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후는 몇 마디로 상황을 정리하고 시월을 다독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지아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선생님, 왜 치료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시는 거죠?” 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누군가 날 죽이려 해.” 말하는 톤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으나, 그 내용은 지아를 놀라게 했다. “소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게 의심되세요?” “내 가족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내 병이 너무 수상하게 시작됐어.” 그는 수년 동안 가족을 의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적합한 신장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신장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경로를 통해 신장 기증자를 찾을 때마다 그들이 각종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수술은 계속해서 무산되었다. 한두 번이면 우연일 수 있지만, 계속 이상한 일이 반복되자 시후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비밀리에 조사했지만, 상대방은 너무 은밀히 행동했고, 겨우 몇몇 대리인만을 잡아낼 수 있었다. 시후는 그 사람이 틀림없이 소씨 가문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그는 가족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소씨 가문을 떠났다. 자기 친동생들에게도 비밀에 부친 채.그리고 나서야 시후는 반년 동안 평온을 되찾았다. 비록 신장병이 금방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반년 전보다는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시후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소씨 가문을 위해서도 신중해야만 했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여행 중인 사진을 계속 업로드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이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마 그 사람은 지금도 시후가 점점 파멸을 향해 다가가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비밀을 들춘 것 같아서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어. 우린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나는 이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렇지 않았다면, 셋
지아는 배에 타고 떠났는데,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평온했다.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해!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A시에는 흰 눈이 펄펄 내렸다. 도윤이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사적인 이유로 아이들을 부씨 가문에 데려가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부남진의 성격상, 아이들을 데려가면 틀림없이 떼어놓을 것이었다. 이미 아내를 만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으니, 아이들까지 만나지 못하게 될 상황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도윤은 아이들과 함께 지아가 함께 살았던 결혼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지아에게 많은 아픈 기억을 남겼던 곳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꿈이 시작되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지아가 찢어버렸던 결혼사진도 다시 걸려 있었다. 도윤은 특별히 휴가를 내고 매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부족했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모두 보충해 주려 애썼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독립적이어서 도윤에게 큰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도윤은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운전해서 장을 보러 갔다. 가족 네 명이 마트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절로 그들에게 향했다. 그는 품에 무무를 안고 있었고 소망은 카트에 앉아 있었으며, 해경이 그녀를 밀고 있었다. 네 사람의 외모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특히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무무는 작은 아기 천사 같았다. “아빠, 저 초콜릿 먹을래요! 감자칩도 먹을래요.”해경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소망이 말했다.“엄마가 그런 불량식품은 먹지 말라고 했잖아. 엄마가 없을 때는 내가 널 감시할 거야.” 도윤은 쌍둥이 남매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감자칩 한 봉지를 카트에 넣었다. “가끔은 괜찮아.” “아빠가 먹어도 된다잖아.”해경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도윤이 무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무무는 뭐를 좋아해?” 무무가 과일 수입
지아가 예고도 없이 등장하는 순간, 모두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그녀의 이번 귀국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도윤조차 지아가 언제 귀국했는지는 몰랐다. 사실, 지아가 일부러 비밀을 유지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예린도 이미 지아의 행방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경솔하면 쉽게 다시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번 여정에서 지아는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돌아왔다. 해경과 소망이 재빨리 지아를 향해 달려갔다.“엄마.” 그녀는 곧장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 한 학기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그새 아이들은 많이 자라 있었다. 바로 그때, 귓가에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무무가 도윤의 품에서 내려와 지아를 향해 달려온 것이었다. 무무는 말을 할 수 없지만, 방울을 흔들며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도윤은 이런 장면을 꿈에서 수없이 그렸지만, 이번만큼은 아이들과 지아가 함께 있어 그 어떤 꿈보다도 아름다웠다. “지아야.”도윤이 지아의 앞에 서서 세심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혹여나 야윈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지아는 몸을 일으켜 곧장 그를 끌어안았다.