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의 심장이 멈칫했고 도윤은 이렇게 덧붙였다.“이번에 그쪽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 죽었을 겁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 나으면 꼭 제대로 보답하겠습니다.”왠지 지아의 머릿속에는 영웅이 여자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이 떠올랐고, 구해준 여자들은 보통 드릴 게 없으니 자신을 바쳐서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오래전에 이혼했고 더는 서로 상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이였다.앞으로 다른 아내를 맞이할 도윤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미련이 남은 거다.학생 시절부터 한 남자만 사랑했고, 그와 함께 자식과 손주들을 거느릴 때까지 백년해로하는 미래를 수없이 상상했다.처음 결혼했을 때만 해도 눈과 마음에 도윤이 가득했는데, 언젠가 결혼 생활이 깨지고 남편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차가운 법이다.지아는 도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보답하시려고요?”“그건 당신한테 물어봐야 할 질문이겠군요, 원하는 게 뭐죠?”도윤이 되물었다.지아는 제일 먼저 지윤을 떠올렸다. 도윤이 아들의 양육원을 자신에게 넘겨줄까?“원하는 게 있으면 나중에 이 선생님께 말씀드릴 겁니다.”도윤도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말하는 억양으로 봐서 A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예요?”“바네사, 그냥 그렇게 불러요.”“A국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렇게 유창하게 말할 수 없었을 텐데, 그게 본명은 아니겠죠.”지아는 왠지 불쾌했다.“대체 왜 이렇게 자세히 물어보시는 거죠? 설마 드라마에서처럼 몸으로 은혜를 갚기라도 할 생각인가요?”“내가 결혼하고 싶어도 당신이 허락해야죠.”지아의 마음은 점점 더 불쾌해져만 갔다. 마음속에 한 사람만 있기는 무슨, 저 한심한 남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꼬드겼을지 누가 알겠나.“걱정 마요, 돼지랑 결혼하더라도 당신이랑은 안 하니까.”말을 마친 지아는 씩씩거리며 뒤돌아
지아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허리띠를 묶어주었다.“됐어요.”그런 다음 허리띠를 잡아당기며 동물 가죽 위에 눕게 했다.“잠시 쉬면서 먹고 기력 보충해요.”동굴 안에는 생필품이 꽤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지아가 자주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분명했다.도윤은 지아의 병도 이곳에서 고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아이와 함께 지냈을까?머릿속에는 너무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퍼즐은 언젠가 풀릴 테니까.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명한 방울 소리가 도윤의 귀에 들렸다.마음이 흠칫 떨렸다. 무무다!아직 무무의 생일을 알아내지 않았지만 도윤은 이미 무무를 자신의 아이로 생각하고 있었다.도윤은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고 방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다 마침내 그의 옆에서 멈췄다.작은 손이 얼굴을 쓰다듬자마자 도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무무도 내가 아빠란 걸 알고 있나?’도윤은 감히 이 아름다운 순간을 방해할 수 없었고 곧 무무는 손을 뗐다. 소리를 들으니 지아 곁으로 간 것 같았다.“배고파?”낮은 지아의 목소리는 원래의 목소리와 다소 비슷하게 들렸다.작은 아이가 손짓을 하자 지아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가서 재료 가져와. 엄마가 사탕 만들어 줄게.”방울 소리가 매우 쾌활하게 울려 퍼졌다.도윤은 갑자기 사람의 냄새가 아닌 무언가가 자신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마치 짐승이 자신의 손을 킁킁거리는 것 같았고 무슨 짐승인가 싶어 겁이 났다.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무서워하지 마요, 사슴이에요.”“여기 사슴도 있나요?”“당연하죠. 저쪽에 샘물이 있는데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많이 와요.”“사나운 짐승은 없습니까?”지아의 머릿속에는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예전에는 있었는데 사라졌어요.”그 표범이 죽은 후 모든 짐승들은 깊은 산으로 도망갔고 다시는 지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도윤은 이유를 몰랐기에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었다.동물들은 기운을 느끼기에 과거 야생
도윤도 지아 쪽을 바라보았다. 눈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볼 수도, 올 수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지아는 속으로 당황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 만든 사탕을 바구니에 담았다.“엄마는 할머님께 드리러 갈 테니 네가 여기 남아서 지켜보고 있을래?”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지아가 떠나고 무무는 도윤의 곁에 앉아 새끼 사슴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가끔 새끼 사슴의 몸이 도윤과 부딪히는 걸 보아 도윤은 새끼 사슴과 아이가 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기뻐하던 도윤은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이 동네에는 산사나무가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열매를 가져왔을까?가능성은 단 한 가지, 누군가 밖에서 가져온 것이다.전효!갑자기 도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떠올랐다.지아는 완성한 사탕 일부를 도윤에게도 나눠주었다.몇 년이 지났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아무도 모른다!자신이 없는 수천 번의 밤낮 동안 지아의 옆자리는 다른 남자가 채운 것이었다.도윤은 왠지 당혹스러웠고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무무가 손을 잡고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왜 그래요?”도윤은 직접 물을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말했다.“무무야, 나 여기 있는 게 좀 심심한데 산책 좀 시켜줄래?”무무는 이미 하루치 약을 다 먹은 도윤을 보며 조금 걷는 것도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는 도윤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끌었다.도윤은 자신이 딸과 이런 식으로 소통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렇게 작은 손이 자신을 잡아주자 도윤은 매우 든든하게 느껴졌다.도윤은 혹시나 아프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무무의 손을 잡았다.이 순간 그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권력도, 어떤 지위도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손과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제 해 지는 거야?”딸랑-차분한 방울 소리는 긍정의 의미였다.“엄마는 어디 있어?”도윤이 다시 물었다.“갑자기 눈이 좀 아픈데.”무무는 역시나 지아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고
