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지아는 마치 장사꾼처럼 이른바 말하는 선량함을 떠나 오로지 이익과 득실만을 계산했다.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아야, 그건...”몇 명의 아이들이 모두 지아 곁에서 자랐는데 도윤은 그녀와 아이들의 양육권으로 다툰 적이 없었다. 그는 오직 지윤만이 이씨 가문의 모든 책임을 짊어질 자격이 있다고 생가했다.“난 당신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어. 하지만 지윤이만큼은 안돼. 당신이 그 아이를 아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이씨 가문은 나 이후에 뒤를 이을 후계자가 필요해.”“당신이 주지않겠다면 나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도윤은 갑자기 몸을 숙여 지아의 입술을 사납게 깨물며 키스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벌주었다.지아는 이미 도윤과 싸우며 협상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도윤는 지아와 다시 불편한 관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진한 키스 후에 지아를 놓아주었다. “알았어. 지아,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게. 그럼 오늘 내가 한 부탁은 없었던 것으로 해.”그는 뒤로 물러났다. “네 말이 맞아.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그저 당신 곁에 내 자리를 내어준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기뻐. 어렵게 얻은 이 유일한 기회를 잃고 싶지는 않아.”“오늘 밤 쉬는 데 방해해서 미안해.”도윤은 자신의 외투를 들고 떠났다.지아는 배웅하며 흩날리는 눈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서글픈 보였고 예전의 그 고고함은 온데간데없었다.지아는 순간 이유없이 그녀를 바다에서 끌어올리던 양 팔이 떠올랐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구해줄게.”갑자기 없던 정이 생기더니 점점 켜졌다.그 순간 그녀는 이미 마음이 약해져 완전히 진 거나 다름없었다.“저기, 도윤 씨!”도윤은 황급히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지아는 문 옆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도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지윤이 양육권은 필요 없어.”지아는 본래 도윤과 다툴 생각은 전혀 없었
지난번과 달리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입구에는 경호원, 의사, 눈시울이 붉어진 설아 등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아는 우서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저씨, 이 의사가 정말 아버지를 구할 수 있나요?” 지아는 도윤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저 여자도 여기 있어?” 도윤이 설명했다. “이름은 부설아야.” “제발 당신이 말하던 그분이 저 여자 아버지라고는 하지 마.” 도윤은 난감한 듯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그게 얘기하자면 길어. 네 짐작 대로 설아는 확실히 각하의 딸이 맞고 각하는 나의 은사이기도 해.” 지아가 차갑게 말했다. “아주 좋은 소꿉친구 납셨네.” 도윤은 이런 개인적인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조금 난처했다. 그때 누군가가 차문을 열었다. 설아가 재빨리 달려왔다. “의사 선생님...” 설아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네사인 것을 보고는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녀는 녹색 눈동자의 한 소녀가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무서운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천사처럼 착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악마가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괴물을 낳은 여자라면 좋은 사람 일리 없잖아!’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여기는 또 뭐 하러 왔죠?” 반면 우서진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자식, 그래도 네가 방법을 찾았구나. 바네사를 모셔오다니!” 원래 우서진이 처음 염두에 둔 인물은 바로 지아였다. 단지 마을에 연락이 되지 않았고 설사 자신이 사람을 보냈다고 해도 그녀가 정말 올지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지아는 사라진 상태라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윤이 뜻밖에도 지아를 데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서진은 설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설아야, 괜히 무례하게 굴지 마. 이분은 정말 최고의 심외과의사야. 이제 선생님이 오셨으니 각하도 살 수 있게 됐어.” 설아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육감은 마을에서 처음 지아를 본 이
지아는 여전히 담담한 모습이었다.“네, 전 못 하겠어요.”우서진도 전에 있었던 일로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말했다.“아이고 두 사람도 참, 설아야 넌 옆으로 가 있어. 넌 바네사에 대해 몰라. 작년에 했던 수술이 오늘보다 더 어려웠어. 그때는 심장에서 총알을 빼내는 거였는데 그 사람 결국 살았어.”“웃기네, 총알이 심장에 박혔는데 어떻게 살아요?”지아는 비웃었다.“서로 전문 분야가 다른데 그쪽한테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해요?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고? 선생님, 이곳에서 절 반기지 않는다면 하겠다는 사람한테 맡기세요. 전 안 할 거예요.”“그러지 말고 여기까지 왔는데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 한 번 보는 게 어때요?”“그래요.”지아는 우서진을 따라 중환자실로 들어갔고 오기 전에 이미 모든 검사 결과를 살펴본 그녀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병실에 들어서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았다.뉴스에서 늘 보던 남자가 지금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미셸과 제법 닮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에 미셸이 그토록 오만한 것도 당연했다.“언제 다쳤어요?”“새벽 5시 30분요.”그 말에 전효가 다친 것도 그때였기에 지아의 눈이 번뜩이며 머릿속에는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부남진을 죽이려 했던 게 전효였을까?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지아는 자신이 이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전효가 자신과 상대의 목숨을 바꿨는데 도윤을 위해 그를 살리는 데 동의하다니.“왜 그래요, 힘든가요?”지아의 얼굴은 여전히 침착했다.“상황은 알겠고 나가서 얘기하죠.”지아는 전효가 죽이고자 하는 적이 이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밖으로 나오자마자 도윤이 다가왔다.“어때?”지아가 둘러댈 말을 생각하던 중 복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왔고 상대는 다름 아닌 하용이었다.하용의 곁에는 개량 한복을 입고 안경을 쓴 백발의 노인이 동행하고 있었다.지아가 알기로 그는 유명한 심장
