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도윤을 말문이 막히게 했다.그렇다. 자신이 그녀에게 그토록 많은 상처를 주었는데, 어떻게 감히 마음을 돌려 재결합 하기를 바랄 수 있겠나.전부 헛된 꿈이었다.도윤이 침묵하자 지아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미안해요. 내가 좀 이성을 잃었죠.”“아니요. 전남편 같은 사람은 백번 죽어도 아가씨의 상처를 보상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그냥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지 않고 이대로 늙어 죽었으면 좋겠어요.”도윤은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알겠어요. 이제 그 사람 몰래 A시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네. 그래서 전에 아저씨를 따라 몰래 돌아가려 했는데 해적을 만나 어쩔 수 없게 됐어요. 이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죠.”“걱정 말고 이 문제는 저한테 맡겨요.”단지 그에게 해결책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려던 지아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정말 그럴 수 있어요?”“오랜 세월 여러 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다 보니 차마 말 못 할 부분까지 알게 되더라고요.”도윤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저를 믿어도 돼요.”마주 보는 두 눈에서 지아는 도윤의 진지함을 느꼈다.렌즈를 껴서 원래의 동공 색을 덮은 탓에 지아의 눈에 그는 노란 눈동자였다.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지아의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도윤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리는데, 경박함 대신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이었다.꼭 중세기 기사 같았다.“절대 배신하지 않을게요.”그것은 마치 주종 관계 이상의 다짐 같았다.당황한 지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무슨 뜻일까?’지아가 추측하기도 전에 도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준비할 테니 아마 며칠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지아는 그의 손길이 닿은 곳과 뺨이 어렴풋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고백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예전이었다면 지아도 자신감을 가졌을
그런 방법이어야만 강욱의 이미지에 더 부합하고 지아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 같았다.“그 배는 안전한가요?”“친구랑 미리 얘기했습니다. 우린 방에만 있고 그 사람들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돼요. 배에서 그 어떤 행위에도 참여하지 않고 그저 배만 타는 겁니다.”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배를 타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돌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좋아요.”“걱정하지 마요, 아가씨. 내가 지켜줄 테니까.”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한 신뢰가 차츰 깊어졌다.섬에서 마지막 3일을 보내고 도윤은 지아를 위해 가발과 가면을 준비했다.“아가씨, 배에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의심을 살까 봐 걱정이니까 부부인 척하는 게 좋겠어요. 소망 아가씨는 어쩔 수 없죠.”도윤이는 잠시 머뭇거렸다.“저런 배에 일반 가정의 아이들은 없을 텐데... 화물이면 모를까.”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지고 구석진 곳은 더럽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지아가 이마를 찡그렸다.“알아서 준비해요.”출발 당일, 두 사람은 요트를 타고 거대한 호화 유람선으로 향했다.소망이는 캐리어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지아는 긴 머리 가발을 쓴 채 도윤과 함께 멋지게 차려입고 가면을 썼다.도중에 몇 명의 승객과 마주쳤는데, 가면 속 감춰진 두 눈으로 지아의 몸을 물건 살피듯 훑어보았다.가면으로 얼굴만 가릴 수 있을 뿐 인간성까지 감춰지지 않았다.지아는 당연히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노려보려는 순간, 갑자기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며 그대로 도윤의 단단한 품에 안겼다.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지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실례할게요.”지아는 그가 자신을 위해 이러는 걸 알았다. 상대에게 임자가 있다는 걸 알리는 행동이었다.단순하고 거친 방법에 상대는 흥미를 잃은 듯 눈을 돌렸다.그 와중에 몇몇 뻔뻔한 사람들이 다가와 음흉한 눈빛으로 지아를 훑어보며 말했다.“어이 형님, 오늘 여럿이
그 남자는 냄새 나는 양말을 입에 문 채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자극적인 걸 찾아 배에 올랐던 그는 마침 여자의 몸매가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이라 제안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어차피 배에 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러운 놈들인데 뭣 하러 고결하게 구는 걸까.도윤이 입에 물었던 양말을 빼내자 그는 황급히 애원했다.“형님, 그냥 농담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흥분하십니까, 안 하면 그만이잖아요?”“허.”도윤은 차갑게 웃으며 그의 가면을 벗었다. “너랑 놀아줄게.”가면은 그들의 정체를 가리는 것이었고, 가면을 벗기는 순간 그들은 발가벗겨져 길거리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았다.도윤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A시에서 아주 유명한 지역 사업가였다.언론에서는 오랫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식들도 하나같이 성공했다.하지만 성공한 남자가 뒤에서 이런 추잡한 짓을 하는 게 역겨웠다.“내 가면! 돌려주세요.”가면은 도윤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발에 짓밟혔다.