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야, 어디 가?” 도윤은 재빨리 따라갔다.서미나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이 여자 정신 나간 거 아니야?”지아는 단숨에 옆방으로 달려갔다.“대표님 좀 만나고 싶은데요.”소시후의 비서는 지아를 알고 있었기에 다른 말 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고, 지아는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소시후는 가죽 소파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 씨, 오랜만이야.”지아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대표님, 혹시 이 목걸이가 대표님 여동생의 것인가요?”“응, 내 동생의 물건이 이번 경매에 나왔다고 해서 특별히 찾아왔어. 그럼 동생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만약 찾지 못하더라도 난 그녀의 생일 선물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이것은 지아가 생각한 것과 똑같았다. 다시 말하면, 지아의 추리는 틀리지 않았고, 그 시체가 바로 소시후가 오랫동안 찾던 여동생이었다.그러나 소시후의 그 초췌한 얼굴을 보며 지아는 도무지 이 잔인한 현실을 말할 수 없었다.“지아 씨, 왜 그래?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난 이 다이아몬드 귀걸이의 주인을 본 적이 있어요.”지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 말을 듣자, 소시후는 안색이 변했다.“언제? 어디서?”“지아야, 넌 지금 임신 중인데, 왜 이렇게 빨리 걷는 거야?” 이때, 도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승리자처럼 지아를 꽉 껴안았고, 동시에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소시후를 바라보았다.전에 소시후 때문에 도윤은 지아를 오해했고, 이 사람은 지금 가시처럼 그의 마음속에 박혔다.두 사람이 정면으로 맞붙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시후도 이때 일어서서 담담하게 손을 내밀었다.“이 대표님, 오랜만이군요.”“지난번에 급하게 떠나느라 소 대표님과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내 아내를 잘 보살펴줘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이번에 내가 직접 식사 대접하는 건 어떨까요? 이따 경매 끝나면 같이 간단하게 식사 좀 하지 그래요?”
시체란 두 글자를 들었을 때, 소시후의 손은 이미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안색은 원래 나빴는데, 지금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잘못 본 건 아니고?”“네, 그 귀걸이는 아주 큰 데다 무척 예뻤거든요. 그리고 그 시체가 입고 있던 옷도 브랜드였는데, 참, 시체의 손가락에는 아주 비싼 사파이어 반지가 있었어요.”지아는 갈수록 창백해지는 소시후의 얼굴을 보며 재빨리 위로했다.“대표님, 동생분의 주얼리가 다른 사람의 손에 떨어졌을 수도 있잖아요.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어요.”하지만 소시후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를 뒤지며 지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지아는 그가 끊임없이 떨리고 있는 손가락으로 미친듯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은 결국 한 장의 사진에서 멈추었다.“이 반지를 말하는 건가.”사진 속의 반지는 무척 또렷했는데, 사파이어는 하늘처럼 맑았고 또 아주 정교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졌다.“맞아요. 그 시체는 이미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얼굴을 분별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곳을 도망쳐 나오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후에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는 바람에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방금 그 장미 목걸이를 보고서야 다시 이 일이 생각났고요.”“그곳은 어디지?” 소시후는 목소리가 떨렸고 지아의 대답을 간절히 원했다.“오래된 공업구 지역이요.”도윤은 지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그도 지금 지아가 말한 나쁜 사람이 바로 전에 그녀를 납치한 이예린이란 것을 알아차렸다.‘뜻밖에도 이런 일을 겪었다니, 그것도 시체와 함께, 지아는 그때 얼마나 무서웠을까!’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난 소 대표님에게 빚진 게 있고, 이곳은 너의 구역이니, 좀 도와줘.”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알아차린 도윤도 더 이상 쪼잔하게 질투하지 않았고 즉시 단호하게 대답했다.“좋아, 이 일은 나에게 맡겨. 내가 바로 준비하라고 할게.”이때 마침 소씨 가문의 펜던트가 경매에 나왔고,
헬리콥터는 넓은 곳에 착륙했고, 지아가 머리를 내민 순간, 뜨거운 열기가 사방팔방에서 덮쳐왔다.도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밖은 더우니까 그냥 비행기 안에서 기다려.”“그럴 필요 없어.”지아는 바로 도윤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때 소시후도 많은 사람들을 소집했고, 그는 마음속의 공포를 참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지아 씨, 어디서 그 시체를 봤지?”지아는 자신이 바다에 떨어졌을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그중 한 척의 낡은 배를 가리켰다.“바로 이 배였어요. 그때 안에는 시체가 있었지만, 이미 반년이 지난 지금, 그 시체가 아직도 거기에 있는지는 잘…….”말이 떨어지자 소시후는 성큼성큼 그 낡은 배를 향해 달려갔고, 뒤에 비서인 양지운의 권고까지 무시했다.“대표님, 서두르지 마세요. 자신의 몸부터 생각하셔야죠.”그러나 소시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오랫동안 찾았고, 이제야 겨우 단서를 얻었지만, 뜻밖에도 그녀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었다.줄곧 냉정하던 소시후는 이 순간 다리가 나른했고, 마음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귓가에 휙휙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소시후는 재빨리 그 높은 낡은 배에 올랐다.경호원들은 그보다 먼저 위에 올라갔는데, 그들은 손전등을 켜고 신속하게 허름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얼마 걷지도 못하고 그들은 공기 속에서 나는 메스꺼운 냄새를 맡았다.나무는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 곰팡이 냄새를 풍겼고, 그 속에는 또 썩은 고기의 냄새까지 섞여 있었다.양지운이 입을 열어 말했다,“대표님,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으니 일단 밖에서 잠시 기다리시죠.”그러나 소시후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손전등을 들고 더 빨리 걸어갔다.그의 심장은 지금 마구 뛰고 있었고 이마에 식은땀까지 줄줄 흘렀다.이때 이 넓은 낡은 배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찾았습니다, 여기에 있습니다.”소시후는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하마터면 땅에 쓰러질 뻔했고, 양지운
