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훈이 그런 도윤의 심경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추었다.“보스, 명령하세요.”도윤은 몇 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지아와 주원 사이에 정말 뭐가 있다면 지금 막기엔 너무 늦었다.반대로 추리해 보면 두 사람이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주원은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면 자신이 미워하는 것보다 그의 증오가 더 클 것이다.그러니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둘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도윤은 생각을 정리한 뒤 경훈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명령했고 경훈은 조금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이건 너무 위험해요.”“내 말대로 해, 위험이 없으면 상대를 잡을 수 없어.”경훈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누구를 잡는단 말이지?도윤이 움직이지 않고 방 안에 머무는 동안 경훈은 도윤이 말한 대로 마당 전체와 주변 세팅을 준비했다.말하기 복잡해 도윤의 손에 간략한 지도를 그려주기도 했다.다른 사람 같으면 하늘의 별 따기였겠지만 도윤처럼 똑똑한 사람은 머릿속에 지도를 바로 떠올렸다.도윤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방 안의 물건들의 위치와 높이를 대략 파악했다.“알았어, 네가 안내해 줘.”경훈은 도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다녔다.경훈의 입을 통해 도윤은 지아가 옆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마침 밤이 막 깃든 마당에서는 조원주가 약을 짓고 있었고, 절구질 소리와 무무에게 약의 성능을 설명하는 소리만 들렸다.지아와 주원은 외출했다. 밤이 되기 바쁘게 바로 시작한 건 아니겠지?도윤의 마음은 고양이가 할퀴는 것 같았지만 얼굴은 담담한 척해야 했다.천천히 움직이는 그를 본 조원주가 먼저 말했다.“거기 너, 이리 와 봐.”경훈이 도윤에게 알렸다.“보스, 할머님이세요.”“온 지 여러 날 되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할머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상대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았으니 숨기는 것보다는 솔직해지는 게 낫겠지, 진심이야말로 가장
조원주의 조롱에 도윤은 고개를 숙였고 무무는 자신도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봤다.그전에는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몰랐고, 가끔 지아에게 아버지에 관해 물어보면 지아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리며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이번에 도윤을 만나고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지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생각과는 달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해 보였다.“할머님, 저를 욕하셔도 됩니다. 저는 과거에 그 사람한테 상처 주는 짓을 많이 했어요. 사람도 아닌 나쁜 놈이죠. 하지만 그 여자를 향한 제 사랑은 의심하지 마세요. 몇 년 동안 제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요.”주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말 참 웃기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정말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칠 수 있죠, 이건 모순 아닌가요?”도윤은 멀리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고 상대는 도윤의 곁에 손을 지탱한 채 가까운 거리에서 분명하게 말했다.“내가 봤을 때 선생님은 위선자예요. 그건 사랑이 아니죠. 저였으면 사랑한다면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고 단 한 순간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도윤은 주원이 지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들이 영원히 못 박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과거에 지아를 정말 사랑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가 한 나쁜 일만 기억할 것이다.이런 질문에서 어떻게 대답하든 그는 질 게 분명했다.침묵하는 도윤을 보며 주원이 말을 이어갔다.“선생님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말 몇 마디로 과거에 했던 일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테이블 아래로 내린 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에 그 말이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다만 얼굴에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고 다소 경계하듯 주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당신 누구죠, 저를 아세요?”귓가에 주원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쪽 명성은 알고 싶지 않아도 다 들리던데요.
