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박예찬과 박윤우가 쌍둥이라는 것을 확신했다.한 명은 조하랑과 있고 한 명은 은정숙과 있다.이게 무슨 뜻이겠는가.그날 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다. 유남준은 추위를 못 느끼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었다.경호원이 보내온 자료에는 조하랑의 출국 전후의 일들이 적혀있었다.남자친구도 사귀지 못한 그녀에게 아이가 있을 리 없었다.그러니 이 두 아이는 다 박민정의 아이다.그렇다면 왜 유남준을 속인 것일까.담배에 불을 붙인 유남준은 얼마 가지 않아 세게 기침했다.기사가 나와 물었다.“대표님, 차에 타시는 게 어떻습니까.”“괜찮다.”이 추위만이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유남준은 박윤우가 자기 성을 연이라고 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성은 박이었다. 그는 연지석과 박민정이 한 아이의 성을 연으로 하고 한 아이의 성을 박이라고 결정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유남준은 2, 3일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그저 당장 박민정을 찾아 자기 곁에 묶어놓고 어디도 갈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그 생각에 유남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내일은 유씨 가문의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유남준은 거절했지만 고영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라고 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그는 조하랑과 박예찬의 일을 부하에게 맡겨두고 옛 저택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유씨 가문 옛 저택.모든 사람들이 유남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항상 흐트러짐 없던 그가 지금은 꼴이 엉망이었고 수염도 나 있었다.여자 고용인이 그의 방에서 나오면서 반지 하나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유남준이 그녀를 막아 나서서 물었다.“손에 든 거, 뭐야.”고용인은 유남준을 보자마자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일부러 훔친 건 아니고 이불을 정리할 때 베개 밑에
고영란은 유남준이 온 것을 보고 얘기했다.“남우가 너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대.”말을 마친 고영란은 다른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했다.유남준은 유남우에게로 걸어갔다.“전의 문자도 네가 보낸 거야?”유남우는 온화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유남준은 몸을 약간 숙였다. 유남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돌변해 있었다.이제야 박민정이 쓴 편지의 뜻을 알 것 같았다.사람을 잘못 봤다니.유남우와 유남준을 헷갈렸다는 소리였다.참 어이가 없었다.그는 박민정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유남우는 유남준의 감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민정이의 남편은 나였어야 해.”유남준의 목울대가 약간 움직였다. 눈앞의 사람이 친동생만 아니었다면 죽이려고 들었을지도 모른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박민정 남편이야.”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 얘기했다.“겨우 일어났으니 쉬어야 하지 않아? 다시 잠들면 영영 못 깨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차갑게 말을 마친 유남준이 걸어 나갔다.유남우의 방에서 걸어 나오자 고영란이 그의 곁에서 얘기했다.“의사 선생님 말로는 기적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유남준은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차가운 기운만 내뿜고 있었다.“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그는 놀란 표정의 고영란을 그대로 둔 채 옛 저택을 떠났다. 두원으로 돌아가는 길, 유남준의 머릿속에는 박민정과 유남우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휴식하지 못해 몸이 쓰러질 것 같았지만 잠에 들고 싶지는 않았다.그렇게 결국 두원에 도착했다.유남준은 술을 한 병 들고 혼자
유남준은 공항이 아닌 정림원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 박윤우가 썼던 칫솔을 병원에 가져가 유전자 검사를 맡기도록 했다.다른 한편 조하랑과 박예찬은 이미 비행기에 탑승했고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창밖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조하랑은 밖을 내다보며 마음을 내려놓았다.“앞으로는 좀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박예찬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조하랑은 그가 유치원 친구들과 떨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줄만 알고 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나중에 동민이 데리고 널 보러 갈게.”그 말에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은 박예찬이 그녀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응.”조하랑은 더 얘기를 나누려고 하다가 박예찬이 앞좌석 주머니 안에 있는 신문을 꺼내 들고 보자 입을 닫았다.신문 헤드라인에는 아직도 이지원의 뉴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마 한 일주일 정도는 열기가 식지 않을 것 같았다. 외부에서는 모두 이지원이 유남준의 여자 친구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 말이다.대충 훑어보고 흥미를 잃은 박예찬은 신문을 얼굴 위에 덮고 잠깐 잠을 청했다.조하랑은 옆에 앉은 조그만 아이를 보며 한창 귀여울 나이에 왜 저렇게 애어른 같을까, 하며 속으로 감탄했다.