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원.박민정은 박윤우와 단둘이 마당을 거닐며 지도에 그려진 CCTV와 실제 CCTV 위치를 비교했다.그러고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 박윤우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윤우야, 엄마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응, 뭐야?”“며칠 뒤에 엄마가 윤우 데리러 다시 여기로 올 거야. 엄마가 오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 줄래?”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렇게 할게.”박민정은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그리고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누구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자, 손가락 걸고 약속.”두 사람은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아이가 아직 어려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 집에서 나가는 당일 무슨 변수라도 생기면 안 되기에 미리 얘기해주기로 했다.박윤우는 그런 그녀의 걱정을 눈치챈 듯 큰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그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엄마, 아저씨가 나 이곳으로 데려온 거 돈 때문이지? 나 다 알아.”박민정은 그 말에 조금 어안이 벙벙하긴 했지만, 굳이 제대로 정정해주지는 않았다.“응, 그러니까 윤우는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해.”“걱정하지 마, 엄마!”박윤우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때 박민정이 품에서 미니 통신 기기를 꺼내더니 아이의 옷 속에 넣어주었다.“윤우야, 엄마가 이거로 연락할 때까지 절대 다른 사람한테 이걸 들키면 안 돼. 할 수 있겠어?”“응, 할 수 있어.”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박민정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박윤우를 꼭 껴안아 주었다.한편 유남준은 2층에서 두 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꽤 복잡한 얼굴을 했다.그때 서다희가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했다.“대표님, 방금 법무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양도 절차 다 마쳤다고 합니다.”유남준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그래.”“박민정 씨한테는 지금 얘기할까요?.”서다희의 질문에 다시 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누구도 없었다.유남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현관문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빠르
그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유남준 쪽이었다.“네가 원했던 거 이거 아니었어?”그녀가 사라졌다가 굳이 귀국한 이유는 이것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박민정이 아직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유남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네가 뭣 때문에 몇 년 동안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이쯤 했으면 풀릴 때도 됐잖아. 그러니까 거기에 사인하고 다시 시작하자, 우리.”박민정은 그의 말이 너무나도 우습게 들려왔다.그녀가 했던 행동들이 고작 화가 나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유남준은 박씨 가문의 자산을 돌려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줄 알고 있는 듯하다.박민정은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들더니 문서 세단기 쪽으로 가 서류를 넣어버렸다. 그리고 잘게 잘린 종이들을 보며 말했다.“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 새로운 시작은 없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할 생각이 없으니까.”한번 포기한 남자를 다시 좋아하는 척하는 것도 이제는 힘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윤이를 데리고 한시라도 빨리 진주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한편, 서다희는 그녀의 행동에 경악하더니 눈치껏 사무실을 나가버렸다.유남준은 박씨 가문을 돌려주면 기뻐하며 좋아할 줄 알았던 그녀에게서 예상외의 반응을 보게 되자 곧바로 눈빛이 차가워졌다.“다시 한번 말해 봐.”“몇 번을 말해도 똑같아요. 우리한테 남은 시간은 이제 11일뿐이에요. 당신은 11일이 지나면 나와 했던 약속을 지켜주기만 하면 돼요.”박민정과 박윤우를 보내주겠다고 한 건 유남준이었다.“하, 그래.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지?”유남준은 한 걸음 한 걸음 박민정에게 다가가더니 천천히 그녀를 구석에 몰아넣고 단숨에 안아 들었다.“그래, 우리한테는 아직 11일이 있지. 그리고 나는 그동안 계속 부부생활을 즐길 수 있는 거고.”박민정은 갑자기 몸이 공중에 들리자 깜짝 놀라 그를 꽉 끌어안았다.그때 커튼이 전부 쳐지고 사무실 안이 어두워졌다. 유남준이 무슨 생각인지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곧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힘껏
유남준은 손에 들린 담배를 꺼버렸다.울고불고하면서 예전처럼 따귀라도 때릴 줄 알았지만, 그녀는 예상외로 평온했다.“나 나갔다 올게요.”토를 얼마나 세게 한 것인지 그녀의 목은 심하게 잠겨있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버렸다.회사를 나서자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날씨는 갑자기 우중충해졌고 어느샌가 비도 내렸다. 박민정은 비를 피하지 않았고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다 지켜보던 누군가는 차 안에서 걱정된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차 세워.”“네.”차량이 멈춰서고 연지석이 외투와 우산을 들고 내렸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박민정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박민정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연지석이 그녀에게 외투를 건넸다.“옷 입어.”쫄딱 젖은 박민정은 순순히 그에게서 외투를 건네받았다.“고마워. 그런데 네가 여기 왜 있어?”차마 그녀를 찾으러 왔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던 연지석은 피식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이 근처에서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나왔다가 너 보고 달려왔지.”