콩이 얼굴에 튀자 도윤은 화가 나서 콩을 바구니에 던졌다.“할머님, 전 못 해요.”“젊은이가 왜 이렇게 성급해. 귀한 도련님이라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 건 알지만 잘 생각해. 눈은 며칠 만에 금방 낫는 게 아니야, 미리 앞 못 보는 생활에 적응을 해야지.”도윤은 당황했다. 조원주는 자신을 단련시키려는 것이었다.지아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때 도윤은 재회의 기쁨에 취해 눈은 뒷전이었다.그러다 할머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할머님, 이 눈은 언제쯤 나을 수 있을까요?”“장담 못 해. 빠르면 서너 달, 늦으면 1년 반 넘게 걸려. 잔류 독이 다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병원에 가서 기계로 검사해야지. 눈병은 쉽게 낫지 않아, 빠른 치료가 어렵지.”도윤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전엔 목숨만 건지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젠 머릿속에 온통 지아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지아를 어떻게 되찾아온단 말인가.도윤의 불안한 표정을 보자 작은 손이 위로라도 하듯 그의 손등을 살며시 두드렸다.그 작은 손에는 도윤의 긴장을 서서히 진정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도윤은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아 완두콩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무무는 지아가 만들어준 피리를 꺼내 다리 위에 앉아 조용히 연주했다.울려 퍼지는 ‘스카이캐슬’ 노래가 미묘하고 감미로웠다.고요한 밤, 조용히 쏟아지는 달빛, 그 거룩한 빛이 모든 것을 정화하며 도윤의 감정을 서서히 진정시켰다.도윤은 완두콩 껍질을 벗기는 데 집중하며 감각으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이름 모를 곤충들이 울어대고, 멀리서 새들이 날갯짓을 하고, 나뭇가지에서 부엉이가 소리를 낸다.조용하고 황량했던 도윤의 세상이 갑자기 활기차게 변했다.그는 지아에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주위를 소홀히 했었다.완두콩을 한 바구니 끝내자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켰다.밤 문화가 없는 작은 마을에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사람들이라 다들 이미 꿈나라에 들어갔을 것이다.도윤도 육
끼익-문이 열렸다.도윤은 그 순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머릿속으로 지아와 주원이 붙어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몇 년 전 배 위에서 주원은 약기운을 빌려 지아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었다.이미 이혼한 지 오래인데 주원과 정말로 그런 짓을 한들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이 순간 도윤은 최악의 장면을 보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향신료가 아닌 샴푸나 바디워시 냄새 같은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지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왜 왔어요?”도윤은 순간 다소 당황했다. 왜 왔을까,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으려고?그는 가슴 속 복잡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며 애써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아래에서 아프다고 하는 소리를 들리길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싶어서 왔어요.”“전...”지아가 설명하려는데 주원이 피식 웃었다.“이도윤 씨는 모든 여자에게 그렇게 다정하신가 봐요? 여자가 방에서 아프다고 하는 게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척하는 건가요?”“저 여자는 내 주치의라 내 목숨과도 상관이 있죠. 저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없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는 그쪽은 제가 뭘 했다고 저한테 무례하게 구는 겁니까?”“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죠”지아는 주원과 도윤의 마찰로 인해 도윤이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주원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거즈로 눈을 가린 도윤을 보니 그토록 당당하던 사람이 이젠 지나가던 개한테도 당할 것 같이 나약해 보였다.지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전 괜찮아요, 동생이 제 머리를 빗겨준 거예요.”당시 항암치료를 받은 후 머리카락이 아주 천천히 자랐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자로서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을까 봐 주원은 지아를 위한 샴푸를 만들고 마사지 기술도 배워왔다.아프긴 해도 효과가 좋
지아는 머리를 깨끗하게 씻고 창문에 기대어 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주원에게 거짓말을 했다.3년 반이나 지났으니 이미 오래전에 관계를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도윤이 독살당해 곧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너무 당황스럽고 무력했다.모든 걸 제쳐놓고 서둘러 돌아온 것도 아이들보다도 마음속 깊이 도윤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이런 감정이 생겨선 안 되는데.괜한 생각하지 않게 가능한 한 빨리 도윤을 치료하고 보내야 할 것 같았다.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렸다. 무무가 도윤의 방 테라스에 앉아 연주하고 있었다. 아이는 도윤을 저렇게 따르는데 도윤이 친아빠가 아니란 사실을 어떻게 털어놓아야 하나.만약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사실을 안다면 도윤이 무무에게 손대지는 않을까?3년이 지난 후 도윤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지아는 알 수 없었다.무무는 몇 곡을 연주한 뒤 연주를 멈추고 도윤의 손을 토닥이더니 일찍 자야 한다는 듯 침대로 이끌었다.도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착하지, 너 같은 아이를 둔 아빠는 분명 자랑스러울 거야.”무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도윤은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 느껴졌다. 무무가 뽀뽀해 줬다는 걸 알아차리곤 무척 기뻤다.“무무야, 내가 좋아?”딸랑-도윤은 이제 아이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기뻐하며 말했다.“나도 무무가 좋아.”아빠가 날 좋아한다고?무무는 무척 기뻤다.아이는 목에 걸고 있던 오색 비단실로 만든 구슬 목걸이를 벗어 도윤의 손목에 묶어주었다.“나한테 주는 거야?”딸랑-“고마워.”도윤은 딸이 선물한 특별한 구슬 목걸이를 어루만졌다.“꼭 소중히 간직할게.”무무는 기쁜 마음으로 도윤의 방을 나와 지아에게 돌아갔고, 지아가 자신의 옆을 툭툭 치자 새끼 고양이처럼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무무는 지아의 손바닥에 ‘아빠’ 두 글자를 썼다.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한 지아는 처음으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무무에게 언니 오빠와 너는 아빠가 다르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지아는 누군가를 쫓는 것 같았다.도윤은 난간을 붙잡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와 소리를 따라 쫓아갔다.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도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일어나 계속 달렸다.