박예찬은 진주에 있는 동안에 한 번도 아빠를 찾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집에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기만 하다.박민정이 있는 항구도시 오르후스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일여덟 시간은 족히 가야 하기에 조하랑도 눈을 감고 좀 자기로 했다.그리고 8시간 뒤.시차 때문에 오르후스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한밤중이었다.박민정은 진작부터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조하랑과 박예찬을 발견하고 다가오면서 그들을 불렀다.“예찬아, 하랑아.”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박예찬을 안았다.박예찬은 뽀송뽀송하고 발그스름한 얼굴을 엄마의 품에 비볐다.“엄마.”“가자. 우리 먼저 집으로 가자.”한편 집에서는 은정숙과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도 않는데 계속 찾진 않을 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포기하겠지.”유남준이 자신을 찾아다니는 건 그저 달갑지 않아서일 뿐이라고 박민정은 생각했다.박민정은 그한테 큰돈을 남겨 빚 갚는 셈 치고 돌려주었다.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하랑은 생각에 잠깐 잠겨있더니 또 물었다.“그럼 너 윤우랑 예찬이한테 새 아빠 만들어줄 생각은 없는 거야?”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박민정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최근 몇 년 밖에서 떠돌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오직 어떻게 두 아이를 잘 키울지 하는 생각으로만 고민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난 지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애들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잘 보살필 수 있어. 괜히 새 아빠 만들어서 애들한테 영향 끼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 지금...”그녀는 손을 평탄한 아랫배에 얹으며 매만졌다.그걸 보자 조하랑은 눈을 크게 떴다.“진짜 임신한 거야?”“응.”박민정이 고개를 약간 주억거렸다.“여기 오자마자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봤는데 임신 맞대. 한 달 됐어.”조하랑은 호기심이 들어찬 눈빛으로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너무 잘 됐다. 그러면 아홉 달 후면 윤우 수술할 수 있겠네?”“정확히 말하면 8개월 후야.”박민정은 이런 방면에는 문외한인 조하랑에게 열 달 임신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실제로는 아홉 달이면 아이가 출산한다고.“아...그런 거구나...”조하랑은 손을 거둬들이며 박민정에게 국내의 소식을 들려주었다.“너 뉴스 봤지? 이지원 이번엔 끝장이야. 그리고 유남준도, 네티즌들이 오쟁이 진 남자라고 엄청 놀려대고 있어.”일이 이렇게 될지는 알았었지만 유남준이 여론을 막지 않은 것은 좀 의외였다.“유앤케이가 원래 여론 막는 데는 도가 텄지 않았어? 쓸데없는 말은 한 줄도 안 나오게 했던 것 같은데.”“몰라. 아빠 얘기 들으니까 유앤케이 지금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서 대표 자리에 앉혀놓고 유남준은 막후에서만 활동한대.”“그 사
과거의 일을 전부 없었던 걸로 하자고?유남준은 그 서류를 낚아채 조목조목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두 사람이 더 이상 관계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가서, 배상액을 보는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1조 6천억!이렇게나 많은 돈을...박민정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났단 말인가.유남준은 진즉에 박민정의 회사를 조사했다. 유동자산이 많아 봐야 천억 정도밖에에 안 되었고, 그 회사를 통째로 판다 해도 이 많은 돈을 모으기엔 턱 없이 모자란다.냉소를 흘리며 유남준은 그 서류를 휴지통에 처박았다.“허, 왜 내가 여기에 사인할 거라 생각해요?”“제 의뢰인이 얘기한 바 있습니다. 유 대표님이 사인을 안 하시게 되면 이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옛날 일들을 전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요.”장명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동시에 무게를 실었다.“그러니까 앞으로 그 일을 들먹여서 박민정 씨의 목을 조르지 마세요. 당신이 싫다고 한 것이지, 박민정 씨가 갚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란 걸 잊지 말란 말씀입니다.”박민정을이 어릴 때부터 쭉 봐온 셈인 장명철은 전부터 그녀를 대신해 유남준한테 시원하게 욕을 날리고 싶었다.영락없이 얻어맞으며 쫓겨날 줄 알았는데 유남준은 그가 한 말에는 별로 화가 난 눈치가 아니었고 이렇게만 말했다.“걱정 마세요. 앞으로 그 일 다시 꺼내지 않을 테니까.”너무 순순히 나오자 장명철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하지만 유남준은 여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했다. 박민정이 어처구니없는 금액의 큰돈을 서슴없이 내놓으면서까지 자신을 떠나려는,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결심이 얼마나 견결한지를 그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장명철이 가고 난 후 유남준은 음침한 소리로 서다희한테 물었다.“널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심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서다희는 자기 여자 친구를 떠올리며 물음에 대답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난 그녀를 반드시 후회하게 할 겁니다.”그래, 그