“내가 왔어.” ‘내가 왔다’라는 한 마디가 가정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듯해, 보는 사람마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 “흑흑, 너무 감동적입니다.”진봉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저는 지금도 사모님께서 바다에 빠졌던 장면이 생생해요. 그런데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진환도 모처럼 감상에 젖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그날도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었죠...” 드디어 가족 네 명이 다시 모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은 마치 작은 새처럼 뛰어다니며 행복해했다. “엄마, 아빠가 저녁에 죽을 끓여준다고 하셨어요.” “그래.”지아는 쌍둥이의 손을 잡았고, 도윤은 무무를 안고 있었다. 정원에는 커다란 눈사람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는데, 두 개의 큰 눈사람과 네 개의 작은 눈사람이었다. 가장 키가 큰 눈사람은 큰아들인 이지
도윤은 지아가 많이 침착해졌음을 발견했다. 그는 지아가 예전에 예린과 함께 죽으려 했던 그 광기를 잊을 수 없었다.“그래.”이런 지아는 오히려 도윤에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했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게 했다. 도윤은 능숙하게 생선을 손질하며 예린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이 조금 멍해져 있었다. 바로 그때, 생선 뼈 하나가 그의 손을 찔러 소량의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찌푸린 얼굴로 손을 씻으며 상처를 깨끗이 했다. “내가 할게, 집중 못 하는 게 딱 보여.” 도윤은 이미 오랫동안 예린을 보지 못했다. 사실, 매일 예린의 곁에 있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피로 얼룩진 깊은 원한이 가로막혀 있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게다가 아무리 도윤이가 추궁해도, 예린은 쓸모 있는 정보를 전혀 내놓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친여동생이라지만, 예린을 정말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심예지는 그 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서,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를 돌보는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심예지가 마음만 먹으면, 예린이 비밀리에 빠져나갈 방법을 마련해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미안해.”도윤은 급히 주방을 떠나 전화를 걸었다. 심예지의 목소리는 다소 나른했다.[무슨 일이야?] 심예지는 이성을 회복한 이후로, 매일 약에 취한 사람처럼 늘어져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그 남자를 위해 미쳐있지도 않았다.“예린이는요?”“자.”심예지는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예전부터 도윤이 무언가를 물으면 즉각 대답하곤 했는데, 그는 진작에 의심했어야 했다.“어머니, 언제까지 저를 속이실 거예요?”심예지는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으며, 더는 속일 필요가 없다고 느낀 듯 말했다.[다 알고 있니?] 도윤이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머니, 제게 뭐라고 약속하셨죠?” [도윤아, 예린이는 내 딸이야.] 도윤이 눈을 감고 말했다.“저도 어머니의 아들이에요. 그리고 지아는 어머니의 며느리
도윤은 언제나 사랑과 증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예전에 그가 지아를 미워할 때는 차갑게 대할 대로 차갑게 대했으나, 지금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윤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리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아 또한 적어도 그 일에 대해서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지아야...” 지아는 도윤의 손을 들어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부드럽게 닦았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가자, 아이들이 도윤 씨의 요리를 기다리고 있어.” 도윤은 눈을 내리깔고 지아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했다. 가슴이 아팠고, 깊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내가 예전에 그렇게 했는데도, 지아는 여전히 내 옆에 있어 주며 묵묵히 지난 일들을 용서해 주는구나.’ 두 사람은 눈 내리는 길에서 손을 꼭 맞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도윤이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하자, 쌍둥이들은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무무는 체질상 아주 허약하게 태어나서 늘 지아의 곁을 지켰다. 지아는 무무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 고요한 방 안에는 오직 바둑돌이 바둑판에 놓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무무는 마음이 섬세하고 생각이 분명했지만, 말하지 못했다.지아는 수년간 최고의 명의를 찾아다니며 온갖 방법을 써보았지만, 무무를 치료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무무를 대할 때만큼은 늘 인내심을 가지고 놀아주며,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무무는 나이가 가장 어리지만, 성격은 가장 듬직하고 성숙한 아이였다. 무무가 부엌에 있는 도윤을 가리키며 수화를 했다.“엄마, 아빠랑 화해했어요?” 무무는 마을에 있을 때 지아가 도윤에게 보였던 냉담한 태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돌아온 후, 두 사람은 훨씬 가까워진 듯했다. 지아가 반문했다.“아빠랑 화해했으면 좋겠어?” 무무는 마지막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비록 무무가 패배했으나, 지아가 큰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무무가 바둑판을 가리켰다.“인생은 바둑과 같아요.” “져도 이기는 거고, 이겨도 지는 거죠.” 지아는 무무의 뜻을 이해했다.‘내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큰
