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도련님, 지금 뭐하신 거예요?”이명란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아가씨께서 홀몸이 아니시라 고요.”“아직 임신 중이라 감금하는 거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말이야.”“그래도 가둘 필요는 없잖아요. 아니면 저까지 감금해주세요. 혼자 두는 건 걱정돼서 안 될 것 같아요.”미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명란이다.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라온 미셸인지라 항마력이 없다.부장경이 앞으로 나서자, 부남진을 닮은 얼굴이 엄청난 압박감을 안고 와서 이명란을 당황하게 했다.“미셸을 엄청나게 여기는 것 같아?”이명란은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네, 제 아이는 태어나서 요절했습니다. 아가씨는 제가 키웠으니 당연히 아가씨가 안쓰럽습니다.”“어쩐지 성격도 지랄 맞은 것이 점점 외모까지 닮아가는 것 같아.”그 한 마디는 이명란의 마음속에 폭탄으로 터져버렸다.아무것도 모르는 미셸은 계속 부채질을 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부씨 가문의 핏줄이라고 저런 천한 하인의 핏줄이 아니라!”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명란은 겨우 소리를 냈다.“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먼저 사모님한테 가 보겠습니다.”부장경이 갑자기 길을 막자 이명란은 점점 더 당황스러워졌다.“이게 무슨 뜻입니까?”“설마 사람을 피 토할 지경까지 때리고 나서 빠져나가려는 건 아니지? 미셸도 피해가지 못하는 일을...”이명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아가씨를 정말로 포기하신 겁니까?”“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할 만큼 다했는데.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이다가 지금까지 뉘우치지도 않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 하용이 어떻게 하든 절대 끼어들지 않을 거야. 감옥에 가든지 집행유예를 받든지 모두 미셸 팔자야.”이명란은 갑자기 부장경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하기 시작했다.“제발 좀 나서서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친동생이잖아요. 정말로 법정 싸움까지 가게 된다면 부씨 가문의 체면도 깎이는 거잖아요.”“집사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아
어떤 일은 생각하지 않으면 별일이 없으나 일단 생각하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게 되어 있다.“이제 곧 결과 나와.”부남진이 일깨워 주었다.“결과가 나올 때까지 어떤 가정도 가능성도 하지 마.”“네.”이때 집사가 들어왔다.“각하, 이씨 가문에 관한 자료입니다.”자료를 훑어보는데 볼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이씨 가문은 어촌 어민으로 대대로 가난했는데 이명란이 열 살 되던 해에 부인을 구하고 쌀집에서 일하며 부인 곁으로 차근차근 다가갔습니다.”원래 긍정적인 이야기였지만, 이명란이 민연주를 믿고 그 어촌에서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살았다.이씨 가문은 일찍이 어부로부터 사회인이 되었고 고리대금을 대출했으며 심지어 몇몇 페이퍼컴퍼니도 돈세탁에 연루되었다.부남진은 서류를 민연주에게 던지며 말했다.“봐봐.”민연주는 점점 더 당황했다.“난 모르는 일이야. 그냥 수속 좀 도와달라고 해서 작은 회사인 줄 알았어.”부남진은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이런! 파렴치한 년을 봤나!”“아버지, 진정하세요.”부남진은 화가 치밀어 올라서 관자놀이가 튀어 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약.”민연주는 얼른 약을 가져와 그에게 먹였다.“진실이 곧 밝혀질 텐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친자 검사 결과가 빨라도 몇 시간 정도는 돼야 나올 텐데 기다리는 동안 매초가 지옥이었다.민연주의 머릿속에 화연의 작은 얼굴이 떠올랐다.자기가 나온 뒤로 윤미래가 또 어떻게 괴롭힐지 걱정되었다.분명히 미셸과 비슷한 나이의 화연은 그토록 말라 있었고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뭐라도 좀 더 끓여서 가져다줘야 겠어. 안쓰러운 아이야.”“미셸을 위해서 그러는 줄 알았어요.”민연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처음에는 그랬지만 화연을 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알 거야.”음식을 챙겨 들고 병원에 도착하자 하용의 사람들이 민연주를 막아섰다.부장경도 함께 왔고 지금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하용이 나오라고 해.”하용도 감히 홀대하지 못하고 곧 문
화연의 시선이 민연주의 따뜻한 눈빛과 마주쳤을 때, 마음속 가장 약한 곳이 살짝 흔들렸다. 평생 한 번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화연은,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인 민연주의 인자한 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연주가 진심이든 아니든, 이 순간만큼은 화연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배려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너무 귀한 물건이라 받을 수 없어요.” “너는 참 좋은 아이야, 그냥 받아. 이걸로 너와 거래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빨리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거란다.” 부장경은 손에 들고 있던 과일과 꽃을 내려놓으며 화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 잘못이었어요. 저와 어머니는 미셸의 부탁으로 온 게 아니에요. 우리는 진심으로 아가씨가 빨리 낫길 바라고 있어요.” 하용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가만히 살폈다. 부장경과 민연주의 속 깊은 마음을 아는 하용은 두 사람의 그런 따뜻한 배려 너머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선뜻 하기 어려웠다. 사실 지금 미셸의 유전자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기도 전인데, 미셸이 정말 부씨 가문의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부씨 가문은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만약 미셸이 조금이라도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가졌다면, 부씨 가문의 사람들도 어쩌면 조금이나마 미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셸은 지금까지도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마치 세상이 모두 자신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셸의 이런 배은망덕하고 잔인한 처사에 부씨 가문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민연주는 화연의 부어오른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쩜 이렇게 심하게 부었니?” 지아가 설명했다. “화연 씨의 몸은 어릴 때 중독되었던 병력 때문에 면역력이 매우 약해요. 그래서 상처가 회복되는 속도도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느리고요. 그래서 같은 상처라도 보통 사람은 삼일 정도 지나면 낫지만, 화연 씨는 일주일, 아니 더 오래 걸리기도 해요.
