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옆에 서 있던 백씨 가족들은 이 장면을 보자마자 바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특히 백정일은 가장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전에 그는 소지아에게 친절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두 눈이 곧 소지아의 몸을 뚫을 것 같았다.“진희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백정일은 엄숙하게 변진희를 일으켜 세웠다.소지아가 아직 입을 열지 못할 때, 백정일이 먼저 심한 말을 했다. “소지아, 지금 그녀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녀는 널 낳고 널 키운 어머니야. 요 몇 년 동안 그녀는 마음속으로 줄곧 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울분이 쌓여 앓기까지 했어. 그녀는 심장이 원래 좋지 않은데, 이렇게 거듭 그녀를 자극하다니, 아주 그녀를 죽여버려야 마음이 편한 건가?”“여보, 그만해.”변진희는 입을 열어 사정했다.백정일은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고, 엄숙한 얼굴은 매우 격동되었다. “소지아, 네가 믿든 안 믿든, 나는 널 불쌍히 여기고 진심으로 너를 딸처럼 돌보고 싶었어. 또한 진희가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도록 하고 싶었고. 그러나 지금 보면, 나는 오히려 애초에 이도윤이 왜 너와 이혼했는지 좀 알 것 같군!”소지아는 깨어났을 때에야 위가 좀 좋아졌는데, 이 두 사람에게 번갈아 모욕을 당한 후, 그녀는 화가 나서 완전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위통이 온몸으로 번져 미간까지 찡그린 소지아는 온몸의 힘을 다해 한마디 짜냈다.“너 같은 여자는 아무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진희 좀 봐, 넌 그녀가 죽어라 하고 낳은 아이야. 네가 효도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그녀를 이렇게 대하다니! 너도 하늘이 내린 천벌을 받을 거야!”백정일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죄명을 한꺼번에 소지아에게 뒤덮어씌웠고, 그녀의 멘탈까지 공격했다.소지아는 피를 한 모금 삼키고 백정일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말 다 했어요? 다 했으면 꺼져요.”그녀는 지금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이런 사람과 얘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였다.까마귀의 세계에서, 백조마저 죄인이었다.소지아는 너무
백채원은 은근히 소지아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소지아가 자신을 땅에 눌러 때리는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백채원은 장님도 아니었으니 또 어떻게 소지아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겠는가?그러나 백채원은 소지아가 아픈 틈을 타서 그녀를 괴롭히고 싶었다!소지아가 일어나지 못하는 틈을 타서 백채원은 소지아를 계속 걷어차며 마음속의 분노를 발산했다.“채원아, 그만해.”변진희는 손을 뻗어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백채원은 평소에 그녀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어머니, 그녀가 엄살을 부리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몇 발 안 차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녀 괴롭히는 줄 알겠어요.”말하면서 백채원은 또 이 기회를 틈타 몇 발을 찬 다음, 여전히 후련하지 않아서 심지어 손바닥으로 소지아의 얼굴을 때렸다.“천한 년, 무슨 생쇼를 하는 거야!”소지아는 반박하려 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그저 의식이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고 느꼈다.그런 가운데 소지아는 자신이 부축받은 것을 느꼈고, 귓가에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듣지 못했다.소지아는 중얼거렸다.“집, 나 집에 갈래…….”귓가에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내가 너 데리고 집으로 갈게.”곧이어 그녀는 등에 올려졌고, 소지아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살포시 얹었다.남자는 온건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소지아는 왠지 모르게 여러 해 전에 그녀가 나쁜 아이들에게 밀려 넘어진 일을 생각했다.어린이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돌멩이와 쓰레기를 던졌다.“넌 엄마도 없는 아이야!”“네 엄마가 다른 남자랑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네 엄마는 정말 염치없어!”소지아는 화가 나서 반항했고, 아이들과 한바탕 싸웠다.