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샘물가에 엎드린 채 손을 들어 무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착하지, 엄마 좀 잘게.”무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디밭에 누워 지아의 볼에 뽀뽀를 했다.두 사람 주위에는 작은 나비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카메라가 있다면 기록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지아는 며칠 밤을 새운 탓에 너무 피곤해서 엎드리자마자 곧장 잠에 들었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지아의 하얀 얼굴은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무무도 지아를 귀찮게 하지 않고 근처에서 약초를 뜯었다.산속의 작은 동물들도 무무를 좋아했고, 자주 보러 오던 사슴은 무무 앞에 누워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들였다.참 단조롭고도 아름다운 일상이었다.도윤은 허약한 몸인 데다 문제는 시력이 회복되지 않아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다.진환은 그를 데리고 익숙한 방으로 갔다. 크지 않은 방에는 대나무로 만든 가구가 있었고 창문을 열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천천히 가. 여기 작은 테이블에 물 있어. 목마르면...”도윤은 도와주려는 미셸의 손을 뿌리쳤다.“미셸, 여기 있을 필요 없다고 했잖아. 사람 보내줄 테니 가.”“하지만 오빠, 난...”도윤은 손을 흔들며 진환과 진봉을 내보냈고 방에 두 사람만 남자 그때야 도윤이 말을 꺼냈다.“미셸, 넌 이미 결혼 적령기가 지났고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 나한테 눈길 돌리지 마. 3년 전에 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고 그 여자와의 재혼이 아니면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소지아는 이미 오빠를 떠났어. 오빠가 그동안 계속 찾아다녔다는 거 알아. 정말 오빠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면 그렇게 단호하게 떠났을까? 시간이 지나서 이미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아이까지 가졌을지도...”쾅-큰 소리와 함께 도윤이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부쉈다.“내 앞에서 지아 욕보이는 말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미셸,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할 말은 끝났어. 전에도
미셸은 순탄한 삶을 살아왔지만 유일하게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사랑이었다.도윤이 자신을 구해준 순간부터 그녀는 커서 도윤과 결혼하겠다고 맹세했다.어렸을 때부터 어디에 있든 고생해 본 적이 없는 미셸은 모두가 그녀 앞에 굽실거리고 떠받들어주고 존중해 주었다.하늘의 별과 달을 원해도 기꺼이 따다 주려 할 것이다.그런데 여자에게 뺨을 두 번이나 맞다니, 의학 좀 아는 게 대수인가?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자신의 손가락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미셸은 개울로 달려가 맑은 강물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세게 때린 탓에 얼굴이 다 부었다!오늘 맞은 두 대는 천배, 만 배로 갚아줄 것이다.미셸은 멍하니 몰두한 나머지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진봉은 갑자기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조심해.”미셸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반응하기도 전에 뱀이 입을 크게 벌리고 물 밖으로 뛰어나와 자기 다리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았다.미셸은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봉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뱀, 뱀이 있어!”미셸은 말을 더듬었다.진봉은 미셸을 공격하려던 뱀을 공격했고 피가 튀어 몇 방울이 미셸의 신발에 떨어졌다.미셸은 신분 때문에 도윤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야생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도윤과 함께 있을 때도 그녀는 피 주머니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미셸은 남들보다 타고난 신체도 없었기에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당황하며 조금도 침착하지 못했다.미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금 전의 아찔한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누나, 괜찮아?”진봉이 물었다.“아니, 안 괜찮아.”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나.미셸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진봉은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이상하네. 보통 저런 뱀은 사람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데 왜 갑자기 사나워졌지? 설마 근처에 새끼가 있나?”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떤 동물이든 새끼와 함께 있을 때는 다른
