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도윤을 밀었다. “장난치지 마.”하지만 차가운 눈 속에서 도윤은 술기운에 살짝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난 네가 그리웠어. 이제는 저 ‘늙은이’가 담 넘는 것도 막아.”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서글픔이 묻어 있었고, 지아는 비록 현장을 보지 못했지만 그 장면을 상상하니 꽤 흥미진진했다. ‘언제나 단단하고 고고했던 이도윤이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지아는 발끝을 살짝 들어 도윤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알았어, 그만해. 밤에 보상해줄게.”두 사람은 자신들 가까이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채나였다. 채나는 엄마가 또 그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밖으로 나왔지만, 자신이 본 화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채나는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아버지 이도윤을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어머니 백채원에게는 더욱 냉담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빠가 엄마에게 미소 지은 적이 없었어. 아빠는 늘 엄마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지.’ ‘난 그게 아빠의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아빠가 의사 선생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고,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안아주다니!’ ‘나에게조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 미소를...’ ‘왜일까? 아빠는 엄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다른 여자에게는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걸까.’채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아빠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채나는 언젠가 아빠가 다시 엄마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장면을 본 이상, 그 희망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벗어나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는데, 다이닝 룸으로 돌아오니 채나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중권이 말했다. “채나가 엄마를 찾으러 갔는데, 너희는 못 봤니?”지아는 눈빛이 흔들렸고, 무슨 일
도윤과 지아의 아이들 중 지윤은 여전히 외부에서 훈련 중이었다. 나머지 세 아이도 각기 다른 곳에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과거에 지아가 스스로 도윤과 아이들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아는 도윤조차도 아이들이 어디에서 학교를 다니는지 알 수 없게 비밀에 부쳤다.설령 도윤이 채나에게 잘해줄 만한 이유가 있다 해도, 지아는 도윤이 남의 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지아는 운전대를 꽉 잡으며 스스로에게 채나에게 화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결국 지아는 부씨 가문 저택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한편, 백씨 가문의 저택에서는 백채원이 백호의 폭력적인 욕망에 억눌려 있었다. 차가운 거울 앞에서 백호의 거친 행동을 참아내며 채원은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서야 백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물러났다.채원은 그의 어깨를 꽉 물며 소리쳤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어!”백호는 광기로 가득 찬 표정으로 답했다. “너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할 거야!”“넌 미쳤어!” 채원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같은 놈의 아이를 가질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백호는 그녀의 턱을 꽉 잡고 말했다. “넌 평생 내 거야! 절대 너를 떠나보내지 않을 거다.”채원은 자신이 왜 이런 미친 사람과 얽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거만한 그녀도 할아버지인 백중권에게는 한마디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백중권은 이미 오늘 내일을 알 수 없는 풍전등화 같은 나이였고, 이런 일로 자극을 받았다가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기 때문이다.채원은 이미 부모님을 떠나보냈다. 백중권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채원은 백호의 모든 학대를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제 채원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수술을 통해 다시 걷
지아는 온갖 복잡한 마음을 안고 부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방 안은 따뜻한 조명이 깜빡이고 있었고, 화연은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민연주는 직접 짠 목도리를 화연에게 둘러주며 말했다.“딱 맞네. 내일은 장갑이랑 모자도 짜서 줄게.”“고마워요, 엄마.” 화연의 안색은 며칠만에 눈에 띄게 좋아졌고, 얼굴에도 약간 살이 붙었다.“엄마한테 뭐가 고마워? 앞으로 엄마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빨리 건강해져야 해.”그때 지아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화연은 지아를 보자마자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냈고, 그로 인해 화연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지아, 돌아왔구나. 오늘 어디 갔다 왔어?”“환자 좀 보러 갔어요. 고모님 몸은 괜찮으세요?” 지아는 화연의 밝은 얼굴을 보며 오늘 하루 나빴던 기분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걸 느꼈다.“응, 괜찮아. 배도 안 아프고, 식욕도 늘었어. 다 네 약 덕분이야.”화연은 마치 작은 태양처럼 보였다. 그녀는 비록 속으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늘 미소를 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화연은 미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미셸은 자기중심적이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사람이었지만, 화연은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그러나 때로는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지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 나를 지키려면 우리 다 어느 정도 이기적이어야 해...’지아는 이렇게 생각하며 잠시 화연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욕실에서 목욕을 하느라 알지 못했다.그동안 도윤은 부씨 가문의 저택까지 지아를 쫓아왔지만, 문 앞에서 저지당했다.“죄송합니다, 이 대표님. 각하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밤에는 들일 수 없다고 지시하셨습니다.”도윤이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하용은 손에 간식
