이 이끌어줬는데 이젠 진환이 갔으니 전부 지아의 몫이었다.지아는 도윤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손 줘요.”지아는 도윤의 손을 잡고 이끌었고, 도윤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전에는 군말 없이 버텨왔다. 이제 지아의 존재를 알았으니 고통이 기쁨으로 바뀔 정도였다.지아는 그런 도윤의 마음도 모른 채 근처에서 약초를 찾아 빻은 후 즙을 모아 그의 눈을 치료해 줄 약물을 만들 생각이었다.도윤은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