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 별장.박예찬을 데려온 조하랑은 한숨을 돌렸다. 이윽고 김인우를 보면서 얘기했다.“무조건 배상해줘야 해요!”김인우가 수표를 밀었다.“나도 그쯤은 알아요.”김인우는 조하랑과 박예찬을 보면서 약간 실망했다.솔직히 자기한테 아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싫다기보다 기대되었다.박예찬은 약간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그는 그런 박예찬이 좋았다. 또 총명하기도 했고.조하랑은 수표를 건네받고 미간에 힘을 풀었다. 이 돈이 그녀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잠시나마 꺼뜨린 것 같았다.“그럼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이만 안녕히 계세요. 영원히 다시 만나지 말자고요.”조하랑은 말을 마치고 박예찬을 데리고 차에 올랐다.두 사람이 택시에 타서 멀어져갔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 차에 탄 유남준이 이글거리는 시선을 박예찬에 고정시킨 채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유남준의 두 눈동자에는 놀라움만이 담겨있었다.서다희가 다가와 얘기했다.“박윤우가 아닙니까?”유남준은 입술을 꽉 말고 천천히 얘기했다.“따라가. 나는 김인우를 만나러 간다.”“네.”...김인우는 유남준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유남준이 인터넷의 여론 때문에 바쁜 줄 알았다.“남준아, 걱정하지 마. 그저 여자일 뿐이잖아. 이지원 같은 여자는 널리고 널렸어.”김인우는 술 한 병을 따서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유남준은 그의 앞에서 이지원 얘기를 꺼내지 않고 물었다.“조하랑이 데려간 아이가 요즘 계속 너한테 있었어?”김인우는 약간 어색해져서 코를 긁적였다.“오해였어.”그는 앉아서 그와 박예찬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오해가 생겼는지 다 유남준한테 알려주었다.유남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아까 본 아이가 정림원에 있던 박윤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그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박예찬이라는 애가 조하랑의 아들이라고?”“응.”유남준은 바로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김인우는 그가 바로 떠나려는 것을 이상히 여겨 물었다.“왜?”유남준이 가기 전
유남준은 박예찬과 박윤우가 쌍둥이라는 것을 확신했다.한 명은 조하랑과 있고 한 명은 은정숙과 있다.이게 무슨 뜻이겠는가.그날 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다. 유남준은 추위를 못 느끼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었다.경호원이 보내온 자료에는 조하랑의 출국 전후의 일들이 적혀있었다.남자친구도 사귀지 못한 그녀에게 아이가 있을 리 없었다.그러니 이 두 아이는 다 박민정의 아이다.그렇다면 왜 유남준을 속인 것일까.담배에 불을 붙인 유남준은 얼마 가지 않아 세게 기침했다.기사가 나와 물었다.“대표님, 차에 타시는 게 어떻습니까.”“괜찮다.”이 추위만이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유남준은 박윤우가 자기 성을 연이라고 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성은 박이었다. 그는 연지석과 박민정이 한 아이의 성을 연으로 하고 한 아이의 성을 박이라고 결정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유남준은 2, 3일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그저 당장 박민정을 찾아 자기 곁에 묶어놓고 어디도 갈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그 생각에 유남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내일은 유씨 가문의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유남준은 거절했지만 고영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라고 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그는 조하랑과 박예찬의 일을 부하에게 맡겨두고 옛 저택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유씨 가문 옛 저택.모든 사람들이 유남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항상 흐트러짐 없던 그가 지금은 꼴이 엉망이었고 수염도 나 있었다.여자 고용인이 그의 방에서 나오면서 반지 하나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유남준이 그녀를 막아 나서서 물었다.“손에 든 거, 뭐야.”고용인은 유남준을 보자마자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일부러 훔친 건 아니고 이불을 정리할 때 베개 밑에
고영란은 유남준이 온 것을 보고 얘기했다.“남우가 너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대.”말을 마친 고영란은 다른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했다.유남준은 유남우에게로 걸어갔다.“전의 문자도 네가 보낸 거야?”유남우는 온화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유남준은 몸을 약간 숙였다. 유남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돌변해 있었다.이제야 박민정이 쓴 편지의 뜻을 알 것 같았다.사람을 잘못 봤다니.유남우와 유남준을 헷갈렸다는 소리였다.참 어이가 없었다.그는 박민정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유남우는 유남준의 감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민정이의 남편은 나였어야 해.”유남준의 목울대가 약간 움직였다. 눈앞의 사람이 친동생만 아니었다면 죽이려고 들었을지도 모른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박민정 남편이야.”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 얘기했다.