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 별장.박예찬을 데려온 조하랑은 한숨을 돌렸다. 이윽고 김인우를 보면서 얘기했다.“무조건 배상해줘야 해요!”김인우가 수표를 밀었다.“나도 그쯤은 알아요.”김인우는 조하랑과 박예찬을 보면서 약간 실망했다.솔직히 자기한테 아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싫다기보다 기대되었다.박예찬은 약간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그는 그런 박예찬이 좋았다. 또 총명하기도 했고.조하랑은 수표를 건네받고 미간에 힘을 풀었다. 이 돈이 그녀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잠시나마 꺼뜨린 것 같았다.“그럼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이만 안녕히 계세요. 영원히 다시 만나지 말자고요.”조하랑은 말을 마치고 박예찬을 데리고 차에 올랐다.두 사람이 택시에 타서 멀어져갔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 차에 탄 유남준이 이글거리는 시선을 박예찬에 고정시킨 채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유남준의 두 눈동자에는 놀라움만이 담겨있었다.서다희가 다가와 얘기했다.“박윤우가 아닙니까?”유남준은 입술을 꽉 말고 천천히 얘기했다.“따라가. 나는 김인우를 만나러 간다.”“네.”...김인우는 유남준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유남준이 인터넷의 여론 때문에 바쁜 줄 알았다.“남준아, 걱정하지 마. 그저 여자일 뿐이잖아. 이지원 같은 여자는 널리고 널렸어.”김인우는 술 한 병을 따서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유남준은 그의 앞에서 이지원 얘기를 꺼내지 않고 물었다.“조하랑이 데려간 아이가 요즘 계속 너한테 있었어?”김인우는 약간 어색해져서 코를 긁적였다.“오해였어.”그는 앉아서 그와 박예찬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오해가 생겼는지 다 유남준한테 알려주었다.유남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아까 본 아이가 정림원에 있던 박윤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그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박예찬이라는 애가 조하랑의 아들이라고?”“응.”유남준은 바로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김인우는 그가 바로 떠나려는 것을 이상히 여겨 물었다.“왜?”유남준이 가기 전
유남준은 박예찬과 박윤우가 쌍둥이라는 것을 확신했다.한 명은 조하랑과 있고 한 명은 은정숙과 있다.이게 무슨 뜻이겠는가.그날 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다. 유남준은 추위를 못 느끼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었다.경호원이 보내온 자료에는 조하랑의 출국 전후의 일들이 적혀있었다.남자친구도 사귀지 못한 그녀에게 아이가 있을 리 없었다.그러니 이 두 아이는 다 박민정의 아이다.그렇다면 왜 유남준을 속인 것일까.담배에 불을 붙인 유남준은 얼마 가지 않아 세게 기침했다.기사가 나와 물었다.“대표님, 차에 타시는 게 어떻습니까.”“괜찮다.”이 추위만이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유남준은 박윤우가 자기 성을 연이라고 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성은 박이었다. 그는 연지석과 박민정이 한 아이의 성을 연으로 하고 한 아이의 성을 박이라고 결정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유남준은 2, 3일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그저 당장 박민정을 찾아 자기 곁에 묶어놓고 어디도 갈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그 생각에 유남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내일은 유씨 가문의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유남준은 거절했지만 고영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라고 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그는 조하랑과 박예찬의 일을 부하에게 맡겨두고 옛 저택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유씨 가문 옛 저택.모든 사람들이 유남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항상 흐트러짐 없던 그가 지금은 꼴이 엉망이었고 수염도 나 있었다.여자 고용인이 그의 방에서 나오면서 반지 하나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유남준이 그녀를 막아 나서서 물었다.“손에 든 거, 뭐야.”고용인은 유남준을 보자마자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일부러 훔친 건 아니고 이불을 정리할 때 베개 밑에
고영란은 유남준이 온 것을 보고 얘기했다.“남우가 너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대.”말을 마친 고영란은 다른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했다.유남준은 유남우에게로 걸어갔다.“전의 문자도 네가 보낸 거야?”유남우는 온화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유남준은 몸을 약간 숙였다. 유남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돌변해 있었다.이제야 박민정이 쓴 편지의 뜻을 알 것 같았다.사람을 잘못 봤다니.유남우와 유남준을 헷갈렸다는 소리였다.참 어이가 없었다.그는 박민정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유남우는 유남준의 감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민정이의 남편은 나였어야 해.”유남준의 목울대가 약간 움직였다. 눈앞의 사람이 친동생만 아니었다면 죽이려고 들었을지도 모른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박민정 남편이야.”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 얘기했다.“겨우 일어났으니 쉬어야 하지 않아? 다시 잠들면 영영 못 깨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차갑게 말을 마친 유남준이 걸어 나갔다.유남우의 방에서 걸어 나오자 고영란이 그의 곁에서 얘기했다.“의사 선생님 말로는 기적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유남준은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차가운 기운만 내뿜고 있었다.“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그는 놀란 표정의 고영란을 그대로 둔 채 옛 저택을 떠났다. 두원으로 돌아가는 길, 유남준의 머릿속에는 박민정과 유남우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휴식하지 못해 몸이 쓰러질 것 같았지만 잠에 들고 싶지는 않았다.그렇게 결국 두원에 도착했다.유남준은 술을 한 병 들고 혼자