도윤은 마치 지아가 위에서 내려다볼 것을 먼저 예상한 듯, 가로등 아래 서서 온몸에 쌓인 눈을 털어내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아가 날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아마 이 눈을 뚫고 나에게 내려오겠지.’지아는 욕실 가운을 걸치고 손에 도윤이 보낸 선물을 안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도윤을 내려다보며, 지아는 고개를 숙여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입력하고는,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도윤에게 확인하라고 했다.도윤은 지아의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우리 지아가 날 걱정해 주고 있네.’하지만 그는 핸드폰을 열어보는 순간 미소는 완전히 굳어버렸다.[선물 고마워. 춥고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히 가.]도윤은 문자를 확인한 후, 지아가 창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커튼은 단단히 쳐졌고, 지아의 모습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지아가 잠옷 차림으로 폭설을 뚫고 내 품에 뛰어들던 날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날들은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그는 깨달았다. ‘지금의 지아는 이미 달라졌고, 나도 더 이상 이 여자의 최우선 순위가 아닌 거야.’...지아도 도윤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방금 전, 도윤이 단지 작은 ‘연민 유발’ 정도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작은 토끼 인형들을 침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았다. 비록 선물을 받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도윤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 둘은 지금 이 정도의 거리감이 서로에게 가장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지...’그날 밤, 지아는 푹 자고 일어나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인해 하인들이 정원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지아 아가씨.” 길을 지나던 고용인들이 지아에게 미소로 인사했다. 많은 이들이 손에 빨간 등롱을 들고 있었다. 곧 설날이 다가오고 있어서 집안은 이미 설 준
도윤은 지아의 모습이 눈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내가 일을 망친 것 같네. 사실 어떤 계략이나 계획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아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부남진이 중간에서 도윤을 막고 있고, 지아는 화연을 돌봐야 했기에 이제 지아를 만나는 일조차 도윤에게는 사치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 지아가 수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윤이 그녀가 부씨 가문의 저택을 떠나는 첫 순간에 마주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밤새 차 안에서 지아를 기다렸다.도윤도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임무에서 돌아온다고 미리 알리면, 지아는 항상 식사를 준비해 놓고 앞치마를 두른 채 현관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지.’ ‘하얀 눈이 지아의 머리카락과 옷자락 위에 소복이 쌓여, 마치 요정처럼 아름다웠어.’ 그는 그때의 지아가 그리웠다.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또다시 지아를 화나게 한 것을 자책했다. 그는 곧바로 차에 올라타고, 지아를 따라갔다.오늘 수술은 지아의 별장 지하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곳에는 최신 의료 장비가 구비되어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지아는 먼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검은 차와 흰 차가 나란히 멈췄고, 도윤은 재빠르게 지아의 뒤를 따랐다. 지아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지만, 집 안은 아직 난방이 켜지지 않아 마치 커다란 냉동고처럼 차가웠다.지아는 도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신발을 갈아 신고 난방기를 켰다. 그때, 지아의 외투 끝자락이 누군가에게 살짝 잡혔다. 돌아보니, 키가 큰 도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고,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도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잘못했어.”그가 만약 거만하게 나왔다면, 지아는 오히려 더욱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윤은 너무나도 순순히 사과하고 있었고, 지아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속의 화가 조금씩 누그러졌다.“뭘 잘못했는데?”“자기 말이 맞아. 전림에 대해 은혜 갚는 것을 자기에게까지 강요한 건