유남준은 입구에 서서 집 안에 있는 너무나 익숙해 마지않은 얼굴을 바라봤다.분명 못 본 지 겨우 반달 남짓 되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경호원들은 대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유남준만 집안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실내의 기압마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내가 분명히 다 얘길 한 줄로 아는데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선 유남준은 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색을 살필 수가 없었다.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깊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며 시선을 한시도 떨구지 않았다.데일 것만 같은 따가운 시선에 박민정은 저도 몰래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장명철 변호사님한테서 돈 받았죠? 그러니까 우린 이제 끝난 사이에요.”여전히 말이 없는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박민정의 모습만 박혀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려고 했으나 박민정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손을 피해 연거푸 몇 발짝이나 물러났다.그러고는 긴 숨을 들이쉬며 그녀가 물었다.“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허공에 떠 있는 손 그대로 유남준은 한 글자씩 또렷하게 내뱉었다.“나랑 집에 돌아가자.”“집이요?”박민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무슨 집이요? 두원 별장 말하는 거예요? 거긴 여태껏 내 집인 적이 없어요.”과거에 유남준은 이렇게 그녀와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젠 박민정이 그한테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유남준은 박민정 때문에 상처받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고작 한마디 말뿐인데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허울뿐이잖아요!”박민정은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쳤다.순간일순 큰 바위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에 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어 잡았다. 눈빛에서는 불씨가 타오르는 듯하며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허울뿐?! 너 지난달까지만 해도 내 침대에 있었어. 너 기분 좋을 때 어떤 소리 내지르는지 내가 한 번 실감 나게 질러줘 봐?”쨕!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의 뺨
한참 후 유남준과 연지석의 얼굴에는 누구 하나 더 낫다 할 것 없이 골고루 상처가 나 있었다.하지만 전에 상처를 입은 연지석은 유남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남준의 주먹이 또 날아오자 박민정은 두 팔을 벌려 연지석을 보호하며 막아섰다.“그만해요, 이제!”그녀는 차갑게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를 저지했다.유남준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다 터진 입가로부터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오며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엄지손가락으로 피를 쓱 닦아내며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이만 가요, 안 그러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그한테 경고했다.그 순간의 기분은 대체 어떤 것인지 유남준도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게 누구든 항상 제일 먼저 그의 편에 섰던 그녀였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이를 선택했다.유남준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묵묵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가 떠나자 박민정은 얼른 연지석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그녀의 손이 연지석의 팔에 닿자마자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어, 괜찮아.”연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소매에서 피가 스며져 나와 그녀의 손끝까지 붉게 물들인 것을 발견했다.“네 팔에서 피가 나오고 있어.”연지석은 곧장 외투를 벗어 다부진 팔근육을 드러냈다. 흉측한 칼자국 상처가 조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다시 벌어져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는 얼른 옷으로 그곳을 눌렀다.“전옛날에 난 상처인데, 혹시 놀랐어?”유남준이 주먹을 꽤 잘 쓰는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때 그가 데려온 사람도 집안에 들어왔다. 모두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얼굴들이었다.연지석이 다친 걸 보자 그 중 한 사람이 달려와 그에게 상처를 싸매주었다.“병원으로 가실까요?”“아니야, 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어.”연지석은 그 일행을 밖에 내보내고서는 박민정에게 시선을 돌렸다.“유남준이 널 다치게 하진 않았어?”박민정은 고개를 저었