나중에 그녀는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맞아서 반격할 힘도 없었고,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후에 소계훈이 소지아를 찾았고, 그녀는 울면서 소계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소지아는 눈을 점차 뜨더니 바로 하얀 셔츠를 보았고, 시선을 위로 이동하니 이도윤의 튼튼한 턱선을 보았다.그리고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긴, 아빠는 아직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여기에 나타날 수 있겠어?’“전에 왜 코피를 흘렸어?”이도윤이 입을 연 첫 마디는 뜻밖에도 이것이었다.그의 몸에서는 낯선 샴푸 냄새가 났고, 소지아는 어젯밤 이도윤이 백채원과 동침했다는 것을 생각하고 즉시 그의 품에서 물러났다.“코를 부딪쳤는데, 우리 엄마가 때렸을 때 마침 안에 있는 상처를 건드려서.”소지아는 조용히 대답했다.이도윤은 그녀의 표정을 응시하며 소지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소지아는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왜? 믿지 않는 거야? 너 내 몸이 줄곧 좋다고 하지 않았어? 나한테 무슨 병이 있겠니?”“하긴.”이도윤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인지 소지아를 설득하기 위해서인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소지아의 입가에 스친 냉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이도윤은 지난번 건강검진 보고서를 직접 보았는데, 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지아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이씨 집안 아니라 자신이 전에 거주하던 해변 아파트라는 것을 발견하였다.보아하니 이번 소란에 수확이 없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백씨 집안이 강요하고 있는 이상, 이도윤도 더는 공공연히 그녀와 함께 살지 못했다.“일이 없는 이상 내일 회사로 출근해. 인사팀이 이미 다 안배했어.”“좋아.”소지아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나도 이제 별일 없으니 너도 돌아가. 백씨 집안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이 말은 다시 이도윤을 화나게 했다. 원래 어두운 표정은 더욱 화가 났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이게 바로 네가 원하는 거야?”소지아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응, 난 당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거든. 전에 그런 일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비천하게 살고 싶지 않아.”이도윤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않
아침 일찍 진봉은 아래층에서 소지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특별히 옅은 화장을 하여 자신이 혈색 있어 보이게 했다.회사에 도착하자, 진환은 일찌감치 차 앞에서 기다리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사모님.”소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했지, 이 호칭은…….”“미안해요, 습관이 되었어요. 일단 직위에 관해 설명드릴 게 있어서요.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판매부로 전근시켰어요.”소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는 내가 그의 비서로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어?”진환은 안색이 좀 어색했다. 그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 “대표님은 소지아 씨가 경험을 쌓으려 한다는 것을 고려해, 비서는 판매부의 직원보다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없었기에 대표님도 아가씨를 위해 고려한 셈이죠.”소지아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을 곁에 둔다면, 이도윤은 백씨 집안 쪽에 설명할 말이 없었다.분명히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지만, 이도윤이 정말 자신과 선을 긋기로 선택했을 때, 소지아는 자신이 이렇게 빨리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다.‘됐어, 내가 어느 부서에 있든 그 사람은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거야.’“그래, 그럼 잘 부탁할게.”“천만에요, 저는 이미 인사팀에게 설명했으니, 직접 올라가서 수속을 밟으시면 돼요.”진환은 들키지 않기 위해 소지아를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데려다 주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소지아가 회사에 입사한 이유도 단지 이도윤의 곁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 뜻밖에도 시작하기도 전에 판매부로 들어갔다니.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며 결국 자신을 설득했다.소지아가 인사팀에 가서 보도할 때, 상대방은 그녀를 위아래로 여러 번 훑어보았다.추측하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음, 소지아 양, 당신의 자리는 저쪽에 있으니 직접 가면 돼요.”인사팀 팀장의 태도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고마워요.”소지아는 자신의 사원증을 보면서 이 순간, 좀 낯설다고 생각했다.그녀의 첫 직장은 의사가 아
