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도 지아 쪽을 바라보았다. 눈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볼 수도, 올 수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지아는 속으로 당황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 만든 사탕을 바구니에 담았다.“엄마는 할머님께 드리러 갈 테니 네가 여기 남아서 지켜보고 있을래?”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지아가 떠나고 무무는 도윤의 곁에 앉아 새끼 사슴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가끔 새끼 사슴의 몸이 도윤과 부딪히는 걸 보아 도윤은 새끼 사슴과 아이가 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기뻐하던 도윤은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이 동네에는 산사나무가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열매를 가져왔을까?가능성은 단 한 가지, 누군가 밖에서 가져온 것이다.전효!갑자기 도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떠올랐다.지아는 완성한 사탕 일부를 도윤에게도 나눠주었다.몇 년이 지났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아무도 모른다!자신이 없는 수천 번의 밤낮 동안 지아의 옆자리는 다른 남자가 채운 것이었다.도윤은 왠지 당혹스러웠고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무무가 손을 잡고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왜 그래요?”도윤은 직접 물을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말했다.“무무야, 나 여기 있는 게 좀 심심한데 산책 좀 시켜줄래?”무무는 이미 하루치 약을 다 먹은 도윤을 보며 조금 걷는 것도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는 도윤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끌었다.도윤은 자신이 딸과 이런 식으로 소통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렇게 작은 손이 자신을 잡아주자 도윤은 매우 든든하게 느껴졌다.도윤은 혹시나 아프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무무의 손을 잡았다.이 순간 그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권력도, 어떤 지위도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손과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제 해 지는 거야?”딸랑-차분한 방울 소리는 긍정의 의미였다.“엄마는 어디 있어?”도윤이 다시 물었다.“갑자기 눈이 좀 아픈데.”무무는 역시나 지아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고
도윤은 다른 남자 밑에 누워 있는 지아를 생각만 해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쳤고 살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무무의 몸에서 나는 방울 소리가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주원은 기쁜 마음으로 무무를 향해 달려갔지만 무무 옆에 있는 남자를 보자 얼굴에 미소가 얼어붙었다.그는 도윤을 가리키며 지아에게 물었다.“누가 말한 환자야?”“응, 얘기하자면 길어.”지아는 주원에게 눈치를 주자 주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윤은 제대로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바네사, 손님 오셨어요?”주원은 피식 웃었다.“누가 손님인지 모르겠네.”도윤은 모르는 척 물었다.“선생님께선 저한테 적대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은데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지아는 차갑게 끼어들었다.“모르는 사이에요. 여긴 왜 왔어요?”무무가 손짓을 하자 지아가 도윤을 돌아보았다.“눈이 아파요?”“네, 그쪽이 가고 살짝 통증이 느껴져서 무무한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어요.”지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따라와요.”앞으로 걷던 지아는 도윤이 앞을 못 본다는 걸 깨닫고 다시 돌아와 그의 허리띠를 당기며 데리고 갔다.주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살기가 눈동자 깊숙한 곳을 휩쓸고 지나갔다.방으로 돌아온 지아가 명령했다.“앉아요.”도윤이 순순히 자리에 앉자 나무 침대가 그의 큰 덩치에 삐걱거렸다.지아는 그의 앞에 서서 눈을 감싸고 있던 거즈를 벗겨냈다.눈꺼풀에는 아직 약이 남아 있었고 지아는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냈다.“눈 떠요.”도윤은 매우 협조적이었다.“불빛이 보여요?”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 흔들었다.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 전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요.”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았다.“아직도 아파요?”“조금 아파요.”지아는 어디서 난 약인지 또 가져와 도윤의 눈에 떨어뜨리며 부드럽게 불었다.눈앞이 시원해지자 머리도 훨씬 맑아져서 눈은 물론 두통도 많이 완화되었다.다만 지아가 희미한 체온까지 느낄 수
경훈이 그런 도윤의 심경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추었다.“보스, 명령하세요.”도윤은 몇 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지아와 주원 사이에 정말 뭐가 있다면 지금 막기엔 너무 늦었다.반대로 추리해 보면 두 사람이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주원은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면 자신이 미워하는 것보다 그의 증오가 더 클 것이다.그러니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둘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도윤은 생각을 정리한 뒤 경훈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명령했고 경훈은 조금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이건 너무 위험해요.”“내 말대로 해, 위험이 없으면 상대를 잡을 수 없어.”경훈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누구를 잡는단 말이지?도윤이 움직이지 않고 방 안에 머무는 동안 경훈은 도윤이 말한 대로 마당 전체와 주변 세팅을 준비했다.말하기 복잡해 도윤의 손에 간략한 지도를 그려주기도 했다.다른 사람 같으면 하늘의 별 따기였겠지만 도윤처럼 똑똑한 사람은 머릿속에 지도를 바로 떠올렸다.도윤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방 안의 물건들의 위치와 높이를 대략 파악했다.“알았어, 네가 안내해 줘.”경훈은 도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다녔다.경훈의 입을 통해 도윤은 지아가 옆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마침 밤이 막 깃든 마당에서는 조원주가 약을 짓고 있었고, 절구질 소리와 무무에게 약의 성능을 설명하는 소리만 들렸다.지아와 주원은 외출했다. 밤이 되기 바쁘게 바로 시작한 건 아니겠지?도윤의 마음은 고양이가 할퀴는 것 같았지만 얼굴은 담담한 척해야 했다.천천히 움직이는 그를 본 조원주가 먼저 말했다.“거기 너, 이리 와 봐.”경훈이 도윤에게 알렸다.“보스, 할머님이세요.”“온 지 여러 날 되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할머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상대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았으니 숨기는 것보다는 솔직해지는 게 낫겠지, 진심이야말로 가장
