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눈을 들어 바라보았는데,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이목구비는 미연과 아주 비슷했다.비록 닮았지만 미연은 활발하고 명랑했고, 그녀의 동생은 기질이 음울하고 차가웠다.지아의 눈빛을 감지한 소년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죄송합니다. 제 어머니는 상황을 모르고 이렇게 소란을 피운 것 같습니다.”진환은 이미 강은환에게 설명을 했기에, 그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고, 단지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숨겼던 것이다. 그러나 조미자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지아는 강은환을 바라보며 가볍게 말했다.“네가 바로 은환이구나, 네 누나가 전에 네 얘기 많이 했는데.”준수한 소년은 눈시울이 빨갰고, 안색이 초췌했다. 그는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아 절뚝거리며 걸어왔다.지아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소년은 털썩하고 지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참회했다.“저는 이 일의 경과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누나에게 누를 끼쳤고 또 아가씨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차 사고를 피했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지아는 한숨을 쉬며 진환더러 그를 일으켜 세우라고 했다.“넌 다리가 좋지 않으니 더 이상 자신을 다치게 하지마. 그들은 이미 계획을 짠 거야. 네가 만약 다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네 부모님을 겨냥했을 거야. 그러니까 넌 자책할 필요가 없어. 내가 미연이한테 빚진 거야.”강은환은 지아의 평평한 배를 주시했다. 그는 비록 여자가 아니었지만, 그 한 쌍의 쌍둥이가 그녀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이것은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지아는 다시 조미자를 바라보았다.“아주머니, 미연의 일은 정말 죄송해요. 미연이 이렇게 떠나게 돼서 저도 매우 슬프고요. 저는 아주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더
도윤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상쾌한 몸으로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는 먼저 들어가지 않고 진환에게 물었다. “상황은 어때?”진봉은 얼른 말했다.“아주 이상합니다. 사모님은 떠들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디저트까지 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중간에 경호원들의 부상에 대해 물어보셨고, 또 킬러들을 몇 명이나 잡았는지, 장민호란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아무튼 처음부터 끝까지 사모님은 무척 냉정했습니다.”“넌 어떻게 대답했는데?”“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장민호는 이미 도망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사모님도 다른 말씀 하지 않으셨고, 그저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진봉은 머리를 긁적였다.“대표님,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사모님이 이렇게 나오시니 저는 오히려 좀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냉정하셔서 등골이 다 오싹하네요.”“지아는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도윤은 지아가 자신을 따돌리고 자살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정말 깨달은 것 같았다.그가 살금살금 들어가자, 침대 위의 사람은 이미 눈을 떴다.그 깨끗한 눈빛에는 확신함이 스쳐 지나갔다.“난 네가 휴식하지 않고 다시 달려올 줄 알았어. 저쪽의 소파 좀 밀어내서 푹 쉬어.”도윤은 지아를 몇 번 더 살펴보았다.“지아야, 너 정말 괜찮은 거야?”“나한테 무슨 일이 더 있겠어? 의사 선생님의 치료에 협조해서 일찍 회복하고 싶은 뿐. 참, 내 오른손 말이야, 지금 약간의 감각이 있는 것 같아. 나한테 가장 좋은 의사 하나 찾아줘. 난 이대로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아.”이 반년 동안 지아는 비록 오른손의 치료를 멈추지 않았지만, 그녀가 임신했기에, 많은 약물과 치료 방식을 사용할 수 없었다.다행히 지아는 줄곧 침을 놓았기에, 방금 그녀는 자신의 손에 약간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것은 아마도 그녀의 엉망진창인 인생에서 유일한 좋은 소식일 것이다