“겨우 일어났으니 쉬어야 하지 않아? 다시 잠들면 영영 못 깨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차갑게 말을 마친 유남준이 걸어 나갔다.유남우의 방에서 걸어 나오자 고영란이 그의 곁에서 얘기했다.“의사 선생님 말로는 기적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유남준은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차가운 기운만 내뿜고 있었다.“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그는 놀란 표정의 고영란을 그대로 둔 채 옛 저택을 떠났다. 두원으로 돌아가는 길, 유남준의 머릿속에는 박민정과 유남우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휴식하지 못해 몸이 쓰러질 것 같았지만 잠에 들고 싶지는 않았다.그렇게 결국 두원에 도착했다.유남준은 술을 한 병 들고 혼자
유남준은 공항이 아닌 정림원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 박윤우가 썼던 칫솔을 병원에 가져가 유전자 검사를 맡기도록 했다.다른 한편 조하랑과 박예찬은 이미 비행기에 탑승했고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창밖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조하랑은 밖을 내다보며 마음을 내려놓았다.“앞으로는 좀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박예찬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조하랑은 그가 유치원 친구들과 떨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줄만 알고 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나중에 동민이 데리고 널 보러 갈게.”그 말에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은 박예찬이 그녀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응.”조하랑은 더 얘기를 나누려고 하다가 박예찬이 앞좌석 주머니 안에 있는 신문을 꺼내 들고 보자 입을 닫았다.신문 헤드라인에는 아직도 이지원의 뉴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마 한 일주일 정도는 열기가 식지 않을 것 같았다. 외부에서는 모두 이지원이 유남준의 여자 친구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 말이다.대충 훑어보고 흥미를 잃은 박예찬은 신문을 얼굴 위에 덮고 잠깐 잠을 청했다.조하랑은 옆에 앉은 조그만 아이를 보며 한창 귀여울 나이에 왜 저렇게 애어른 같을까, 하며 속으로 감탄했다.박예찬은 진주에 있는 동안에 한 번도 아빠를 찾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집에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기만 하다.박민정이 있는 항구도시 오르후스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일여덟 시간은 족히 가야 하기에 조하랑도 눈을 감고 좀 자기로 했다.그리고 8시간 뒤.시차 때문에 오르후스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한밤중이었다.박민정은 진작부터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조하랑과 박예찬을 발견하고 다가오면서 그들을 불렀다.“예찬아, 하랑아.”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박예찬을 안았다.박예찬은 뽀송뽀송하고 발그스름한 얼굴을 엄마의 품에 비볐다.“엄마.”“가자. 우리 먼저 집으로 가자.”한편 집에서는 은정숙과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도 않는데 계속 찾진 않을 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포기하겠지.”유남준이 자신을 찾아다니는 건 그저 달갑지 않아서일 뿐이라고 박민정은 생각했다.박민정은 그한테 큰돈을 남겨 빚 갚는 셈 치고 돌려주었다.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하랑은 생각에 잠깐 잠겨있더니 또 물었다.“그럼 너 윤우랑 예찬이한테 새 아빠 만들어줄 생각은 없는 거야?”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박민정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최근 몇 년 밖에서 떠돌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오직 어떻게 두 아이를 잘 키울지 하는 생각으로만 고민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난 지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애들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잘 보살필 수 있어. 괜히 새 아빠 만들어서 애들한테 영향 끼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 지금...”그녀는 손을 평탄한 아랫배에 얹으며 매만졌다.그걸 보자 조하랑은 눈을 크게 떴다.“진짜 임신한 거야?”“응.”박민정이 고개를 약간 주억거렸다.“여기 오자마자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봤는데 임신 맞대. 한 달 됐어.”조하랑은 호기심이 들어찬 눈빛으로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너무 잘 됐다. 그러면 아홉 달 후면 윤우 수술할 수 있겠네?”“정확히 말하면 8개월 후야.”박민정은 이런 방면에는 문외한인 조하랑에게 열 달 임신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실제로는 아홉 달이면 아이가 출산한다고.“아...그런 거구나...”조하랑은 손을 거둬들이며 박민정에게 국내의 소식을 들려주었다.“너 뉴스 봤지? 이지원 이번엔 끝장이야. 그리고 유남준도, 네티즌들이 오쟁이 진 남자라고 엄청 놀려대고 있어.”일이 이렇게 될지는 알았었지만 유남준이 여론을 막지 않은 것은 좀 의외였다.“유앤케이가 원래 여론 막는 데는 도가 텄지 않았어? 쓸데없는 말은 한 줄도 안 나오게 했던 것 같은데.”“몰라. 아빠 얘기 들으니까 유앤케이 지금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서 대표 자리에 앉혀놓고 유남준은 막후에서만 활동한대.”“그 사