하용은 젠틀한 척 보여도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몇 년 전 눈 내리는 밤, 상대가 비록 도윤을 노리긴 했어도 도윤이 온몸을 던져 지아를 지키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작 죽은 시체가 됐을 것이다.이 모든 일의 주범은 하용이고, 지아는 단 하루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하지만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하용과 달리 지아는 정체를 숨겨야 했다.미셸이 서둘러 말을 꺼냈다.“오빠, 저 여자 막아야 해. 선생님도 뭐에 홀린 것 같아. 아빠 목숨이 위태로운데 저 어린 여자가 무슨 경험이 있겠어? 우리 아빠를 실험용 쥐로 취급하는데 자칫하면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설아야, 진정해.”하용은 미셸을 진정시키고 민연주를 돌아보았다.“사모님, 설아 말도 일리가 있어요. 이 아가씨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나이도 젊은데 어떻게 경험 많은 장 교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민연주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도윤이 넌 늘 진중하니까 네 생각에는...”도윤은 긴 말 대신 딱 한 마디 했다. “전 이 사람 믿습니다.”지아는 속으로 믿지 말라고 되뇌었다. 정말 전효가 죽이고 싶었던 게 이 사람이라면 구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상했다. 총알이 조금만 비껴갔으면 부남진은 바로 죽을 수 있었는데 전효가 거리를 잘못 계산한 걸까?하지만 잘 보이기 급급한 하용의 모습을 보며 지아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모든 게 전효가 일부러 꾸민 것 같았다.전효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하용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그렇지 않고서야 왜 하필 다친 부분이 심장이며, 하용이 장연후를 미리 찾아냈겠나.진실은 오리무중인데 외부인인 지아가 어떻게 알까.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우서진도 장담하듯 말했다.“이 여자가 나이는 어려도 정말 대단해. 이 사람 아니었으면 도윤이는 진작 죽었을 거야. 작년에 했던 수술도 아주 완벽했어. 장 교수가 경험이 많긴 해도 젊은 사람들한테 기회를 줘야지.”장연후는 하용과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당장에 반박했다.“우 교수, 자네 체면을
윤공훈이 성큼성큼 지아에게 다가왔다.“그쪽이 바네사죠? 우 교수한테 얘기 들었어요.”지아는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남들에게 들킬까 봐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애썼다.“안녕하세요. 윤 교수님, 바네사라고 합니다.”“그 유명한 바네사가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네요. 이 수술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지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미셸이 외쳤다.“윤 선생님, 저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수술해요? 장 교수님만큼 나이도 많지 않고 경험도 없는데 우리 아빠가 죽으면 누가 책임져요!”“얘야, 바네사가 수술하는 영상 봤어. 나이가 어려도 침착하고 손놀림이 빨라. 장 교수는 나이도 들고 젊은 사람들처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해, 그리고...”윤공훈은 장연후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 수술할 수 없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윤 선생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우 선생님과 두 분이 장 교수님을 포기하고 이 정체불명의 의사를 감싸는데 각하께서 정말 수술 과정에 큰일이라도 나시면 책임질 수 있습니까?”하용이 다그쳤다.“수술은 원래 100% 장담할 수 없는 것인데 저렇게 어린 의사면 더 그렇죠.”도윤이 반박하려 하자 지아가 몰래 손바닥을 긁으며 말렸다.“됐어요, 다들 그만 다퉈요. 나도 중요한 일인 만큼 장 교수가 집도하는 게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민연주가 결단을 내리자 미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럼 더 늦기 전에 미루지 말죠, 아빠가 혹시라도...”우서진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윤공훈은 걱정이 가득했다.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그는 장연후에게 몰래 물었다.“장 교수, 솔직히 말해봐. 손은 좀 어때?”두 사람은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최고의 의사였고, 10년 전 장연후는 갑자기 병을 앓으며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던 적이 있었다.때마침 윤공훈이 함께 수술하며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 후로 장연후는 드물게 수술을 진행했고 병원에 재취업하는 것을 거부하며 정년퇴직했다.윤공훈은 지난 몇 년 동안 다시는 장연