“지아야, 난 지금 일부러 누구의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니야. 이것은 독충 답지가 않거든. 이예린이 만약 정말 너를 죽이려고 했다면, 너에게 독을 탈 기회를 찾아 바로 죽였을 텐데, 굳이 이런 수단을 쓸 필요가 있을까? 너도 지금 독충의 리더가 진수련이라는 거 알잖아. 정일 아저씨가 세상을 떠난 후, 진수련은 독충을 데리고 A시를 떠났어. 이예린도 몇 달 전에 이곳을 떠났고.”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블랙X를 매수한 사람은 엄청난 재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블랙 넷과 관련이 있어. 이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깔끔하면서도 마음이 독하거든. 지아야, 잘 생각해봐. 혹시 전에 누구 잘못 건드린 적이라도 있니?”지아는 고개를 저었다.“내 과거에 대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난 대학 수업도 마치지 못하고 너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으니 누구를 건드릴 수 있겠어? 그것도 쉽게 200억을 꺼내 내 목숨을 원하는 사람을.”도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난 이 사람이 네 진정한 부모님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돼. 진희 이모가 백혈병에 걸렸기 때문에 넌 진희 이모와 DNA를 검사했고, 네가 그들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지. 만약 누군가 계속 조사하려는 널 막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다면, 이제 넌 죽기만 하면 아무도 그 비밀을 모를 거야.”이것이 유일한 가능성이었다.지아는 더욱 자신의 진정한 가족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그녀는 지금 살아갈 동력이 생겼다.지아는 두 아이와 미연의 목숨까지 짊어졌으니,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아야 했다.“블랙 X는 계속 사람을 보내서 날 죽일까?”“결과를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이번에 블랙X는 100명을 동원했고,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사람들도 일반 경호원이 아니란 것을 몰랐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어. 비록 일부 사람들이 도망쳤지만,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을 잡았어. B급과 A급은 말할 것도 없고, C급도 그들에게 있어 아주 소중한 인재야. 임무가 실
지아의 눈빛은 맑지도, 냉정하지도 않았고 오직 끝없는 광기와 고집만이 들어있었다.울화산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는 특전사를 훈련시키는 비밀 기지로, 들어가면 거의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거나 전쟁 때문에 집을 잃은 아이들, 아무튼 모두 혼자였다.대부분 아주 어릴 때 훈련을 받았는데, 지아처럼 이렇게 큰 사람은 없는 게 아니지만 이 방면의 배경이 있어야 했다.만약 그녀가 이렇게 경솔하게 들어간다면 죽음뿐이었으니 도윤이 놀랄 만도 했다.“지아야, 그런 생각 하지 마. 너 전에 일반인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싶다고 했잖아. 비록 백채원이 이름을 바꿨지만, 이 병원은 이미 운영을 하기 시작했고, 국내외 최고의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리고 나는 진찰받기 불편하고 또 돈이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또 하나의 재단을 설립했는데, 지금까지 이미 백여 명이 도움을 받았어. 그중에는 농아까지 있다고. 그리고 노인들을 위해 스페셜 재단을 설립했어.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누군가가 아름답게 꾸미고 있단 말이야. 만약 네가 없다면,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진찰받을 돈이 없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지아는 눈물을 글썽였다.“내가 천하의 모든 사람을 구했다고 해도, 내 친구, 나 자신의 아이조차 구할 수 없으니 아무리 많은 사람을 구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내가 살고 있는 한, 목표는 단 한 가지 뿐, 바로 복수야.”도윤은 가볍게 탄식하며 지아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이제 그만 자.” 지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하늘에 나타난 그 한줄기의 빛을 바라보며, 눈빛에 하늘을 찌를 듯한 원한이 가득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만졌는데, 6개월 동안 익숙해진 습관을 일시에 고칠 수가 없었다.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의 뱃속에 이미 아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활발하고 해맑은 이웃이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간 것처럼, 그녀는 아직 익숙해지지