저녁이 되자 박민정은 취침하러 방에 들어갔다.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건만 머릿속에는 유남준이 떠날 때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릴 때 그가 속았다는 걸 알고 나서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보지 못했다.마음속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불안감 때문에 박민정은 선잠을 잤다.한편, 유남준은 박민정의 집과 멀지 않은 한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싸늘한 표정으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연지석은 여기가 진주가 아닌 유남준의 구역을 벗어난 곳이라고 안심했지만, 사실 진주에 있을 때 유남준은 오히려 행동 가짐에 더 유의를 기울이는 편이었다.이제 외국에 왔으니 그는 더 거리낄 게 없었다.사고가 발생한 후 연지석의 가족들은 그를 밤새 데려갔고 모든 소식을 차단했다.그리하여 박민정은 연지석이 사고 난 걸 모르고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사람을 불러 문부터 수리했다.이 기간에 그녀는 여기에 잠시 머무르며 곡을 계속 쓰다가 유남준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되면 다시 은정숙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아침에 장보러 가려고 문을 열고 밖에 나오자 마이바흐 차를 세워놓고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남준을 보게 되었다.남자는 그녀를 보자 얼른 담뱃불을 눌러 끄고 한쪽 휴지통에 꽁초를 버렸다.박민정은 그를 못 본척하며 그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유남준은 몸에서 담배 냄새가 사라지길 조금 기다렸다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그녀를 쫓아왔다.”“민정아!”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어제 한 얘기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예요? 그럼 오늘 한 번 더 얘기해줄까요? 난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놔줘요. 우리 좀 좋게 좋게 헤어져요.”유남준의 눈동자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너 없어지고 나서 내가 하루도 잠을 제대로 푹 잔 적이 없다는 걸 알아?”박민정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잠을 잘 못 잔다고요? 그럼 의사를 찾아가야지.”결혼한 지 3년 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햇빛 아래서 그의 덩치는 유난히 우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웬만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이런건 모르지 않나? 그런데 왜 유남준은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줄도 아는 거지?’이때, 마침 유남준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물고기를 받으라고 손짓했다.그 모습에 박예찬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그를 향해 외쳤다.“여기로 던져주세요.”유남준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박예찬에게 던져줬다. 필경 아직 어린아이라 물고기를 만져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는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물을 채운 뒤 안에 넣었다.그 모습에 많은 어린이들이 구경하러 오게 되었다.“와! 예찬아, 이게 너희 아빠가 잡은 물고기야?”박예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어떤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희 아빠 참 대단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다른 아이들도 유남준을 칭찬하며 박예찬을 한껏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아 그에게 던져줬다.최현아 따라 땔감을 주우러 가려던 유지훈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엄마, 저도 가서 볼래요.”그의 말에 최현아도 말리지 않았다.“그래.”최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지훈은 재빨리 아이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나도 물고기 좀 보게 다들 비켜봐.”아이들은 이런 유지훈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저마다 자리를 비켜줬다.유지훈이 맨 앞에 다가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저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 우리 아빠가 돈 주고 산 물고기가 훨씬 크고 이뻐!”아이들이라 그런지 한창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이다.특히 유지훈은 모든 아이가 박예찬을 둘러싸고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다.그러나 아쉽
유남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어젯밤에 네가 계속 춥다고 잠꼬대해서 내가 안고 같이 잤어.”“네?”박민정은 그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날씨도 이젠 어느 정도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어젯밤도 전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옆에 누워있던 박예찬이 침낭에서 일어나더니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나도 봤어. 어젯밤에 분명 엄마가 계속 춥다면서 안아달라고 했어.”박예찬의 진지한 말투가 전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자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나이 먹으면서 외로워졌나?’이때, 박예찬이 박민정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에도 두 사람이 자주 그렇게 잤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알았어.”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유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어젯밤은 고마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못 잔 건 아니죠?”유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내가 이따가 이불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에는 우리 이불 덮고 자자.”“그럴 필요 없...”박민정이 단번에 거절하려는 순간 텐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서, 남준 씨, 깼어?”