도윤은 다른 남자 밑에 누워 있는 지아를 생각만 해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쳤고 살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무무의 몸에서 나는 방울 소리가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주원은 기쁜 마음으로 무무를 향해 달려갔지만 무무 옆에 있는 남자를 보자 얼굴에 미소가 얼어붙었다.그는 도윤을 가리키며 지아에게 물었다.“누가 말한 환자야?”“응, 얘기하자면 길어.”지아는 주원에게 눈치를 주자 주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윤은 제대로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바네사, 손님 오셨어요?”주원은 피식 웃었다.“누가 손님인지 모르겠네.”도윤은 모르는 척 물었다.“선생님께선 저한테 적대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은데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지아는 차갑게 끼어들었다.“모르는 사이에요. 여긴 왜 왔어요?”무무가 손짓을 하자 지아가 도윤을 돌아보았다.“눈이 아파요?”“네, 그쪽이 가고 살짝 통증이 느껴져서 무무한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어요.”지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따라와요.”앞으로 걷던 지아는 도윤이 앞을 못 본다는 걸 깨닫고 다시 돌아와 그의 허리띠를 당기며 데리고 갔다.주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살기가 눈동자 깊숙한 곳을 휩쓸고 지나갔다.방으로 돌아온 지아가 명령했다.“앉아요.”도윤이 순순히 자리에 앉자 나무 침대가 그의 큰 덩치에 삐걱거렸다.지아는 그의 앞에 서서 눈을 감싸고 있던 거즈를 벗겨냈다.눈꺼풀에는 아직 약이 남아 있었고 지아는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냈다.“눈 떠요.”도윤은 매우 협조적이었다.“불빛이 보여요?”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 흔들었다.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 전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요.”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았다.“아직도 아파요?”“조금 아파요.”지아는 어디서 난 약인지 또 가져와 도윤의 눈에 떨어뜨리며 부드럽게 불었다.눈앞이 시원해지자 머리도 훨씬 맑아져서 눈은 물론 두통도 많이 완화되었다.다만 지아가 희미한 체온까지 느낄 수
경훈이 그런 도윤의 심경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추었다.“보스, 명령하세요.”도윤은 몇 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지아와 주원 사이에 정말 뭐가 있다면 지금 막기엔 너무 늦었다.반대로 추리해 보면 두 사람이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주원은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면 자신이 미워하는 것보다 그의 증오가 더 클 것이다.그러니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둘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도윤은 생각을 정리한 뒤 경훈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명령했고 경훈은 조금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이건 너무 위험해요.”“내 말대로 해, 위험이 없으면 상대를 잡을 수 없어.”경훈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누구를 잡는단 말이지?도윤이 움직이지 않고 방 안에 머무는 동안 경훈은 도윤이 말한 대로 마당 전체와 주변 세팅을 준비했다.말하기 복잡해 도윤의 손에 간략한 지도를 그려주기도 했다.다른 사람 같으면 하늘의 별 따기였겠지만 도윤처럼 똑똑한 사람은 머릿속에 지도를 바로 떠올렸다.도윤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방 안의 물건들의 위치와 높이를 대략 파악했다.“알았어, 네가 안내해 줘.”경훈은 도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다녔다.경훈의 입을 통해 도윤은 지아가 옆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마침 밤이 막 깃든 마당에서는 조원주가 약을 짓고 있었고, 절구질 소리와 무무에게 약의 성능을 설명하는 소리만 들렸다.지아와 주원은 외출했다. 밤이 되기 바쁘게 바로 시작한 건 아니겠지?도윤의 마음은 고양이가 할퀴는 것 같았지만 얼굴은 담담한 척해야 했다.천천히 움직이는 그를 본 조원주가 먼저 말했다.“거기 너, 이리 와 봐.”경훈이 도윤에게 알렸다.“보스, 할머님이세요.”“온 지 여러 날 되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할머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상대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았으니 숨기는 것보다는 솔직해지는 게 낫겠지, 진심이야말로 가장
조원주의 조롱에 도윤은 고개를 숙였고 무무는 자신도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봤다.그전에는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몰랐고, 가끔 지아에게 아버지에 관해 물어보면 지아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리며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이번에 도윤을 만나고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지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생각과는 달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해 보였다.“할머님, 저를 욕하셔도 됩니다. 저는 과거에 그 사람한테 상처 주는 짓을 많이 했어요. 사람도 아닌 나쁜 놈이죠. 하지만 그 여자를 향한 제 사랑은 의심하지 마세요. 몇 년 동안 제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요.”주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말 참 웃기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정말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칠 수 있죠, 이건 모순 아닌가요?”도윤은 멀리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고 상대는 도윤의 곁에 손을 지탱한 채 가까운 거리에서 분명하게 말했다.“내가 봤을 때 선생님은 위선자예요. 그건 사랑이 아니죠. 저였으면 사랑한다면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고 단 한 순간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도윤은 주원이 지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들이 영원히 못 박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과거에 지아를 정말 사랑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가 한 나쁜 일만 기억할 것이다.이런 질문에서 어떻게 대답하든 그는 질 게 분명했다.침묵하는 도윤을 보며 주원이 말을 이어갔다.“선생님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말 몇 마디로 과거에 했던 일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테이블 아래로 내린 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에 그 말이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다만 얼굴에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고 다소 경계하듯 주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당신 누구죠, 저를 아세요?”귓가에 주원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쪽 명성은 알고 싶지 않아도 다 들리던데요.