새까만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찬바람은 촛불을 흔들었고, 사람들은 더욱 슬피 울었다.지아는 자신의 얼굴에 떨어진 빗물을 만지더니 가볍게 중얼거렸다.“미연아, 네가 돌아온 거야?”두 방울의 빗물은 마침 사진 속 미연의 눈에 떨어졌고, 마치 사진 속 사람이 웃음을 머금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 보였다.지아는 묘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연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네 가족들을 잘 챙겨줄게. 앞으로 네 가족이 바로 내 가족이니까 너도 이제 안심하고 떠나. 다음 생에…… 다음 생에는 꼭 좋은 집안에 환생하고.”장례식 이후, 온 마을은 보슬보슬한 이슬에 휩싸여졌다.지아는 급히 떠나지 않고, 미연이 전에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그녀의 가족들은 도시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중요한 날을 제외하고는 평소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집안은 전체는 낡아 보이며, 마당에 서 있는 사과나무와 포도덩굴은 빗속에서 쓸쓸함을 나타냈다.지아는 포도덩굴 아래에 서 있었는데, 눈앞에 마치 귀여운 소녀가 무더운 여름 저녁에 이곳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과일을 먹으며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누나도 이런 포도를 아주 좋아했는데, 아쉽게도 앞으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겠네요.”강은환은 지아의 곁에 서서 예전의 미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지아는 매우 진지하게 들었고, 가끔 웃기도 했다.“미연이도 참, 장난꾸러기가 다름없네.”“그래요, 전 마을에서, 우리 누나가 제일 큰 장난꾸러기였어요. 하지만 누나는 성적이 아주 우수했고, 덕분에 우리 가족도 시내로 이사를 갈 수 있었던 거예요. 아빠 엄마는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리 남매를 부양했고, 난 좋을 날이 곧 다가올 줄 알았어요. 그러나 뜻밖에도…….”지아는 그의 빨개진 눈을 마주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울지 마. 앞으로 내가 바로 네 누나니까 너도 반드시 열심히 공부해서 미연이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네.”미연 일가를 공식으로 자신의 가족으로 삼기로 결정한 뒤, 날이 점점 어두
지아는 멍하니 그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한 쌍의 눈은 무척 혼탁했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고, 주름이 가득한 입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할머니, 지금 저랑 말씀하시는 거예요?”“맞아요! 맞아요!” 노인은 흥분해하며 지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손은 마른 나무껍질처럼 거칠어 지아는 아픔을 느꼈다.지아는 깜짝 놀랐다. ‘이 할머니는 뜻밖에도 나와 존댓말을 하다니. 분명히 연세가 꽤 있으시고, 또 나와 아는 사이가 아닌데, 대체 왜 이렇게 흥분해할까?’“할머니,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제가 어떻게 사람을 잘못 봤을 수가 있겠어요? 아가씨, 정말 살아생전에 아가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가씨는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변화도 없네요.”할머니는 지아를 자세히 바라보았다.“아니다, 좀 마르신 것 같네요. 그리고 이 얼굴도 좀 이상하네.”조미자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어르신, 분명히 사람을 잘못 보았을 거예요. 지아는 여태껏 우리 마을에 온 적이 없어요. 이번이 처음이라고요.”“지아?” 할머니는 지아를 에워싸고 한 바퀴 돌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음, 이상하긴 하네. 넌 우리 아가씨보다 키가 더 크고 더 말랐어. 생김새도 좀 다르고. 하지만 얼굴은 우리 아가씨와 너무 닮았잖아.”지아와 도윤은 눈을 마주쳤다.‘설마 이 할머니가 내 가족을 알고 있단 말인가?’“할머니,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 보세요, 제가 누구랑 닮은 거죠?”“환희 아가씨.”‘환희?’지아의 이런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이 할머니는 유일하게 자신의 진정한 가족을 찾을 수 있는 단서였기에 지아는 조급해하며 물었다.“환희 아가씨는 누구예요? 지금 어디에 있죠? 할머니는 또 그분과 어떻게 알고 있는 사이죠?”“환희 아가씨가 바로…….”