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의 얼굴엔 천진난만한 표정이 가득했다.“내가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수님 따라 수술 참관을 하러 갔는데 수술실에서 유명한 의사가 손에 경련을 일으켜 환자가 죽을 뻔한 걸 교수님께서 힘겹게 살리셨어. 그 유명한 의사가 누구인지 알아?”“장연후?”“맞아, 그 사람은 신경 질환이 있는데 고치기 어려운 병이야. 특히 큰 자극을 받으면 더 제어하기 힘들지. 의사라면 각하의 이번 수술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테고 큰 심리적 부담으로 발작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다 계산한 거야?”지아는 고개를 저었다.“계산이 아니라 운명이야. 그 사람이 수술을 더 어렵게 만들었으니 각하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도윤은 이 모든 것이 지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삶과 죽음은 모두 운명이다.눈보라가 흩날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지아가 따분한 듯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그 사람 처음 봤을 때도 큰 눈이 내리고 있었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이씨 가문의 자식이냐고 물어보셨지, 어르신처럼.”도윤은 한숨을 쉬었다.“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위치가 아니었어. 나랑 하용이 그 자리까지 올려보낸 거지.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원한 건 이익이 아니었어. 이씨 가문에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했던 건 이씨 가문을 지킬 수 있는 방패일 뿐이었지. 어렸을 때부터 이씨 가문에서 받지 못했던 따뜻함을 그분이 줬어.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나를 대해주셨어. 비록 나한테 잘해주는 것이 사람 마음을 얻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한테 따뜻함과 보살핌을 주셨던 분이 내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차마 못 보겠어.”지아는 메시지 전송을 마치고 휴대폰을 닫으며 도윤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시간 나면 과거에 대해 말해줘.”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아 네 말이 맞아. 이 수술은 너무 위험하니까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하기 싫다면 나도 존중할 수 있어. 많은 일을 겪으
민연주 역시 전에 말이 심했다는 걸 알고 우서진과 윤공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경험 많은 늙은 교수와 젊은 아가씨가 있다면 누구라도 전자를 택할 것이다.그녀는 또한 이 유명한 의사가 다소 오만하고 권력과 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모습을 감추는 지아였기에 돈이 아무리 많은 부자라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민연주는 지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우리가 잘못했어요. 조금 전 무시하고 오만하게 대했던 거 사과할게요.”“엄마, 뭐 하는 거예요? 정말 저 여자가 우리 아빠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엄마 같은 사람이 천민인 이 여자에게 무릎을 꿇어요, 얼른 일어나요!”천민?지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보아하니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이 어린 년은 아직 사회의 독한 맛을 겪어보지 못한 듯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지아가 민연주를 일으켜 세웠다.“사모님, 미셸 씨 말이 맞아요. 저 같은 천민에게 무릎 꿇을 여유가 없죠, 일어나세요.”민연주는 그대로 미셸을 바닥으로 끌어당겼다.“제 딸이 잘못했습니다. 전에 있었던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보아하니 사모님은 미셸처럼 안하무인으로 굴지 않고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 같았다.“엄마, 내가 왜 저 여자한테 무릎을 꿇어야 해, 저 여자는...”민연주는 손을 들어 미셸의 뺨을 때렸다.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윤공훈과 우서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들이 추천한 사람이니 분명 틀림없을 거다. 지아가 나서지 않으면 최악의 결과가 나와도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선다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었다.민연주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사과하라고 했잖아, 내 말 못 들었어? 언제까지 성질부릴 거야?”뺨을 맞은 미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온화했던 엄마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이 여자 때문에 자신을 때렸다. 하나같이 뭐에 홀렸는지 왜 저 여자를 믿는 걸까.민연주의 압박에
부장경은 성숙하고 안정된 분위기에 강한 아우라를 풍겼다.“도윤이가 데려온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믿으니 마음 놓고 하세요.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최악의 결말이라도 당신과 상관없습니다.”지아도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소독하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갈게요.”지아가 도착하자 윤공훈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고 지아는 자신의 스승님을 힐끗 쳐다보았다.처음 학교에 들어왔을 때 윤공훈은 규칙을 어기고 지아를 수술실에 데려갔고 지아는 그때만 해도 늘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옆에서 공부하고 필기만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뛰어난 외과 의사로 되었고 선생님은 자신의 조수가 되었다.선생님,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을게요.윤공훈이 전에 있었던 과정을 설명해 주자 지아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눈빛에서 느껴지는 무력감과 걱정이 보였다. 의사로서 가장 두려운 게 눈앞에서 환자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때 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번거롭지만 제가 살릴 수 있어요.”그 순간 윤공훈은 고개를 번쩍 들며 마스크에 가려진 낯선 얼굴에서 지아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그럴 리가, 공부도 마치지 않은 그 아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단 말인가?낯선 상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윤공훈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정말요?”“네.”이걸 하려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아는 윤공훈의 안목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밖에서 시간이 흘러가며 모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특히 하용은 더욱 그랬다.평생 도윤과 싸워왔지만 이번만큼은 도윤과 같은 목적이었다. 만약 각하가 수술대에서 죽는다면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모두들 기도하고 있을 때 미셸만이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정말 그 말을 믿어요? 20대인 여자가 대체 무슨 능력으로?”“무슨 능력으로? 날 치료해 준 사람인데 그렇다고 널 믿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더 대단한 의사 찾아올 수 있어?”