민연주의 위로 덕분에 하루 종일 몸이 아팠던 화연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고, 식사 후 극심한 피로 때문에 잠이 몰려오자 눈을 감고 서서히 잠에 들었다. 민연주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 아이, 진짜 상태가 어떠니?” 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앞으로 임신은 어려울 거예요.” “뭐, 뭐라고? 아직 저렇게 젊은데...” 민연주는 같은 여자로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화연 씨가 태어나자마자 독을 먹은 것과 관련이 있어요. 화연 씨의 몸에 아주 적은 양을 주입했기 때문에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어요. 그러다 홍수에 휩쓸렸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게다가 운 좋게 하씨 가문에 발견되었어요. 하씨 가문은 화연 씨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썼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지아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화연 씨가 겨우 몸을 추스르는 중이었는데, 이번 임신은 화연 씨에게 너무 큰 대가를 요구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폭력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잃었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할머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화연 씨는 이미 제 환자니까 제가 최선을 다해 치료할 겁니다. 부씨 가문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제 양심이기도 해요.” “고맙구나.” 지아는 시계를 한번 확인한 뒤 물었다. “할머니, 아직 안 가세요?” 할 일은 다 끝냈으니 민연주와 함께 가려고 했지만, 민연주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너 먼저 가거라.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게.” 지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민연주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민연주는 때로는 조금 계산적일지 몰라도, 모성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미셸에게 보여주는 태도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지아도 민연주가 단순히 미셸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화연이
차 안에서 지아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부장경이 손을 들어 지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피곤해 보이네?” “약간요. 이제 C 국의 생활 패턴에 익숙해지니, 며칠 있으면 나아질 거예요.” 지아는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이때 부장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 파트너였던 그 사람, 죽지 않았어.” 지아는 오늘 하루 너무 바빠서 시억을 거의 잊고 있었는데, 방금 들은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요?” “한대경도 시억을 잡지 못했어. 공항에서 한대경은 너를 속이려고 한 것뿐이야. 내가 널 데리고 가긴 했지만, 네 신분이 노출된 셈이지. 한대경은 이도윤과 수년간 맞서 온 사람인데, 매우 까다로운 상대야. 그리고 한대경은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삼촌, 저도 알아요. 지금은 제가 부씨 가문에 있으니 한대경도 저를 어쩌지는 못할 거예요, 그렇죠?” 부장경은 한숨을 쉬었다. “넌 남자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특히 한대경 같은 ‘발정난 맹수’는 더더욱 말이야.” 지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부장경이 말한 ‘발정 난 맹수’이라는 말은 한대경에게 매우 적절한 묘사였다. “지아야, 네가 반지를 빼돌렸지? 그 반지가 네 손에 있었을 때 왜 폭발하지 않았는지 알아? 그 반지는 착용자의 신체 징후를 자동으로 감지해. 네가 훔쳤을 때도 한대경은 네가 다치지 않길 원했어. 그러니까 한대경이 화가 난 이유는 네가 반지를 훔쳐서가 아니라, 네가 떠나려 했기 때문이야.” 지아는 한대경과 헤어지기 전날 밤, 한대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아를 위해서라면 남편과 아이들까지 데려와도 좋다고 했던 한대경이었다. ‘한대경을 속였으니, 다음에 만나면 그 사람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지아야,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네가 앞으로 위험에 뛰어들지 않는 거야. 지금은 네가 우리 집 안에 있으니, 한대경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하려면 먼저 하늘에 올라가야 할 만큼 어려울 거야.
