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윤우의 그림을 몰래 숨겨놓았다.정림원은 너무 커서 제대로 돌아보려면 적어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주변에 숨어있는 카메라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유남준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거대한 몸집의 그는 검은 눈동자에 두 사람이 앉아서 노는 장면을 담았다.시간은 항상 빠르게 지나가서 놀라게 만든다.박윤우는 유남준을 발견하고 얼른 그와 인사했다.“아저씨, 우리랑 같이 놀래요?”아까는 그저 발로 몇 번 찼을 뿐이다. 그래서 성에 차지 않았다. 박민정은 박윤우를 말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박윤우와 유남준은 혈연관계이니, 너무 오랜 기간 같이 있으면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될까 봐였다. 유남준은 이미 그들에게로 걸어오며 물었다.“뭘 놀고 싶은데.”박윤우는 머리를 굴리고 얘기했다.“역할 놀이 해요! 아저씨는 아빠, 엄마는 엄마! 나는 두 사람의 아들!”박민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유남준도 멍해서 서 있었다.‘남자애가 무슨 역할 놀이를 좋아해? 여자애들도 아니고.’“아저씨, 우리 아빠는 엄청난 부자예요. 내 아빠 역할은 아무한테나 안 시키는 건데, 특별히 아저씨한테 주는 거예요.”박윤우가 입술을 움직이며 이 일이 유남준의 영광이라도 되는 듯 얘기했다. “윤우야, 아저씨 난처하게 하지 말고...”박민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얘기했다.“그래, 네 아빠가 되어줄게.”박윤우는 그가 동의하자마자 바로 그의 허벅지를 잡고 눈물과 콧물을 갈아입은 바지에 묻히며 얘기했다.“엉엉엉, 아빠, 윤우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알아요?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다고요.”유남준은 박윤우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빠라는 말에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다른 한편, 박민정은 윤우가 유남준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그녀의 두 아이는 아빠를 원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속으로는 아빠가 있었으면 했다.지금 윤우가 안고 있는 사람이 그들의 친아빠라고 알려주면 얼마나 좋아할까.하지만 박민정은 유남준에
가끔 어린아이의 도발도 꽤 유용했다.유남준은 다시 박민정을 보더니 목울대를 꿈틀거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미안해.”박민정도 그를 보다가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얘기했다.“괜찮아요.”박윤우는 나름 참신한 방법으로 유남준이 사과하게 만들었다.“아빠, 매일 여기에 혼자 있는 건 너무 답답해요. 아빠랑 엄마랑 같이 나가서 놀고 싶어요.”박윤우의 애교는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그건 유남준도 마찬가지였다.“그래.”동의한 후, 유남준은 사람을 시켜 박윤우를 데리고 근처의 놀이공원에 갔다. 하지만 박윤우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많은 놀이기구들은 탈 수가 없었다. 박민정은 박윤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세 사람은 놀이공원에서 이목을 끌었다.박윤우는 조금 걷더니 피곤함을 느껴 유남준을 쳐다보았다. 유남준이 그를 안아주려는 생각이 없는 것을 보고, 박윤우는 그가 돈과 얼굴이 아니었으면 평생 아내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빠, 저기 다른 아빠들 좀 봐요.”박윤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딸을 어깨에 앉힌 남자를 가리켰다.유남준은 그 남자를 보고 또 박윤우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안돼.”“하지만 아빠, 나도 아빠한테 안기고 싶단 말이에요.”박윤우는 제자리에 서서 유남준을 바라보았다.“그럼 차면 안 돼.”그렇게 경고한 후에야 유남준은 박윤우를 안았다.박윤우는 전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이 놀이기구, 저 놀이기구 다 타겠다고 했다.“아빠, 저 판다 인형을 잡아서 엄마한테 줘요!”“아빠 최고!”“아빠, 나 엄마랑 저거 먹고 싶어요.”“아빠가 최고예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박윤우는 유남준의 품에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유남준은 아빠라는 소리를 들으며 점점 박윤우가 연지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오후에 품에 안은 박윤우가 저녁에 그의 등에서 잠이 들자, 유남준은 그제야 놀이를 끝냈다.“내가 안을게요.”박민정이 손을 뻗
주변이 삽시에 조용해지고 바람이 나뭇잎을 휩쓸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박민정은 익숙한 유남준의 얼굴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어색해하면서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난 이제...”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끼어들었다.“너랑 낳겠다는 게 아니었어.”박민정은 놀라서 동공이 떨렸다. 그의 차갑고 모진 말이 그녀의 고막을 때렸다.“어떤 남자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와 계속 아이를 낳고 싶겠어.”유남준은 박민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으로 걸어갔다.자기 방에 도착한 그는 짜증스레 외투를 벗어 던졌다.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을 때, 박민정이 거절하려고 하자 유남준은 그제야 자기가 얼마나 우스운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그가 얼마나 황당한 일을 저질렀는지도 알게 되었다.하루 동안 그 아이의 아빠 역할을 해주다니.얼마나 아이를 갖고 싶었으면 다른 아이의 아빠를 해줬을까.별장 밖.박민정은 홀로 바람 속에 서 있었다.머리에는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 “어떤 남자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와 계속 아이를 낳고 싶겠어.”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거실에 들어갔다.거실에는 그녀뿐이어서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러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5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홀로 이렇게 넓은 곳에 있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얼른 방으로 돌아갔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부드러운 선율에 박민정의 마음이 약간 풀렸다.쿠쿵~창밖에서 갑자기 우레가 치더니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기가 멈추지 않을 기세로 쏟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박민정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거의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그때 마침 밖에서 차량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윽고 대문 벨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누구지?’박민정은 유남준이 잠에 들었는지 몰라 일단 나가보았다. 문을 열자 환자복을 입은 이지원이 목에는 붕대를 하고 비에 맞아 쫄딱 젖은 채, 핏기 하나 없는