그의 위선을 짓밟아 산산조각 낸 것이었다.도윤은 발을 뗐다. 인간 본성의 추악함은 진작 알고 있었고, 돈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얼마나 추잡스럽게 노는지 잘 알고 있었다.다만 그는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그런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심지어 예전에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있었다. 언론에서 좋은 사람으로 포장되어 있었기에 도윤은 나름 예의있게 대했다.남자의 본성을 알게 되자 그는 상대를 밟는 것조차 더럽게 느껴졌다.품위 있어 보이던 그의 아내도 함께 역겨워 보였다.심지어 지아에게 추근거렸던 것을 떠올리자 도윤은 차갑게 말했다.“손 잘라버려.”“네, 보스.”진봉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었다. 손에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갔다.“당신, 뭐 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진봉은 장난스럽게 웃었다.“물론이죠, 장 대표님. 그렇게 못
도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근 들어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부쩍 많아지면서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것만 빼면 진짜 아빠와는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방금 만든 거야, 먹어 봐.”지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요. 단 거 너무 많이 먹으면 충치 생겨요.”“괜찮아요, 한 조각인데요 뭘.”다정한 모습은 밖에서 보는 것과 생판 다른 사람 같았다.지아는 착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욱이 처음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당연했다. 처음부터 속내를 다 드러내는 사람은 없으니까.“다 됐어요?”“네.”도윤이 당부했다.“참 아가씨, 여기 유람선 지도예요.”지아는 배를 탈 때만 해도 유람선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보통 큰 게 아니었다.맨 밑 1층은 대형 카지노였고, 2층은 출처가 없는 온갖 종류의 골동품 보물, 약초, 무기, 심지어 장기까지 돈만 있으면 못 사는 게 없는 물건들로 가득했다.3층에는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가 입점해 있고, 4층은 세계 최고 음식이 가득한 푸드코트였다.그들이 있는 곳은 숙소 건물이었고, 맨 위층에는 부자들이 파티를 열고 불꽃놀이를 하는 거대한 인피니티 풀이 있었다.돈만 있으면 늙을 때까지 이 유람선에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지아의 시선이 2층에 향했다.“여기 약초가 많겠네요?”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약초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의사들도 있어요.”“암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말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대신 가 볼게요. 어쨌든 아가씨는 외출하지 말고 여기 있어요.”“네.”지아의 병은 줄곧 도윤에게 큰 난제였다. 종양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전이되거나 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게다가 단기간에 다시 재발하면 몸 상태가 더 이상 항암치료를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때는 특별한 약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악의를 품고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무법자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숨은 실력도 있었다.낮에는 대부분
진봉은 명품을 본 여자처럼 흥분해서 재잘댔다.“형, 저거 봐. 근접전 펼칠 때 진짜 멋있지 않아? 나 사줘. 이것도, 저것도.”“...”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진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때 도윤이 여성용 권총을 집어 들자 가게 사장이 이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안목 참 좋으시네요. 이거 요즘 새로 나온 모델인데 반동이 작아 여성이 사용하기에 적합합니다.”“이거 주세요, 그리고 이것도.”도윤은 또 숨기기 좋은 작은 휴대용 비수 하나도 골랐다.그렇게 한참 동안 고르고 난 뒤, 도윤은 약재 구역으로 향했다.그곳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마치 배추 세일 현장을 방불케 했다.국가에서 많은 약재를 엄격히 단속하고 있지만, 무법천지인 이곳에는 그저 돈과 욕심만 있을 뿐이다.돈이 많다면 제 욕심을 모두 채울 수 있으니까.오늘은 경매가 없기에 도윤은 각종 코너를 돌며 물건을 골랐다.“사장님, 뭐 사실 겁니까? 우리 여기 없는 것 빼고 다 있습니다.”그때 한 상인이 열정적으로 호객 멘트를 날렸다.물론 단속이 없어 배 위에 있는 물건은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비싸다. 하지만 희귀하기만 하다면 돈 많은 사장님들이 그깟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도윤이 한 약병을 들고 이리저리 확인하고 있을 때,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사장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정말 보는 눈이 있네요. 이게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물건인데, 밤새도록 해도 끄떡없거든요. 아무리 꼬시기 어려운 여자라도 이것만 있으면 아주 녹아내릴겁니다...”이게 그런 효과가 있는 약인지 알 리 없었던 도윤은 얼른 약을 제 자리에 내려놓고는 헛기침을 했다.“혹시 항암제는 있습니까?”“암요.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제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도윤은 눈앞의 40대 남성을 위아래로 쭉 훑어봤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 웃기 좋아하며 웃을 때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딱 봐도 간사한 면상이었다.“모릅니다.”“제가 바로 그 유명한 활사인입니다.”“아하, 저 그거 알아요.”그때 진봉이 갑자기 끼어들었다.“요,
