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자른 대나무를 조립하기 시작했다.고기를 굽는 동안 나무껍질과 덩굴을 모아 약간의 가공을 거쳐 밧줄로 만들었다.그는 여전히 상의를 입지 않았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자 등 전체에 상처가 드러내며 매우 남자다운 모습을 보였다.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설명하며 작업을 했다.“땅이 벌레 때문에 더러울까 봐 대나무를 잘라서 간이침대를 만들어 밤에도 편안하게 잘 수 있게 하려고.”도윤은 이 작업에 익숙해서 최대 30분 만에 침대를 만들 수 있었다.옆에는 그가 가져온 나뭇잎과 마른풀이 있었는데, 모두 습기가 조금도 없이 말리려고 미리 불 옆에 놓아두었다. 이런 폭우 속에서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정도였다.아무 느낌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룻밤만 자면 되는 건데 왜 귀찮게 그래?”“널 위해선 귀찮은 거 없어.”도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업에 고개를 파묻은 채 말했다.지아가 침대 너비를 훑어보니 도윤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동굴에 불이 있다고 해도 오랜 시간 자고 나면 습기가 있을 테고, 몸속의 독이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에 지아가 말을 꺼냈다.“저기...”도윤은 지아를 돌아보았다.“왜 그래. 어디가 불편해? 또 손이 아파?”“아니.”지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의 시선이 조금 당황스러웠다.“내 말은 어차피 만들 거면 도윤 씨 것도 하나 만들어. 이 시기엔 원래 비가 많고 내일 또 큰 비가 올지 모르는데 폭우 속에서 간다는 건 말도 안 돼.”“난 필요 없어, 귀찮아. 남자는 바닥에 드러누우면 그만이야. 밖에서 그렇게 많은걸 따질 필요가 없지.”고개를 푹 파묻고 일에 몰두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오만한 대표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도윤이 다시 한번 대나무 장대를 잡으려는 순간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그 앞에 맨발로 서 있는 지아의 등 뒤로 불빛이 펄떡이며 뛰어올랐다.“내 말대로 해.”“알았어.”도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힐끗 보았다.“근데 침낭이 하나밖에 없어서 싱
이 남자가...전에는 무모하고 위압적인 태도로 원하는 건 뭐든 요구하는 데 익숙했는데, 갑자기 예의를 갖추자 지아는 다소 어색했다.“나 배고파.”지아가 거절하자 도윤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지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많이 먹어.”그렇게 말하며 도윤은 조용히 다시 침대를 만들러 갔다.지아는 멧돼지 고기를 한입 베어 물며 얼굴을 만져보니 동굴의 온도 때문인지 뜨겁고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의 든든한 뒷모습을 보면 그런 남자를 미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어젯밤의 자극적인 정사는 지아에게도 남달랐다.미움은 제쳐두고, 그런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었다.하지만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정이다. 일련의 일들을 생각만 해도 지아는 가슴을 막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윤과의 친밀한 행위는 과거 자신에 대한 배신과도 같았다.도윤은 다 잊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의 지아는 검은 수렁 속에 갇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지아는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진정으로 앞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이 모든 일들이 겪고 난 후 지아는 자신이 여전히 도윤을 사랑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이 마음을 어떡해야 할까.분명 지금은 도윤도 많이 변해서 조심스러워졌지만 지아는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았다.그녀가 보고 싶었던 건 자신감 넘치고 강인한 도윤의 모습이었다.숲에서 멧돼지를 망설임 없이 깔끔하고 단호한 손놀림으로 죽인 것처럼.지아는 도윤이 우유부단해져서 자신 때문에 또다시 함정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지아야, 다 끝났어, 내가 해볼게.”도윤은 침대에 누워 두 번 구르며 지탱력을 테스트하고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나뭇잎과 건초를 더 깔며 입으로 중얼거렸다.“호랑이를 만나지 못한 게 아쉽네. 호랑이 가죽을 벗겨 이불을 만들 수 있는데...”도윤은 지아와 함께 있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돌보았고 이건 남편으로서 당연한 의무였다.예전에는