계속해서 괴롭히다니.박민정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계속해서 남을 모함하는 건 이지원이 아닌가.이지원의 두 손은 이미 피로 물들었다. 유남준은 얼른 그녀를 구급차에 태워 갔다.떠나기 전, 이지원은 박민정을 슬쩍 쳐다보았다.마치 ‘봤지? 너와 나 중에서 유남준은 날 선택할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금의 박민정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이지원이 빨리 유남준과 사귀어서 유남준이 박민정과 박윤우를 놓아주었으면 했다.구급차에서.유남준의 차가운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이렇게 늦은 밤에 두원에 와서 뭐 하는 거야.”“혼자 병원에 있는 건 너무 무서워서 오빠를 보려고 왔어요.”그렇게 심하게 다쳤지만 끝내 유남준을 잡지 못했다.이지원은 유남준이 앞으로 자기를 버릴까 봐 걱정이었다.그리고 오늘의 일로 그 걱정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유남준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앞으로 두원에 오지 마.”이지원은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왜요? 민정 씨 때문이에요? 그런 여자는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유남준이 이지원의 말을 끊었다.“박민정은 내 아내야!”이지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에도 핏기가 가셔 창백했다.“그럼 나는요? 오빠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8년이나 기다렸어요!”“보상할게.”유남준은 무표정으로 유명한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지원의 앞에서 드라마 주인공 배역을 따주었다.“내가 있으면 넌 영원히 승승장구하게 될 거야. 그런 비열한 수단 없이도 말이야.”이지원은 그제야 알았다. 유남준은 진작 그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두려워진 이지원은 유남준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전에 이지원이 해외 노래를 표절한 것 때문에 사건이 터졌었는데 유남준 덕분에 깔끔하게 해결되었었다. 여전히 많은 브랜드들이 이지원을 모델로 삼으려고 했다. 이지원의 명성에는 전혀 흠집이 없었다.그날 밤, 유남준은 두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이튿날, 박민정은 뉴스에서 이지원이 또 유명한 감독의 여자 주인공 배역을 따고
차 안에서. 유남준은 뒷좌석에 앉았다.어젯밤 그는 차에서 저녁 내내 박민정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박민정은 전화 한 통 주지 않았다.박민정이 나오는 것을 본 그는 창문을 내리고 피곤한 얼굴로 얘기했다.“타.”박민정은 그가 금방 돌아온 줄 알고 화가 나서 차에 타지 않았다.“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해요.”유남준은 약간 피곤한 눈으로 얘기했다.“아직 보름 남았어. 잊지 마.”박민정은 약간 의아해하면서 차에 올라탔다.유남준은 어젯밤 이지원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박민정도 왜 이제야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었다.“오늘은 옛 저택으로 간다.”유남준이 얘기했다.박민정은 약간 이해되지 않았다.“옛 저택에 가서 뭐 해요?”“며칠 있으면 추석이잖아.”유남준이 멈칫하고 얘기했다.“전에 나랑 옛 저택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옛 저택에 살고 싶다고 한 건 옛 저택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유남준과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시간은 많이 흘렀고 그녀는 이제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두 사람은 불가능한 사이니까.어젯밤, 박민정은 오랫동안 생각했다.만약 이번에 임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유남준의 정자를 얻었으니 앞으로도 임신할 수 있는 기회는 많다.정림원의 지도를 알았으니 박윤우를 데려오는 것도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다.그녀는 그저 유남준이 자기와 윤우를 놓아주지 않고 다시 붙잡아 올까 봐 걱정이었다.그래서 그저 유남준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네.”옛 저택.고용인부터 집주인까지, 누구 하나 박민정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이곳을 제일 싫어한다는 것을 몰랐다.보슬비 때문에 이 세계에 한 층의 얇은 막이 씌워진 기분이 들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끝도 안 보이는 옛 저택을 보면서 우울감을 느꼈다.‘아직도 17일...’옆의 보디가드가 검은 우산을 씌워주었고 박민정은 하이힐을 신고 유남준과 함께 걸
박민정은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어젯밤 유남준이 이지원과 키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저 메스꺼웠다.차가운 벽을 등진 채, 박민정은 힘껏 유남준을 밀어냈다.유남준은 그저 고양이가 할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자기 외투를 벗어 던졌다.“싫어...”박민정은 그가 뭘 하려는 지 알기에 얼른 거부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좋으면서 말로만 싫다고 하는 줄 알았다.박민정은 조급해져서 눈이 붉어졌다.그리고 그대로 유남준을 힘껏 물어버렸다.유남준은 약간 신음을 흘리더니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박민정을 쳐다보았다.“뭐 하는 거야.”“날 놓아줘요!”박민정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유남준은 손을 그녀의 얼굴에 대고 얘기했다.“싫어.”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계속 키스하려고 했다.어젯밤의 유남준과 이지원도 이랬을까. 