마치 일부러 그를 유인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계속 일정한 거리에서 들렸다.지아의 안위가 걱정된 도윤은 지아의 이름을 불렀다.“지아야, 어딨어? 무슨 일이야?”꿈에서 깨어난 지아는 도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꿈인가?왠지 모르게 불안했다.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직접 나가 봐야 마음이 놓이겠다 싶어 다시 일어났다.지아는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에서 내려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도윤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이 늦은 시간에 도윤은 왜 문을 열고 있는 걸까?지아는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고, 방에는 촛불의 희미한 불빛만 있을 뿐 이불이 젖혀진 침대에는 도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이도윤 씨?”지아가 도윤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불안감이 마음속으로 거세게 퍼져나갔다.앞이 보이지 않는 도윤이 마구 뛰어다닐 리도 없고, 자신이 분명 주위에 독극물이 많다고 경고했는데 대체 어디 간 걸까?지아는 아래층을 돌아다녔지만 도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마을에는 감시 카메라는커녕 휴대폰도 없었다.뒷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보니 경훈이었다.“이도윤 씨 지키지 않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지아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물었다.“할머님이 농사일 좀 하라고 하셔서요. 늦은 시간이라 보스는 이미 잠드셨어요.”지아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늘 이렇게 단순했던 남자는 과거 자신이 미연과 이어주려 했지만 매일 붙어있어도 미연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지아는 너무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그러니 평생 총각으로 살죠!”“선생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에요?”“그쪽 보스가 실종됐어요.”경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도 안 돼요. 앞이 안 보이는데 어디로 가요
경훈은 등골이 오싹했다. 평소 조원주와 얘기를 나눌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이곳에는 총 마흔여덟 종의 뱀이 있는데 그중 서른 이상이 독사고, 한번 물면 어떤 약도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다.도윤이 앞이 안 보이는데 넘어지기라도 한다면?지아와 경훈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앞쪽으로 달려갔다.“보스, 멈춰요!”경훈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조용한 산에서 도윤이 분명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도윤의 슬리퍼가 발견되었고 이따금 뜨끈한 피 몇 방울이 보였다.지아는 도윤이 그렇게 많이 넘어졌는데도 왜 계속 앞으로 달려가는지 궁금했다.위험하단 걸 모르나?아니, 도윤은 분명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에 계속 달리는 것이다.“빨리 가요!”...자고 있는 무무의 곁으로 무언가 팔을 건드렸다.졸린 눈을 비비고 보니 평소 함께 놀던 새끼 사슴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침대에 내려앉아 구구 울어댔고 고개를 돌리자 지아는 보이지 않았다.뭔가 잘못되었다.무무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사슴을 따라 뛰어갔다.도윤의 발걸음이 서서히 멈췄고 탁 트인 산 너머로 경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지아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고 위험에 처했는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살려줘요, 살려줘요...”“지아야!”도윤이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뱀이 신호를 보내는 소리가 들렸고, 소리가 들쑥날쑥한 걸 보아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다름 아닌 주원이었다.그는 몇 번이나 넘어져 상처투성이인 도윤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고 눈에서 독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도윤은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지금보다 도윤을 죽일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주원은 조용히 들고 있던 지아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기를 아래로 던졌다.그 아래에는 뱀 동굴이 있었고, 수천 마리의 뱀이 무리 지어 얽히고설킨 모습
지아는 속도를 다그쳤다. 뱀굴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들도 빠져나오기 힘든 곳이었다.뱀굴에 빠지면 분명 뱀에게 잡아먹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비릿한 뱀 냄새와 함께 찬바람이 불자 지아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지아는 마치 사냥하는 맹수처럼 최대한 열심히 달릴 뿐이었다.지나가는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지아는 겁에 질렸다.쿵 소리와 함께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닥에 쓰러졌고, 경훈은 서둘러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괜찮아요?”그런데 지아의 온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빨리 가요! 바로 앞에 뱀굴이 있어요!”지아는 까진 무릎도 개의치 않고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뛰어갔다.이 순간 지아에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직 도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절대 그가 죽어서는 안 된다.온 힘을 다해 달려갔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뱀굴로 뛰어드는 도윤의 모습만 보였다.수천 마리의 독사들 속에서 지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살려줘요, 살려줘요...”도윤이 목숨도 뒤로한 채 죽기 살기로 달리며 뱀굴에 뛰어든 이유였다.이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안 돼!”지아의 처절한 목소리도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고 도윤의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단지 앞을 보지 못할 뿐 바보가 아닌데, 분명 눈앞에 뭐가 있는지 알 텐데도 도윤은 뒷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뛰어들었다.지아도 이성을 잃고 도윤을 쫓아가려 했지만 주원이 그녀를 붙잡아 품에 꽉 가둔 채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늦었어, 이제 다 끝났어.”지아는 그제야 소름 끼치는 소년이 절대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배에서 일부러 약을 먹고도 순진한 척, 좋은 사람인 척 자신의 곁에 있었고, 나중에는 그녀의 아이까지 없애려고 했다.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주원이었기에 잊으려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오직 자기밖에 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