과거의 일을 전부 없었던 걸로 하자고?유남준은 그 서류를 낚아채 조목조목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두 사람이 더 이상 관계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가서, 배상액을 보는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1조 6천억!이렇게나 많은 돈을...박민정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났단 말인가.유남준은 진즉에 박민정의 회사를 조사했다. 유동자산이 많아 봐야 천억 정도밖에에 안 되었고, 그 회사를 통째로 판다 해도 이 많은 돈을 모으기엔 턱 없이 모자란다.냉소를 흘리며 유남준은 그 서류를 휴지통에 처박았다.“허, 왜 내가 여기에 사인할 거라 생각해요?”“제 의뢰인이 얘기한 바 있습니다. 유 대표님이 사인을 안 하시게 되면 이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옛날 일들을 전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요.”장명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동시에 무게를 실었다.“그러니까 앞으로 그 일을 들먹여서 박민정 씨의 목을 조르지 마세요. 당신이 싫다고 한 것이지, 박민정 씨가 갚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란 걸 잊지 말란 말씀입니다.”박민정을이 어릴 때부터 쭉 봐온 셈인 장명철은 전부터 그녀를 대신해 유남준한테 시원하게 욕을 날리고 싶었다.영락없이 얻어맞으며 쫓겨날 줄 알았는데 유남준은 그가 한 말에는 별로 화가 난 눈치가 아니었고 이렇게만 말했다.“걱정 마세요. 앞으로 그 일 다시 꺼내지 않을 테니까.”너무 순순히 나오자 장명철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하지만 유남준은 여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했다. 박민정이 어처구니없는 금액의 큰돈을 서슴없이 내놓으면서까지 자신을 떠나려는,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결심이 얼마나 견결한지를 그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장명철이 가고 난 후 유남준은 음침한 소리로 서다희한테 물었다.“널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심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서다희는 자기 여자 친구를 떠올리며 물음에 대답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난 그녀를 반드시 후회하게 할 겁니다.”그래, 그
유남준은 입구에 서서 집 안에 있는 너무나 익숙해 마지않은 얼굴을 바라봤다.분명 못 본 지 겨우 반달 남짓 되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경호원들은 대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유남준만 집안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실내의 기압마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내가 분명히 다 얘길 한 줄로 아는데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선 유남준은 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색을 살필 수가 없었다.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깊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며 시선을 한시도 떨구지 않았다.데일 것만 같은 따가운 시선에 박민정은 저도 몰래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장명철 변호사님한테서 돈 받았죠? 그러니까 우린 이제 끝난 사이에요.”여전히 말이 없는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박민정의 모습만 박혀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려고 했으나 박민정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손을 피해 연거푸 몇 발짝이나 물러났다.그러고는 긴 숨을 들이쉬며 그녀가 물었다.“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허공에 떠 있는 손 그대로 유남준은 한 글자씩 또렷하게 내뱉었다.“나랑 집에 돌아가자.”“집이요?”박민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무슨 집이요? 두원 별장 말하는 거예요? 거긴 여태껏 내 집인 적이 없어요.”과거에 유남준은 이렇게 그녀와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젠 박민정이 그한테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유남준은 박민정 때문에 상처받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고작 한마디 말뿐인데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허울뿐이잖아요!”박민정은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쳤다.순간일순 큰 바위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에 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어 잡았다. 눈빛에서는 불씨가 타오르는 듯하며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허울뿐?! 너 지난달까지만 해도 내 침대에 있었어. 너 기분 좋을 때 어떤 소리 내지르는지 내가 한 번 실감 나게 질러줘 봐?”쨕!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의 뺨