진봉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도윤의 뒤통수를 바라봤다.‘참 안 됐네.’도윤은 애초에 백채원과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 없다. 처음부터 도윤에게 여자는 소지아뿐이었으니. ‘차라리 나처럼 여친은 없어도 욕구를 풀 상대라도 만들지.’도윤은 한 사람에게만 올인하는 스타일이라 만약 앞으로도 소지아와 재결합하지 못한다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생각할수록 불쌍하네.’“형, 우리 보스한테 성인돌이라도 사줄까? 지금 진짜 같은 게 엄청 많대. 그럼 배신한 것도 아니잖아.”“네가 그렇게 죽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을게.”진환의 한심하다는 말투에 진봉은 억울해했다.“나도 다 보스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 이렇게 지내다가 망가지면 어떡해. 안 되겠어, 형. 나랑 같이 보스한테 줄 물건 사러 가자. 이렇게 참게할 수는 없잖아.”한편, 도윤은 한참을 걸어가서야 붉게 달아올랐던 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확실히 그는 요즘 지아만 보면 충동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계속 참아왔다.‘내가 욕구불만인 게 그렇게 티 나나?’‘돌팔이가 손 한번 잡고 맥을 집어보고 알아맞힐 정도로?’도윤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아니야, 딱 봐도 사기꾼이잖아.’원하는 약재를 찾지 못하자 도윤은 지아와 아이들 먹을 음식을 사가지고 돌아갈 결심을 했다.하지만 그 돌팔이의 말 때문인지, 도윤은 왠지 몸에서 자꾸만 열기가 느껴졌다.결국 칵테일 한 잔을 시켜 천천히 음미했다. 지아 곁에 있으면서 도윤은 너무 힘들었다. 시시각각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해야 했으니.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손으로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리는 도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때, 웬 향기가 코를 간지럽혀 눈을 떠보니 바텐더가 제작한 칵테일을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손님, 이건 저희 가게에서 제일 잘나가는 ‘키스 오브 파이어’인데, 한번 드셔보세요.”‘키스 오브 파이어?’‘그냥 제일 잘나가는 거 해달라고 했는데 이름이 이럴 줄은 몰랐네.’술은 화려한 붉은 색에 스노우
뒤를 돌아보니 진봉과 진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도윤이 이렇게 안심하고 술을 마신 이유도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하필 이 순간 사라졌으니 이런 일을 당한 거다.여자는 자기의 외모와 몸매에 무척 자신 있어 했고, 저를 거절할 남자가 없다고 자신했다.하지만 도윤의 눈빛에는 욕망 대신 위압감과 한기만 맴돌았다.분명 도윤이 앉아 있고 본인이 서 있었지만, 도윤은 오히려 키리스마에서 저를 압도했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왕좌에 앉아 세상을 군림하고 있는 제왕 같았다.심지어 저를 개미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듯한 눈빛에 여자는 달갑지 않아 이 모든 걸 약효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여자는 교태를 부리며 도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여자는 자기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몸매가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지아 씨가 있으면 난 끝났어.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쳐야지.’도윤은 화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평온해지는데, 표정이 평온할수록 더 겉잡을 수 없는 분노를 감추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하지만 여자는 정작 자기가 교태를 부릴수록 도윤이 더 역겨워한다는 걸 알 리 없었다.그때, 도윤이 싸늘하게 물었다.“뭘 하고 싶은데?”겨우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원하는대로 다 맞춰줄게요.”“좋아요.”도윤은 어두운 눈빛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소원대로 해줄게요.”도윤이 동의했지만 여자는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그러다 이내 시선을 도윤의 목울대로 옮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경험상으로 봤을 때 이 남자 틀림없이 죽여줄 거야.’상대가 저 때문에 이성을 잃고 저를 탐할 걸 생각하니 여자는 피가 끓어올랐다.이윽고 혀로 입술을 살짝 핥으며 대답했다.“제 방으로 가요.”사실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풀장에 가자고 제안하고 싶었지만, 처음인 데다 어렵게 꼬신 상대가 놀라 도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도윤은 가면으로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볼 수
도윤은 자신의 키를 이용해 버튼을 손으로 가리며 지아의 손길을 막았다. 그리고 도윤은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난 괜찮으니까 아가씨는 제 걱정하지 말고 가서 소망이랑 같이 있으세요.”도윤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숨길수록 지아는 더욱 걱정했다. 분명 다쳤는데도 지아의 걱정을 덜기 위해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도윤이 불을 켜지 못하게 막자, 지아는 절박한 마음에 손을 뻗어 도윤의 몸을 만졌다. 이미 극도로 억제하고 있었기에 도윤은 미칠 것만 같았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만지지 마세요.”“그러면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아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도윤의 말을 지아는 믿지 않았다. 도윤의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정도를 봤을 때는 분명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어디를 다친 거지? 상처 어디 있는 거야?’지아는 도윤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자, 도윤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지아의 손을 잡고 단칸방 침대 쪽으로 밀쳐냈다. 