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푹 쉬는 거야. 네 신원에 관한 건 언제든지 조사할 수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 마.” “머리가 너무 아파요.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아 두려워요. 오빠, 제발 부탁이에요.” 하용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가져오게 했다. 화연이 가장 잘하는 것은 수채화와 유화였고, 하용이 곁에 없을 때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림이었다.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그림에 몰두하면서 손끝에서 수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화연의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의 그림은 거칠고 강렬한 느낌을 풍겼다. 민연주가 그 독특한 화풍을 보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혹시 네가 그 ‘Lee’라는 화가니?” Lee는 국제적으로 매우 유명한 화가였다. 8년 전, Lee의 작품 ‘역풍’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고, ‘금화상’을 거머쥐었다. 그때부터 Lee의 모든 출품작은 엄청난 가격에 팔리기 시작했다. 특히 ‘역풍’은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진 수집품으로 꼽혔고, 민연주는 이 그림을 60억에 구매했다. ‘60억’은 갓 데뷔한 신인 화가에게는 매우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민연주는 명문가 출신이며, 외가도 학문과 예술을 중시하는 집안이었다. 어머니도 근현대 유명 화가였기 때문에, 민연주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고, 여가 시간에는 미술 전시회를 다니며 취미 생활을 즐겼다. 당시 민연주는 ‘금화상’ 시상식에 초대받아 시상자로 나섰고, Lee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Lee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시상식 당일 화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한 비서가 대신 시상식에 참석하여 상을 받았다. 그 후로 Lee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듯이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고, 민연주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즉, 그렇게 잠재력이 있는 화가가 사라진 것이 말이다. 지금도 그 그림은 민연주의 침실에 걸려 있어 매일 그녀에게 ‘인생’이란 역풍을 헤쳐 나가는 것과 같다는 걸 상기시켰다. 화연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아는 미셸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잠에서 깨서 투덜거리며 말했다. “정말 시끄럽네.” 옆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자의 혀를 잘라버릴까?” 지아는 잠이 확 달아나서 눈을 떴다. “점점 더 폭력적이네.” 도윤은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자기야, 나에게는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해. 미셸이든 다른 사람이든, 네 행복만큼 중요한 건 없어.” 미셸의 소란 덕분에 지아는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지아도 미셸이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지 궁금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가 보니, 미셸의 방 앞은 이미 엉망이었다. 미셸의 욕설이 계속해서 귀에 들려왔다. “너희들 같은 쓸모없는 것들, 아침밥 하나 제대로 못 만들다니. 이렇게 주인을 우롱해도 되는 거야?” 지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 재료들을 한 번 훑어보고, 미셸이 뜨거운 국을 끼얹은 듯한 젊은 가정부의 상태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이 가정부는 새로 온 사람이라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부씨 가문의 아가씨가 까다롭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일을 떠넘기다 결국 자신에게까지 일이 떠밀려온 것이었다. “아가씨께서 아침 식사를 달라고 하셔서 여러 종류를 준비했는데, 입맛에 맞지 않으신다며 화를 내셨어요.” “왜 남에게 말하니? 내가 부씨 가문의 진짜 아가씨야! 이 배신자들!” 지아는 어린 가정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가서 화상 연고 발라. 여기는 내가 처리할게.” “하지만...” “괜찮아. 가도 돼.” 어린 가정부는 지아에게 감사하는 눈빛을 보내며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미셸은 이를 보고 크게 화를 냈다. “소지아, 너 잘난 척 그만해. 아빠가 너를 인정했다고 해서 내 앞에서 잘난 척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부씨 가문의 진짜 아가씨는 나야!” ‘진짜 아가씨’라는 말이 미셸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더욱더
부장경은 화가 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이제는 내 앞에서 연기할 생각도 없는 거냐?”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마치 자신이 지아의 남편인 양 지아를 눈 속에서 한 팔로 감싸 안았다. “이미 다 들켰는데 제가 뭘 더 아닌 척하겠어?” 만약 도윤이 부씨 가문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이씨 가문이 주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기 전, 그는 부남진에게 한 방에 당할 게 뻔했다. 부남진이 일부러 눈감아 주는 한, 도윤도 그저 부남진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 “지아가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부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도 상관없어.” 도윤을 바라보는 장경은 도윤의 모습이 마치 꼬리를 흔들며 친근함을 표시하는 커다란 강아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 부씨 가문은 도윤을 사위로 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 이젠 도윤이 스스로 부씨 가문으로 들어오겠다고 자청하다니. “세상 참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쥐가 고양이 결혼식의 들러리를 서는 꼴이라니.” 