지아는 씻고 나니 온몸이 편안해졌고, 마음도 서서히 맑아져 이미 결심한 뒤였다.뒤돌아보니 도윤이 작은 노인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는 물고기 덫을 짜느라 바빴다. 떠나기 전에 건빵과 물 두 병, 과일 몇 개를 가져왔는데 원래 의도는 샘물 좀 마시고 야생 과일을 따서 먹으며 가능한 한 빨리 여길 떠나는 것이었다.하지만 폭우와 갑작스러운 지아의 등장으로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내일도 비가 올 것 같자 도윤은 서둘러 물고기 덫을 뜨고 낚시 준비를 했다.지아는 어느새 도윤이 만든 대나무 침대에 앉아 새하얀 두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피곤하지 않아?”지아가 물었다.어떻게 피곤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는 밤새 잠도 못 자고 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으며, 불 옆이 엄청나게 더워서 이마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곧 끝나. 저기 강에 사는 물고기들은 살이 통통해. 비가 멈춘 뒤 물가에 내려가면 내일 생선을 먹을 수 있을 거야.”말하며 도윤은 지아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고 물고기 바구니를 챙겨 어둑어둑한 밤 속으로 들어갔다.돌아왔을 때 그의 머리와 몸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찬물로 샤워를 한 게 분명했다.지아가 돌아보자 남자의 모습은 갓 목욕을 마친 인어처럼 보였고, 잘 다듬어진 복근을 따라 물방울이 신비로운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늘어져 있었는데 전에 있던 매서움은 사라지고 부드러움이 보였다.남자 아이돌 리더처럼 허리 몇 번 흔들면 여자들이 미칠 것 같았다.지아는 문득 얼마 전 봤던 영상 속에서 마스크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몸을 흔들자 그 밑에 여자들이 수만 개의 댓글을 달며 난리를 부리던 게 떠올랐다.도윤의 몸은 일부러 헬스클럽에서 단련한 근육과는 달리 온몸에 난 상처가 야성미를 더했다.어느새 도윤은 지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양옆에 손을 지탱했다.앉아 있는 지아 위로 도윤이 살짝 몸을 숙이자 그의 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다.“뭘 보고 있는 거야?”지아는 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지아는 대나무 침대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하지만 속검은 도윤이 일부러 침대를 1.2미터 정도로밖에 만들지 않았는데 어디로 도망가겠나.곧 지아의 손바닥이 대나무 침대 가장자리에 닿았다.어젯밤엔 욱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강욱의 신분으로 자신을 만졌을 때도 지아는 역겨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인간은 화가 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입히는 경향이 있었고 지아는 다시 그 말을 할 리가 없었다.“홧김에 한 말이야.”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지아는 어제와 같은 담대함이 없었다.도윤은 야생 표범처럼 침대에 무릎을 꿇고 조금씩 앞으로 기어갔다.곧 지아는 그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 완전히 둘러싸였고 두 손으로 겨우 온몸을 지탱하고 있었다.도윤의 입술이 지아의 가늘고 하얀 목에 닿자 지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며 불리한 상황에 부닥쳤다.얇은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지아는 부드러운 도윤의 말을 들었다.“이러면 어때, 역겨워? 역겹다면 그만할게.”남자는 그녀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사람의 마음과 본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도윤은 확실히 달인이었다.지아는 섬세하게 피어난 꽃처럼 폭우 속에서 가볍게 흔들리며 몸을 떨었다.도윤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진득한 느낌에 지아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가슴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얇은 입술이 지아의 머리카락에 닿았고, 이로 비녀를 물어 부드럽게 빼내자 지아의 수천 가닥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도윤은 지아가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좋았다. 나른하면서 매혹적이었다.비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지아야, 넌 이런 모습일 때가 가장 아름다워.”이렇게 말하며 도윤은 비녀의 끝으로 지아의 피붓결을 따라 스쳐 지나갔는데 시원한 촉감이 쇄골을 지나 계속 내려가다가 단추 앞에서 멈췄다.마치 금기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도윤은 부드럽게 물었다
