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지아는 대나무 침대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하지만 속검은 도윤이 일부러 침대를 1.2미터 정도로밖에 만들지 않았는데 어디로 도망가겠나.곧 지아의 손바닥이 대나무 침대 가장자리에 닿았다.어젯밤엔 욱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강욱의 신분으로 자신을 만졌을 때도 지아는 역겨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인간은 화가 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입히는 경향이 있었고 지아는 다시 그 말을 할 리가 없었다.“홧김에 한 말이야.”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지아는 어제와 같은 담대함이 없었다.도윤은 야생 표범처럼 침대에 무릎을 꿇고 조금씩 앞으로 기어갔다.곧 지아는 그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 완전히 둘러싸였고 두 손으로 겨우 온몸을 지탱하고 있었다.도윤의 입술이 지아의 가늘고 하얀 목에 닿자 지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며 불리한 상황에 부닥쳤다.얇은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지아는 부드러운 도윤의 말을 들었다.“이러면 어때, 역겨워? 역겹다면 그만할게.”남자는 그녀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사람의 마음과 본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도윤은 확실히 달인이었다.지아는 섬세하게 피어난 꽃처럼 폭우 속에서 가볍게 흔들리며 몸을 떨었다.도윤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진득한 느낌에 지아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가슴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얇은 입술이 지아의 머리카락에 닿았고, 이로 비녀를 물어 부드럽게 빼내자 지아의 수천 가닥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도윤은 지아가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좋았다. 나른하면서 매혹적이었다.비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지아야, 넌 이런 모습일 때가 가장 아름다워.”이렇게 말하며 도윤은 비녀의 끝으로 지아의 피붓결을 따라 스쳐 지나갔는데 시원한 촉감이 쇄골을 지나 계속 내려가다가 단추 앞에서 멈췄다.마치 금기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도윤은 부드럽게 물었다
격렬한 폭풍이 모든 것을 휩쓸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꽃들이 강풍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꽃잎 몇 장이 땅에 떨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폭우는 서서히 그치고 지아는 도윤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도윤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닌지 의심했다. 2인용 침대를 만들 거면 조금 더 넓게 만들면 안 되는 건가?싱글 사이즈 침대에 두 사람이 눕고 키가 190 가까이 되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함께 있자 지아에게는 다소 비좁았다.지아는 도윤과 붙지 않으면 바닥에 붙어야 했다.침낭은 펼쳐져 두 사람을 덮는 이불이 되었고, 침낭 아래 두 사람은 몸에 걸친 것 없이 서로의 피부, 체온, 윤곽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은 신혼 때도 이렇게 붙어있지 않았다.그때 도윤은 지나치게 억제하느라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을 때도 본성을 억누르고 있어야 했다.몇 년 동안 혼자 지낸 도윤은 다시 태어나서 그때로 돌아가면 멍청한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그런 도윤이 이제 지아 앞에서 자제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지난 몇 년의 공백을 메우려면 지아 위에서 그대로 죽고 싶었다.도윤이 등 뒤로 지아의 허리를 감싸며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지아야, 나 정말 행복해.”“너무 행복해하지 마. 당신이랑 잔다고 해서 용서하고 재결합하려는 건 아니니까.”그들 사이에는 아직 이예린이 있었다.도윤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렇게 덧붙였다.“지금 이것만으로 난 행복해. 네가 날 위해 딸을 하나 더 낳아줬잖아.”그는 지아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수고했어.”이 말에 지아는 뒤돌아서서 도윤을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따지기엔 늦지 않았다.“이도윤,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야? 내가 한때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줄 알고 낙태할 생각도 했다는 거 알아?”지아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벌리고 도윤의 가슴을 세게 깨물었다.“내가 무무 낳을 때 하혈로 죽을 뻔한 거 알아? 이 아기를 살리기 위해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알아?”도
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 도윤이 자신을 자기라고 부른 것에 놀라야 할지, 정관수술이라는 말에 놀라야 할지 몰랐다.도윤과의 미래는 일단 뒤로 하고 지아 본인은 정관 수술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도윤은 지아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 맞췄지만 거즈의 촉감에 얇은 입술이 손등에서 손끝으로 옮겨갔다.마치 독실한 신자가 신에게 키스하는 것 같았다.“나 이도윤이 평생 지아 너만 사랑한다는 뜻이지. 과거에도, 앞으로도 늘 너였어.”지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고 싶었고 그녀도 어른이라 정상적인 욕구도 있었다.도윤과 관계가 완화되었다고 해서 재혼을 하겠다는 뜻은 아닌데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난 재결합한단 말 안 했어.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도윤이 지아의 손끝을 입에 머금자 지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당신, 뱉어, 더럽게.”남자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재혼할 명분을 찾고 싶지만 네가 지금의 삶이 좋고 결혼이라는 족쇄로 속박당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괜찮아.”착각인가, 이게 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도윤은 몸을 뒤집어 다시 지아를 덮쳤다.“지아야, 내가 부탁하는 건 딱 한 가지야. 나를 욕구 해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더라도 다시는 쫓아내지 마.”서서히 젖어 드는 지아의 눈동자에 도윤은 그녀의 입술을 몇 번이고 문지르며 말했다.“자기야, 나 좀 아껴줘, 응?”지아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요물은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 도윤도 해당한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는 소설 속 여우 같았고, 목소리가 쉴 정도로 지아를 계속 괴롭혔다.도윤이 허리에 손을 얹는 것을 본 지아는 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도윤은 조용히 웃었다.“지아야, 난 그냥 허리 마사지 해주려는 거야.”“무슨 마사지야, 더하면 이제 날이 밝겠어. 얼른 자!”이 남자 철로 만들어졌나.도윤은 속상한 듯
