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도윤을 밀었다. “장난치지 마.”하지만 차가운 눈 속에서 도윤은 술기운에 살짝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난 네가 그리웠어. 이제는 저 ‘늙은이’가 담 넘는 것도 막아.”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서글픔이 묻어 있었고, 지아는 비록 현장을 보지 못했지만 그 장면을 상상하니 꽤 흥미진진했다. ‘언제나 단단하고 고고했던 이도윤이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지아는 발끝을 살짝 들어 도윤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알았어, 그만해. 밤에 보상해줄게.”두 사람은 자신들 가까이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채나였다. 채나는 엄마가 또 그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밖으로 나왔지만, 자신이 본 화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채나는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아버지 이도윤을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어머니 백채원에게는 더욱 냉담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빠가 엄마에게 미소 지은 적이 없었어. 아빠는 늘 엄마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지.’ ‘난 그게 아빠의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아빠가 의사 선생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고,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안아주다니!’ ‘나에게조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 미소를...’ ‘왜일까? 아빠는 엄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다른 여자에게는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걸까.’채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아빠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채나는 언젠가 아빠가 다시 엄마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장면을 본 이상, 그 희망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벗어나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는데, 다이닝 룸으로 돌아오니 채나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중권이 말했다. “채나가 엄마를 찾으러 갔는데, 너희는 못 봤니?”지아는 눈빛이 흔들렸고, 무슨 일
도윤과 지아의 아이들 중 지윤은 여전히 외부에서 훈련 중이었다. 나머지 세 아이도 각기 다른 곳에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과거에 지아가 스스로 도윤과 아이들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아는 도윤조차도 아이들이 어디에서 학교를 다니는지 알 수 없게 비밀에 부쳤다.설령 도윤이 채나에게 잘해줄 만한 이유가 있다 해도, 지아는 도윤이 남의 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지아는 운전대를 꽉 잡으며 스스로에게 채나에게 화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결국 지아는 부씨 가문 저택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한편, 백씨 가문의 저택에서는 백채원이 백호의 폭력적인 욕망에 억눌려 있었다. 차가운 거울 앞에서 백호의 거친 행동을 참아내며 채원은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서야 백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물러났다.채원은 그의 어깨를 꽉 물며 소리쳤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어!”백호는 광기로 가득 찬 표정으로 답했다. “너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할 거야!”“넌 미쳤어!” 채원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같은 놈의 아이를 가질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백호는 그녀의 턱을 꽉 잡고 말했다. “넌 평생 내 거야! 절대 너를 떠나보내지 않을 거다.”채원은 자신이 왜 이런 미친 사람과 얽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거만한 그녀도 할아버지인 백중권에게는 한마디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백중권은 이미 오늘 내일을 알 수 없는 풍전등화 같은 나이였고, 이런 일로 자극을 받았다가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기 때문이다.채원은 이미 부모님을 떠나보냈다. 백중권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채원은 백호의 모든 학대를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제 채원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수술을 통해 다시 걷
지아는 온갖 복잡한 마음을 안고 부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방 안은 따뜻한 조명이 깜빡이고 있었고, 화연은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민연주는 직접 짠 목도리를 화연에게 둘러주며 말했다.“딱 맞네. 내일은 장갑이랑 모자도 짜서 줄게.”“고마워요, 엄마.” 화연의 안색은 며칠만에 눈에 띄게 좋아졌고, 얼굴에도 약간 살이 붙었다.“엄마한테 뭐가 고마워? 앞으로 엄마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빨리 건강해져야 해.”그때 지아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화연은 지아를 보자마자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냈고, 그로 인해 화연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지아, 돌아왔구나. 오늘 어디 갔다 왔어?”“환자 좀 보러 갔어요. 고모님 몸은 괜찮으세요?” 지아는 화연의 밝은 얼굴을 보며 오늘 하루 나빴던 기분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걸 느꼈다.“응, 괜찮아. 배도 안 아프고, 식욕도 늘었어. 다 네 약 덕분이야.”화연은 마치 작은 태양처럼 보였다. 그녀는 비록 속으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늘 미소를 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화연은 미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미셸은 자기중심적이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사람이었지만, 화연은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그러나 때로는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지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 나를 지키려면 우리 다 어느 정도 이기적이어야 해...’지아는 이렇게 생각하며 잠시 화연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욕실에서 목욕을 하느라 알지 못했다.그동안 도윤은 부씨 가문의 저택까지 지아를 쫓아왔지만, 문 앞에서 저지당했다.“죄송합니다, 이 대표님. 각하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밤에는 들일 수 없다고 지시하셨습니다.”도윤이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하용은 손에 간식
