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서늘한 찬바람이 불어오자 여전히 춥게만 느껴졌다.정민기는 주변의 CCTV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야윈 모습의 박민정이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다.“고마워요.”박민정은 앞으로 나서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차에 올라탄 정민기는 자상하게 히터를 켰다.박민정이 해외로 나간 이후로 줄곧 옆에서 지켜주며 시간을 보낸 덕분에 자연스레 그녀가 추위를 탄다는 걸 알게 되었다.“어디로 갈까요?”박민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두원 별장으로 가요.”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유남준도 곧 알게 될 것이기에 분명히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찾아올 게 뻔하다.“알겠습니다.”정민기는 경치가 좋은 길을 택했다.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급한 일 있다며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이제는 괜찮아요?”핸들을 꽉 움켜쥔 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했다.“약혼녀랑 파혼했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보디가드라는 직업 특성상 그들은 남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여 박민정은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갑작스럽게 듣게 된 파혼 소식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더니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일 때문인가요?”정민기처럼 책임감 있는 보디가드는 정말 흔치 않다. 그는 박민정이 찾는 한 늘 그녀의 곁을 지켰고 몇 시가 됐든 달려 나왔다.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뭔가를 망설이는 듯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요.”이 말 한마디에 차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박민정은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유남준이었다.순간 자신을 홀대하는 유씨 집안 사람들이 떠오른 박민정은 이를 무시한 채 벨소리를 무음으로 설정
부하들은 줄곧 그녀를 미행했으나 정민기가 운전하는 차가 택시여서 별다른 의심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방금 택시를 탔고 두원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박민정이 아직 진주에 있다는 사실에 유남준은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갑자기 돌아가려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왜 두원으로 가는지 알아?”“모르겠습니다.”줄곧 밖에서 뒤를 밟으며 미행하는 그들이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유남준은 전화를 끊자마자 두원으로 갈 차를 준비했다.두원으로 향하던 중.그는 또다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고 다급한 마음에 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운전해달라고 부탁했다.같은 시각, 두원에 도착한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곧바로 별장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어깨 위로 가랑비가 내렸고 그녀의 눈빛에서는 심란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얼마 후, 등 뒤로 차 한 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랜드로버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고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달려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왜 전화 안 받아?”박민정의 맑은 두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따지려고 찾아온 거죠?”유남준은 뜬금없었다. 말없이 제멋대로 떠나고 전화도 받지 않았는데 따지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그녀는 유남준을 밀어내더니 비를 맞으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보름밖에 안 남았으니까 괜히 헛수고하지 말아요.”잔뜩 어두워진 눈빛으로 박민정을 따라 걸음을 옮긴 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게 무슨 뜻이야?”박민정은 가랑비 사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한 달 동안 부부로 지내자고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윤우 돌려주고 이만 헤어져요.”유남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저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래? 나 때문에 화난 거야?”그의 손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의 차가운
그는 어느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긴 다리를 꼰 채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있었다.아직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고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 속에는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그냥 문 열고 들어왔는데?”여유롭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몸에 두른 가운을 꽉 조였다.“나가요.”유남준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왜 화난 거야?”아직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으니 박민정이 직접 말해주기를 기다렸다.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듯 대충 핑계를 대며 둘러댔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얼른 나가요. 옷 갈아입을 거예요.”유남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래.”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유남준을 등지고 옷을 갈아 입었고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시선은 박민정의 매끈한 등을 향했다. 그러다가 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에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을 꺼내 보디가드에게 연락했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디가드에게 메시지가 왔다.[대표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끝에 알아냈습니다. 이한석 집사님의 딸인 이혜림 씨가 민정 씨를 모욕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르신께 알리겠다고 협박하면서 유씨 가문에서 나가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묵묵히 메시지를 읽고 난 후, 그의 살벌한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당장 데리고 와.]문자를 보낸 뒤 핸드폰을 끄고 다시 박민정을 바라봤을 때, 박민정은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왜 나한테 직접 얘기하지 않는 거야?”그는 자기 아내를 쫓아낸 사람이 유씨 가문의 일개 도우미라는 사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박민정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사실대로 얘기하면 믿어줄 거예요?”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유남준과 달리 박민정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한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남준 씨의 선택이니까 강요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우스워?”