한참 후 유남준과 연지석의 얼굴에는 누구 하나 더 낫다 할 것 없이 골고루 상처가 나 있었다.하지만 전에 상처를 입은 연지석은 유남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남준의 주먹이 또 날아오자 박민정은 두 팔을 벌려 연지석을 보호하며 막아섰다.“그만해요, 이제!”그녀는 차갑게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를 저지했다.유남준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다 터진 입가로부터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오며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엄지손가락으로 피를 쓱 닦아내며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이만 가요, 안 그러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그한테 경고했다.그 순간의 기분은 대체 어떤 것인지 유남준도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게 누구든 항상 제일 먼저 그의 편에 섰던 그녀였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이를 선택했다.유남준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묵묵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가 떠나자 박민정은 얼른 연지석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그녀의 손이 연지석의 팔에 닿자마자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어, 괜찮아.”연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소매에서 피가 스며져 나와 그녀의 손끝까지 붉게 물들인 것을 발견했다.“네 팔에서 피가 나오고 있어.”연지석은 곧장 외투를 벗어 다부진 팔근육을 드러냈다. 흉측한 칼자국 상처가 조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다시 벌어져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는 얼른 옷으로 그곳을 눌렀다.“전옛날에 난 상처인데, 혹시 놀랐어?”유남준이 주먹을 꽤 잘 쓰는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때 그가 데려온 사람도 집안에 들어왔다. 모두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얼굴들이었다.연지석이 다친 걸 보자 그 중 한 사람이 달려와 그에게 상처를 싸매주었다.“병원으로 가실까요?”“아니야, 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어.”연지석은 그 일행을 밖에 내보내고서는 박민정에게 시선을 돌렸다.“유남준이 널 다치게 하진 않았어?”박민정은 고개를 저었
마침내 분만실 문이 열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간호사가 두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유남준은 아기를 보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분만실에는 박민정이 기력이 없이 누워있었다.“민정아.”박민정은 힘겹게 웃었다. “괜찮아요.”유남준은 그런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이제 그만 낳자.”“네, 좋아요.”박민정이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기들은요?”“밖에 있어, 건강해.” 유남준의 이 말에 박민정은 안심되면서도 궁금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유남준이 멈칫했다.“잠깐만, 내가 보고 올게.”그는 박민정 생각에만 빠져서 아기를 보는 걸 잊고 말았다.밖으로 나오니 박윤우와 박예찬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기들은요?”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제 아기 생각나요? 신생아실로 갔어요.”“깜빡했네요.”유남준이 물었다.“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멋진 사내아이 둘이에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도 박예찬, 박윤우처럼 실망했다. 그는 박민정을 닮은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쉬는 동안 조하랑과 진서연네는 아기들을 달래고 있었고 의사는 박윤우의 수술을 위한 검사로 바빴다.“너무 작고 귀여워.”진서연은 모성애가 한껏 피어올라 연신 귀엽다고 했으나 박예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남동생 둘도 좋아, 실망하지 마.”조하랑의 위로에 박예찬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랑 이모, 언제 아기 낳으실 거예요? 저랑 윤우한테 여동생 둘 낳아주세요.”“맞아요, 한 명씩이요.” 박윤우마저 한마디 하자 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꿈도 꾸지 마. 내가 낳은 딸을 왜 너희한테 하나씩 줘? 게다가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조하랑이 부글부글 말하고 있을 때 김인우도 다가왔다. “맞아, 우리 딸
정수미는 돌아간 뒤 박민정이 조산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윤소현이 계속 세뇌를 시도했다. “엄마, 박민정이 회사 일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인 것 같아요.”“지원이가 엄마 딸이잖아요. 박민정도 엄마 딸이라면 쌍둥이라도 낳으셨단 말이에요?”정수미는 귓가가 윙윙거렸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정말 딸이라면 그동안 자신이 박민정에게 했던 모든 일들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엄마,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절대 믿으시면 안 돼요. 그럼 지원이는 어떻게 해요?” 이 말에 정수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좀 조용히 있어 줄래?”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몰래 이지원에게 박민정이 모든 걸 알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지원도 소름이 돋았다. [정수미가 믿었어요?][아직은요. 하지만 엄마 성격상 분명 조사할 거예요.]이 메시지에 이지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소식 들었는데 박민정이 너무 흥분해서 지금 출산한대요. 소현 씨, 우리는 한 배를 탔어요. 도와주셔야 해요.]