최현아였다.그녀의 물음에 박민정이 재빨리 답했다.“네. 무슨 일이에요?”“우리 지금 땔감 주어서 아이들한테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여기까지 직접 와서 물어보니 박민정은 거절하기 힘들었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박민정이 침낭에서 나오자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이때,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최현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남준 씨, 동서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따 남자분들은 개울에서 낚시해야 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박민정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최현아는 자
유남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알겠어.”빠르게 저녁 시간이 돌아왔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별들이 잘 보였다.박민정과 박예찬은 같이 앉아 쉬고 있었고 유남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바비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기 굽는 냄새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해 자기도 모르게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박민정은 살짝 난감한 듯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네가 다른 친구들이랑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해.”전날 밤, 그냥 가벼운 말로 야외에서 캠핑하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기억하고 준비해 줬다.“네.”박예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그렇게 잠깐 박민정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유남준은 어느새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박민정에게 건넸다.“먹어.”“먼저 먹어요. 저는 제가 구워서 먹을게요.”박민정은 방금 그와 다퉜는데 그가 구워준 고기를 덥석 받아먹는 게 왠지 미안했다.하여 스스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난 고기를 원래 안 좋아해. 네가 안 먹으면 이건 그냥 버릴게.”살짝 화가 난 목소리였다.그의 말에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재빨리 그의 접시를 받아서 들었다.“아깝게 왜 버려요. 고기 안 좋아하면 더 이상 굽지 말아요.”생각했던 대로 말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순간 질투가 많은 여느 여고생처럼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이제 자신이 구워주는 고기도 마다한다고 생각하니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나 박민정은 이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고기를 먹고 있다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유남준이라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그런 유남준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웃고
그러다가 최현아는 무심결에 유남준의 튼실한 팔뚝과 또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애초에 남준 씨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휴지를 꺼내며 물었다.“땀 흘렸네요. 제가 닦아 드릴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그의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막 거절하려던 순간 박민정과 박예찬이 들꽃을 꺾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괘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최현아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남준때문에 심장이 또다시 나대기 시작했다.‘들은 소문에 의하면 유남준에게 첫사랑인 이지원을 제외하면 여자라고는 박민정뿐이라고 했는데?’‘역시나 남자들은 다 똑같네!’순간 최현아는 진작에 유남준에게 접근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니면 진작에 IM 대표의 사모님 자리를 꿰찼을 텐데.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손은 점점 바빠졌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마침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러다가 박민정은 문득 머릿속에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장소는 비슷했지만 유남준의 맞은편에는 최현아가 아닌 이지원이 서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예찬도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을 놓고 재빨리 달려가 두 사람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현아 이모, 지훈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이모 찾던데요?”그의 말에 최현아가 재빨리 되물었다.“무슨 급한 일?”“가서 직접 물어보세요.”박예찬의 말에 최현아는 두말없이 유지훈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박민정은 어느새 유남준에게 다가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보통 이런 식으로 바람피웠나 보네요?”유남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무덤덤해 보이는 박민정에게 다가가 되물었다.“화 안나?”“그저 유치해 보이는데요?”박민정의 입에서 들리는 유치하다는 말이 단번에 유남준의 가슴에 꽂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