말을 마친 유남준은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침실을 나섰다.혼자 자리에 남겨진 박민정은 그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어딘가 불안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이 일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남준과 한 달 동안 부부로 지낸다 한들 절대 그녀와 윤우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된 이상 유남준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윤우를 데려갈 수밖에 없다.또다시 연지석에게 신세지기 싫었던 박민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고 윤우와 함께 떠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쿵!아래층에서 유남준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혼자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유남준이 윤우와의 만남을 허락해야만 단둘이 정림원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나 다름없다.도망칠 기회를 얻었다 한들 진주를 벗어나는 것도 큰 산이다.이때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오른 그녀는 정민기가 준 핸드폰에 낯익은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곧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변호사님, 저 민정이에요.”장명철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민정이니? 살아있었어?”“네.”“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장명철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그건 나중에 제가 차차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장명철은 박민정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신임했던 변호자이자 진주시에서 꽤 많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다.“그래, 뭐가 됐든 말만 해.”“출국할 신분이 두 개 필요한데 구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이 일은 절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돼요.”사실 돈으로 얼마든지 주민등록증을 살 수 있지만 직접 사면 유남준이 무조건 의심하기에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언제쯤 필요한데?”“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알겠어.”위조 주민등록증을 얻으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이 소요되기에 무조건 일주일 내에 윤우를 데려올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전
이한석이 허둥지둥 지하실로 달려갔을 때 유남준은 이미 없었고, 그곳에 남은 건 구석에 숨어서 벌벌 떨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이혜림뿐이었다.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혜림아, 왜 그래?”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한석 집사님, 대표님께서 더 이상 혜림 씨를 유씨 가문에 들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부로 당장 진주시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한석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해외로 보낼게요.”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린 이혜림은 이한석의 다리를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아빠, 전 떠나고 싶지 않아요.”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게 다 박민정 때문이에요...”이한석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으나 눈빛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 시각 별장 밖. 차에 올라탄 유남준은 서다희의 업무 보고를 들으며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지석 씨의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밑지는 장사인 만큼 주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서다희는 눈치를 살피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유남준이 데이트하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회사 임원들은 자기가 주인이 된 것처럼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으며 면박을 줬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유남준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예전이라면 자신 있게 예측했겠지만, 연지석 씨의 뒤를 지키는 그룹들이 워낙 뼈대가 굵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평범한 외국계 회사라면 유남준의 공격 속에서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하지만 연지석은 무려 5년을 버텼다.물론 유남준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손해가 두렵지 않은 듯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계속 진행해. 그 철옹성 같은 장벽이 언제 무너지는지 궁금하네.”그는 연지석이 해외에서 몇 번이나 암살당할 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건 뒤에서 지켜주는 세력이 많다는 뜻이기도
박민정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살짝 떨었다.그제야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유남준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어느새 박민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고였고, 그가 멈추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깊은 밤.박민정을 품에 안고서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던 유남준은 아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이른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유남준은 더 이상 곁에 없었다.어젯밤의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공허하게 다가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씻으러 갔다.거울 앞에 서서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쓰던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침실을 나섰고, 서재 앞을 지나며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유남준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평소의 싸늘함을 되찾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순간 계획이 떠오른 박민정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무슨 일이야?”유남준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어제는 내가 실수했어요.”박민정은 뜬금없이 사과했다.“너무 억울해서 본의 아니게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손에 서류를 든 유남준의 시선은 줄곧 첫 번째 단어에 머물러 있었고 전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곧이어 그는 서류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봤다.사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거기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더해지자 괜스레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이런 모습은 예전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뭐가 다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이리 와.”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갔다.“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요. 혜림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요.”유남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얇은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사과하고 싶은 게 맞아? 뭔가 이상한데?”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솔직히 말하면 사과하고 싶지 않은데 남준 씨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그는 주의깊게 박민정을 훑어보았다.예전에는 그녀의 비굴한 모습