미셸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듯했다. 부씨 가문이 무너지면 가문의 영광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그게 좋은 일인 줄 아나.미셸은 부장경의 주홍빛 눈을 마주한 순간 정말 공포를 느꼈다.오빠는 자신과 달리 어려서부터 군에 입대했고 자신이 어떤 명품을 살지 고민할 시간에 오빠는 이미 수없이 많은 공로를 세운 지 오래였다.부씨 가문의 덕을 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그는 고통과 굶주림을 겪으며 심연에서 빛으로 나아갔다.반면 미셸은 철없는 아가씨라 이런 상황을 전혀 몰랐다.“오빠, 아파...”민연주가 달려가 두 아이를 떼어놓았다.“그만해 장경아, 네 동생도 아빠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얘한테 화풀이해도 무슨 소용이야.”부장경은 차갑게 한 마디를 던졌다.“그렇게 싸고도니까 누구는 20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의사가 되는 동안 얘는 쓰레기나 됐죠.”지금 그녀가 누리는 지위도 도윤과 부씨 가문 덕분이었다.고고한 아가씨가 어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고생하겠나.남들은 목숨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지위를 미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었다.미셸은 굵직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위로를 받으려는 듯 도윤을 돌아보았다.옛정을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도윤은 장경이 대신 말해주자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위로는 무슨.그는 미셸의 눈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예전 같았으면 하용이 몇 마디 위로라도 해주었을 텐데 자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라 최대한 몸을 낮춰야 했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리며 순식간에 사람들이 다가갔다.가장 먼저 나온 우서진은 마스크를 쓰고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됐어!” 그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반짝였다.“천재, 정말 천재야. 저렇게 대단한 사람은 처음 봤어. 각하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내다니, 의학계 천재가 따로 없어!”“선생님, 아버지는 어떻게 됐어요?”“총알은 제거했지만 아직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이쪽으로 오시죠.”도윤은 지아를 방으로 이끌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며 문이 닫히는 순간 지아를 와락 끌어안았다.“지아야, 내가 잘못했어. 내 손으로 네 날개를 부러뜨리는 게 아니었는데.”당시 지아에게 공부를 그만두게 시켰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신과 결혼하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배우자가 최대한 몸을 감춰야 했고 또 다른 이유는 지아가 학교에서 하도 눈에 띄어 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향하는 게 싫었던 소유욕 때문이었다.이제야 도윤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지아야, 네가 자랑스러워, 넌 내 자랑이야.” 도윤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지아는 불과 몇 년 만에 이렇게 성장했다. 임종을 앞둔 그 시간 동안 지아가 국내외 의학 서적과 문헌, 수술 사례를 반복해서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걸 도윤은 알까.예전부터 선생님과 함께 수많은 수술을 지켜봤고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건의 수술을 직접 해봤으니 뛰어난 재능과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합쳐져 지금의 지아를 만든 것이다.지아는 도윤을 밀어냈다.“밤새워 고생해서 너무 피곤해. 내일 얘기해.”어젯밤 내내 도윤에게 시달리다가 두세 시간밖에 못 자고 전효의 수술을 진행하고 방을 치운 다음 또 몇 시간 동안 수술을 진행해 지아는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지아가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자 도윤은 안타까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잘 자.”지아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저쪽에 얼굴을 비춰야 했기에 도윤은 지아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병실을 나섰다.의사들은 방금 시행한 수술 과정을 되돌아보고 있었다.“재능이 대단한 여자야. 특히 칼을 잡은 손놀림이 나이 든 교수들보다 더 안정적이라니, 이런 천재를 키운 스승이 누구인지 모르겠네.”“천재라고 하면 윤 교수도 한 명 키우지 않았나? 툭하면 자랑하곤 했었는데.”“윤 교수, 줄곧 인재에 목말라하던 자네가 웬일로 이렇게 덤덤해?”윤공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무슨 얘기 중이었어?”“천재라고. 저 아
순식간에 복도에는 세 사람만 남았고 부장경은 무릎에 손을 올려놓은 채 똑바로 앉아 있었다.복도 끝 창문을 통해 찬바람이 세차게 들어왔고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사람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부장경은 차갑게 말했다.“이번 공격은 내부에서 누군가가 누설한 거야.”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부님도 다치지 않았을 겁니다.”부장경의 날카로운 시선이 두 사람의 얼굴을 훑었다.“우리 중에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내면 그 사람은 끔찍하게 죽게 될 거야.”도윤과 하용에게 경고하는 것이 분명했다.도윤은 의심에 굴하지 않고 손을 겹친 채 당당하게 부장경의 시선을 마주했다.“절 의심하시는 겁니까?”부장경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내가 너희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혐의를 갖고 있어. 하지만 난 진심으로 너희들 중 한 명이 아니길 바라.”도윤과 하용은 더 이상 숨기지 않은 채 서로를 공격했고 하필 부남진이 이때 다쳤다.