유남준은 공항이 아닌 정림원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 박윤우가 썼던 칫솔을 병원에 가져가 유전자 검사를 맡기도록 했다.다른 한편 조하랑과 박예찬은 이미 비행기에 탑승했고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창밖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조하랑은 밖을 내다보며 마음을 내려놓았다.“앞으로는 좀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박예찬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조하랑은 그가 유치원 친구들과 떨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줄만 알고 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나중에 동민이 데리고 널 보러 갈게.”그 말에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은 박예찬이 그녀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응.”조하랑은 더 얘기를 나누려고 하다가 박예찬이 앞좌석 주머니 안에 있는 신문을 꺼내 들고 보자 입을 닫았다.신문 헤드라인에는 아직도 이지원의 뉴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마 한 일주일 정도는 열기가 식지 않을 것 같았다. 외부에서는 모두 이지원이 유남준의 여자 친구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 말이다.대충 훑어보고 흥미를 잃은 박예찬은 신문을 얼굴 위에 덮고 잠깐 잠을 청했다.조하랑은 옆에 앉은 조그만 아이를 보며 한창 귀여울 나이에 왜 저렇게 애어른 같을까, 하며 속으로 감탄했다.박예찬은 진주에 있는 동안에 한 번도 아빠를 찾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집에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기만 하다.박민정이 있는 항구도시 오르후스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일여덟 시간은 족히 가야 하기에 조하랑도 눈을 감고 좀 자기로 했다.그리고 8시간 뒤.시차 때문에 오르후스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한밤중이었다.박민정은 진작부터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조하랑과 박예찬을 발견하고 다가오면서 그들을 불렀다.“예찬아, 하랑아.”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박예찬을 안았다.박예찬은 뽀송뽀송하고 발그스름한 얼굴을 엄마의 품에 비볐다.“엄마.”“가자. 우리 먼저 집으로 가자.”한편 집에서는 은정숙과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도 않는데 계속 찾진 않을 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포기하겠지.”유남준이 자신을 찾아다니는 건 그저 달갑지 않아서일 뿐이라고 박민정은 생각했다.박민정은 그한테 큰돈을 남겨 빚 갚는 셈 치고 돌려주었다.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하랑은 생각에 잠깐 잠겨있더니 또 물었다.“그럼 너 윤우랑 예찬이한테 새 아빠 만들어줄 생각은 없는 거야?”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박민정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최근 몇 년 밖에서 떠돌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오직 어떻게 두 아이를 잘 키울지 하는 생각으로만 고민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난 지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애들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잘 보살필 수 있어. 괜히 새 아빠 만들어서 애들한테 영향 끼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 지금...”그녀는 손을 평탄한 아랫배에 얹으며 매만졌다.그걸 보자 조하랑은 눈을 크게 떴다.“진짜 임신한 거야?”“응.”박민정이 고개를 약간 주억거렸다.“여기 오자마자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봤는데 임신 맞대. 한 달 됐어.”조하랑은 호기심이 들어찬 눈빛으로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너무 잘 됐다. 그러면 아홉 달 후면 윤우 수술할 수 있겠네?”“정확히 말하면 8개월 후야.”박민정은 이런 방면에는 문외한인 조하랑에게 열 달 임신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실제로는 아홉 달이면 아이가 출산한다고.“아...그런 거구나...”조하랑은 손을 거둬들이며 박민정에게 국내의 소식을 들려주었다.“너 뉴스 봤지? 이지원 이번엔 끝장이야. 그리고 유남준도, 네티즌들이 오쟁이 진 남자라고 엄청 놀려대고 있어.”일이 이렇게 될지는 알았었지만 유남준이 여론을 막지 않은 것은 좀 의외였다.“유앤케이가 원래 여론 막는 데는 도가 텄지 않았어? 쓸데없는 말은 한 줄도 안 나오게 했던 것 같은데.”“몰라. 아빠 얘기 들으니까 유앤케이 지금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서 대표 자리에 앉혀놓고 유남준은 막후에서만 활동한대.”“그 사
과거의 일을 전부 없었던 걸로 하자고?유남준은 그 서류를 낚아채 조목조목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두 사람이 더 이상 관계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가서, 배상액을 보는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1조 6천억!이렇게나 많은 돈을...박민정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났단 말인가.유남준은 진즉에 박민정의 회사를 조사했다. 유동자산이 많아 봐야 천억 정도밖에에 안 되었고, 그 회사를 통째로 판다 해도 이 많은 돈을 모으기엔 턱 없이 모자란다.냉소를 흘리며 유남준은 그 서류를 휴지통에 처박았다.“허, 왜 내가 여기에 사인할 거라 생각해요?”“제 의뢰인이 얘기한 바 있습니다. 유 대표님이 사인을 안 하시게 되면 이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옛날 일들을 전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요.”장명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동시에 무게를 실었다.“그러니까 앞으로 그 일을 들먹여서 박민정 씨의 목을 조르지 마세요. 당신이 싫다고 한 것이지, 박민정 씨가 갚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란 걸 잊지 말란 말씀입니다.”박민정을이 어릴 때부터 쭉 봐온 셈인 장명철은 전부터 그녀를 대신해 유남준한테 시원하게 욕을 날리고 싶었다.영락없이 얻어맞으며 쫓겨날 줄 알았는데 유남준은 그가 한 말에는 별로 화가 난 눈치가 아니었고 이렇게만 말했다.“걱정 마세요. 앞으로 그 일 다시 꺼내지 않을 테니까.”너무 순순히 나오자 장명철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하지만 유남준은 여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했다. 박민정이 어처구니없는 금액의 큰돈을 서슴없이 내놓으면서까지 자신을 떠나려는,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결심이 얼마나 견결한지를 그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장명철이 가고 난 후 유남준은 음침한 소리로 서다희한테 물었다.“널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심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서다희는 자기 여자 친구를 떠올리며 물음에 대답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난 그녀를 반드시 후회하게 할 겁니다.”그래, 그