저택에 도착해 유남준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박민정은 고영란의 문자를 받았다.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순간 망설여진 그녀는 유남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가고 싶지 않으면 거절해.”퉁명스럽게 내뱉은 그 한마디가 인사치레인지 진심이 담긴 말인지 알 수 없었다.“갈게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을 만나러 갔다.바깥 정원.한복 차림의 고영란은 직접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자연스레 도우미에게 물조리개를 건넸고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여긴 예전부터 꽃이 잘 안 피더라고. 그래서 싹 다 바꿨어.”“그렇군요.”언뜻 봐서는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 같아도 그 속에는 손주를 안고 싶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박민정은 당연히 그 의도를 알아챘지만 당황하지 않고 일부러 태연하게 행동했다.“민정아, 그거 아니? 내가 최근에 엄청 귀여운 아이를 만났어. 남준이 어렸을 때랑 똑 닮았거든.”결혼생활 3년 동안 유남준이 밤늦게 집에 있는 날이 손꼽힐 정도였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아. 요즘 둘 사이는 어때? 좋아졌어?”고영란은 더 이상 이지원에게 그 어떤 기대도 없었다.특히나 지난번 유남준과 박민정이 방에서 키스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본 이후로 박민정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고영란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예전에는 내가 많이 실수했어. 이제부터 네가 남준이의 아이를 임신한다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장담할게.”여장부라고 소문난 천하의 고씨 가문의 아가씨도 손자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말만 해.”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던 예전과 달리 한없이 다정해진 고영란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박민정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돌변하는 고영란의 모습이 역겨운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죄송해요. 이런 건 약
고영란은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미리 챙겨온 값비싼 장난감들을 그에게 건네줬다.그러나 박예찬은 장난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할머니, 너무 감사하지만 엄마가 낯선 사람이 주는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박민정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그러나 아직 고영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확실한 상황이라 절대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박예찬의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고영란은 ‘낯선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예찬아, 할머니가 왜 낯선 사람이야? 우리 적어도 몇 달은 알고 지냈잖아. 할머니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박예찬이 언급한 엄마가 조하랑인 줄 알았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이었다.“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추석 지내고 나면 할머니가 직접 엄마를 만나서 얘기할게. 그럼 이제 낯선 사람이 아닌 거지?”박예찬은 엄마를 함부로 대하며 괴롭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이러는 게 이해 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무려 20일을 유지훈을 데리러 온다는 핑계로 유치원을 찾아왔다.매번 거절했음에도 고영란은 늘 선물이나 음식을 가져왔다.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박민정에게 했던 무자비한 행동을 떠올리면 그런 마음마저 사라졌다.“할머니, 제가 비록 어린아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요. 누군가를 싫어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니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절대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걸요.”그 말 한마디에 고영란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리에 얼어붙었다.비수 같은 말에 상처받은 것도 있지만 그의 모습이 어릴 적의 유남준과 너무 똑 닮아있어 기분이 착잡했다.“왜 할머니를 싫어하는 거야?”슬픔에 허덕이는 고영란과 달리 박예찬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에게는 진짜 할머니가 있거든요.”혈육 간의 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박민정은 다시 한번 느꼈다.어찌 보면 고영란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건 친아들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햇빛 아래서 그의 덩치는 유난히 우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웬만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이런건 모르지 않나? 그런데 왜 유남준은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줄도 아는 거지?’이때, 마침 유남준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물고기를 받으라고 손짓했다.그 모습에 박예찬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그를 향해 외쳤다.“여기로 던져주세요.”유남준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박예찬에게 던져줬다. 필경 아직 어린아이라 물고기를 만져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는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물을 채운 뒤 안에 넣었다.그 모습에 많은 어린이들이 구경하러 오게 되었다.“와! 예찬아, 이게 너희 아빠가 잡은 물고기야?”박예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어떤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희 아빠 참 대단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다른 아이들도 유남준을 칭찬하며 박예찬을 한껏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아 그에게 던져줬다.최현아 따라 땔감을 주우러 가려던 유지훈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엄마, 저도 가서 볼래요.”그의 말에 최현아도 말리지 않았다.“그래.”최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지훈은 재빨리 아이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나도 물고기 좀 보게 다들 비켜봐.”아이들은 이런 유지훈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저마다 자리를 비켜줬다.유지훈이 맨 앞에 다가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저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 우리 아빠가 돈 주고 산 물고기가 훨씬 크고 이뻐!”아이들이라 그런지 한창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이다.특히 유지훈은 모든 아이가 박예찬을 둘러싸고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다.그러나 아쉽
