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도윤은 미셸을 어린 동생으로 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녀를 돌봐주었고, 당시 구해준 것도 얼떨결에 벌어진 일인데 그로 인해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과거 도윤이 작전을 나갈 때마다 미셸은 꼭 같이 가겠다고 고집부렸다. 그때는 어리고 진급을 위해 훈련하려는 줄 알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수혈해 줄 수도 있으니 데리고 다녔었다.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 대한 애정이 더 분명해지자 도윤은 미셸에게 결혼했다는 걸 알렸다.겨우 몇 년 동안 잠잠하다가 자신의 이혼 소식이 들끓자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도윤이 아무리 거절해도 미셸은 계속해서 달라붙었다.도윤은 이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스승의 체면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었다.진환은 서둘러 말했다.“보스, 이렇게 아픈데 치료도 안 하고 돌려보내면 윗사람들한테 한 소리 들을 테고, 그건 보스의 평판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요...”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본인이 자초한 거잖아. 됐어, 신경 쓰지 마.”일어나서 나가려던 도윤이 문 앞에서 문틀에 걸려 넘어질 뻔한 순간, 그를 제때 붙잡은 것은 지아였다.“오두막집은 큰 별장과는 달라서 익숙하지 않으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요.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장례를 치러줘야 하잖아요.”“미안합니다.”지아는 도윤의 손을 잡고 길을 안내했다.“그래도 눈먼 사람한테 화내지는 않아요. 천천히 내려와요.”진환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윤이 부탁한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하자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고 지아가 그를 다시 바라봤을 때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착각이었을까?진봉은 여전히 울부짖었다.“선생님, 저 여자한테 큰일이 생기면 제가 죽습니다! 전 아직 어리고 아내도 얻지 못했어요.”지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며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보아하니 미셸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고, 그녀가 다치면 도윤에게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도윤은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입을 진환에게 말했다.“다 들었지, 나는 남아서 독을 해독해야 해.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니 네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서 수습하고, 미셸도 큰 문제가 없다면 같이 데려가.”진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내를 찾았다고 형제를 버리다니, 곧바로 그들을 내보내고 지아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알았어요, 보스. 그럼 경훈이한테 연락할게요.”오두막집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를 날리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그래, 내 행방은 비밀로 해줘.”“네.”일 핑계를 댔지만 사실 아내와의 재회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도윤이 지아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두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었기에 진환은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물을 붓고 불을 붙이던 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왜 저렇게 빨리 보냈을까, 진환이 떠나면 도윤의 옷은 누가 벗겨주나?무무처럼 새를 시켜 경훈에게 연락할 재주도 없었다.됐다, 지아는 마음속으로 자신은 의사고 도윤은 그저 평범한 환자일 뿐이라고 계속 되뇌었다.“옷 벗어요.”“그럼 돌아서요.”도윤은 꿋꿋이 연기했다.“알량한 살덩어리를 내가 보고 싶어서 보겠어요?”지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뒤에서 도윤이 중얼거리는 듯 말했다.“알량하지 않은데.”지아는 곧바로 얼굴을 붉혔다.‘이 변태가, 아무 여자한테나 이런 농담을 하는 거야?’“자, 다 벗었어요.”도윤이 말했다.전에는 전부 진환이 이끌어줬는데 이젠 진환이 갔으니 전부 지아의 몫이었다.지아는 도윤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손 줘요.”지아는 도윤의 손을 잡고 이끌었고, 도윤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전에는 군말 없이 버텨왔다. 이제 지아의 존재를 알았으니 고통이 기쁨으로 바뀔 정도였다.지아는 그런 도윤의 마음도 모른 채 근처에서 약초를 찾아 빻은 후 즙을 모아 그의 눈을 치료해 줄 약물을 만들 생각이었다.도윤은
지아의 심장이 멈칫했고 도윤은 이렇게 덧붙였다.“이번에 그쪽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 죽었을 겁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 나으면 꼭 제대로 보답하겠습니다.”왠지 지아의 머릿속에는 영웅이 여자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이 떠올랐고, 구해준 여자들은 보통 드릴 게 없으니 자신을 바쳐서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오래전에 이혼했고 더는 서로 상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이였다.앞으로 다른 아내를 맞이할 도윤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미련이 남은 거다.학생 시절부터 한 남자만 사랑했고, 그와 함께 자식과 손주들을 거느릴 때까지 백년해로하는 미래를 수없이 상상했다.처음 결혼했을 때만 해도 눈과 마음에 도윤이 가득했는데, 언젠가 결혼 생활이 깨지고 남편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차가운 법이다.지아는 도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보답하시려고요?”“그건 당신한테 물어봐야 할 질문이겠군요, 원하는 게 뭐죠?”도윤이 되물었다.지아는 제일 먼저 지윤을 떠올렸다. 도윤이 아들의 양육원을 자신에게 넘겨줄까?“원하는 게 있으면 나중에 이 선생님께 말씀드릴 겁니다.”도윤도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말하는 억양으로 봐서 A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예요?”“바네사, 그냥 그렇게 불러요.”“A국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렇게 유창하게 말할 수 없었을 텐데, 그게 본명은 아니겠죠.”지아는 왠지 불쾌했다.“대체 왜 이렇게 자세히 물어보시는 거죠? 설마 드라마에서처럼 몸으로 은혜를 갚기라도 할 생각인가요?”“내가 결혼하고 싶어도 당신이 허락해야죠.”지아의 마음은 점점 더 불쾌해져만 갔다. 마음속에 한 사람만 있기는 무슨, 저 한심한 남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꼬드겼을지 누가 알겠나.“걱정 마요, 돼지랑 결혼하더라도 당신이랑은 안 하니까.”말을 마친 지아는 씩씩거리며 뒤돌아