두 사람이 함께 침대에 넘어지자, 지아는 도윤이 혹시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지아는 그 상황에 다른 방향으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강욱 씨, 도대체 어디를 다친 거예요? 빨리 말해봐요.”지아의 초조한 목소리가 도윤의 귀 뒤에서 퍼져 나가며 간질거리자 도윤은 움직이지 않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아가씨, 그만 물어보세요. 저는.”도윤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하자 지아는 불안해서 말했다.“이런 식으로 방치해서는 안 되니까 의사 찾으러 갈게요. 절대 도윤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게 두지 않을 거야.”그러자 도윤이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정말 나를 도와주고 싶어요?”“물론이죠, 강욱 씨가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도와줬는데, 강욱 씨가 위험에 처하면 난 반드시 도와줄 거예요.”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아무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지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도윤을 자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도 짙고 무거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곧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는 눅눅하고 묵직했다. 지아는 교외의 폐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다섯 걸음 간격으로 배치된 보초들을 보았다. ‘소시월이 이런 경비를 받다니 어떻게 보면 영광스러운 일이네.’보초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씨 가문과 부씨 가문에서도 파견되었다. 세 가문의 힘이 모여 별장을 완벽히 포위한 덕분에 파리 한 마리조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상황이었다. 차가 멈추자 진봉이 문을 열었고, 도윤은 무무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무무는 독립심이 강한 아이였지만, 도윤은 여전히 아이를 안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듯했다. “이 대표님, 사모님, 아가씨.”진봉은 차에서 내리는 세 사람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는데, 지아와 도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은 수많은 고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제야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야. 드디어 내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소시월은 좀 어때?” “예린 아가씨께서 안에 계십니다. 저희를 들어가진 못하게 하셨지만...”진봉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며 덧붙였다.“아마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밖에서도 비명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이고, 예린 아가씨께서도 워낙 가차 없는 분이셔서...”그 말에 지아는 깊이 공감했다.예린이 과거 자신에게 가했던 방식으로 시월을 다루고 있다면, 과연 시월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알고 싶군.’지아가 무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가, 엄마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아빠랑 밖에서 기다려 줄래?” 무무는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아이였지만, 지아에게 있어 무무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어두운 세상을 보게 할 순 없어.’ 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도윤의 품에서 벗어났고, 손짓으로 지아에게 말했다. “소시월의 몸에는 독벌레가 있어요.” 무무는 이전에도 지아에게 경
지아는 가족과의 상봉만으로도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임호가 이렇게 큰 선물을 준비할 줄은 몰랐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으면서 어렵게 찾은 가족이야. 나는 가족과의 정이 중요하지 재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지아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오빠들이 다가와 위로했다.“부담 갖지 마. 이건 아버지와 우리 모두의 마음이야.” 시후는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 네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네가 자라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했어.” 시하는 지아를 꼭 안으며 말했다.“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너한테는 이제 가족이 있잖아.” 지아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결국 ‘가족’이라는 한 마디였기에, 되려 오빠들을 끌어안으며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흘렸다. 지아는 자신이 이제 강해졌다고 믿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세상일이 아무리 엉망이라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부장경은 지아가 가족의 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멀찍이 서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A시에서 지내던 동안 지아는 부씨 가문과 재회했지만, 부장경은 지아에게 여전히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오늘, 소씨 가문과의 재회를 통해 그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한편, 소임호가 소씨 가문과 완전히 결별하겠다고 선언한 일은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비록 이 모든 상황은 소임호가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아내가 그 과정에서 희생될 줄은 몰랐다. 소임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경숙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심세호는 철저히 가짜 신분을 사용했기에 단서를 찾기 어려웠다.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소시월이었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시월은 폐별장에 감금되어 있었고, 소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소상현이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 사이 지아는 먼저 시월이 감금된 폐별장으로 향했다. 차