혼자서는 박민정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정씨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윤소현은 이지원을 찾아갔고 정수미는 모든 걸 지켜보며 사람을 시켜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게 했다.이지원은 방에서 계획을 세우다가 윤소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적으로는 언니라고 부르지 마요. 무슨 일이겠어요, 박민정 일로 의논하려고 왔죠.”이지원은 윤소현이 악랄하면서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를 찾아오다니, 정수미가 뭐라고 생각할까?“아...”이지원이 목소리를 낮춰 이해관계를 설명한 후에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내가 너무 급했네요.”“괜찮아요, 언니. 진실은 밝혀질 테니 일단 쉬세요.”이지원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지만 다른 방에서 대화
박민정은 정수미가 검사 결과를 보고 기뻐할 줄 알았다. 이지원이 가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정수미가 제일 먼저 위조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박민정은 목구멍이 바늘에 찔린 듯했다.“이건 진짜예요. 위조된 게 아니에요. 믿지 못 하시다면 직접 확인해보세요.” 윤소현이 비웃듯 말했다.“사기꾼 말 믿고 우리 엄마가 세상 모든 여자랑 친자 검사라도 해야 하나?”그녀는 정수미 손에서 검사서를 뺏어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엄마, 가요. 이런 사기꾼이랑 말할 가치도 없어요.”정수미는 일어서지 못한 채 박민정을 바라보았다. “내 친딸 얘기로 장난치지 말라고 했죠. 평생의 아픔이에요!”박민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절대 용서 못 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요!” 정수미의 마지막 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박민정은 찢어진 검사서를 바라보았고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바보같아.”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식당을 나섰다. 밖에 나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가슴 한켠을 누르는 거대한 바위같은 무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전화벨이 울리자 박민정은 정수미가 마음을 돌려 자신과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보니 유남준이 건 전화였다.“남준 씨.”“일어났어?”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눈물이 났다. “진작 일어났어요.”“그럼 전화하지 그랬어? 지금 갈게.” 유남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말에 박민정은 휴대폰을 꼭 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나 정수미 씨 만나고 왔어요.” 유남준은 걸으며 통화를 이어갔다.“그래서?”“그 사람이 내가 보여준 유전자 검사를 믿지 않았어요. 나더러 사기꾼이래요. 다시는 연락하지 말래요.”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어디야? 내가 갈게. 울지 마.” 유남준이 차에 타며 말했고 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병원 근처
윤소현은 정수미가 박민정과 만난다는 걸 알자마자 전화를 걸었고 진짜 그렇다는 걸 확인하고는 순간 급해졌다.“엄마, 제가 같이 갈게요. 박민정이 엄마를 만나자고 한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지난번에 칼을 들고 엄마를 협박했던 일을 잊으셨어요?”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경계심이 들었다. “네가 말하니 기억나네. 걱정 마, 이번엔 경호원을 데리고 갈 거야. 그러면 못할 거야.”“엄마, 무서워요. 제가 꼭 같이 가야겠어요.” 윤소현은 이미 차에 탄 상태였다. “엄마, 주소 보내주세요. 엄마는 제 전부예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알았어.”주소를 보내고 나서 정수미는 윤소현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비서도 대화를 대충 들었다. “소현 아가씨가 냉철해도 대표님을 많이 생각하시네요.”정수미는 미소 지었다. “그 애는 내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난 정말 걱정이야. 내가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나...”“대표님, 분명 오래 사실 거예요.” 비서가 아부했다.정수미는 한숨을 쉬었다. “내 몸은 내가 알지. 젊을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육칠십까지만 살아도 만족해.”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민정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윤소현이 오기 전에 정수미는 비서 겸 경호원과 함께 올라갔다.룸의 고급 방에서 박민정은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긴장된 마음을 달랬다.마침내 발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자 정장 차림의 정수미가 비서와 함께 들어왔다.“민정 씨, 무슨 얘기하실 건가요?”정수미는 들어오자마자 앉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함미현 일 때문 아닌가요? 박민정 씨가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네요.”예전 같았으면 박민정은 바로 받아쳤을 테지만 지금은 정수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정수미가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죠.”박민정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아무 반응 없이