지아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허리띠를 묶어주었다.“됐어요.”그런 다음 허리띠를 잡아당기며 동물 가죽 위에 눕게 했다.“잠시 쉬면서 먹고 기력 보충해요.”동굴 안에는 생필품이 꽤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지아가 자주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분명했다.도윤은 지아의 병도 이곳에서 고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아이와 함께 지냈을까?머릿속에는 너무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퍼즐은 언젠가 풀릴 테니까.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명한 방울 소리가 도윤의 귀에 들렸다.마음이 흠칫 떨렸다. 무무다!아직 무무의 생일을 알아내지 않았지만 도윤은 이미 무무를 자신의 아이로 생각하고 있었다.도윤은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고 방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다 마침내 그의 옆에서 멈췄다.작은 손이 얼굴을 쓰다듬자마자 도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무무도 내가 아빠란 걸 알고 있나?’도윤은 감히 이 아름다운 순간을 방해할 수 없었고 곧 무무는 손을 뗐다. 소리를 들으니 지아 곁으로 간 것 같았다.“배고파?”낮은 지아의 목소리는 원래의 목소리와 다소 비슷하게 들렸다.작은 아이가 손짓을 하자 지아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가서 재료 가져와. 엄마가 사탕 만들어 줄게.”방울 소리가 매우 쾌활하게 울려 퍼졌다.도윤은 갑자기 사람의 냄새가 아닌 무언가가 자신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마치 짐승이 자신의 손을 킁킁거리는 것 같았고 무슨 짐승인가 싶어 겁이 났다.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무서워하지 마요, 사슴이에요.”“여기 사슴도 있나요?”“당연하죠. 저쪽에 샘물이 있는데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많이 와요.”“사나운 짐승은 없습니까?”지아의 머릿속에는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예전에는 있었는데 사라졌어요.”그 표범이 죽은 후 모든 짐승들은 깊은 산으로 도망갔고 다시는 지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도윤은 이유를 몰랐기에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었다.동물들은 기운을 느끼기에 과거 야생
도윤도 지아 쪽을 바라보았다. 눈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볼 수도, 올 수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지아는 속으로 당황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 만든 사탕을 바구니에 담았다.“엄마는 할머님께 드리러 갈 테니 네가 여기 남아서 지켜보고 있을래?”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지아가 떠나고 무무는 도윤의 곁에 앉아 새끼 사슴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가끔 새끼 사슴의 몸이 도윤과 부딪히는 걸 보아 도윤은 새끼 사슴과 아이가 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기뻐하던 도윤은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이 동네에는 산사나무가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열매를 가져왔을까?가능성은 단 한 가지, 누군가 밖에서 가져온 것이다.전효!갑자기 도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떠올랐다.지아는 완성한 사탕 일부를 도윤에게도 나눠주었다.몇 년이 지났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아무도 모른다!자신이 없는 수천 번의 밤낮 동안 지아의 옆자리는 다른 남자가 채운 것이었다.도윤은 왠지 당혹스러웠고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무무가 손을 잡고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왜 그래요?”도윤은 직접 물을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말했다.“무무야, 나 여기 있는 게 좀 심심한데 산책 좀 시켜줄래?”무무는 이미 하루치 약을 다 먹은 도윤을 보며 조금 걷는 것도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는 도윤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끌었다.도윤은 자신이 딸과 이런 식으로 소통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렇게 작은 손이 자신을 잡아주자 도윤은 매우 든든하게 느껴졌다.도윤은 혹시나 아프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무무의 손을 잡았다.이 순간 그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권력도, 어떤 지위도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손과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제 해 지는 거야?”딸랑-차분한 방울 소리는 긍정의 의미였다.“엄마는 어디 있어?”도윤이 다시 물었다.“갑자기 눈이 좀 아픈데.”무무는 역시나 지아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고
도윤은 다른 남자 밑에 누워 있는 지아를 생각만 해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쳤고 살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무무의 몸에서 나는 방울 소리가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주원은 기쁜 마음으로 무무를 향해 달려갔지만 무무 옆에 있는 남자를 보자 얼굴에 미소가 얼어붙었다.그는 도윤을 가리키며 지아에게 물었다.“누가 말한 환자야?”“응, 얘기하자면 길어.”지아는 주원에게 눈치를 주자 주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윤은 제대로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바네사, 손님 오셨어요?”주원은 피식 웃었다.“누가 손님인지 모르겠네.”도윤은 모르는 척 물었다.“선생님께선 저한테 적대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은데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지아는 차갑게 끼어들었다.