유남준은 입구에 서서 집 안에 있는 너무나 익숙해 마지않은 얼굴을 바라봤다.분명 못 본 지 겨우 반달 남짓 되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경호원들은 대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유남준만 집안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실내의 기압마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내가 분명히 다 얘길 한 줄로 아는데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선 유남준은 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색을 살필 수가 없었다.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깊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며 시선을 한시도 떨구지 않았다.데일 것만 같은 따가운 시선에 박민정은 저도 몰래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장명철 변호사님한테서 돈 받았죠? 그러니까 우린 이제 끝난 사이에요.”여전히 말이 없는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박민정의 모습만 박혀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려고 했으나 박민정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손을 피해 연거푸 몇 발짝이나 물러났다.그러고는 긴 숨을 들이쉬며 그녀가 물었다.“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허공에 떠 있는 손 그대로 유남준은 한 글자씩 또렷하게 내뱉었다.“나랑 집에 돌아가자.”“집이요?”박민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무슨 집이요? 두원 별장 말하는 거예요? 거긴 여태껏 내 집인 적이 없어요.”과거에 유남준은 이렇게 그녀와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젠 박민정이 그한테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유남준은 박민정 때문에 상처받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고작 한마디 말뿐인데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허울뿐이잖아요!”박민정은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쳤다.순간일순 큰 바위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에 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어 잡았다. 눈빛에서는 불씨가 타오르는 듯하며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허울뿐?! 너 지난달까지만 해도 내 침대에 있었어. 너 기분 좋을 때 어떤 소리 내지르는지 내가 한 번 실감 나게 질러줘 봐?”쨕!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의 뺨
한참 후 유남준과 연지석의 얼굴에는 누구 하나 더 낫다 할 것 없이 골고루 상처가 나 있었다.하지만 전에 상처를 입은 연지석은 유남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남준의 주먹이 또 날아오자 박민정은 두 팔을 벌려 연지석을 보호하며 막아섰다.“그만해요, 이제!”그녀는 차갑게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를 저지했다.유남준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다 터진 입가로부터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오며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엄지손가락으로 피를 쓱 닦아내며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이만 가요, 안 그러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그한테 경고했다.그 순간의 기분은 대체 어떤 것인지 유남준도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게 누구든 항상 제일 먼저 그의 편에 섰던 그녀였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이를 선택했다.유남준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묵묵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가 떠나자 박민정은 얼른 연지석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그녀의 손이 연지석의 팔에 닿자마자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어, 괜찮아.”연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소매에서 피가 스며져 나와 그녀의 손끝까지 붉게 물들인 것을 발견했다.“네 팔에서 피가 나오고 있어.”연지석은 곧장 외투를 벗어 다부진 팔근육을 드러냈다. 흉측한 칼자국 상처가 조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다시 벌어져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는 얼른 옷으로 그곳을 눌렀다.“전옛날에 난 상처인데, 혹시 놀랐어?”유남준이 주먹을 꽤 잘 쓰는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때 그가 데려온 사람도 집안에 들어왔다. 모두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얼굴들이었다.연지석이 다친 걸 보자 그 중 한 사람이 달려와 그에게 상처를 싸매주었다.“병원으로 가실까요?”“아니야, 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어.”연지석은 그 일행을 밖에 내보내고서는 박민정에게 시선을 돌렸다.“유남준이 널 다치게 하진 않았어?”박민정은 고개를 저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