병실에서 퇴원할 생각 없이 늦게까지 떠나지 않는 진서연 일행. 남자인 유남준은 당연히 그들과 할 얘기가 없어 다른 방에서 계속 일했고 그들이 떠나자마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박윤우는 이미 피곤함에 지쳐 잠들어 있었고 그걸 본 유남준이 박민정 곁으로 다가왔다. “피곤하지 않아? 좀 누워있을래?” 박민정은 매번 누울 때마다 그가 이것저것 장난치는 걸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안 피곤해요, 좀 더 앉아있고 싶어요.”“출산이 얼마 안 남았는데 가서 좀 누워있자. 응?” 유남준이 다정하게 달랬고 결국 박민정은 그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함께 누웠다.불을 끄자 밖의 희미한 불빛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함미현네는 괜찮아요?” 박민정이 물었다.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걱정 마, 내가 몰래 사람을 붙여뒀어.” “네...”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왜 저렇게 잔인한 걸까요?” 박민정은 자신과 박예찬이 그녀 손에 죽을 뻔했던 걸 떠올렸다. 또 함미현네 일을 생각하니 그 사람이 무서워졌다. 함미현의 일은 자업자득이지만, 자신은? 그저 윤소현의 미움을 샀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친어머니라니!“여자가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어느 정도 수단은 필요하지.” 유남준이 대답했다. 박민정도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고민이에요. 그분을 엄마로 받아들여야 할지...”“사실 진실을 말해도 좋을 것 같아. 그 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 되고.”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결심이 선 듯했다. “좋아요, 내일 가서 얘기해 볼게요.” 어차피 이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해야 했다.“응.” 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박민정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준 씨!” 유남준은 또 ‘응’하고 대답했는데 목소리가 쉰 듯했다.좋아하는 여자가 곁에 있으
이지원도 함미현의 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지만 윤소현이 이토록 잔인할 줄은 몰랐다.그녀가 알기로는 함미현에게 어린아이가 있지 않았던가.윤소현이 전화를 끊자 그녀는 부드럽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윤소현은 그녀를 보면서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것, 둘 다 박민정을 싫어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잠시 생각한 끝에 숨기지 않기로 했다.“함미현이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데, 만약 이 비밀이 정수미의 귀에 들어가면 우리 둘 다 큰일 날 거예요.”이지원이 의아해했다. “무슨 비밀인데요?”“내가 어떻게 지원 씨랑 정수미의 친자 감정 결과를 혈연관계가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었는지 알아요? 박민정이 바로 정수미의 친딸이기 때문이에요.” 윤소현이 한 글자 한 글자 말하며 이지원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과연 이지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고 머릿속이 윙윙거렸다.“그럴 리가 없어요...”“왜 없겠어요? 박민정도 고아잖아요. 진주시 보육원에서 한수민이 입양했고 마침 태어난 날도 폭설이 내렸어요. 지원 씨랑 박민정의 나이도 딱 맞지 않아요?” 윤소현의 말에 이지원은 한참을 정신을 못 차렸다.왜? 그녀는 자신이 정씨 가문의 귀한 딸이 되어 이제는 박민정이 따라올 수 없는 존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왜?왜 박민정이 정수미의 딸인 거지?세상의 모든 좋은 일들은 왜 그녀가 다 차지하는 걸까?이지원은 분하기만 했다. 꽉 쥔 주먹의 손톱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다.“지원 씨, 괜찮아요?”윤소현은 그녀가 한참을 말이 없자 일부러 그녀를 불렀다.이지원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괜찮아요.”“함미현이 아마 박민정에게 진실을 이미 말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박민정이 왜 정씨 가문과 적이 되는 길을 선택하고 그 여자를 구해줬겠어요.” 이지원이 말했다. “소현 씨, 지금 사람을 보내 함미현 일행을 쫓는 건 너무 늦었을 것 같네요.”윤소현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 봤다.“만약 아닐 수도 있잖아요? 박민정이 진실을 알았다면 지금쯤 벌
함미현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박민정은 이때 가정부에게 동하와 동하 아빠를 불러오라고 했다.두 사람은 곧 아동방에서 나왔고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함미현을 보고 물었다.“미현아,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야?”“엄마, 많이 아파요?”함미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우리 먼저 떠나자. 민정 씨한테 더 폐를 끼치지 말자고.”“그래.”동하의 아빠는 아들을 안고 함미현과 함께 박민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동하는 떠나면서도 잊지 않고 말했다. “아줌마, 감사해요. 윤우 형이 나으면 저랑 놀게 해주세요.”박민정은 그를 향해 미소 지었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일이라 아이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이쪽에서 박민정이 함미현 일가의 일을 잘 처리했을 때 정수미도 곧 소식을 받았고 함미현과 동하가 떠났다는 걸 알게 됐다.“누가 한 짓이지?”감히 그녀에게 맞서다니!부하가 말했다. “박민정과 유남준인 것 같습니다.”정수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또 박민정 그 여자야. 지난번 교훈을 잊은 모양이구나?”그녀가 말하는 중에 윤소현도 급히 왔다.