도윤은 마치 지아가 위에서 내려다볼 것을 먼저 예상한 듯, 가로등 아래 서서 온몸에 쌓인 눈을 털어내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아가 날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아마 이 눈을 뚫고 나에게 내려오겠지.’지아는 욕실 가운을 걸치고 손에 도윤이 보낸 선물을 안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도윤을 내려다보며, 지아는 고개를 숙여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입력하고는,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도윤에게 확인하라고 했다.도윤은 지아의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우리 지아가 날 걱정해 주고 있네.’하지만 그는 핸드폰을 열어보는 순간 미소는 완전히 굳어버렸다.[선물 고마워. 춥고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히 가.]도윤은 문자를 확인한 후, 지아가 창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커튼은 단단히 쳐졌고, 지아의 모습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지아가 잠옷 차림으로 폭설을 뚫고 내 품에 뛰어들던 날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날들은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그는 깨달았다. ‘지금의 지아는 이미 달라졌고, 나도 더 이상 이 여자의 최우선 순위가 아닌 거야.’...지아도 도윤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방금 전, 도윤이 단지 작은 ‘연민 유발’ 정도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작은 토끼 인형들을 침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았다. 비록 선물을 받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도윤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 둘은 지금 이 정도의 거리감이 서로에게 가장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지...’그날 밤, 지아는 푹 자고 일어나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인해 하인들이 정원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지아 아가씨.” 길을 지나던 고용인들이 지아에게 미소로 인사했다. 많은 이들이 손에 빨간 등롱을 들고 있었다. 곧 설날이 다가오고 있어서 집안은 이미 설 준
도윤은 지아의 모습이 눈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내가 일을 망친 것 같네. 사실 어떤 계략이나 계획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아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부남진이 중간에서 도윤을 막고 있고, 지아는 화연을 돌봐야 했기에 이제 지아를 만나는 일조차 도윤에게는 사치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 지아가 수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윤이 그녀가 부씨 가문의 저택을 떠나는 첫 순간에 마주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밤새 차 안에서 지아를 기다렸다.도윤도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임무에서 돌아온다고 미리 알리면, 지아는 항상 식사를 준비해 놓고 앞치마를 두른 채 현관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지.’ ‘하얀 눈이 지아의 머리카락과 옷자락 위에 소복이 쌓여, 마치 요정처럼 아름다웠어.’ 그는 그때의 지아가 그리웠다.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또다시 지아를 화나게 한 것을 자책했다. 그는 곧바로 차에 올라타고, 지아를 따라갔다.오늘 수술은 지아의 별장 지하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곳에는 최신 의료 장비가 구비되어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지아는 먼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검은 차와 흰 차가 나란히 멈췄고, 도윤은 재빠르게 지아의 뒤를 따랐다. 지아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지만, 집 안은 아직 난방이 켜지지 않아 마치 커다란 냉동고처럼 차가웠다.지아는 도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신발을 갈아 신고 난방기를 켰다. 그때, 지아의 외투 끝자락이 누군가에게 살짝 잡혔다. 돌아보니, 키가 큰 도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고,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도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잘못했어.”그가 만약 거만하게 나왔다면, 지아는 오히려 더욱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윤은 너무나도 순순히 사과하고 있었고, 지아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속의 화가 조금씩 누그러졌다.“뭘 잘못했는데?”“자기 말이 맞아. 전림에 대해 은혜 갚는 것을 자기에게까지 강요한 건