푹 잔 도윤은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뒤척이다가 새벽에 잠들었고 점심이 지나서야 일어났다.일어날 때 두 사람은 서로 꼭 껴안고 있었다.지아는 멍한 상태에서 눈을 떴고, 몸은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나쁜 자식, 예전엔 3번을 안 넘기더니.당시 극도로 절제하던 도윤은 한 달에 몇 번을 할지조차 정하곤 했다.지아는 이제야 과거 도윤이의 의지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깨달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니 자신은 침대에서 내려올 힘도 없었다.둘이서 하도 뒹군 탓에 온몸이 끈적끈적해서 무척 괴로웠다.“날이 밝... 읍...”지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소리가 도윤에 의해 삼켜졌다.또 한 번의 격정적인 키스를 하고 나서야 도윤은 지아를 놓아주었다.“지아야, 좋은 아침이야.”하룻밤 사이에 몇 살은 더 젊어진 것 같은 남자의 모습에 정말 요물이 아닌지 의심되었다.“날도 밝았고 씻고 싶어.”땀만 흘렸다면 참을 수 있었겠지만 몸 안팎에서 온통 도윤의 체향이 느껴졌다.“내가 길을 알아, 데려다줄게.”말하며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입었고 지아에게 자신의 큰 셔츠를 입혀주었다.근처에는 사람이 없고 동물들만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나 혼자 걸을 수 있어, 내려줘.”“하지만 안아주고 싶어.”비바람이 몰아친 밤이 지나고 나니 풀과 나무가 모두 새것처럼 보였다.울창한 숲 사이로 비치는 찬란한 햇빛이 두 사람에게 얼룩덜룩한 빛을 드리웠고, 지아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현실이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결혼 후 매일 집에 머물며 새색시처럼 도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도윤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않았고 어떠한 행사에 지아를 데려간 적도 없었으며, 가끔 지아를 데리고 외출할 때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다.영화 관람도 미리 대관하고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지아와 함께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정한 모습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도윤이 지아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랑을 드러낼 수 없는 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이제 도윤은 마음껏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던 물결이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나뭇가지에 달린 꽃 한 송이가 바람에 날려 물 위에 가볍게 떨어지자 도윤은 무심코 꽃을 떠서 지아의 머리에 꽂았다.지아는 화가 난 표정을 짓더니 능숙하게 머리를 위로 끌어올려 비녀로 고정했다.“다 쉬었으면 나가. 오늘 날씨도 좋으니까 많이 걸어야지. 이 숲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7일은 걸릴 거야.”지아가 상기시켰다.“그래.”도윤은 어젯밤에 손질한 물고기를 다음 목적지에서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갔다.둘은 짐을 챙기고 도윤은 커다란 등산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동굴 입구에 서서 왠지 모를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지아는 그 앞에서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안 가?”도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자.”그는 평생 이곳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다음 날 밤, 쉼터를 찾지 못한 도윤은 덩굴로 해먹을 즉석에서 만들 수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침낭에 몸을 웅크린 채 머리 위로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지아야, 문득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칼날 같은 삶에 지쳐 있던 도윤은 가족들과 단란한 삶을 원했다.하지만 이것은 지아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대답하지 않았고 도윤은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도윤은 지아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오늘 밤은 괴롭히지 않을게, 자자, 자기야.”지아는 그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되찾은 보물 같은 존재였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은 여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도윤은 많이 나아진 지아의 체력에 신기해했다.정글에서 하루에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도 지아는 오랜 시간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듯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지아는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멋진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두 사람은 때마침 산기슭의 작은 어촌에 도착했고, 다행히 그곳은 전기와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었다.도윤은 진환에게 연락했고, 길이 멀어 다음날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두