늘 고고했던 도윤이 이제는 말할 수 없이 비굴한 자세로 간절히 지아에게 말했다. “어젯밤 채나에게 준 선물은 내가 자기에게 줄 토끼 인형을 고르다가 그냥 산 거야. 지아야, 내 마음속엔 자기와 우리 아이들 말고는 아무도 없어. 이제 곧 설날인데,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특히, 부드럽고 귀여운 무무를 떠올릴 때마다 도윤의 마음은 저려왔다. 그때 도윤이 무무와 잠시 함께했던 그 짧은 순간에, 지아는 바로 무무를 데려가버렸다.지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 이번이 마지막이야.”도윤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절대로 또다시 그러지 않을게.”지아는 그의 턱에 난 수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위로 올라가서 좀 씻어.”“알았어.” 도윤은 그녀의 손끝을 잡아 입술에 살짝 입맞춤하며 말했다. “이제 자기 정말로 안 화난 거지?”“정말이야.”그제야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지금 자신과 지아의 사이는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는 듯 위태롭기만 했다. 겨우 ‘연결고리’를 붙잡은 지금, 도윤은 다시는 지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제 자존심이든, 과거의 은혜든 이제 그 어떤 것도 지아보다 중요하지 않았다.샤워기 아래에서 도윤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전림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겠지만,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백채원의 소원을 다 들어주느라 정작 내 결혼 생활을 망쳐버렸어. 지금까지 그 은혜는 충분히 갚았어. 앞으로는 오직 우리 지아와 아이들을 위해 살 거야. 나를 옭아맸던 그 은혜의 족쇄, 이제는 내가 스스로 끊어내야 해!’도윤도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렇게 오랜 세월을 지아와 아이들과 만나지도 못한 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텐데...’방으로 돌아오니, 지아가 이미 도윤을 위해 옷을 준비해 두었다. 도윤은 예전부터 억지로 이 집에 자기 옷을 놔두고 다녔었다. 침대 위에 놓인 깔끔한 옷들을 보
채나는 도윤이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속이 복잡했다. ‘아빠와 의사 선생님은 이미 같이 사는 걸까?’ 어머니인 백채원이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채나는 어젯밤 자신이 본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집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속에서 채나는 또래보다 훨씬 성숙해졌고, 심리적으로는 이미 십 대 후반의 소녀처럼 내면이 깊고 예민했다.그래서 채나는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빠.”도윤은 책을 덮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백호는 채원을 밀고 들어와 도윤을 보며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대표님, 혹시 바네사 선생님과 잘 아시는 사이인가요?”“네, 아주 잘 알죠. 먼저 수술실로 안내할게요.” 도윤은 채원 일행을 데리고 지하실로 향했다.채원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도윤은 채원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 모두가 지하실에 도착했고, 수술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지아는 이미 마스크를 쓰고 수술복을 입은 채 살균 소독을 마친 상태였다. 방 안은 오직 수술대 위의 중앙 조명만 켜져 있었고, 어두운 모서리로 인해 그녀의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였다.도윤은 무심하게 말했다. “채원이를 수술대에 올려놓으면 나가도 돼요.”채원은 도윤이 지시를 내렸다는 말을 듣고,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마음속 불안이 더욱 깊어졌다.‘이도윤이 몇 년 동안 소지아를 찾아 헤맸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건 이도윤이 아직도 소지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바네사와 얽히는 걸까?’채원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도윤 씨, 혹시 바네사 선생님과는 어떤 사이예요?”도윤은 채원 앞에 서서 차갑게 대답했다. “내가 바네사와 어떤 관계이든 너와는 아무 상관 없어.”그 말만 남기고 도윤은 수술실을 떠났고, 너무 냉정해서 마치 낯선 사람 같았다. 채원은 그 말에 가슴이 시려왔다. ‘도윤 씨와 부부로 지낼 수 없다면, 최소한 친구로라도 남을 수는 없을까?’백호는 채원을 조용히 수술대에 눕히고 나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
두 손을 옆에 늘어뜨린 채 고개를 들어 채나를 바라보는 도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다는 아니야.” 도윤은 손을 뻗어 채나를 옆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냥 우리 채나에게 이야기 하나 해주고 싶은데.” 채나의 얼굴에 눈물이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만약 제가 아빠의 재혼을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빠가 그동안 엄마와 잘 지내지 못한 건 알지만, 아빠가 항상 혼자였다는 것도 들었어요.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나쁘지 않잖아요? 아빠는 왜 이렇게 서둘러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는 거예요? 저는 아빠가 다른 아줌마와 아이를 낳는 거 원하지 않아요. 아빠가 제 아빠이기만 하면 좋겠어요.” 도윤은 채나의 눈을 바라보며, 그 안에 비친 집착이 과거 백채원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이제라도 깨달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채나야, 진정해.” “싫어요!” 채나는 그대로 도윤의 품에 달려들며 눈물을 쏟아냈다. “아빠, 저와 엄마는 아빠를 정말로 사랑해요.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요. 엄마가 잘못한 건 알아요. 하지만 엄마는 이미 벌을 받았어요. 아빠는 엄마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잖아요? 엄마는 유명한 무용가였는데, 이제는 휠체어에만 앉아 있어요.” “적어도 예전에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잖아요? 학교에서 배웠는데, 부모는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대요.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오빠랑 제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겠어요?”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채나의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야, 네 아빠는 정말로 널 사랑했어. 그리고 네 엄마도 사랑했지. 하지만 그 아빠는 내가 아니야.” 채나는 깜짝 놀라 큰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아빠, 무슨 말이에요? 그 아빠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도윤은 채나를 옆으로 앉히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좀 길어...” 그는 전림과 자신 사이의 관계, 그리고 소지아, 백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