본래 악랄한 자는 더 악랄한 자가 상대해야 하는 법이었다. 시월은 자신을 예린에게 넘긴다는 말을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여자는 완전 미친 사람이야!’ ‘소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리 나를 증오한다고 해도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낄 거야. 하지만 이예린이면 말이 달라질 거라고!’ 예린은 독충에서 연구를 할 때부터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게다가 시월은 시후를 해친 데다가 예린을 속인 적도 있으니, 예린이 시월을 가만두지 않을 것은 뻔했다. 예린은 심문 전문가보다도 더 가혹할 것이었고, 예린에게 붙잡힌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고통을 겪을 게 분명했다. “안 돼요! 아빠, 오빠들, 우린 그래도 한 가족이었잖아요. 제발 이예린한테 저를 넘기지 말아주세요. 저 여자는 악마예요! 정말이라고요!” 소씨 가문 사람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시월이 이토록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곧 결정을 내렸다. 예린은 마치 유령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씩 시월에게 다가갔다. 시월은 황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긴 팔과 다리를 가진 채 온몸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를 뿜어내는 부장경에게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부장경은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하여,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아우라로 시월을 집어삼키려 했다. 부장경은 곧이어 시월을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힘껏 탁자 위로 내던졌고, 시월은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남자와 여자의 힘의 격차는 너무도 크기에, 시월은 자기 등이 아프다는 것만 느낄 뿐, 말 한 마디 할 힘조차 없었다. 부장경이 차가운 눈빛으로 시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 그게...”시월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더듬거렸는데, 바로 그때 시월의 팔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시월은 고개를 돌렸고, 예린이 어느새 주사기로 자기 팔에 약물을 주입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기 안의 모든 액체가 시월은 몸에 주입된 뒤였다. “이예린,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씨 가문 사람들은 마치 굶주린 이리 떼처럼 시월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가 시월을 증오했지만, 당장 죽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임호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눌렀다. “시월아,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독충의 모든 은신처와 거점, 그리고 그동안 조경선이 해 온 짓거리를 낱낱이 밝히고, 조경선을 여기로 끌어내는 거야.” 이것이 바로 시월이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시월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한테서 온갖 방법으로 모든 걸 빼앗아 갔으니 이제 전 빈껍데기나 다름없어요. 이제 와서 제가 말하는 말든 무슨 차이가 있죠? 결국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잖아요.” 시월은 주위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 덧붙였다.“제 손에 독충과 관련된 모든 자료와 데이터가 있어요. 만약 저를 살려준다면 여러분한테 협조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총명한 사람은 어떤 궁지에서도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시월 역시 그런 사람이었는데, 절벽 끝에 뿌리내린 한 줌의 씨앗처럼, 시월에게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위로 뻗어 나가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시월의 문제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있었고,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양심을 버렸다는 점에 있었다. 시월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어 있었다. 시하는 분노에 차서 시월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꿈 깨! 네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갈 구멍을 찾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집어 치워. 네가 스스로 모든 걸 털어놓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입을 벌리게 하고 말 거야.” 시월은 뺨을 맞아 입가에서 피가 흘렀지만, 예전처럼 울며 오빠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 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시월이라면 사람들의 연민을 사기 위해 연약한 척하고 애교를 부렸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것이었