늘 고고했던 도윤이 이제는 말할 수 없이 비굴한 자세로 간절히 지아에게 말했다. “어젯밤 채나에게 준 선물은 내가 자기에게 줄 토끼 인형을 고르다가 그냥 산 거야. 지아야, 내 마음속엔 자기와 우리 아이들 말고는 아무도 없어. 이제 곧 설날인데,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특히, 부드럽고 귀여운 무무를 떠올릴 때마다 도윤의 마음은 저려왔다. 그때 도윤이 무무와 잠시 함께했던 그 짧은 순간에, 지아는 바로 무무를 데려가버렸다.지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 이번이 마지막이야.”도윤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절대로 또다시 그러지 않을게.”지아는 그의 턱에 난 수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위로 올라가서 좀 씻어.”“알았어.” 도윤은 그녀의 손끝을 잡아 입술에 살짝 입맞춤하며 말했다. “이제 자기 정말로 안 화난 거지?”“정말이야.”그제야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지금 자신과 지아의 사이는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는 듯 위태롭기만 했다. 겨우 ‘연결고리’를 붙잡은 지금, 도윤은 다시는 지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제 자존심이든, 과거의 은혜든 이제 그 어떤 것도 지아보다 중요하지 않았다.샤워기 아래에서 도윤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전림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겠지만,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백채원의 소원을 다 들어주느라 정작 내 결혼 생활을 망쳐버렸어. 지금까지 그 은혜는 충분히 갚았어. 앞으로는 오직 우리 지아와 아이들을 위해 살 거야. 나를 옭아맸던 그 은혜의 족쇄, 이제는 내가 스스로 끊어내야 해!’도윤도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렇게 오랜 세월을 지아와 아이들과 만나지도 못한 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텐데...’방으로 돌아오니, 지아가 이미 도윤을 위해 옷을 준비해 두었다. 도윤은 예전부터 억지로 이 집에 자기 옷을 놔두고 다녔었다. 침대 위에 놓인 깔끔한 옷들을 보
채나는 도윤이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속이 복잡했다. ‘아빠와 의사 선생님은 이미 같이 사는 걸까?’ 어머니인 백채원이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채나는 어젯밤 자신이 본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집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속에서 채나는 또래보다 훨씬 성숙해졌고, 심리적으로는 이미 십 대 후반의 소녀처럼 내면이 깊고 예민했다.그래서 채나는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빠.”도윤은 책을 덮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백호는 채원을 밀고 들어와 도윤을 보며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대표님, 혹시 바네사 선생님과 잘 아시는 사이인가요?”“네, 아주 잘 알죠. 먼저 수술실로 안내할게요.” 도윤은 채원 일행을 데리고 지하실로 향했다.채원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도윤은 채원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 모두가 지하실에 도착했고, 수술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지아는 이미 마스크를 쓰고 수술복을 입은 채 살균 소독을 마친 상태였다. 방 안은 오직 수술대 위의 중앙 조명만 켜져 있었고, 어두운 모서리로 인해 그녀의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였다.도윤은 무심하게 말했다. “채원이를 수술대에 올려놓으면 나가도 돼요.”채원은 도윤이 지시를 내렸다는 말을 듣고,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마음속 불안이 더욱 깊어졌다.‘이도윤이 몇 년 동안 소지아를 찾아 헤맸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건 이도윤이 아직도 소지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바네사와 얽히는 걸까?’채원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도윤 씨, 혹시 바네사 선생님과는 어떤 사이예요?”도윤은 채원 앞에 서서 차갑게 대답했다. “내가 바네사와 어떤 관계이든 너와는 아무 상관 없어.”그 말만 남기고 도윤은 수술실을 떠났고, 너무 냉정해서 마치 낯선 사람 같았다. 채원은 그 말에 가슴이 시려왔다. ‘도윤 씨와 부부로 지낼 수 없다면, 최소한 친구로라도 남을 수는 없을까?’백호는 채원을 조용히 수술대에 눕히고 나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
두 손을 옆에 늘어뜨린 채 고개를 들어 채나를 바라보는 도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다는 아니야.” 도윤은 손을 뻗어 채나를 옆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냥 우리 채나에게 이야기 하나 해주고 싶은데.” 채나의 얼굴에 눈물이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만약 제가 아빠의 재혼을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빠가 그동안 엄마와 잘 지내지 못한 건 알지만, 아빠가 항상 혼자였다는 것도 들었어요.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나쁘지 않잖아요? 아빠는 왜 이렇게 서둘러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는 거예요? 저는 아빠가 다른 아줌마와 아이를 낳는 거 원하지 않아요. 아빠가 제 아빠이기만 하면 좋겠어요.” 도윤은 채나의 눈을 바라보며, 그 안에 비친 집착이 과거 백채원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이제라도 깨달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채나야, 진정해.” “싫어요!” 채나는 그대로 도윤의 품에 달려들며 눈물을 쏟아냈다. “아빠, 저와 엄마는 아빠를 정말로 사랑해요.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요. 엄마가 잘못한 건 알아요. 하지만 엄마는 이미 벌을 받았어요. 아빠는 엄마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잖아요? 엄마는 유명한 무용가였는데, 이제는 휠체어에만 앉아 있어요.” “적어도 예전에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잖아요? 학교에서 배웠는데, 부모는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대요.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오빠랑 제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겠어요?”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채나의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야, 네 아빠는 정말로 널 사랑했어. 그리고 네 엄마도 사랑했지. 하지만 그 아빠는 내가 아니야.” 채나는 깜짝 놀라 큰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아빠, 무슨 말이에요? 그 아빠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도윤은 채나를 옆으로 앉히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좀 길어...” 그는 전림과 자신 사이의 관계, 그리고 소지아, 백채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