“미팅은 잘 끝냈어?”“물론이지.”연지석이 부드럽게 웃었다.“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갈래?”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유남준이 나한테 경호원을 붙였을 거야. 우리가 함께 식사한 걸 알면 화낼 거고.”연지석은 목구멍 쪽이 쓰게 느껴졌다.“민정아, 나 못 믿어?”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연지석이 말을 이었다.“나 유남준 안 무서워. 네 계획도 성공했고 우리는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어. 그러니까 너도 필요 이상으로 그 남자 눈치 안 봐도 돼.”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박민정은 연지석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또한, 그가 유남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그저 고작 친구일 뿐인 사이에 그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할 뿐이다.연지석은 박민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지금 어떤 생각을
두 사람은 걸어서 근처 한식집에 도착했다.박민정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경호원이 유남준에게 어떻게 보고를 하든 더는 두렵지 않았다. 연지석과는 떳떳한 사이니까.한편, 유남준은 경호원이 보내온 사진을 확인하고는 눈에 분노가 피어올랐다.“어딜 가나 했더니 데이트하러 간 거야?”가슴이 미치도록 답답했지만 이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그때, 고영란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연결이 되자 곧바로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남준아, 방금 LA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곧 깨어나게 될 지도 모른대!”유남준은 핸드폰을 꽉 쥐더니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알겠어요.”...한식집.박민정은 맛있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도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게 유남준 때문인지 아니면 드디어 임신한 건지 아직은 감이 서지 않았다. 병원에서 검사하거나 직접 테스트기를 사서 확인해 볼 수는 없으니 검사는 출국한 뒤로 미뤄야 한다.“유남우에 관해 알아보긴 했는데 유남준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정보 외에는 알려진 게 없어.”“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거야?”박민정이 묻자 연지석이 고개를 저었다.“찾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몰라.”유씨 가문은 유남우의 정보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박민정이 해외에서 신분을 감췄을 때보다 더.“그런데 유남우는 왜 조사해 달라고 한 거야?”박민정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꽉 쥐며 답했다.“내가 뭔가를 착각한 것 같아서.”연지석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별거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이제 떠날 건데 뭐. 찾는 거 그만해도 돼.”이렇게 말을 하니 연지석은 유남우라는 사람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박민정은 화제를 돌리며 최근 윤이를 만났고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해주기 시작했다.분명히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지만, 박민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나 5일 뒤에 윤이 데리고 떠날 거야.”“왜 하필 5일 뒤야?”“유남준하고 약속한 게 있어, 한 달 뒤면 나와 윤이를 보내주기로. 이제 11일 남았지만,
유남준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다.박민정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그를 향해 외쳤다.“나쁜 놈!”유남준이 웃었다.“그 나쁜 놈을 좋아했던 건 너고.”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마 술에 취해 이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게 틀림없다.“주정뱅이하고 대화할 생각 없으니까 당장 이거 놔요.”“안 놔. 아니, 못 놔.”유남준은 그녀를 자신의 품속으로 더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내가 너를 놓으면 너는 바로 연지석 그 자식하고 도망갈 거잖아. 내 말이 틀려?”박민정이 계속 발버둥 쳐봐도 유남준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계속 추궁해왔다.“왜 날 배신했어? 날 평생 사랑하겠다고 한 건 너였어. 그런데 왜 약속 안 지켜?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내 아들인 줄 알았어!!”유남준은 술에 취해 그간의 설움을 다 토해냈다.“하지만 자기 아빠는 연지석 그 자식이래. 우리 아이가 하늘나라로 간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다른 놈 애를 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어!”박민정은 그의 추궁에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제 말해 봐. 대체 누가 나쁜지.”유남준은 박민정의 턱을 부여잡고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박민정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 때문에 또 한 번 메슥거리기 시작했다.“지금 당장 이손 놓는 게 좋을 거예요.”그녀는 손톱으로 손을 꾹 짓누르며 토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러기 싫다면?”유남준은 술에 취해 박민정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그때 그녀의 입에서 ‘우웩.’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유남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버렸다.박민정은 이때다 싶어 그를 밀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이 익숙한 느낌은 아마 임신이 맞을 것이다.쾅!급하게 들어오느라 화장실 문을 닫지 못하자 유남준이 따라 들어왔다.그는 조금 정신을 차린 얼굴로 더러워진 옷을 벗어 던지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나와 있는 게 역겨울 정도야?”박