부장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꿈 깨라. 우리 집안은 네가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도윤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허락하든 안 하든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느낀 지아가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아까 파도리에 간다고 했잖아. 거기에는 왜 가는 거야?” “미셸의 할머니는 A 시 외곽에서 살고, 외할머니는 외진 어촌에서 살았어. 만약 누군가 아이를 숨기려 한다면, 어디에 두겠어?” “거기가 파도리?” “그래. 그리고 내 사람들이 미셸의 할머니도 한때 한 어린 소녀를 데리고 있었던 걸 알아냈어.” 지아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도윤은 이미 지아를 돕기 위해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일로 지아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부장경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히 사람들 눈길 끌려고 생색
운전기사는 뒷유리에 생긴 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스, 차가...” “상관없어. 물은 튀었나?” “네, 튀었습니다.” “그럼 됐어.” 운전기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스도 오랜 세월 참고 살더니, 앞으로 그 화가 폭발하든지 아니면 정말 기이한 방식으로 나타날 것 같은데.’ 하용이 본래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행동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의 방식은 점점 예측 불가능해졌다. 한편, 지아는 마을의 건물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전에 자연재해로 많이 파괴된 적이 있지 않았어?” “맞아. 아가씨, 우리 마을은 20여 년 전에 큰 홍수가 났어. 그때 물이 정말 무서웠지. 우리 마을이 워낙 가난해서 복구도 제대로 못 하고, 지금도 20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한 노인이 다가와 말했다. “혹시 이 마을에 투자하러 오신 건가요?” 두 사람의 옷차림은 마을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눈에 봐도 부자인 게 분명했다. 요즘 많은 마을이 어려웠던 삶을 벗어나 잘살게 되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다른 마을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누구든 큰 사업가가 와서 이곳에도 투자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지아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며 물었다. “어르신, 혹시 예전에 그 큰 홍수 때, 한 어린 소녀가 휩쓸려 간 적이 있나요?” “어린 소녀? 그건 뭐라 말하기 어렵구먼. 그때는 사람도 집도 많이 떠내려갔으니까.” 도윤은 지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생각이 난 거야?” “아직 확신할 수 없어. 혹시 현금 있어?” 도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수표는 안 될까?” 지아는 그의 주머니에서 개봉하지 않은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도윤은 조금 당황한 듯 귀 끝이 붉어지며 말했다. “자기야, 나... 그냥... 심심할 때 한 대 피우는 거야. 요즘 담배 거의 안 피워.” 지아는 담배를 노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르신, 부탁 좀 드릴게요. 제가 찾는 그 소녀는 그때 큰 홍수 당시 7살이었을
지아 역시 과거에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경험이 있기에, 지아는 화연을 도와주고 싶었다. “우리 지아, 참 바보같긴. 이 세상에 네가 겪은 고통만큼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도윤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아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다. 부장경과 하용은 이미 맞닥뜨려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서로 마주친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하용은 차갑게 부장경을 쳐다보며 물었다. “미셸 때문에 여기에 온 거예요?” 하용은 부씨 가문의 저택에서 명확히 서로의 관계를 끊은 이후로 부장경에게 더 이상 공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부장경에 대한 존경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용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과 함께 인내심이 바닥난 모습이 역력했다. 이렇게 교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하용의 태도를 본 부장경은 어느 정도 하용의 입장을 이해했다.“오해하지 마라. 미셸 때문에 온 건 맞지만, 미셸을 도와주려고 온 건 아니야.” 하용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부씨 가문은 필사적으로 가족을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누가 쉽게 가족이 위기에 처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그렇다면 여기 온 이유가 뭡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 두 사람은 동시에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누구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니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때 뒤에서 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촌, 하용 씨, 두 분의 목적이 같으니 인제 그만 다투세요.”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동시에 지아의 말을 곱씹었다. ‘목적이 같다고?’ ‘우리의 목적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지아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말했다. “하용 씨, 제 추측이 ㅇ, 오늘 오신 이유는 여동생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죠?” 하용은 지아의 말에 잠시 멈칫하며 도윤을 쳐다봤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수법을 써서 내 비밀을 알아냈나?’ 도윤은 팔짱을 끼며 비웃었다. “날 쳐다보지 마.