사방에 뱀이 점점 더 많아지자 진봉은 미셸을 등 뒤로 던졌고, 미셸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그녀는 버럭 화를 냈다.“뭐 하는...”“닥쳐.”진봉은 근엄한 목소리로 이를 제지하며 급히 자비를 구했다.“꼬마야, 그만 불어. 이미 잘못한 걸 알고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제발 이 뱀들을 멈추게 해 줘!”이윽고 목소리를 낮추며 미셸을 위협했다.“죽고 싶지 않다면 빨리 빌어. 안 그러면 오늘 우리 중 누구도 이 마을을 떠날 수 없어.”사사삭-뱀들의 소리가 숲속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고 미셸은 이런 장면을 처음 보는 데다 보호복도 입지 않았기에 자존심은 뒤로 하고 울면서 빌었다.“미안해, 미안해, 그만해. 내가 정말 잘못했어.”뱀이 멈추지 않자 진봉은 미셸의 높은 포니테일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몇 번 더 박았다.“꼬마야, 네가 너그럽게 용서해 줘. 네 엄마도 네가 이런다는 걸 알면 기뻐하지 않을 거야.”역시나 그 말이 끝나자 피리 소리가 멈추고 뱀들도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하지만 저마다 멀리서 똬리를 틀고 바라보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어린 무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아였다.무무가 처음 힘을 사용한 것은 두 살 때였는데, 지아가 산에 약초를 캐러 갔을 때 너무 오래 머물다 보니 몸에 바른 동물 기피제 가루 냄새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표범 한 마리가 뒤에서 지아에게 달려들었고, 지아는 재빨리 반응했지만 팔에 상처를 입었다.업혀 있던 아이 얼굴에 피가 튀자 무무는 두 눈을 크게 떴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홧김에 알아서 모든 뱀과 벌레, 쥐와 개미, 하늘의 맹수들까지 불러들였다.표범은 산 채로 물려서 결국 하얀 뼈만 남았다.지아는 표범보다 자신의 딸이 더 무서웠다.지금도 무무는 당시 괴물을 보는 듯한 지아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래도 몇 초 만에 다시 자신을 안아주며 괜찮다고 안심시켰지만 무무는 여전히 그 눈빛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그렇다, 엄마는 자신이 능력을 마음대로 쓰는 걸 원하지 않
“그랬지, 하지만 그건 미셸이 사과하지 않았을 때 얘기고 이미 사과했잖아.”진환은 고개를 저었다.“그때 미셸이 진심으로 사과한 것 같아?”“아니겠지. 만약 정말 바네사가 그랬다면 우린 어떡해?”진환은 한숨을 쉬었다.“방울도 단 사람이 풀어야지. 이건 미셸이 직접 사과를 하고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진환이 방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몸이 약해서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진환은 들어올 때마다 미리 인사를 건넸다.“보스, 저예요.”“알아.”도윤은 진환이 생각하는 것만큼 연약하지 않아서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오늘은 좀 어때요?”도윤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렸다.“안 좋아, 두통이 심해.”도윤의 얼굴에 있던 자국이 많이 옅어진 걸 보면 독소가 점점 줄어들고 활력이 넘쳐나야 하는데 왜 저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걸까?“잠깐만요, 바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응.”진환은 미셸 일은 뒤로 하고 약방으로 달려갔다.이때 지아는 약을 달이기 위해 불을 지키며 의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한의학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서의학에도 능통해서 본인이 직접 배합해 병을 치료하는 독특한 방법도 가지고 있었다.서둘러 달려오는 진환의 얼굴을 보니 분명 도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왜 그래요?”지아는 아무렇지 않게 책갈피를 놓고 일어났다.“보스한테 문제가 생겼어요, 한번 봐주세요.”말하는 동안 지아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네, 저 대신 불 좀 봐주시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자신의 영역이긴 하지만 지아는 그래도 혹시나 사고가 날까 봐 두려웠다. 도윤의 독이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고 누군가 약을 바꾸면 사람이 쉽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알겠어요.”지아는 발걸음을 가볍게 내디디며 집 안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바네사?”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도윤은 경계하며 먼저 물었다.“네, 저예요.”지아가 희미한 약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도윤의 표정이 미