지아는 받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상관없어요. 위험이 큰 수술이라 잘하면 유명해지겠지만 여차하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죠. 이도윤 씨만 아니었으면 안 왔을 거예요. 지금 저한테는 아무 영향도 없지만 장연후 씨가 실패하면 당신들한테 큰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무슨 소리야! 감히 우리 아빠를 저주해?”상대가 누구 딸이든 상관없다. 법과 질서가 있는 이 사회에서 말 한마디 했다고 죽이기야 하겠나.“미셸 씨, 저는 진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진심으로 당신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고 나중에 저한테 부탁할 일도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도윤 씨가 절 데려다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미셸이 욕설을 퍼부으려는 찰나 민연주가 입을 막았다.“그만하지 못해? 너랑 저 여자 신분이 같아? 대체 왜 이러는 거야!”“엄마, 저 오만하게 구는 게 싫어요. 의사가 얼마나 많은데 제까짓 게 뭐라고, 저 여자는 괴물을 낳은 요물이라고요!”민연주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됐어,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네 아빠는 아직 병원 침대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있고 네 오빠는 밖에서 상황을 안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얌전히 있어, 성가시게 굴지 말고.”“네, 엄마.”하용도 지아와 함께 자리를 떠났는데 지아가 먼저 차에 올라타자 하용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도윤을 바라보았다.“이번엔 네가 질 거야.”“그래.” 도윤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99번을 이겨도 이번 한 번 지는 걸로 충분해. A시 하늘이 바뀔 때도 됐지.”도윤이 눈을 흘겼다.“밤새우지 말고 일찍 집에 가서 잠이나 자. 꿈속엔 뭐든 다 있으니까.”그렇게 말한 뒤 차에 올라타 문을 닫고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지아를 품에 안고 대형견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지아야, 고생시켜서 미안해.”지아는 미소를 지었다.“당신 부탁만 아니었으면 수술하고 싶지 않았어. 도와주지 않았다고 화 난 건 아니지?”“저 자식 한 번 이기게 해 주지 뭐.”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하용이
지아의 얼굴엔 천진난만한 표정이 가득했다.“내가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수님 따라 수술 참관을 하러 갔는데 수술실에서 유명한 의사가 손에 경련을 일으켜 환자가 죽을 뻔한 걸 교수님께서 힘겹게 살리셨어. 그 유명한 의사가 누구인지 알아?”“장연후?”“맞아, 그 사람은 신경 질환이 있는데 고치기 어려운 병이야. 특히 큰 자극을 받으면 더 제어하기 힘들지. 의사라면 각하의 이번 수술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테고 큰 심리적 부담으로 발작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다 계산한 거야?”지아는 고개를 저었다.“계산이 아니라 운명이야. 그 사람이 수술을 더 어렵게 만들었으니 각하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도윤은 이 모든 것이 지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삶과 죽음은 모두 운명이다.눈보라가 흩날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지아가 따분한 듯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그 사람 처음 봤을 때도 큰 눈이 내리고 있었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이씨 가문의 자식이냐고 물어보셨지, 어르신처럼.”도윤은 한숨을 쉬었다.“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위치가 아니었어. 나랑 하용이 그 자리까지 올려보낸 거지.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원한 건 이익이 아니었어. 이씨 가문에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했던 건 이씨 가문을 지킬 수 있는 방패일 뿐이었지. 어렸을 때부터 이씨 가문에서 받지 못했던 따뜻함을 그분이 줬어.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나를 대해주셨어. 비록 나한테 잘해주는 것이 사람 마음을 얻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한테 따뜻함과 보살핌을 주셨던 분이 내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차마 못 보겠어.”지아는 메시지 전송을 마치고 휴대폰을 닫으며 도윤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시간 나면 과거에 대해 말해줘.”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아 네 말이 맞아. 이 수술은 너무 위험하니까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하기 싫다면 나도 존중할 수 있어. 많은 일을 겪으
민연주 역시 전에 말이 심했다는 걸 알고 우서진과 윤공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경험 많은 늙은 교수와 젊은 아가씨가 있다면 누구라도 전자를 택할 것이다.그녀는 또한 이 유명한 의사가 다소 오만하고 권력과 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모습을 감추는 지아였기에 돈이 아무리 많은 부자라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민연주는 지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우리가 잘못했어요. 조금 전 무시하고 오만하게 대했던 거 사과할게요.”“엄마, 뭐 하는 거예요? 정말 저 여자가 우리 아빠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엄마 같은 사람이 천민인 이 여자에게 무릎을 꿇어요, 얼른 일어나요!”천민?지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보아하니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이 어린 년은 아직 사회의 독한 맛을 겪어보지 못한 듯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지아가 민연주를 일으켜 세웠다.“사모님, 미셸 씨 말이 맞아요. 저 같은 천민에게 무릎 꿇을 여유가 없죠, 일어나세요.”민연주는 그대로 미셸을 바닥으로 끌어당겼다.“제 딸이 잘못했습니다. 전에 있었던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보아하니 사모님은 미셸처럼 안하무인으로 굴지 않고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 같았다.“엄마, 내가 왜 저 여자한테 무릎을 꿇어야 해, 저 여자는...”민연주는 손을 들어 미셸의 뺨을 때렸다.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윤공훈과 우서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들이 추천한 사람이니 분명 틀림없을 거다. 지아가 나서지 않으면 최악의 결과가 나와도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선다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었다.민연주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사과하라고 했잖아, 내 말 못 들었어? 언제까지 성질부릴 거야?”뺨을 맞은 미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온화했던 엄마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이 여자 때문에 자신을 때렸다. 하나같이 뭐에 홀렸는지 왜 저 여자를 믿는 걸까.민연주의 압박에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