“맞아요. 제 추측이 맞다면, 당시 이명란이 아이들을 몰래 바꾼 후, 그 아이를 고향으로 데려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키우게 했어요. 그리고 매일 독약을 먹여서 마치 그 아이가 병약해서 죽은 것처럼 꾸민 거죠.” “그러니까 화연이가 매일 먹을 것도 부족한데도 유독 매일 우유 한 병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 독이 우유에 섞여 있었던 거죠.” 하용은 두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그때 홍수가 나서 외할머니가 화연이에게 집에 가서 중요한 서류를 가져오라고 속였고, 결국 화연이는 홍수에 휩쓸려 사라졌어요.” 부장경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싸늘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바로 문을 발로 차서 열어버렸다. 하지만 정원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누군가 사는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없네.” 마침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당신들, 혹시 향자 할머니를 찾는 거요? 그 할머니는 오래전에 떠났어요.” 지아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아주머니, 혹시 향자 할머니 집과 잘 아세요?” 그녀는 주머니에 현금이 없어서, 귀에서 진주 귀걸이를 빼서 아주머니 손에 쥐여주었다. 아주머니는 눈이 반짝였다. ‘이들 모두 비싼 차를 타고 온 부자들이니, 진짜 귀걸이임이 틀림없지.’ 아주머니는 바로 귀걸이를 주머니에 넣고 말했다. “그럼요.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이웃사촌으로 지냈어요. 그 집 일은 100가지 중 99가지는 알고 있죠.” “그럼, 아주머니께 여쭐게요. 향자 할머니가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키운 적 있나요?” “맞아, 그 아이가 ‘영애’였어요. 불쌍한 아이였죠. 듣자 하니 영애의 엄마는 도시에서 부잣집에서 일하는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더라고요. 매번 마을에 돌아올 때마다 금은보화를 걸치고 마치 자기가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함께 자란 우리 친구들까지 우습게 여기는 거잖아요.”“그럼 향자 할머니가 영애를 잘 돌봤나요?” “잘 돌보다니, 말도 안 돼요. 명란이의
화연은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민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모님,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민연주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네가 내 딸일 가능성이 커.” 그녀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의 전말을 화연에게 설명했고, 의사를 불러 친자 확인 검사를 하기로 했다. 화연은 여전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내가 사모님의 딸이라는 거지?’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화연도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연주는 이미 기쁨에 넘쳐 있었다. 화연이 이제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민연주는 이 아이를 빨리 집으로 데려가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민연주가 왕성철에게 준비를 지시하던 중, 윤미래가 기분 좋게 병실로 들어왔다. “재수 없는 년, 네가 진짜 운이 좋구나. 이렇게까지 살아남다니...” 윤미래가 말하며 병실로 들어오다가, 민연주가 왕성철과 통화하고 있는 장면과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윤미래의 등 뒤가 싸늘해졌다. 자신이 마치 맹수에게 사냥감을 노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민연주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굳어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처리해.” 윤미래는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얘는 정말 운이 좋네요. 오늘도 보러 오셨군요.” “아까 뭐라고 했지?” 민연주의 검은 눈동자는 차갑게 윤미래를 노려보았다. 윤미래는 민연주가 약간 불쾌해하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민연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미셸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으니까. “사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하씨 가문은 이번 일을 문제로 삼지 않을 겁니다. 화연이 이 년은 아무리 해도 죽지 않을 테니, 설령 죽더라도 그건 미셸 아가씨와는 아무 상관이...” 찰싹!민연주는 손을 들어 윤미래의 뺨을 세게 때렸다
화연이 고모가 된다는 사실은 지아에게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이전에 지아와 미셸의 사이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지아는 매번 부남진의 입장을 생각하며 미셸의 온갖 행패를 참아왔다. 이제 화연이 고모가 되었으니, 지아의 마음속 빈자리가 채워졌다. “선, 선생님, 얼굴이...” 오늘 지아는 변장하지 않고,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화연은 지아의 그 거의 완벽에 가까운 얼굴을 보며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전에는 몇 가지 이유로 신분을 바꿔야 했어요. 이 얼굴이 원래 제 얼굴이에요. 고모님, 할아버지가 고모님을 보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민연주는 지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예전에는 미셸 때문에 너와 좀 불편한 일이 있었지. 지아야, 화연이가 정말 고생 많이 했어. 제발 예전 일 때문에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줘. 난...” “할머니, 저 다 이해해요.” 지아는 부드럽게 민연주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저는 화연 씨를 줄곧 제 환자로 생각해 왔어요. 화연 씨가 누구이든 간에, 최선을 다해 치료할 겁니다.” 민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가에 서 있는 하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용아, 우리 화연이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네 덕분이야. 예전에 네가 우리 집에 했던 말은 모두 없던 일로 할게. 네가 내 딸에게 잘해준 만큼, 우리 집안도 너에게 보답할 거야.” 하용은 화연을 데려가려는 민연주를 보며 마음속에서 씁쓸함과 허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내가 예전에 그토록 원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 포기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이렇게 쉽게 주어지다니.’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하용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그는 천천히 화연에게 다가가, 민연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모님, 비록 사모님과 화연이 모녀간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화연이가 가족을 찾은 것도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모님이 화연이 친어머니라고 해도, 화연이를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