다음날 점심.유남준은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다 옆에 박민정이 없는 것을 보고는 바로 침실을 뛰쳐나갔다.박민정은 그 시각 아래층에서 한창 곡을 쓰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헐레벌떡 뛰어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유남준은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고 아래에는 주름이 가득 간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이미지 관리는 이제 포기한 모양이지?’예전에 그는 상반신은 물론이고 팔조차 드러내지 않고 다녔었다.하지만 지금은 마치 노출증 환자처럼 아무렇지 않게 몸을 드러내며 그녀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박민정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유남준은 그녀가 아직 있다는 것에 안도하더니 서둘러 샤워실로 향했다. 어젯밤 술을 마신 것에 더해 박민정이 토까지 해 놓은 탓에 한시라도 빨리 씻고 싶었다.반 시간 뒤, 샤워를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몇십 통이 와 있었다. 모두 서다희가 건 것이었다.“무슨 일이야?”유남준이 전화를 걸어 묻자 서다희가 난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대표님, 저번에 돈을 빼갔던 놈이 이번에 또 1조 5천8백만이라는 돈을 빼갔습니다.”유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주소는?”“주소가 특정되기는 했는데 그게...”서다희가 뜸을 들였다.“뭔데?”“주소가 정림원으로 나옵니다.”이건 그를 농락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은 싸늘해진 얼굴로 얘기했다.“기술팀 물갈이 좀 해야겠네.”처음에 계좌를 털렸을 당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건 돈을 빼돌린 사람을 직접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남준의 것을 건드리면 고작 감방이라는 가벼운 처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니까.하지만 이게 웬걸, 또 한 방 먹고 말았다.“무슨 수를 써서든 3일 내로 범인 잡아 와.”“네, 알겠습니다.”정림원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니 범인의 얼굴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유치원.박예찬은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를 힘껏 했다.그러다 우연히 창문 밖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유치원 원장과 김인우가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하랑은 바로 박예찬의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선생님, 안녕하세요.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예찬이 좀 바꿔주실 수 있으세요?”“예찬이 어머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예찬이는 아까 아버님께서 오셔서 데려가셨는데...”‘아버님? 설마... 유남준? 아니야, 아니야. 유남준은 예찬이가 자기 자식인 것도 모르잖아. 그럼 혹시...’“여보세요? 예찬이 어머니, 들리세요?”“우리 아들을 아무한테나 데려가게 내버려 두시면 어떻게 해요! 그게 나쁜 사람이면 선생님이 책임 지실 거예요? 데려간 사람 얼굴은 기억해요?”조하랑은 휴대폰에 대고 씩씩거리며 외쳤다.만약 이대로 예찬이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박민정을 볼 낯이 없게 된다. 친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과도 같은 존재가 아이들인데 만약 예찬이가 사라진 것을 알기라도 하면...조하랑은 아까 같이 버려진 자신의 개인 물품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황급히 택시에 올라타 국제 유치원으로 향했다.한편 담임은 어안이 벙벙했다.“아이 아버님 얼굴을 모르세요?”그러자 조하랑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저와 예찬이 아빠 하룻밤 실수로 만난 거라 얼굴 못 봤어요. 왜요?!”아이들 담임이라는 사람이 고작 아버지라는 한마디에 홀라당 아이를 보내다니, 너무 무책임한 선생이 아닌가!담임은 그녀를 애써 진정시키며 해명했다.“예찬이 어머님, 일단 진정하세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원장님이 데려온 거라... 그래도 얼굴을 확실히 봤어요. 190이 넘는 키에 잘생긴 얼굴이었어요. 그리고 성은 김 씨라고 했고요.”담임은 아까 본 그대로 묘사했다.김씨 성을 가지고 아이에게 볼일이 있는 남자라면 김인우 말고 또 누가 있을까.조하랑은 담임과의 전화를 끊고 바로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조하랑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이 자식이 설마 나 차단한 거 아니야? 우리 예찬이 어떡하지....”...해운 별장.김인우가
박예찬은 별장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신랄하게 그를 비난했다.“아저씨가 정말 내 아빠라면 지금 이러는 거 쪽팔리지도 않으세요?”그러자 김인우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무슨 뜻이야?”“우리 엄마는 내가 이렇게 클 동안 단 한 번도 나 때린 적 없는데 아저씨는 나 만나자마자 꼬집고 괴롭혔잖아요. 그래서 쪽팔리지 않냐고 물었어요.”박예찬의 눈은 진지했고 김인우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아이는 불편한 자세에도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만약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세상을 구하는 슈퍼맨 같은 사람일 줄 알았어요.”이건 전에 유지훈에게서 들었던 표현이다.“내가 괴롭힘을 당하면 짠하고 나타나 나쁜 사람들을 다 혼내줄 줄 알았다고요. 하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바로 내 마음속의 슈퍼맨일 줄이야.”세상을 구하는 슈퍼맨?고작 그 한마디에 김인우의 화가 전부 풀려버렸다.하지만 곧바로 차 안에서의 말이 생각나 별장 안 아이 방에 아이를 내려놓았다.“나는 너를 때리지 않아. 부자 상봉에 그런 과격한 인사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이대로 얌전히 있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박예찬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답지 않게 예의 바른 얼굴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항상 중요시하던 게 예의였어요.”김인우는 예의 운운하는 아이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예의 있는 애가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자, 이제 솔직하게 얘기해 봐. 그때 호텔에서 나한테 술을 붓고 내 옷과 휴대폰을 몰래 버린 거, 엄마가 지시한 거 맞지?”만약 아이가 맞다고 대답하면 김인우는 아이의 양육권을 되찾을 좋은 핑계를 얻게 되는 셈이다.하지만 박예찬은 똑똑한 아이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술을 붓고 옷이 뭐요?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으세요?”김인우는 자신이 언젠가는 이 작은 아이 때문에 화병에 걸릴 것 같았다.“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아이는 나쁜 아이야. 벌로 오늘 저녁은 없을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