백씨 집안 덕분에 소지아는 마침내 이도윤에게서 벗어났다.같은 회사에 있어도, 판매부 직원인 소지아는 이도윤과 만날 수 없었다.유일한 아쉬움은 바로 비서실을 떠났다는 것이다. 소지아는 그 몇 명의 비서들과 점점 멀어졌으니 회사에 온 목적을 어긴 셈이다.소지아는 오직 모든 희망을 전효에게 걸어 그가 이번에 일부 유용한 소식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한창 생각하는 사이, 귓가에 탄식이 들려왔다. “아, 왜 또 내가 기획표를 내러 가는 거죠?”소지아는 고개를 돌려 한쌍의 둥글고 큰 눈과 마주쳤는데, 바로 그녀의 옆에 앉은 동료인 박금란으로서 나름 열정적인 사람이었다.“왜 그래요, 금란 언니?”박금란은 귓가의 잔머리를 정리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이 프로젝트의 기획표를 제출해야 해서.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C팀이잖아. 지난달에 이미 꼴찌였으니 나는 감히 비서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겠어. 만약 진환 비서님을 만난다면, 아예 놀라서 자빠질걸.”“그 진 비서님, 그렇게 무서워요?”“넌 신인이라 잘 모르나본데, 대표님이 만약 악마라면, 진환 비서님은 저승사자지. 그 무뚝뚝한 모습은 지난번에 청소 아주머니의 딸까지 놀라 울게 했다니깐.”소지아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갈게요. 어차피 나는 신인일 뿐이니 욕 몇 마디 먹어도 상관없으니까요.”“와, 지아야, 너 어쩜 이렇게 좋을까! 정말 고마워.”박금란은 얼른 서류를 소지아에게 건네주었다.소지아는 손에 든 서류를 보고 입꼬리를 가볍게 들어올렸다.‘마침 비서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그녀가 떠나자마자 주위에서 웃고 떠들던 동료들의 얼굴이 싹 변했다.“요즘 젊은이들이 정말 주제를 모른다니까. 또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왔다니. 올해에 벌써 몇 번째야?”박금란은 두 손을 가슴에 얹으며 하찮은 표정으로 말했다.“이것이 유일하게 대표님에게 접근하는 방법이니까. 가서 존재감을 과시하면 대표님이 자신에게 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설령 소지아가 다가가서 물건을 책상 위에 놓더라도 오가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가희 언니, 이건 내가 언니에게 주는 선물이에요.”오가희는 고개를 들어 손으로 안경을 밀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 들어온 이유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러 온 건가?”“아이고, 지아야, 그녀 상대하지 마. 그녀는 원래 성격이 그런 거니까 너도 돈을 절약한 셈이지.”나지민은 소지아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기획서는 내가 진 비서님에게 줄 테니 안심해.”“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다들 방해하지 않을게요.”소지아의 눈빛은 오가희를 스쳐 지나갔다.오가희는 계속 업무 상태로 회복했는데, 마치 그녀의 눈에는 일만 있는 것 같았다.사무실의 나지민과 오가희는 성격이 정반대인데, 만약 문제가 있다면 어느 사람일까?소지아는 여우라면 자신의 꼬리를 감출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자신이 손을 대지 않아도, 상대방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브로치에 추적기를 박았는데, 이번에는 주도권을 스스로의 손에 쥔 셈이었다.펑.소지아는 넋을 잃고 생각하다, 이 조용한 층에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녀는 상대방의 품에 머리를 부딪쳤다.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다 큰 어른이 길도 보지 않는 거야?”소지아는 재빨리 이도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이도윤이 사무실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귀신처럼 몰래 나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죄송해요, 대표님, 저는 아직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소지아는 이도윤을 거의 보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고 사과한 다음 이도윤에게 남겨질까 봐 급히 도망갔다.소지아는 몇 걸음 만에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갔는데, 마침 엘리베리터문이 열리더니 진환과 진봉이 나왔다.동료의 말을 생각하자 소지아는 머릿속에서 바로 이 두 사람을 저승사자로 상상했다.‘확실히 닮긴 했어.’소지아는 재빨리 입을 막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이도윤은 그녀의 입가의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요 며칠 그는 소지아를 찾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면 일은 커진 셈이었다. 