지아가 몸을 돌려 새하얀 팔로 도윤의 목을 감싸 안고 입을 맞추었다.“괜찮아.”도윤은 한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화장대를 받치고 서 있었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탄탄한 팔뚝이 드러났고, 단추 두 개가 풀린 셔츠 사이로 섹시한 쇄골이 보였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지지 않은 채 살짝 흘러내려, 도윤의 전체적인 모습은 부드럽고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지아야, 요리했더니 온몸에 기름 냄새가...” 그는 깔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지아는 오히려 그의 말을 끊으며 깊게 키스했다.“도윤 씨, 보고 싶었어.” 고요한 방 안,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하나로 겹쳤다. 밖에서는 조용히 눈이 쌓여갔고, 무거워진 나뭇가지가 이따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아침, 따사로운 햇살이 작은 마당에 내려앉았다. 한밤중까지 이어진 사랑에 피곤했던 지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방 안에는 어느새 조그마한 아이들이 모여들어 있었다.“어젯밤에 엄마 방에서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어. 엄마가 고양이를 키우는 게 분명해.”소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 울음소리였어. 엄마가 아빠한테 맞은 거 아닐까?” 지아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바라보며 따지듯이 묻는 해경의 얼굴을 마주했다.“엄마, 아빠가 또 엄마를 괴롭힌 거죠?!” 지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방의 방음 효과도 꽤 좋고, 아이들도 일찍 잠들었다고 생각해서 오랜만에 마주한 도윤 씨와의 순간에 너무 방심했었나 봐.’ ‘그 소리 때문에 아이들까지 깨어날 줄이야!’지아는 아이들에게 설명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야.”“하지만 엄마가 우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운 게 아니라니까? 고양이 소리였다고. 엄마, 방에 고양이를 숨겨둔 거죠?” 아이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밖에서 진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야옹...”지아도 놀란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웬 고양이지?’게다가 한 마리가 아
지아는 도윤의 품에 안긴 채 모든 것이 꿈만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자신에게 행복과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주었던 이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 초기, 이곳에서는 분명 달콤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매일 집에서 요리법을 배우며 하루 종일 도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정원에 있는 꽃과 식물을 다듬으며, 그가 갈아입은 옷을 깨끗이 세탁하고 다려서 옷장에 정리해 두었다.게다가 테이블 위에는 언제나 생기 넘치는 꽃다발을 두어 집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곤 했다. 하지만 아이를 잃은 후, 지아는 날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때의 그녀는 이 집이 그녀를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조금의 행복도 느낄 수 없었다. 특히 직접 꾸민 그 아기방은 지아에게 더 큰 아픔을 주었다. 바다에 빠진 후, 수많은 밤을 그 작디작은 아기 침대에서 웅크린 채, 조산으로 태어난 아들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바로 그때, 아기방 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감에서 나는 듯한 음악 소리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안방에서 고양이들과 놀고 있는데, 어찌 아기방에서 소리가 날 수 있겠는가. 지아는 곧장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떠나기 직전 이 방의 모든 가구와 장식을 망가뜨렸었다. 하지만 도윤이 방을 원래대로 복원해 놓은 듯했다. 아기침대 옆에는 키 큰 아이가 서 있었다. 사실, 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웠는데, 키가 크기 때문이었다. 비록 올해로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지만 말이다. 그 아이는 손에 작은 딸랑이를 들고 있었고, 침대 위의 모빌은 가볍게 흔들리며 부드럽고 순수한 음악 소리를 냈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도윤이 몸을 돌렸다. 지아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곧장 그 아이의 품으로 달려갔다. “지윤아.”“엄마.”두 모자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이날을 맞이하기까지 꼬박 9년이 걸렸다. 두 사람은 이제야 서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지윤은 지난 몇 년간 많은 슬픔을 겪었다. 그 아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엄마인 지아
지윤은 옆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알아차렸다.“네가 해경이야?” “맞아, 형.”해경은 지윤의 가슴 높이쯤밖에 오지 않았으며, 훨씬 작았다. 해경은 그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지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 삼 형제는 모두 남자아이였으나, 해경은 지아를 더 닮은 반면, 지윤은 도윤과 판박이였다! 정말이지 하나의 틀에서 나온 것처럼 닮아 있었다. “큰오빠, 나는 소망이야. 오빠는 아빠랑 정말 닮았네.” 지윤은 무표정할 때 더욱 도윤과 닮았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눈빛은 강력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소망도 도윤을 닮았으나, 그 남성적인 얼굴에는 약간의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방울 소리가 조용히 울리자, 지윤이 몸을 낮추고 무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무무, 맞지?” 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오빠가 잘 돌봐줄게.”무무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가족 모두는 그 아이를 소홀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애틋하게 여겼다. 지아는 몸을 낮춰 덩치가 각기 다른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10년이 지나서야 그토록 기다려온 재회를 맞이한 것. 이것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이가 든 가정부인 장미숙은 예전과 같은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닦았고, 잠시 후에야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대표님, 사모님, 아래층에서 ‘부’ 씨 성을 가진 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모님을 모시러 왔다고 하더군요.” 이토록 당당하게 이씨 가문을 찾아올 사람은 부장경밖에 없었다. 순간, 도윤의 눈동자에 불쾌감이 번뜩였다. ‘개라도 되는 건가? 지아는 겨우 어제야 집에 돌아왔는데, 벌써 냄새를 맡고 찾아오다니.’ 지아는 눈물을 닦고 무무를 안아서 들었다.“엄마랑 가서 인사드리자. 그 분은 엄마에게 잘해 주신 몇 안되는 친척이야. 작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돼.” “네.”지윤은 쌍둥이와 함께 지아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장경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막 찻잔 뚜껑을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