그 생각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유남준의 어깨를 잡고 손톱으로 그를 꼬집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유남준! 날 놓아달라고요!”유남준은 여전히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이유는 모르겠지만 박민정이 반항하고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는 박민정을 더욱 깊게 새기고 자기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방안이 열기로 후끈거리는 것 같았다.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유남준이 멈추더니 불쾌한 듯 물었다.“누구야.”문밖에 서 있던 이혜림은 안의 소리를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 나기도 했다.“도련님, 어르신이 부르십니다.”이혜림이 붉어진 볼을 만지며 얘기했다.“알았어.”유남준은 품의 박민정을 보더니 옷으로 그녀를 꽁꽁 감싸고 침대에 데려다 놓았다.“잘 쉬어.”해외에서 몇 년간 어떻게 살았길래 몸은 여전히 이토록 허약한 건지.박민정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창백한 얼굴로 얘기했다.“네.”유남준은 옷을 갈아입고 가지 않고 박민정 앞으로 왔다. 그의 어깨에 박민정이 물었던 상처와 등에 있는 상처들이 선명하게 보였다.하지만 그는 정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귓가에 들려오는 조롱 섞인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린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이혜림을 바라봤다.반듯한 정장과 달리 훤히 드러난 그녀의 가슴골은 일부러 연출한 듯 자연스러웠고 계란형 얼굴과 얇은 눈썹, 살짝 찌푸린 눈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박민정은 그녀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다.현실은 집사의 딸에 불과한데 마치 유씨 가문의 사모님처럼 행동하는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혔었다.이혜림은 박민정이 대답이 없자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은 줄 알고 제멋대로 행동하더니 바닥에 놓인 옷을 발로 차며 모욕적인 말들을 일삼았다.“정말 뻔뻔하네. 설마 장애인이라는 걸 잊은 건가? 예전에는 순직한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참 애쓰네. 옷차림이...”이혜림은 그녀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 바닥에 놓인 럭셔리한 옷들을 보란 듯이 발로 짓밟았다.과거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박민정을 마음껏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오늘날의 박민정은 더 이상 유남준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박민정은 외투를 걸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한 걸음 한 걸음 이혜림에게 다가갔다.고개를 든 이혜림은 그녀의 귀에 보청기가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어머, 듣고 있었네요? 완전히 귀먹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민정은 손을 들었고 곧이어 ‘짝’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혜림의 뺨을 내리쳤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을 잃은 이혜림은 뺨이 얼얼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감히 날 때려?”박민정도 손이 따끔한 건 마찬가지였다.“때렸어요. 왜요?”화가 치밀어 오른 이혜림은 반격하려고 손을 들었으나 곧바로 박민정에게 손목이 잡혔고 박민정은 또다시 이혜림의 뺨을 후려갈겼다.이혜림은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겁쟁이가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하이힐을 신은 채 비틀거리던 그녀는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박민정 씨, 그쪽은 이곳에
비록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서늘한 찬바람이 불어오자 여전히 춥게만 느껴졌다.정민기는 주변의 CCTV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야윈 모습의 박민정이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다.“고마워요.”박민정은 앞으로 나서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차에 올라탄 정민기는 자상하게 히터를 켰다.박민정이 해외로 나간 이후로 줄곧 옆에서 지켜주며 시간을 보낸 덕분에 자연스레 그녀가 추위를 탄다는 걸 알게 되었다.“어디로 갈까요?”박민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두원 별장으로 가요.”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유남준도 곧 알게 될 것이기에 분명히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찾아올 게 뻔하다.“알겠습니다.”정민기는 경치가 좋은 길을 택했다.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급한 일 있다며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이제는 괜찮아요?”핸들을 꽉 움켜쥔 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했다.“약혼녀랑 파혼했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보디가드라는 직업 특성상 그들은 남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여 박민정은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갑작스럽게 듣게 된 파혼 소식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더니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일 때문인가요?”정민기처럼 책임감 있는 보디가드는 정말 흔치 않다. 그는 박민정이 찾는 한 늘 그녀의 곁을 지켰고 몇 시가 됐든 달려 나왔다.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뭔가를 망설이는 듯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요.”이 말 한마디에 차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박민정은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유남준이었다.순간 자신을 홀대하는 유씨 집안 사람들이 떠오른 박민정은 이를 무시한 채 벨소리를 무음으로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