소씨 가문은 비록 국제적으로 유명한 대가족이지만, 이곳은 A시였기에, 소시후가 이 일을 처리하려면 한계를 받을 것이고, 도윤처럼 그렇게 편리하지 못할 것이다.도윤은 자원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부검을 시작하게 했다.기다리는 동안 소시후는 줄곧 한 가지 자세를 유지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지아는 레몬 물 한 잔을 그의 앞에 놓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대표님, 결과가 곧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일은 절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거예요. 그러니 일단 물부터 좀 마셔요.”소시후는 그제야 정신을 차라며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이미 잠겼다.“이 시체에 관한 디테일을 좀 더 말해줄 수 있어?”지아는 자신이 배에서 탈출한 경과를 자세히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시체와 함께 더러운 물에 잠겨 있으면서 물고기 떼가 시체의 눈을 뚫고 나왔다는 것을 말하자, 도윤과 소시후는 동시에 안색이 변했다.도윤은 지아가 그때 도망 다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과정이 이토록 험난할 줄은 몰랐다.소시후는 거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길쭉한 손가락은 자신의 무릎을 꽉 쥐었으며 고급 양복바지까지 쭈글쭈글해졌다.“대표님, 슬퍼하지 마세요.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대표님은 지금 몸도 안 좋으신데, 절대로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소시후는 고개를 저었다.“지아 씨, 나 지금 자꾸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그 시체, 아마도 시영이가 맞을 거야.”지아는 최근에 소계훈이 다시 입원한 일을 겪었기에, 가족을 잃은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될수록 소시후를 위로하려 했지만,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소시후가 먼저 말했다.“반년 전부터 나와 내 남동생들은 자주 꿈을 하나 꾸었거든. 꿈속의 시영은 물속에서 끊임없이 울며 우리에게 하소연했고, 자신을 구해달라고 했어. 우리는 이게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시영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사방을 돌아다니며 시영의 행방을 찾았던 거야.”“이 반년 동안, 시영이에게
지아는 처음으로 태동을 느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사탕을 먹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면서 이 기쁨을 도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그날 지아는 도윤에게 많은 문자와 영상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그리고 저녁에 도윤이 마침내 돌아왔을 때, 지아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현관에 달려가서 그에게 말했다.“도윤아, 오늘 아이가 움직였어. 내가 정말로 느꼈는데, 너도 빨리 만져봐.”그때 지아는 임신한지 겨우 3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배는 그렇게 선명하게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도윤은 이 말을 듣고 단지 차갑게 그녀를 힐끗 보았을 뿐, 바로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마치 찬물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먹먹해졌고, 그 순간에야 다른 사람이 자신처럼 흥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나중에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태동도 점점 뚜렷해졌지만, 지아는 더 이상 도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도윤은 그때 일찍 문을 나서거나 늦게 돌아왔고, 아니면 아예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기에 지아의 변화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그녀가 임신한 그 몇 개월 동안, 도윤은 그녀의 배를 한 번도 만진 적이 없었다.그러나 오늘 도윤은 조심스럽게 지아에게 부탁을 했고, 눈빛은 더욱 간절했다.지아는 바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때 누군가 휴게실의 문을 두드렸고, 소시후와 지아는 재빨리 문을 향해 바라보았다.양지운과 진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왔다. 양지운은 손에 서류를 들고 엄숙하게 말했다.“대표님, 법의관은 아직 부검을 하고 있지만 DNA 결과가 이미 나왔습니다. 검사하는 동안 제가 줄곧 옆에서 지켜봤기에 결과에 문제가 없을 겁니다.”소시후는 천천히 서류를 받았고, 긴장함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고요한 방에서 지아는 숨까지 죽였고 자기도 모르게 치마를 꽉 잡았다.그녀 자신조차도 이렇게 긴장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는 소시후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잠시 후, 원래 불안한 소시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지아가 입을 열어 결과를