부남진은 손을 들어 아들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이명란이 이렇게 대담하게 일을 벌였다는 건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고. 우리가 강제로 추궁하면, 이명란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어. 이명란이 죽으면, 우리도 더 이상 네 친동생의 행방을 알아낼 방법이 없을 테니.” “그럼, 아버지의 뜻은...” “다각도로 준비하고, 두 가지 방식을 병행하자.” 부남진은 곧바로 대책을 세웠다. “당시 이명란과 네 어머니가 동시에 출산했으니, 이명란이 데려간 그 아이가 바로 네 친여동생일 거야.” 부장경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 “하지만, 이명란의 아이는 이미 죽었어요. 정말로 제 여동생이라면...” “그렇다면 이명란의 집안이 피로 갚아야 해!” 부남진의 이마에 드리운 살기는 무시무시했다. 부장경은 급히 떠나고, 방 안에는 지아와 부남진만 남았다. 지아는 작은 목소리로 부남진을 진정시키려 했다. “할아버지, 고모님은 분명 살아 계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남진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의자에 기댔지만,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지아야, 너에게 우스운 꼴을 보였구나. 내가 평생 아끼고 사랑한 딸이 가짜였다니. 고작 우리 집안에서 일하는 고용인 하나가 이 긴 시간 동안 우리를 이렇게 농락해 왔다니.” 이 진실이 밖으로 새 나가면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지아는 부남진에게 이 일이 얼마나 큰 충격일지 이해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할아버지, 모든 일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속았지만, 만약 고모님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 아니겠어요?” 부남진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너도 이명란이 어떻게 사람을 때리는지 봤잖아. 저 사람은 아주 잔인해. 내 딸이 이미...” “할아버지, 결과는 아직 모르잖아요. 왜 그렇게 빨리 포기하려고 하세요? 그 아이는 할아버지의 친딸이에요. 저라도 이명란을 바로 죽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만약 저를 믿으신다면, 제가 삼촌
부장경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가끔 너무 순진하신 것 같아.’ 매번 미셸이 친 사고를 수습할 때마다 민연주는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민연주가 보기엔, 미셸이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다면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민연주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히도 미셸이 자신의 딸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정말 친딸이었다면, 그때는 부씨 가문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을 테니까.“어머니, 지금 중요한 건 미셸이 아니라 제 친여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제야 민연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당장이라도 이명란을 찾아가 따질 기세로 일어섰다. “이명란이 그 당시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고 했었는데, 설마 우리 딸을...” “어머니,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세요. 이명란은 교활하고 음험한 사람입니다. 지금 가서 이명란을 추궁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궁지에 몰리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니?”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미 사람들을 시켜서 여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이명란에게서 정보를 캐내세요. 이명란을 안심시켜야 해요.” 민연주는 얼굴이 굳어지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명란에게 그동안 그렇게 잘해주고 친동생처럼 아껴왔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부장경은 차분하게 말했다. “사람의 욕망은 밑바닥이 없는 구덩이 같아.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지.” 민연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불쌍한 내 딸,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서재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걱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흐른 지금, 그 불쌍한 여자아이가 과연 아직 살아 있을지, 혹은 이미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부남진은 민연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
이명란은 민연주가 소파에 앉자마자 무릎을 꿇고 바로 민연주 앞에 납작 엎드렸다. “사모님, 이번 일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아가씨가 저에게 하용이 자신에게 얼마나 냉담하게 대하는지 이야기했어요.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아가씨는 제가 어릴 때부터 키워온 아이라 순간적으로 사모님께 상의하지 않고 일을 처리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상대쪽 사람들과의 충돌이 있었고, 그때부터 사모님 앞에 다시 얼굴을 들고 나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에 따른 결과는 모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명란은 매우 영리했다. 이 말 한마디에도 미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누구라도 그녀를 충실하고 헌신적인 고용인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와 동시에 민연주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민연주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민연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렇다면 좋겠지. 그랬다면 걱정할 일도 없었을 거야. 오늘은 내가 화연이 그 아이에게 맑은 북엇국을 보내주고, 하용을 설득했지만, 하용도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어. 끝까지 우리 집안과 싸워서 정의를 찾겠다고 말하더군.” 이명란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우리 아가씨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번에는 어떻게 해도 쉽지 않을 거야. 하용은 사람도, 증거도 모두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미셸의 과거까지도 쥐고 있어. 우리 쪽에서 계속 하용을 자극하면 예전 일까지 다 드러날 테니, 이번에는 단순히 몇 년 형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이명란은 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 있던 일들은 제가 모두 깔끔하게 처리해 두었으니 약점이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설령 미셸이 무사히 넘어간다 해도, 너는 보호받지 못할 거야. 네가 내 곁을 지킨 세월이 적지 않으니, 네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줄게.” 이명란은 잠시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사모님, 그동안 사모님께서 저를 이미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