도윤은 그날 지아에 대한 사소한 기억까지 떠올렸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눈앞에 있는 여자가 바로 지아였다!그 생각에 도윤의 피가 흥분으로 끓어올랐다.지아는 청진기로 도윤의 심장 박동을 살피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지?”지아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의자에 앉아 도윤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맥을 잴 테니까 평소처럼 호흡해요.”지아는 이 순간 도윤의 머릿속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러면서 모든 상황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왜 그 유명한 의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돕기 위해 제때 도착했고, 사흘 밤낮을 꼬박 새워 손수 약을 만들어 주었을까.자신이 안았을 때 짧게 내던 앓는 소리는 분명 지아의 목소리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그날 꿨던 꿈은 아마도 자신이 지아의 진찰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아는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일 테다.도윤의 머릿속에 어린 소녀의 어렴풋한 윤곽이 떠올랐다.아이가 아직 세 살도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설마...도윤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그날 밤 그는 배에서 지아의 약기운을 해결해 주고 A시로 데려갔다. 다음날 하빈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지아가 피임약을 부탁했다는 걸 알렸다.피임약이 몸에 좋지도 않고 당시 지아의 몸 상태가 안 좋은 데다, 언젠가 의사가 몸이 약해 임신이 쉽게 되지 않을 거란 말이 떠올랐던 도윤은 하빈에게 피임약 대신 비타민을 주라고 했었다.그런데 또다시 당첨이다.어쩐지 지아와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 아이 눈은 초록색일까? 자신과 지아의 눈동자는 전부 검은색인데.지아는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고 예쁜 딸까지 낳아주었다. 딸도 곧 세계적인 명의가 될 것이다.도윤은 감격스럽고 행복했다.기뻐할수록 맥박이 빨라지고 지아의 이마에 미간이 찡그려졌다.지아는 도윤을 바라보았다.“지금 마음이 흥분한 건가요?”도윤은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
예전에 한창 서로 사랑할 때 자주 손을 맞잡았었다. 사람의 외모도 가리고, 분위기도 바뀌고, 하다못해 눈빛도 연습하면 감출 수 있지만 유독 손의 크기만은 바꿀 수 없다.그렇게 수없이 잡았던 손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지아의 작은 손은 도윤의 큰 손바닥 안에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다만 손바닥이 예전처럼 평평하지 않고 굳은살이 박인 걸 보아 편히 지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지아가 격하게 손을 뿌리치자 도윤의 얼굴에 죄책감이 번쩍 떠올랐다.“미안해요, 전 부인이 생각나서 당신한테 무례한 행동을 했네요.”지아는 도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안색에 별다른 변화가 없고 눈동자도 초점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괜한 생각이겠지.“괜찮아요.”“전 왜 이런 겁니까?”“아마 약이 너무 독해서 부작용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으니 오늘부터 복용량을 줄이고 다른 약을 몇 가지 더 만들어 줄게요. 뒷산 샘터에 가서 자주 몸을 담그면 좋을 거예요. 우선 약식을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거 먹고 잠시 후에 다시 맥을 재 보죠.”“감사합니다.”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도윤은 한눈에 봐도 무척 약해 보였다.지아는 얼른 뒷방으로 가서 닭을 잡아오고, 버섯과 약재를 딴 다음 닭을 깨끗이 손질하고 재료들과 함께 솥에서 끓여 죽을 만들었다.지금 도윤의 몸은 영양이 필요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보충해서도 안 되니 비율을 잘 맞춰야 했다.도윤은 지아가 가자마자 진환을 불렀다.“보스, 부르셨어요? 아직 약 드실 때는 아닌데.”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문 닫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들어와.”“네.”진환은 진봉보다 더 믿음직스러웠고 일을 마친 그가 도윤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됐어요, 보스. 무슨 일이에요?”도윤은 귓속말로 작게 말했다.“무무가 몇 살인지 정확히 알고 싶으니까 가서 정보를 좀 알아봐.”“갑자기 무무는 왜요?”도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키는 대로 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조용히 움직여야 해.”“네.”진환은 조금 이상