격렬한 폭풍이 모든 것을 휩쓸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꽃들이 강풍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꽃잎 몇 장이 땅에 떨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폭우는 서서히 그치고 지아는 도윤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도윤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닌지 의심했다. 2인용 침대를 만들 거면 조금 더 넓게 만들면 안 되는 건가?싱글 사이즈 침대에 두 사람이 눕고 키가 190 가까이 되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함께 있자 지아에게는 다소 비좁았다.지아는 도윤과 붙지 않으면 바닥에 붙어야 했다.침낭은 펼쳐져 두 사람을 덮는 이불이 되었고, 침낭 아래 두 사람은 몸에 걸친 것 없이 서로의 피부, 체온, 윤곽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은 신혼 때도 이렇게 붙어있지 않았다.그때 도윤은 지나치게 억제하느라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을 때도 본성을 억누르고 있어야 했다.몇 년 동안 혼자 지낸 도윤은 다시 태어나서 그때로 돌아가면 멍청한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그런 도윤이 이제 지아 앞에서 자제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지난 몇 년의 공백을 메우려면 지아 위에서 그대로 죽고 싶었다.도윤이 등 뒤로 지아의 허리를 감싸며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지아야, 나 정말 행복해.”“너무 행복해하지 마. 당신이랑 잔다고 해서 용서하고 재결합하려는 건 아니니까.”그들 사이에는 아직 이예린이 있었다.도윤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렇게 덧붙였다.“지금 이것만으로 난 행복해. 네가 날 위해 딸을 하나 더 낳아줬잖아.”그는 지아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수고했어.”이 말에 지아는 뒤돌아서서 도윤을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따지기엔 늦지 않았다.“이도윤,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야? 내가 한때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줄 알고 낙태할 생각도 했다는 거 알아?”지아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벌리고 도윤의 가슴을 세게 깨물었다.“내가 무무 낳을 때 하혈로 죽을 뻔한 거 알아? 이 아기를 살리기 위해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알아?”도
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 도윤이 자신을 자기라고 부른 것에 놀라야 할지, 정관수술이라는 말에 놀라야 할지 몰랐다.도윤과의 미래는 일단 뒤로 하고 지아 본인은 정관 수술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도윤은 지아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 맞췄지만 거즈의 촉감에 얇은 입술이 손등에서 손끝으로 옮겨갔다.마치 독실한 신자가 신에게 키스하는 것 같았다.“나 이도윤이 평생 지아 너만 사랑한다는 뜻이지. 과거에도, 앞으로도 늘 너였어.”지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고 싶었고 그녀도 어른이라 정상적인 욕구도 있었다.도윤과 관계가 완화되었다고 해서 재혼을 하겠다는 뜻은 아닌데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난 재결합한단 말 안 했어.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도윤이 지아의 손끝을 입에 머금자 지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당신, 뱉어, 더럽게.”남자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재혼할 명분을 찾고 싶지만 네가 지금의 삶이 좋고 결혼이라는 족쇄로 속박당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괜찮아.”착각인가, 이게 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도윤은 몸을 뒤집어 다시 지아를 덮쳤다.“지아야, 내가 부탁하는 건 딱 한 가지야. 나를 욕구 해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더라도 다시는 쫓아내지 마.”서서히 젖어 드는 지아의 눈동자에 도윤은 그녀의 입술을 몇 번이고 문지르며 말했다.“자기야, 나 좀 아껴줘, 응?”지아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요물은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 도윤도 해당한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는 소설 속 여우 같았고, 목소리가 쉴 정도로 지아를 계속 괴롭혔다.도윤이 허리에 손을 얹는 것을 본 지아는 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도윤은 조용히 웃었다.“지아야, 난 그냥 허리 마사지 해주려는 거야.”“무슨 마사지야, 더하면 이제 날이 밝겠어. 얼른 자!”이 남자 철로 만들어졌나.도윤은 속상한 듯