조원주의 조롱에 도윤은 고개를 숙였고 무무는 자신도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봤다.그전에는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몰랐고, 가끔 지아에게 아버지에 관해 물어보면 지아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리며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이번에 도윤을 만나고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지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생각과는 달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해 보였다.“할머님, 저를 욕하셔도 됩니다. 저는 과거에 그 사람한테 상처 주는 짓을 많이 했어요. 사람도 아닌 나쁜 놈이죠. 하지만 그 여자를 향한 제 사랑은 의심하지 마세요. 몇 년 동안 제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요.”주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말 참 웃기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정말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칠 수 있죠, 이건 모순 아닌가요?”도윤은 멀리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고 상대는 도윤의 곁에 손을 지탱한 채 가까운 거리에서 분명하게 말했다.“내가 봤을 때 선생님은 위선자예요. 그건 사랑이 아니죠. 저였으면 사랑한다면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고 단 한 순간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도윤은 주원이 지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들이 영원히 못 박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과거에 지아를 정말 사랑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가 한 나쁜 일만 기억할 것이다.이런 질문에서 어떻게 대답하든 그는 질 게 분명했다.침묵하는 도윤을 보며 주원이 말을 이어갔다.“선생님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말 몇 마디로 과거에 했던 일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테이블 아래로 내린 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에 그 말이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다만 얼굴에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고 다소 경계하듯 주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당신 누구죠, 저를 아세요?”귓가에 주원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쪽 명성은 알고 싶지 않아도 다 들리던데요.
콩이 얼굴에 튀자 도윤은 화가 나서 콩을 바구니에 던졌다.“할머님, 전 못 해요.”“젊은이가 왜 이렇게 성급해. 귀한 도련님이라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 건 알지만 잘 생각해. 눈은 며칠 만에 금방 낫는 게 아니야, 미리 앞 못 보는 생활에 적응을 해야지.”도윤은 당황했다. 조원주는 자신을 단련시키려는 것이었다.지아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때 도윤은 재회의 기쁨에 취해 눈은 뒷전이었다.그러다 할머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할머님, 이 눈은 언제쯤 나을 수 있을까요?”“장담 못 해. 빠르면 서너 달, 늦으면 1년 반 넘게 걸려. 잔류 독이 다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병원에 가서 기계로 검사해야지. 눈병은 쉽게 낫지 않아, 빠른 치료가 어렵지.”도윤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전엔 목숨만 건지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젠 머릿속에 온통 지아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지아를 어떻게 되찾아온단 말인가.도윤의 불안한 표정을 보자 작은 손이 위로라도 하듯 그의 손등을 살며시 두드렸다.그 작은 손에는 도윤의 긴장을 서서히 진정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도윤은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아 완두콩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무무는 지아가 만들어준 피리를 꺼내 다리 위에 앉아 조용히 연주했다.울려 퍼지는 ‘스카이캐슬’ 노래가 미묘하고 감미로웠다.고요한 밤, 조용히 쏟아지는 달빛, 그 거룩한 빛이 모든 것을 정화하며 도윤의 감정을 서서히 진정시켰다.도윤은 완두콩 껍질을 벗기는 데 집중하며 감각으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이름 모를 곤충들이 울어대고, 멀리서 새들이 날갯짓을 하고, 나뭇가지에서 부엉이가 소리를 낸다.조용하고 황량했던 도윤의 세상이 갑자기 활기차게 변했다.그는 지아에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주위를 소홀히 했었다.완두콩을 한 바구니 끝내자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켰다.밤 문화가 없는 작은 마을에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사람들이라 다들 이미 꿈나라에 들어갔을 것이다.도윤도 육