그의 행방은 일반 간부들은 전혀 알 수 없었고 부장경이 두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도윤은 당당하게 말했다.“제 목숨 하나 겨우 구했는데 제가 언제 이런 짓을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각하는 제 스승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분을 다치게 합니까? 이번에 바네사가 남은 독을 치료하기 위해 저와 함께 A시로 오지 않았다면 전 그 사람을 데려올 기회도 없었을 겁니다. 하용이 어떻게 장연후를 찾았느냐가 문제죠.”하용이 약간 당황한 듯 서둘러 설명했다.“각하께서 제게 새 삶을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그 은혜를 배신하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장연후는 한 달 전 박람회에서 우연히 만나서 그가 어디에 정착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각하가 사고를 당하자마자 재빨리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의 손에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수술에 대해 책임지고 처벌받겠습니다.”부장경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한 사람은 당황하며 자책하고 다른 한 사람은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병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아는 의료계의 거물급 교수들에게 보물처럼 둘러싸여 있었다.“아가씨, 어느 학교 출신이에요?”“스승님이 누구지?”“어젯밤에 한 수술은 정말 완벽했어요!”모두 앵무새처럼 시끄럽게 떠들었고 다들 눈이 기쁨과 설렘으로 빛났다.우서진은 뿌듯한 표정이었다.“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때 당신들 뭐라고 했어?”“자네, 지나간 얘기는 꺼내지 마. 역시 자네가 선견지명이 있어. 어젯밤엔 정말 깜짝 놀랐어. 각하께서 정말 수술대에서 돌아가셨으면 장 교수는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얘야, 너도 참 대단하다. 그 상황에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다니.”모두가 지아를 칭찬하는데 윤공훈만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건 다 뒤로하고 그녀가 지아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그래서 지아가 말을 꺼낼 때까지 몇 번이고 망설였다.“제 스승님께선 수술대는 전쟁터와 마찬가지라고 했어요. 생명을 살리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어느 쪽도 손을 떨면 안 된다고요.”그 말에 윤공훈이 지아를 바로 돌아보았고 마주친 두 눈이 암묵적인 무언가를 주고받았다.이 말은 지아가 처음 집도하기 전에 윤공훈이 해준 말인데 지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런 식으로 알려준 것이다.“아직도 기억해?” 윤공훈은 지아를 바라보았고 지아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주셨던 스승님의 말씀은 하루도 잊을 수 없어요. 너무 감사하고, 그때 제가 실망스러운 선택을 했을 때 많이 슬퍼하셨을 거예요.”“지금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면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야.”윤공훈의 눈에는 격한 감정이 가득했다.자신이 눈여겨보던 아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지만 다행히 다시 돌아왔다.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칭찬하기 바빴다.“너 같은 제자가 있으니 은사님도 무척 기뻐하실 텐데 어떤 대단한 분인지 우리도 좀 알 수 있을까?”지아는 가볍게 웃으며 더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 다들 더 이상 시간 낭
지아가 조금 더 앞으로 다가오자 부남진은 눈가에 미소를 지었다.“어젯밤 일 다 알고 있어. 젊은 사람이 그렇게 결단력이 있다니 정말 보기 드문 재능이야. 내가 금방 나을 것 같지는 않은데 우 교수 말로는 한의학에도 능한 만능 의사라고 하던데 남아서 날 돌봐주는 주치의가 되어줄 수 있겠나?”우서진의 말처럼 훌륭한 인재는 나라에 충성해야 하나.다른 사람이라면 기뻐 죽을지 몰라도 지아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지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미셸이 다급하게 말했다.“아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여자한테 어떻게 아빠를 돌보라고 해요?”부남진은 다정하게 말했다.“미셸, 정말 위험한 사람이라면 어젯밤 그렇게 고생하면서 날 살렸겠니? 우 교수와 상의했어. 바네사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모두 정통했니 가장 적합한 사람이야.”“죄송하지만 각하, 저는 그럴 능력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을 뽑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민연주는 황급히 지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당신이 그런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한다는 거예요. 당신의 능력은 우리가 모두 봤어요. 원하는 게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얼마든지 들어줄게요.”“나는 한낱 시골 의사라 이런 거창한 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유롭고 편한 생활에 익숙해 매일 고정된 시간에 출퇴근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며칠 동안 머물면서 각하가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진짜 주제도 모르고, 당신이 뭔데? 어디서 감히 거절해?”미셸은 원래도 불만을 가득 품고 있었는데 지아가 감히 거절할 배짱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제까짓 게 뭐라고.이런 은혜를 베풀면 고맙게 받을 것이지.“부설아!” 부장경이 차갑게 꾸짖었다.미셸은 화난 오빠의 모습을 보고 어젯밤의 모습을 떠올리며 겁이 나서 다시는 말을 잇지 못했다.지아는 부남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검진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전 가족분들 방해하지 않고 검사 결과 확인하러 가보겠습니다.”그렇게 지아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