푹 잔 도윤은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뒤척이다가 새벽에 잠들었고 점심이 지나서야 일어났다.일어날 때 두 사람은 서로 꼭 껴안고 있었다.지아는 멍한 상태에서 눈을 떴고, 몸은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나쁜 자식, 예전엔 3번을 안 넘기더니.당시 극도로 절제하던 도윤은 한 달에 몇 번을 할지조차 정하곤 했다.지아는 이제야 과거 도윤이의 의지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깨달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니 자신은 침대에서 내려올 힘도 없었다.둘이서 하도 뒹군 탓에 온몸이 끈적끈적해서 무척 괴로웠다.“날이 밝... 읍...”지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소리가 도윤에 의해 삼켜졌다.또 한 번의 격정적인 키스를 하고 나서야 도윤은 지아를 놓아주었다.“지아야, 좋은 아침이야.”하룻밤 사이에 몇 살은 더 젊어진 것 같은 남자의 모습에 정말 요물이 아닌지 의심되었다.“날도 밝았고 씻고 싶어.”땀만 흘렸다면 참을 수 있었겠지만 몸 안팎에서 온통 도윤의 체향이 느껴졌다.“내가 길을 알아, 데려다줄게.”말하며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입었고 지아에게 자신의 큰 셔츠를 입혀주었다.근처에는 사람이 없고 동물들만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나 혼자 걸을 수 있어, 내려줘.”“하지만 안아주고 싶어.”비바람이 몰아친 밤이 지나고 나니 풀과 나무가 모두 새것처럼 보였다.울창한 숲 사이로 비치는 찬란한 햇빛이 두 사람에게 얼룩덜룩한 빛을 드리웠고, 지아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현실이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결혼 후 매일 집에 머물며 새색시처럼 도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도윤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않았고 어떠한 행사에 지아를 데려간 적도 없었으며, 가끔 지아를 데리고 외출할 때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다.영화 관람도 미리 대관하고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지아와 함께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정한 모습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도윤이 지아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랑을 드러낼 수 없는 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이제 도윤은 마음껏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던 물결이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나뭇가지에 달린 꽃 한 송이가 바람에 날려 물 위에 가볍게 떨어지자 도윤은 무심코 꽃을 떠서 지아의 머리에 꽂았다.지아는 화가 난 표정을 짓더니 능숙하게 머리를 위로 끌어올려 비녀로 고정했다.“다 쉬었으면 나가. 오늘 날씨도 좋으니까 많이 걸어야지. 이 숲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7일은 걸릴 거야.”지아가 상기시켰다.“그래.”도윤은 어젯밤에 손질한 물고기를 다음 목적지에서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갔다.둘은 짐을 챙기고 도윤은 커다란 등산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동굴 입구에 서서 왠지 모를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지아는 그 앞에서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안 가?”도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자.”그는 평생 이곳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다음 날 밤, 쉼터를 찾지 못한 도윤은 덩굴로 해먹을 즉석에서 만들 수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침낭에 몸을 웅크린 채 머리 위로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지아야, 문득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칼날 같은 삶에 지쳐 있던 도윤은 가족들과 단란한 삶을 원했다.하지만 이것은 지아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대답하지 않았고 도윤은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도윤은 지아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오늘 밤은 괴롭히지 않을게, 자자, 자기야.”지아는 그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되찾은 보물 같은 존재였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은 여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도윤은 많이 나아진 지아의 체력에 신기해했다.정글에서 하루에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도 지아는 오랜 시간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듯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지아는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멋진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두 사람은 때마침 산기슭의 작은 어촌에 도착했고, 다행히 그곳은 전기와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었다.도윤은 진환에게 연락했고, 길이 멀어 다음날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두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