시월은 목소리를 높였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외쳤다.“나는 너처럼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가문의 아가씨로 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어! 나 같은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발버둥 치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내가 태어난 그 가난한 산골 마을을 네가 알기나 해?”“그곳 여자들은 소랑 말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 대부분의 아이는 십 대가 되기도 전에 부모에게 팔려 나가 늙은 노총각에게 시집가고,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지. 조경선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야. 그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으면, 난 이미 죽었을 거라고!”“하지만 당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걸 가졌잖아. 손만 뻗으면 뭐든 가질 수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했지?!” 지아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며 외쳤다.“아직도 책임을 회피하고 동정을 사려는 거야?! 어린 나이에 그런 악랄한 수를 썼다는 건,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증거야! 태어난 환경이 잔혹함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될 순 없다고!” “너, 정말 네가 저지른 모든 죄를 몇 마디 말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아는 지난 2년 동안 자신이 왜 어린 나이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는지 철저히 조사했다. 짧은 시간에 암이 그 정도로 형성되려면 몹시 어려운 조건이 필요했는데, 지아는 어릴 적부터 소계훈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귀한 딸이었다.설령 소계훈 가문이 몰락하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아주 힘들었다고 해도, 그렇게 단기간에 병이 악화될 리 없었다. 결국 단 하나의 결론이 남았다.‘누군가 오래전부터 나한테 암을 유발하는 약물을 썼던 거야.” 결혼 문제로 인한 혼란은 단지 발단에 불과했다. 그때만 해도 이서가 조금만 더 일찍 검진받았다면 병을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 그 시기에 소계훈 가문이 몰락했고, 그의 치료비만으로도 생활이 빠듯했던 지아는 자신의 건강을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쓰러져 검사받고 나서야 병이 이미
시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자신이 아주 완벽하게 숨겨왔다고 생각했지만, 지아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심지어 시월의 얼굴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말이다. 지아는 시월에게 한 무더기의 성형 기록을 내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정말 끈질긴 노력을 했더라?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렇게 많은 성형을 해서 나랑 비슷한 얼굴을 만들면 뭐 해?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이고, 아무리 얼굴을 바꾼다 해도 진짜가 될 수는 없는 법인데. 마치 네 신분처럼 말이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걸 이젠 알겠니?”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그게 그렇게 중요해?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소영수 어르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만 돌지 않았으면, 나도 끝까지 속았을 거야. 평생 네 거짓말에 속아 살았을 거라고.” “소시월, 우리 소씨 가문에 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러 놓고 후회한 적은 없니?” 지아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넌 몇 번이고 나를 죽이려 했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내 배 속의 아이까지 해치려 했어.” 시언도 입을 열었다.“내 손, 시하의 다리, 그리고 시영이의 목숨까지... 그 모든 걸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시하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네가 우리 친동생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 하지만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우리 남매들은 너를 친딸, 친동생처럼 대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줬고, 넌 우리 소씨 가문에서 호강하며 자랐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악랄한 짓을 할 수 있어? 시영이 죽음도 네가 벌인 짓이지?” 시월은 담배를 비벼 끄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이죠?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죄인이 되는 법인 걸요. 난 이미 패배자가 됐다고요.” “아니, 시영이 일만큼은 명확하게 말해! 시영이는 당시 이상한 죽음을 맞이했어. 그 사건, 네가 벌인 짓 아니야?” “그래요, 내가 벌인 짓이에요. 하지만
“형님,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님은 우리 형님입니다.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해주세요.” 소재호와 소윤성이 격앙된 채 말했으나, 소임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자, 이만 돌아가거라.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소재호와 소윤성은 부장경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그저 소상현 가족만이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도 이만 가 봐.”소상현은 마음이 착잡했다.마치 자신이 패배한 것 같았고, 소임호의 회사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결국 소씨 가문 전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상현이 이겼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마음 한구석에는 기쁨이 아닌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어...’