지아가 손가락을 잡아 확인해 보니 손가락 끝이 길게 베인 것을 발견했다.“괜찮아요, 전 늘 다쳐서 이건 작은 상처일 뿐이에요.”도윤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손을 빼냈다.“잠깐 기다려요.”지아는 서둘러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지혈했다.“됐어요, 앞으로 이틀 동안은 물 닿지 않게 해요. 내가 부축해 줄게요.”“아니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도윤은 지아를 밀어내고 힘없는 몸을 스스로 끌어올렸다.비록 지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똑똑한 지아는 조금만 방심해도 알아차릴 수 있기에 도윤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일부러 모르는 척 거리를 두었다.지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말했다.“여기선 남녀가 아니라 의사와 환자예요. 계속 저와 거리를 두면 그쪽 독 저도 상관 안 해요.”도윤은 고개를 숙였다.“미안합니다.”지아는 아직 남아있는 삼계탕을 건넸다.“빨리 낫고 싶으면 나한테 협조하세요.”“성가시게 굴어 미안합니다.”도윤은 다시 사과했다.지아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도윤을 바라봤다. 늘 사람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이고 강한 그가 언제 이럴 때가 있었나?지아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괜찮아요, 이해하니까 우선 닭백숙 먼저 먹어요. 오래 끓였으니까.”말을 마친 지아는 당황했다. 마지막 말은 할 필요가 없는데, 괜히 도윤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뼛속 깊이 새겨진 습관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빨리 낫게 하려고 약초를 좀 넣었어요.”지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고마워요.”지아는 도윤에게 한 모금씩 먹여주었고,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가 없었지만 분위기는 다정했다.지아는 떠나던 날 평생 도윤을 피해 다니며 이생에서 더는 그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가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 적은 있어도 이런 식의 재회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도윤은 빨리 낫기 위해서인지 차갑던 사람이 얌전한 아이가 된 것 같았다.도윤은 애써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그동안 도윤은 미셸을 어린 동생으로 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녀를 돌봐주었고, 당시 구해준 것도 얼떨결에 벌어진 일인데 그로 인해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과거 도윤이 작전을 나갈 때마다 미셸은 꼭 같이 가겠다고 고집부렸다. 그때는 어리고 진급을 위해 훈련하려는 줄 알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수혈해 줄 수도 있으니 데리고 다녔었다.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 대한 애정이 더 분명해지자 도윤은 미셸에게 결혼했다는 걸 알렸다.겨우 몇 년 동안 잠잠하다가 자신의 이혼 소식이 들끓자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도윤이 아무리 거절해도 미셸은 계속해서 달라붙었다.도윤은 이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스승의 체면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었다.진환은 서둘러 말했다.“보스, 이렇게 아픈데 치료도 안 하고 돌려보내면 윗사람들한테 한 소리 들을 테고, 그건 보스의 평판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요...”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본인이 자초한 거잖아. 됐어, 신경 쓰지 마.”일어나서 나가려던 도윤이 문 앞에서 문틀에 걸려 넘어질 뻔한 순간, 그를 제때 붙잡은 것은 지아였다.“오두막집은 큰 별장과는 달라서 익숙하지 않으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요.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장례를 치러줘야 하잖아요.”“미안합니다.”지아는 도윤의 손을 잡고 길을 안내했다.“그래도 눈먼 사람한테 화내지는 않아요. 천천히 내려와요.”진환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윤이 부탁한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하자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고 지아가 그를 다시 바라봤을 때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착각이었을까?진봉은 여전히 울부짖었다.“선생님, 저 여자한테 큰일이 생기면 제가 죽습니다! 전 아직 어리고 아내도 얻지 못했어요.”지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며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보아하니 미셸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고, 그녀가 다치면 도윤에게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