콩이 얼굴에 튀자 도윤은 화가 나서 콩을 바구니에 던졌다.“할머님, 전 못 해요.”“젊은이가 왜 이렇게 성급해. 귀한 도련님이라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 건 알지만 잘 생각해. 눈은 며칠 만에 금방 낫는 게 아니야, 미리 앞 못 보는 생활에 적응을 해야지.”도윤은 당황했다. 조원주는 자신을 단련시키려는 것이었다.지아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때 도윤은 재회의 기쁨에 취해 눈은 뒷전이었다.그러다 할머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할머님, 이 눈은 언제쯤 나을 수 있을까요?”“장담 못 해. 빠르면 서너 달, 늦으면 1년 반 넘게 걸려. 잔류 독이 다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병원에 가서 기계로 검사해야지. 눈병은 쉽게 낫지 않아, 빠른 치료가 어렵지.”도윤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전엔 목숨만 건지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젠 머릿속에 온통 지아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지아를 어떻게 되찾아온단 말인가.도윤의 불안한 표정을 보자 작은 손이 위로라도 하듯 그의 손등을 살며시 두드렸다.그 작은 손에는 도윤의 긴장을 서서히 진정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도윤은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아 완두콩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무무는 지아가 만들어준 피리를 꺼내 다리 위에 앉아 조용히 연주했다.울려 퍼지는 ‘스카이캐슬’ 노래가 미묘하고 감미로웠다.고요한 밤, 조용히 쏟아지는 달빛, 그 거룩한 빛이 모든 것을 정화하며 도윤의 감정을 서서히 진정시켰다.도윤은 완두콩 껍질을 벗기는 데 집중하며 감각으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이름 모를 곤충들이 울어대고, 멀리서 새들이 날갯짓을 하고, 나뭇가지에서 부엉이가 소리를 낸다.조용하고 황량했던 도윤의 세상이 갑자기 활기차게 변했다.그는 지아에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주위를 소홀히 했었다.완두콩을 한 바구니 끝내자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켰다.밤 문화가 없는 작은 마을에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사람들이라 다들 이미 꿈나라에 들어갔을 것이다.도윤도 육
끼익-문이 열렸다.도윤은 그 순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머릿속으로 지아와 주원이 붙어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몇 년 전 배 위에서 주원은 약기운을 빌려 지아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었다.이미 이혼한 지 오래인데 주원과 정말로 그런 짓을 한들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이 순간 도윤은 최악의 장면을 보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향신료가 아닌 샴푸나 바디워시 냄새 같은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지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왜 왔어요?”도윤은 순간 다소 당황했다. 왜 왔을까,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으려고?그는 가슴 속 복잡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며 애써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아래에서 아프다고 하는 소리를 들리길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싶어서 왔어요.”“전...”지아가 설명하려는데 주원이 피식 웃었다.“이도윤 씨는 모든 여자에게 그렇게 다정하신가 봐요? 여자가 방에서 아프다고 하는 게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척하는 건가요?”“저 여자는 내 주치의라 내 목숨과도 상관이 있죠. 저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없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는 그쪽은 제가 뭘 했다고 저한테 무례하게 구는 겁니까?”“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죠”지아는 주원과 도윤의 마찰로 인해 도윤이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주원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거즈로 눈을 가린 도윤을 보니 그토록 당당하던 사람이 이젠 지나가던 개한테도 당할 것 같이 나약해 보였다.지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전 괜찮아요, 동생이 제 머리를 빗겨준 거예요.”당시 항암치료를 받은 후 머리카락이 아주 천천히 자랐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자로서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을까 봐 주원은 지아를 위한 샴푸를 만들고 마사지 기술도 배워왔다.아프긴 해도 효과가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