‘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고.’소상현이 원했던 건 소임호를 소씨 가문에서 몰아내고, 소임호가 절망한 채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소임호는 소씨 가문을 흔쾌히 넘기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당신,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나는...” 소상현은 본심을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또다시 가시 돋친 말이었다.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소지훈이 소상현의 팔을 살짝 당기며 만류했다. 소임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훈아, 앞으로 소씨 가문에선 네가 아버지를 잘 보살펴드려야 해. 소씨 가문은 네 할아버지께서 평생을 들여 이루어진 가문이야. 절대 그분을 실망하게 하지 않아야 해.” “큰아버지...”소지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연예계에서 위기를 넘길 때마다 도와준 사람이 소임호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정말 죄송합니다.”소임호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모두 나가봐.” 소지훈은 망설임
“정확히 말하면 소씨 가문의 숨겨진 사업 중 하나였지.” 소임호는 이 한마디로 소지훈이 모든 상황을 깨닫게 했다. 소지훈은 그동안 자신이 실력으로 연예계에서 승승장구했다고 믿어 왔으나, 훌륭한 매니저를 만난 것도, 첫 출연작이 최고 등급의 작품이었던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우연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은 소임호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 당신이...”소지훈은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 주고 보호해 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을 무시해 왔던 큰아버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지훈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허, 당신이 만성의 대표였다니, 이제서야 알게 된 나도... 정말 바보 같군요.” “지훈아, 너도 연예계에서 몇 년간 몸담았으니 그 업계의 룰을 잘 알고 있을 거야. 만성은 너한테 맡기게 된 건 내가 너를 믿기 때문이야. 이건 네 할아버지와 상의한 끝에 정한 일이기도 해.” 소지훈은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손가락으로 옷깃을 세게 쥐고 있었고, 머릿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소지훈도 소상현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세워온 가치관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안 돼, 이런 식이면 안 된다고...’소지훈이 생각하던 큰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독단적이며,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조용히 자신을 보호해 왔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소상현을 바라보았다.“도훈이는 오래전부터 제 곁에서 일을 배워 온 사람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가르쳐 키운 인재나 다름없죠. 앞으로 소씨 가문의 사업 관련 문제는 도훈이에게 넘기겠습니다. 도장, 주요 문서가 들어있는 서랍 열쇠, 금고 비밀번호 등 모든 것을 도훈이에게 위임할 테니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너...!”소상현은 입을 열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답답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소임호는
소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이게 말이 돼? 아버지께서 형님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으셨다고?’ 소상현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버지가 당신한테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을 리 없어!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그런 유언장에 동의할 수 있지? 그 유언장은 분명 가짜일 거라고!” 소임호는 담담하게 설명했다.“물론 아버지는 내게 유산을 나눠 주고 싶어 하셨지만, 내가 거절했어. 나도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재산을 모았고, 소씨 가문의 것은 탐낸 적이 없으니까. 그래, 난 소씨 가문의 것을 탐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소임호는 미리 준비해 둔 수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2조야. 아버지께서 보유하셨던 20% 지분에 대한 금액인데, 현재 시가로 따지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아버지께서 투자하신 400억에 비하면 수십 배로 늘어난 금액이야. 그동안 소씨 가문이 우리 가족에게 베풀어준 보살핌에 대한 감사의 뜻이란다.” 가볍게 내민 수표 한 장은 보이지 않는 강렬한 손바닥으로 소상현의 얼굴을 내리친 것과 같았다.소재호와 소윤성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형님, 저희도 형님이 오랜 세월 동안 소씨 가문을 지탱해 오셨다는 걸 압니다. 이 돈을 절대 받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고 해도 절대 받지 않으셨을 거고요.” “맞습니다. 형님은 어머니의 아들이니 당연히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형님은 아버지께서 가장 아끼신 자식이었잖아요. 그런데 유산을 거부한 걸로도 모자라 저희에게 주시다니요!” 소영수가 살아 있을 때도 그들이 이 돈을 받을 리는 없었지만, 지금 이 돈을 받는 것은 소임호와 소씨 가문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뜻이었다. 소임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언제나 너희를 친동생으로 생각해 왔어. 딴마음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더구나.”“상현이가 나와 우리 가족을 내쫓기 위해 이런 극단적인 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