어르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곧 머리가 텅 비었고,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이불을 건네주었다.“이보게, 자네 딸도 너무 비참하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이었지만, 이런 습관은 이미 어르신의 뼛속에 새겨진 것 같았다.“할머니,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시고 일단 들어가세요.”지아도 이 별장은 처음이라 들어서자마자 훑어보았고, 도윤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방 하나를 가리켰다.“아주머니더러 임시로 방을 하나 정리하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잠시 여기에서 지내면 돼. 매일 너와 함께 있으면, 전의 일을 더욱 빨리 기억해 낼지도 몰라.”“좋아.”“먼저 이틀 동안 적응부터 하도록 하자. 그다음 내가 사람 시켜 할머니에게 전신 검사를 하라고 할게.”“고마워.”도윤에 대한 지아의 태도는 줄곧 미적지근했고, 마치 그가 그녀의 이웃인 것 같았다.도윤은 한숨을 내쉬면서, 지금 지아와의 사이를 즉시 개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지아야, 그래도 푹 쉬어야 해. 너의 몸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오늘부터 사람을 보내 네 손을 치료하라고 할게. 아버님 쪽은 의료팀이 24시간 동안 간호하고 있으니 안심해. 별일 없을 거야.”도윤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는데, 지아는 아무런 트집도 잡지 못했다.이번에 미연의 장례식을 참가하느라 차를 오랫동안 탄 데다, 어젯밤 밤새 자지 못했기에 지아는 매우 피곤했다.그래서 그녀는 장씨 아주머니에게 몇 마디 당부한 다음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지아가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도윤은 서재에서 일했고,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오히려 사이가 아주 좋았는데, 두 사람은 뜻밖에도 신발 깔창을 만들기 시작했다.“어머, 어르신, 눈이 정말 좋네요, 여든이 넘은 사람이 바느질을 어쩜 이렇게 잘하실까.”“내가 자랑하는 게 아닌데, 난 우리 마을에서 바느질 솜씨가 가장 좋은 사람이야. 옛날에 마을 사람들의 옷도 다 내가 만들어 줬거든. 내가 도시에서 일해본 적이 있으니 유행을 잘 알 거라고 하면서. 그런데 내가 전에 일한 집안의 환희 아가씨는 얼마나 젊고 예쁜지, 아가씨가 입은 옷감도 모두 가장 좋은 거였어.”이 말을 할 때, 어르신은 무척
도윤은 눈썹을 찌푸렸다.“어느 도시인데?”“할머니도 모른다고 하셨어. 그 당시 고향에서 올라와 줄곧 떠돌아다녔고, 목적지도 없었으니 그저 다른 사람들을 따라갔다고 말했거든. 전에 있던 그 도시는 바다와 가깝다고 했어.”“60여 년 전이라면, 국내는 전쟁에 처해 있었지. 각지의 세력들은 사방으로 지반을 나누며 왕으로 사칭했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산적과 도적, 민간의 각종 조직이 있었어. 그때의 역사는 혼란스러웠기에 지금 각지의 이름조차도 고치고 또 고쳤으니 이런 단서만으로는 아마 정확하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아.”“괜찮아, 천천히 찾아봐, 할머니를 만날 수 있어서 난 이미 엄청 기쁘거든. 하늘도 우리에게 힌트를 준 셈이야. 앞으로 할머니가 더 많은 일을 떠올릴지도 모르잖아.”“지아야, 그것도 그렇지만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 그 할머니가 모시던 환희 아가씨가 너와 닮았다고 해도 우연일 수가 있어. 이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것도 정상인 데다, 그것은 60년 전의 일이었으니, 너의 가족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거든.”도윤은 지아가 너무 많은 희망을 품다 또 크게 실망을 할까 봐 두려웠다.“알겠어, 의사 선생님 불러와서 내 손 치료해 달라고 해.”지아는 자신의 손목을 만졌다. 그녀는 어떤 방식을 쓰든 손을 치료할 것이고 절대로 이렇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매번 지아의 손목을 볼 때마다, 도윤의 마음속의 자책감은 점점 많아졌다.“요즘 약물과 치료가 점점 심해졌다고 들었는데, 견딜 수 있겠어?”“응, 새로 바꾼 의사, 정말 대단해.”지아는 매일의 치료과정이 고문을 받는 것처럼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았다.손을 고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아파도 지아는 참을 수 있었다.날은 이렇게 하루하루 지나갔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도윤은 지아가 이미 철저히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푹 쉬라고 했지만, 지아는 매일 헬스방에서 아주 긴 시간을 보냈다.불과 한 달 만에 지아의 배는 이미 평탄하게 회복되어 복근까지 생겼다.오른손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