평소에 이도윤이 책임을 물어도 판매팀 총팀장을 찾았지 절대로 이은리와 같은 C팀 팀장을 찾지 않았다.박금란은 1초전까지만 해도 웃는 얼굴이었지만, 다음 순간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소지아, 내가 진작에 말했지, 넌 아직 경력이 없으니 C조에 온 이상 열심히 일하라고. 넌 프로젝트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온통 그런 이상한 일만 생각하고 있다니. 네가 대표님 화나게 한 거 맞지?”“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좀 예쁘게 생겼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넌 대표님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난번에 그를 유혹한 여자 직원이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소지아는 요즘 정말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가든 이런 일에 부딪치다니.그녀는 비서실에 갔을 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자신과 얘기를 나누던 동료들은 바로 나서서 자신을 비난하다니, 게다가 말하는 것도 정말 듣기 거북했다.소지아는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난 대표님을 만나지 못했고, 단지 기획안을 비서실에 넘겨주었는데, 내가 어떻게 대표님을 화나게 했을까요?”“예전에 우리가 기획안을 제출해도 아무일 없었는데, 왜 네가 가자마자 일이 생긴 거지? 엄살 부리지 마. 이 일은 네가 책임을 져야 해.”“맞아요, 팀장님, 소지아 같이 데리고 가세요.”모두들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었고, 분명히 소지아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이것이 바로 직장이었다. 소지아는 나름 깨달은 셈이었다.소지아는 이은리의 곁을 따라갔고, 이은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지아야, 넌 3개월의 시용기간이 있으니, 만약 내가 사인하게 하고 싶다면 이번 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나보고 대신 욕을 먹으라고 하는 거잖아, 이도윤이 바보야?’소지아는 싸늘하게 웃었다.“알죠, 팀장님.”엘리베이터가 열렸고, 이은리는 진환을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진 비서님 안녕하세요.”소지아가 고개만 끄덕이는 것을 보고 이은리는 그녀도 허리를 굽혀 인사하라고 등을
이는 소지아가 처음으로 이도윤이 일하는 모습을 본 것인데, 그는 자신에게만 각박한 것이 아니었다.이은리는 이미 겁에 질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대표님 화 좀 푸세요. 이 방안은…… 지아야, 네가 말해봐.”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지아를 바라보았지만, 이 소녀의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고, 심지어 허리를 쭉 핀 채, 태연자약하게 이도윤과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다.‘용사야!’‘젠장,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이은리는 얼른 머릿속의 이상한 생각을 쫓아냈다.소지아는 이은리의 구조요청에 협박까지 담긴 눈빛을 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제 방안에 대해 불만이 있는 거예요?”이도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네가 한 거야?”소지아는 여기서 이틀밖에 일하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중요한 기획 방안은 그녀가 참여하고 싶어도 팀장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번 분기의 점수와 연말 보너스와 관련된 일이었다.지금은 분명 팀장이 소지아에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려고 했다.소지아도 당연히 멍청하지 않았다.“네, 이 방안에 참여했어요.”이은리는 소지아의 대답에 불만을 품었다. 단지 참여하기만 하면 완전히 잘못을 그녀에게 돌릴 수 없었다.“무엇을 참여했지?”소지아는 방안을 가리키며 이은리의 기대하는 눈빛에서 진지하게 말했다.“이 방안은 제가 직접 프린트한 거예요.”이도윤은 웃음을 참았다. 오직 그만이 소지아의 영리하고 온순한 모습은 모두 가식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이 여자는 성질이 좋은 편이 아니지.’이도윤은 머리만 해도 몇 번 맞았는지 모른다.이은리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지아야, 대표님 앞에서 지금 무슨 농담을 하고 있는 거야? 프린트는 무슨, 이번 기획안은 네가 제안한 거잖아? 대표님 양해해 주세요. 그녀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규칙을 모르네요.”소지아는 어제 오후의 부서 회의를 생각을 했다. 자신이 금방 입사했기에, 이은리는 소지아가 다른 팀에서 파견한 스파이일까 봐 두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