“모르는 사이에요. 여긴 왜 왔어요?”무무가 손짓을 하자 지아가 도윤을 돌아보았다.“눈이 아파요?”“네, 그쪽이 가고 살짝 통증이 느껴져서 무무한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어요.”지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따라와요.”앞으로 걷던 지아는 도윤이 앞을 못 본다는 걸 깨닫고 다시 돌아와 그의 허리띠를 당기며 데리고 갔다.주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살기가 눈동자 깊숙한 곳을 휩쓸고 지나갔다.방으로 돌아온 지아가 명령했다.“앉아요.”도윤이 순순히 자리에 앉자 나무 침대가 그의 큰 덩치에 삐걱거렸다.지아는 그의 앞에 서서 눈을 감싸고 있던 거즈를 벗겨냈다.눈꺼풀에는 아직 약이 남아 있었고 지아는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냈다.“눈 떠요.”도윤은 매우 협조적이었다.“불빛이 보여요?”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 흔들었다.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 전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요.”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았다.“아직도 아파요?”“조금 아파요.”지아는 어디서 난 약인지 또 가져와 도윤의 눈에 떨어뜨리며 부드럽게 불었다.눈앞이 시원해지자 머리도 훨씬 맑아져서 눈은 물론 두통도 많이 완화되었다.다만 지아가 희미한 체온까지 느낄 수
경훈이 그런 도윤의 심경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추었다.“보스, 명령하세요.”도윤은 몇 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지아와 주원 사이에 정말 뭐가 있다면 지금 막기엔 너무 늦었다.반대로 추리해 보면 두 사람이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주원은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면 자신이 미워하는 것보다 그의 증오가 더 클 것이다.그러니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둘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도윤은 생각을 정리한 뒤 경훈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명령했고 경훈은 조금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이건 너무 위험해요.”“내 말대로 해, 위험이 없으면 상대를 잡을 수 없어.”경훈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누구를 잡는단 말이지?도윤이 움직이지 않고 방 안에 머무는 동안 경훈은 도윤이 말한 대로 마당 전체와 주변 세팅을 준비했다.말하기 복잡해 도윤의 손에 간략한 지도를 그려주기도 했다.다른 사람 같으면 하늘의 별 따기였겠지만 도윤처럼 똑똑한 사람은 머릿속에 지도를 바로 떠올렸다.도윤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방 안의 물건들의 위치와 높이를 대략 파악했다.“알았어, 네가 안내해 줘.”경훈은 도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다녔다.경훈의 입을 통해 도윤은 지아가 옆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마침 밤이 막 깃든 마당에서는 조원주가 약을 짓고 있었고, 절구질 소리와 무무에게 약의 성능을 설명하는 소리만 들렸다.지아와 주원은 외출했다. 밤이 되기 바쁘게 바로 시작한 건 아니겠지?도윤의 마음은 고양이가 할퀴는 것 같았지만 얼굴은 담담한 척해야 했다.천천히 움직이는 그를 본 조원주가 먼저 말했다.“거기 너, 이리 와 봐.”경훈이 도윤에게 알렸다.“보스, 할머님이세요.”“온 지 여러 날 되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할머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상대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았으니 숨기는 것보다는 솔직해지는 게 낫겠지, 진심이야말로 가장
조원주의 조롱에 도윤은 고개를 숙였고 무무는 자신도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봤다.그전에는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몰랐고, 가끔 지아에게 아버지에 관해 물어보면 지아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리며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이번에 도윤을 만나고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지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생각과는 달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해 보였다.“할머님, 저를 욕하셔도 됩니다. 저는 과거에 그 사람한테 상처 주는 짓을 많이 했어요. 사람도 아닌 나쁜 놈이죠. 하지만 그 여자를 향한 제 사랑은 의심하지 마세요. 몇 년 동안 제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요.”주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말 참 웃기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정말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칠 수 있죠, 이건 모순 아닌가요?”도윤은 멀리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고 상대는 도윤의 곁에 손을 지탱한 채 가까운 거리에서 분명하게 말했다.“내가 봤을 때 선생님은 위선자예요. 그건 사랑이 아니죠. 저였으면 사랑한다면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고 단 한 순간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도윤은 주원이 지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들이 영원히 못 박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과거에 지아를 정말 사랑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가 한 나쁜 일만 기억할 것이다.이런 질문에서 어떻게 대답하든 그는 질 게 분명했다.침묵하는 도윤을 보며 주원이 말을 이어갔다.“선생님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말 몇 마디로 과거에 했던 일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테이블 아래로 내린 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에 그 말이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다만 얼굴에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고 다소 경계하듯 주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당신 누구죠, 저를 아세요?”귓가에 주원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쪽 명성은 알고 싶지 않아도 다 들리던데요.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