빤히 쳐다보던 지아는 도윤이 충격을 받을 거라 예상하고 그의 분노에 마음의 준비까지 했는데 놀랍게도 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지아는 몸은 주지만 마음은 안 주는 나쁜 여자가 되고 싶은 거네.” 과거 얽매이는 데 익숙해져 있던 지아는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애인이면 책임질 일도 없었고 굳이 전부 다 알려줄 것도 없는 데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었다.과거나 미래에 대해 상대와 얽히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책임만 없다면 어떤 관계도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역시 모든 건 다 되돌아온다. 도윤은 백채원이 자신에게 결혼을 강요했던 때를 떠올렸다. 지아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지아에게 애인의 신분으로 곁에 남아 있어 주길 바란 적도 있었다.그런데 몇 년 후엔 자신이 지아에게 명분을 바랄 줄이야.애인이라는 자리라도 감지덕지할 상황이다.지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언젠가 그녀의 마음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지아는 손가락으로 도윤의 턱을 문지르며 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 원해, 아님 싫어?”이 자세, 원해요, 싫어요?” 두 사람의 관계 자체는 이미 불평등했다.도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잡고 지아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자기야, 이제부터 나도, 내 목숨도 네 거야. 뭐든 해도 돼, 다만 날 버리지만 마.”지아는 약간 손을 찌르는 도윤의 수염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하지만 도윤 씨, 난 당신에게 명분을 줄 수가 없어. 내 일상도 알려줄 수 없고 오늘 누구를 만났고 내일 누구에게 전화했는지 알려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 텐데, 그렇게 할 수 있겠어?”소유욕이 극도로 강한 도윤이 그런 조건에 동의할 수 있을까?“지아야, 네 인생에 간섭하지 않겠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말해봐.”“다른 남자 만나지 마.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해.”이것이 도윤의 유일한 조건이자 최후의 타협이었다.지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내가 무척 밝히는
조용한 작은 어촌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고, 진환이 데리러 왔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다만 마당에는 활주로로 사용할 만한 넓은 공간이 없었고, 헬기는 여전히 착륙할 최적의 장소를 찾아 공중에 떠 있었다.지아는 도윤의 어깨를 깨물었다.“개자식, 끝이 없네.”“지아야, 내 시간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지아는 진봉의 방정맞은 입을 떠올리며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돌아서서 도윤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며 귓불을 깨물었다.“도윤 씨, 빨리...”...헬기가 작은 광장에 멈춰서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진봉은 재빨리 작은 농가로 향했다.“보스는 왜 여기로 온 거야. 형, 여기 맞아? 잘못 온 거 아니지?”진환은 선글라스를 벗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아니야.”“누굴 찾으러 오셨나?”두 사람은 도윤의 특징을 설명했고, 주인은 그들을 이끌었다.“여기, 그쪽이 찾는 사람이 안에 있어.”진환은 감사의 뜻으로 지갑에서 돈다발을 꺼냈고, 진봉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보스, 오랜만인데 저 안 보고 싶었... 엇, 사모님?”진봉은 잘못 본 건가 싶어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이게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 지아가 어떻게 여기에?지아는 진봉을 흘깃 쳐다보았다.“오랜만인데 여전히 멍청하네요.”“...”진환은 평소와 다름없는 반응이었다.“사모님.”“형, 아니, 벌써 알고 있었어? 우린 그래도 같은 엄마 배에서 나왔는데, 왜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도윤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나갔다.지아도 이런 장난을 칠 줄이야.“보스, 보스랑 사모님, 두 사람...”진봉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지아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도윤에게 물었다.“귀국할 거야?”“응, 넌 어떡할 거야?”도윤은 당연히 같이 가고 싶었지만, 방금 지아와 이야기를 나눈 터라 지금 감히 선을 넘을 수 없었다.“마침 나도 귀국하는데 좀 태워다 줘
지아는 공항 탈의실에서 미리 옷을 갈아입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크고 두꺼운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했다.도윤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이미 그를 데리러 온 차들이 줄을 지어져 있었다.공항을 떠나기 전, 도윤은 지아를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지아야.”지아는 팔짱을 꼈다. “도윤 씨, 우리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니지?”“아니,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지금은 당신 입지가 불안정해서 오히려 당신 곁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으니까 내 존재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게 최선 아니야?”지아는 예전보다 명쾌해졌고 도윤은 지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헤어지기 아쉬웠다.“알아, 난 그냥...”지아는 갑자기 마스크를 벗고 발끝을 세워 도윤의 입술에 키스했고, 도윤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며 더 깊고 진하게 파고들었다.힘들게 되찾은 보물인 만큼 더더욱 아쉬웠다.“도윤 씨, 우리 사이에 아직 이예린이 있는 거 알잖아. 만약 그때 일이 다시 일어나서 나와 당신 동생이 동시에 위험에 처하면 누구를 구할 거야?”“난...”지아는 손가락을 도윤의 입술에 대고 말했다.“결혼을 안 하면 제약도 없고 기대도 없으니까 슬퍼하고 속상해할 일도 없지. 당신 선택에 속상할 필요도 없고. 도윤 씨, 그게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지아야, 그렇지 않아.”“그럼 이예린과 연을 끊을 수 있어?”도윤이 침묵하자 지아가 덧붙였다.“당신은 못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 어쨌든 남매라 포기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난 당신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고 나도 힘들고 싶지 않아. 이렇게 지내자. 각자의 삶을 보내면서 가끔 만나는 거 좋잖아.”도윤은 다시 한번 입맞춤을 했고, 지아는 거절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 파고들었다.아무리 아쉬워도 어쨌든 헤어져야 하니까.도윤은 지아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아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그래.”도윤은 인파에 둘러싸인 VIP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