유남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어젯밤에 네가 계속 춥다고 잠꼬대해서 내가 안고 같이 잤어.”“네?”박민정은 그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날씨도 이젠 어느 정도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어젯밤도 전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옆에 누워있던 박예찬이 침낭에서 일어나더니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나도 봤어. 어젯밤에 분명 엄마가 계속 춥다면서 안아달라고 했어.”박예찬의 진지한 말투가 전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자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나이 먹으면서 외로워졌나?’이때, 박예찬이 박민정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에도 두 사람이 자주 그렇게 잤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알았어.”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유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어젯밤은 고마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못 잔 건 아니죠?”유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내가 이따가 이불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에는 우리 이불 덮고 자자.”“그럴 필요 없...”박민정이 단번에 거절하려는 순간 텐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서, 남준 씨, 깼어?”최현아였다.그녀의 물음에 박민정이 재빨리 답했다.“네. 무슨 일이에요?”“우리 지금 땔감 주어서 아이들한테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여기까지 직접 와서 물어보니 박민정은 거절하기 힘들었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박민정이 침낭에서 나오자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이때,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최현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남준 씨, 동서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따 남자분들은 개울에서 낚시해야 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박민정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최현아는 자
유남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알겠어.”빠르게 저녁 시간이 돌아왔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별들이 잘 보였다.박민정과 박예찬은 같이 앉아 쉬고 있었고 유남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바비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기 굽는 냄새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해 자기도 모르게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박민정은 살짝 난감한 듯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네가 다른 친구들이랑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해.”전날 밤, 그냥 가벼운 말로 야외에서 캠핑하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기억하고 준비해 줬다.“네.”박예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그렇게 잠깐 박민정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유남준은 어느새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박민정에게 건넸다.“먹어.”“먼저 먹어요. 저는 제가 구워서 먹을게요.”박민정은 방금 그와 다퉜는데 그가 구워준 고기를 덥석 받아먹는 게 왠지 미안했다.하여 스스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난 고기를 원래 안 좋아해. 네가 안 먹으면 이건 그냥 버릴게.”살짝 화가 난 목소리였다.그의 말에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재빨리 그의 접시를 받아서 들었다.“아깝게 왜 버려요. 고기 안 좋아하면 더 이상 굽지 말아요.”생각했던 대로 말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순간 질투가 많은 여느 여고생처럼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이제 자신이 구워주는 고기도 마다한다고 생각하니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나 박민정은 이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고기를 먹고 있다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유남준이라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그런 유남준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웃고
그러다가 최현아는 무심결에 유남준의 튼실한 팔뚝과 또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애초에 남준 씨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휴지를 꺼내며 물었다.“땀 흘렸네요. 제가 닦아 드릴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그의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막 거절하려던 순간 박민정과 박예찬이 들꽃을 꺾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괘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최현아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남준때문에 심장이 또다시 나대기 시작했다.‘들은 소문에 의하면 유남준에게 첫사랑인 이지원을 제외하면 여자라고는 박민정뿐이라고 했는데?’‘역시나 남자들은 다 똑같네!’순간 최현아는 진작에 유남준에게 접근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니면 진작에 IM 대표의 사모님 자리를 꿰찼을 텐데.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손은 점점 바빠졌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마침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러다가 박민정은 문득 머릿속에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장소는 비슷했지만 유남준의 맞은편에는 최현아가 아닌 이지원이 서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예찬도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을 놓고 재빨리 달려가 두 사람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현아 이모, 지훈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이모 찾던데요?”그의 말에 최현아가 재빨리 되물었다.“무슨 급한 일?”“가서 직접 물어보세요.”박예찬의 말에 최현아는 두말없이 유지훈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박민정은 어느새 유남준에게 다가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보통 이런 식으로 바람피웠나 보네요?”유남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무덤덤해 보이는 박민정에게 다가가 되물었다.“화 안나?”“그저 유치해 보이는데요?”박민정의 입에서 들리는 유치하다는 말이 단번에 유남준의 가슴에 꽂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