“엄마, 들으셨어요? 박민정이 사람을 시켜 동하를 데려갔대요. 함미현도 병원에 없고요.”윤소현은 지금 누구보다도 초조하고 두려웠다. 박민정이 무언가를 알게 된 걸까? 그렇지 않다면 왜 함미현과 동하를 데려갔을까?이런 망할!그녀는 옆에서 정수미의 일을 전담하는 사람을 보며 꾸짖었다. “너희들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왜 쫓아가 데려오지 않은 거야?”“그게...”부하들이 정수미를 쳐다보았다.정수미도 윤소현이 이렇게 격앙될 줄은 몰랐다. “소현아, 그만두자. 그 집안을 놓아줘. 어차피 함미현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용서할 만한 건 용서하는 게 좋아.”“안 돼요.” 윤소현이 단번에 거절했다. “엄마, 함미현은 엄마의 친딸인 척했잖아요. 우리가 그 여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텐데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 용
박씨 집안에서.박민정은 어제 늦게 자서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다.밖에 나오자 정민기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고 정민기 곁에는 동하라는 아이가 있었다.“동하야, 날 기억하니?” 박민정은 정민기가 동하를 데리고 나온 것을 보고 안심하며 인사했다.동하의 눈이 반짝였다. “아줌마, 윤우 엄마시죠.”역시 아이들끼리는 더 잘 기억하는 법이었다.“그래.”박민정이 동하 앞으로 와서 정민기에게 물었다. “어디서 데리고 나온 거예요?”“병원에서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동하 의료비와 입원비를 내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요. 제가 미납금을 내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정민기가 말했다.박민정은 정씨 가문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아이어머니를 가두고 아이는 혼자 병원에 버려둔 채 전혀 신경 쓰지 않다니...“그럼 동하 아빠는요?”“정씨네 회사에서 해고당했어요. 지금은 일자리를 찾으면서 함미현 씨와 동하를 찾고 있죠.” 정민기가 답했다.동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줌마, 전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저를 데려다주실 수 있어요? 소현 아줌마가 우리 엄마 아빠가 저를 버렸대요.”말하면서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박민정은 서둘러 몸을 낮춰 그를 달랬다. “동하야, 아줌마가 지금 널 네 엄마 아빠한테 데려다주려고 하는 거야.”“그분들이 어떻게 너를 버릴 수 있겠니?”그녀는 윤소현과 정씨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줄은 몰랐다!먼저 엄혜란을 죽이더니 이제 또 이런 짓을 하다니...“그런데 왜 엄마 아빠가 병원에 절 보러 안 오셨어요?” 동하의 눈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두 분이 일하느라 바빠서 그랬어. 이제 시간이 나셔서 아줌마보고 널 데리러 오라고 하신 거야.” 박민정이 부드럽게 설명하자 동하는 그제서야 조금 기뻐졌다.“윤우 형은요?”박윤우 얘기가 나오자 박민정은 슬퍼졌다. “윤우는 아파서 지금 병원에 있어.”“아, 윤우 형도
“하지만 증조할아버지, 이 일은 반드시 비밀로 해주세요.” 박예찬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하랑 이모가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연기를 가르쳐 사람들을 속였다는 걸 알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사실 그도 어쩔 수 없었다.김훈이 어느 순간부터 조하랑을 마음에 들어 하더니 꼭 손자며느리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박예찬에게 이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박예찬은 할아버지가 이런 어려운 임무를 자신에게 맡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 온갖 부탁을 했는데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는 거절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런 꾀를 내게 된 것이다.신혼 방에서 김인우와 조하랑은 나란히 누웠지만 감시당할까 봐 말도 못 꺼냈다.“자요.” 김인우가 어색하게 기침을 했다.“네.” 조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지만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김인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일 아침 일찍 노인네가 방에 설치해 둔 도청 장치를 반드시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방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한편, 강씨 가문에서 강연우가 황예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황예지가 누워서 그를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미안해.”강연우는 그녀의 사과를 듣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왜 나한테 사과해?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황예지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어. 당신에게 짐이 되기 싫었거든. 내가 죽으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고.”강연우는 그제서야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게 됐다. 바로 자신이 한 말 때문이었다.죽음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떠나버리면 내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겠어?”강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입 맞췄다.“당신은 정말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