끼익-문이 열렸다.도윤은 그 순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머릿속으로 지아와 주원이 붙어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몇 년 전 배 위에서 주원은 약기운을 빌려 지아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었다.이미 이혼한 지 오래인데 주원과 정말로 그런 짓을 한들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이 순간 도윤은 최악의 장면을 보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향신료가 아닌 샴푸나 바디워시 냄새 같은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지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왜 왔어요?”도윤은 순간 다소 당황했다. 왜 왔을까,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으려고?그는 가슴 속 복잡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며 애써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아래에서 아프다고 하는 소리를 들리길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싶어서 왔어요.”“전...”지아가 설명하려는데 주원이 피식 웃었다.“이도윤 씨는 모든 여자에게 그렇게 다정하신가 봐요? 여자가 방에서 아프다고 하는 게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척하는 건가요?”“저 여자는 내 주치의라 내 목숨과도 상관이 있죠. 저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없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는 그쪽은 제가 뭘 했다고 저한테 무례하게 구는 겁니까?”“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죠”지아는 주원과 도윤의 마찰로 인해 도윤이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주원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거즈로 눈을 가린 도윤을 보니 그토록 당당하던 사람이 이젠 지나가던 개한테도 당할 것 같이 나약해 보였다.지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전 괜찮아요, 동생이 제 머리를 빗겨준 거예요.”당시 항암치료를 받은 후 머리카락이 아주 천천히 자랐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자로서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을까 봐 주원은 지아를 위한 샴푸를 만들고 마사지 기술도 배워왔다.아프긴 해도 효과가 좋
지아는 머리를 깨끗하게 씻고 창문에 기대어 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주원에게 거짓말을 했다.3년 반이나 지났으니 이미 오래전에 관계를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도윤이 독살당해 곧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너무 당황스럽고 무력했다.모든 걸 제쳐놓고 서둘러 돌아온 것도 아이들보다도 마음속 깊이 도윤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이런 감정이 생겨선 안 되는데.괜한 생각하지 않게 가능한 한 빨리 도윤을 치료하고 보내야 할 것 같았다.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렸다. 무무가 도윤의 방 테라스에 앉아 연주하고 있었다. 아이는 도윤을 저렇게 따르는데 도윤이 친아빠가 아니란 사실을 어떻게 털어놓아야 하나.만약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사실을 안다면 도윤이 무무에게 손대지는 않을까?3년이 지난 후 도윤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지아는 알 수 없었다.무무는 몇 곡을 연주한 뒤 연주를 멈추고 도윤의 손을 토닥이더니 일찍 자야 한다는 듯 침대로 이끌었다.도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착하지, 너 같은 아이를 둔 아빠는 분명 자랑스러울 거야.”무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도윤은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 느껴졌다. 무무가 뽀뽀해 줬다는 걸 알아차리곤 무척 기뻤다.“무무야, 내가 좋아?”딸랑-도윤은 이제 아이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기뻐하며 말했다.“나도 무무가 좋아.”아빠가 날 좋아한다고?무무는 무척 기뻤다.아이는 목에 걸고 있던 오색 비단실로 만든 구슬 목걸이를 벗어 도윤의 손목에 묶어주었다.“나한테 주는 거야?”딸랑-“고마워.”도윤은 딸이 선물한 특별한 구슬 목걸이를 어루만졌다.“꼭 소중히 간직할게.”무무는 기쁜 마음으로 도윤의 방을 나와 지아에게 돌아갔고, 지아가 자신의 옆을 툭툭 치자 새끼 고양이처럼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무무는 지아의 손바닥에 ‘아빠’ 두 글자를 썼다.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한 지아는 처음으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무무에게 언니 오빠와 너는 아빠가 다르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지아는 누군가를 쫓는 것 같았다.도윤은 난간을 붙잡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와 소리를 따라 쫓아갔다.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도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일어나 계속 달렸다.마치 일부러 그를 유인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계속 일정한 거리에서 들렸다.지아의 안위가 걱정된 도윤은 지아의 이름을 불렀다.“지아야, 어딨어? 무슨 일이야?”꿈에서 깨어난 지아는 도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꿈인가?왠지 모르게 불안했다.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직접 나가 봐야 마음이 놓이겠다 싶어 다시 일어났다.지아는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에서 내려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도윤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이 늦은 시간에 도윤은 왜 문을 열고 있는 걸까?지아는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고, 방에는 촛불의 희미한 불빛만 있을 뿐 이불이 젖혀진 침대에는 도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이도윤 씨?”지아가 도윤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불안감이 마음속으로 거세게 퍼져나갔다.앞이 보이지 않는 도윤이 마구 뛰어다닐 리도 없고, 자신이 분명 주위에 독극물이 많다고 경고했는데 대체 어디 간 걸까?지아는 아래층을 돌아다녔지만 도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마을에는 감시 카메라는커녕 휴대폰도 없었다.뒷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보니 경훈이었다.“이도윤 씨 지키지 않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지아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물었다.“할머님이 농사일 좀 하라고 하셔서요. 늦은 시간이라 보스는 이미 잠드셨어요.”지아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늘 이렇게 단순했던 남자는 과거 자신이 미연과 이어주려 했지만 매일 붙어있어도 미연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지아는 너무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그러니 평생 총각으로 살죠!”“선생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에요?”“그쪽 보스가 실종됐어요.”경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도 안 돼요. 앞이 안 보이는데 어디로 가요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