도윤은 특별히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임산부는 임신기에 정서가 매우 불안정했다.그는 자신 때문에 지아의 가슴속에 응어리가 맺혔다는 것을 알고, 몇 달 동안 꾹 참으며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오늘 시체를 찾은 일은 지아의 마음속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렸고,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뱃속의 아이는 지아의 괴로움을 느낀 듯, 뱃속에서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지아는 얼른 울음을 멈추었고, 도윤은 뜨거운 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그냥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낯선 사람일뿐, 슬퍼할 필요가 없어. 그 사람이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틀림없이 네가 고마울 거야. 네가 그 사람의 시체를 찾았고, 가족과 다시 모이게 했으니까.”지아는 훌쩍이며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다 같은 소씨라서 그런지, 소시영 씨가 대표님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난 마치 내 가족이 떠난 것처럼 슬펐어.”지아는 이 말을 하면서 자신도 좀 우습다고 느꼈고,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건가 봐.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두 눈을 들어 도윤을 바라보았다.“전에 대표님은 확실히 날 도와줬지만,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난 줄곧 대표님을 친오빠로 여겼고, 우린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사이가 아니야.”도윤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며 진지하게 지아를 쳐다보았다.“응, 알아.”지난번에 도윤이 지아가 소시후의 아이를 가졌다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뿌리 깊은 트라우마가 생겼다.“시간도 늦었으니 좀 일찍 쉬어.”말을 마치자, 도윤은 몸을 돌려 방을 떠났다. 정원의 플루 메리아와 매화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도윤은 오히려 하나 또 하나의 담배를 피웠다.그 잘생긴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지금의 도윤은 예전의 지아처럼 조심스럽고 또 불안해했다.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다시 그녀를 자극할까 봐 걱정이 되어 도윤은 그
지아는 깨어나자마자 바로 빠르게 뒤로 물러났고, 왼손은 심지어 자신의 배를 가리고 있었다.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보고, 도윤의 마음은 마치 갈기갈기 찢어진 것 같았다.“너무 긴장하지 마, 난 그냥…… 아이들 좀 만져보고 싶었어.”하지만 지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병아리를 보호하는 암탉처럼 크게 소리쳤다.“나가.”“알았어, 지아야, 흥분하지 마, 나 바로 나갈게.”“아…….”이때 지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도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이 소리를 듣고 얼른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왜 그래? 아이가 또 발로 찼어? 아까부터 아이들 너무 자주 움직이는 것 같던데.”“아파…….”지아는 자신의 배를 꼭 안았고, 도윤은 깜짝 놀랐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바로 의사 불러올게.”다행히 이곳에 각종 기계가 완비되어 있어서 의사들은 즉시 지아에게 검사를 진행했다.지아는 도윤의 손을 꼭 잡았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그녀는 1년 전 조산으로 아이를 잃은 날을 생각하며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끊임없이 도윤의 이름을 불렀다.“이도윤, 아이, 꼭 우리의 아이를 지켜내야 해.”“지아야, 긴장하지 마. 피 안 났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하지만 도윤이 어떻게 위로하든, 지아는 줄곧 극도의 공포 속에 처해있었다.한차례의 검사를 마친 후, 노지혜는 마침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에겐 큰 문제가 없어요.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어보니 모두 건강한데, 갑자기 배가 아픈 원인은 사모님의 정서와 관계가 있어요.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었나요?”도윤은 지아를 부축하며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에 있는 땀을 닦아주었고, 그녀는 아이가 건강하다는 말을 듣고서야 긴장이 풀렸다.“응,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런데 아이들은 정말 괜찮은 거야?”“네, 아직은 다른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사모님, 제가 잔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비록 지금 이미 3개월을 무사히 보냈지만, 임신
지아가 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에 도착한 다음, 도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그는 담배 하나를 꺼냈지만, 불을 붙이지 않았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아이에게는 아직 문제가 없지만, 대표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사모님은 전에 대출혈 때문에 몸을 크게 다쳤기에 지금 자궁내막이 아주 얇아 유산하기 쉬운 상황에 처해있으십니다.”도윤이 말을 하지 않자 의사는 계속 보충했다.“임산부의 정서도 특히 중요하니까, 대표님께서도 사모님의 상황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될수록 임신기에 사모님을 자극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모체가 자극을 받아 스스로 임신을 중지할 것이고,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사모님은…….”노지혜는 조심스럽게 도윤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손에 든 담배를 꽉 쥐었고, 목소리를 낮추었다.“계속 말해봐.”“사모님은 쌍둥이를 가졌기에 임신 기간은 일반 임산부보다 더 힘드실 것이고, 유산하면 사모님에게 더 큰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심각하면 생명에 위험까지 생길 겁니다.”“알아, 지아가 임신하는 동안, 너희 팀이 전적으로 책임져.”“안심하세요, 대표님. 저희는 꼭 사모님을 지키며,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그럼 수고해.”노지혜가 떠나자, 도윤은 계단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의사의 뜻은 간단했다. 지아는 지금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기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산산조각 날 것이다.이제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니, 도윤은 더욱 엄격히 적들을 대비하며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생기게 못하게 막아야 했다.날이 밝자마자 진환이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대표님, 전에 분부하신 일, 이미 결과가 나왔습니다.”진환은 한 묶음의 자료를 건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소씨 집안의 프로필이었다.“소 회장님과 그 아내분은 금슬이 좋으셔서, 선후로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시체는 4남 2녀 중 다섯 째로, 밑에는 또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