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서늘한 찬바람이 불어오자 여전히 춥게만 느껴졌다.정민기는 주변의 CCTV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야윈 모습의 박민정이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다.“고마워요.”박민정은 앞으로 나서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차에 올라탄 정민기는 자상하게 히터를 켰다.박민정이 해외로 나간 이후로 줄곧 옆에서 지켜주며 시간을 보낸 덕분에 자연스레 그녀가 추위를 탄다는 걸 알게 되었다.“어디로 갈까요?”박민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두원 별장으로 가요.”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유남준도 곧 알게 될 것이기에 분명히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찾아올 게 뻔하다.“알겠습니다.”정민기는 경치가 좋은 길을 택했다.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급한 일 있다며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이제는 괜찮아요?”핸들을 꽉 움켜쥔 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했다.“약혼녀랑 파혼했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보디가드라는 직업 특성상 그들은 남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여 박민정은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갑작스럽게 듣게 된 파혼 소식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더니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일 때문인가요?”정민기처럼 책임감 있는 보디가드는 정말 흔치 않다. 그는 박민정이 찾는 한 늘 그녀의 곁을 지켰고 몇 시가 됐든 달려 나왔다.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뭔가를 망설이는 듯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요.”이 말 한마디에 차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박민정은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유남준이었다.순간 자신을 홀대하는 유씨 집안 사람들이 떠오른 박민정은 이를 무시한 채 벨소리를 무음으로 설정
부하들은 줄곧 그녀를 미행했으나 정민기가 운전하는 차가 택시여서 별다른 의심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방금 택시를 탔고 두원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박민정이 아직 진주에 있다는 사실에 유남준은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갑자기 돌아가려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왜 두원으로 가는지 알아?”“모르겠습니다.”줄곧 밖에서 뒤를 밟으며 미행하는 그들이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유남준은 전화를 끊자마자 두원으로 갈 차를 준비했다.두원으로 향하던 중.그는 또다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고 다급한 마음에 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운전해달라고 부탁했다.같은 시각, 두원에 도착한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곧바로 별장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어깨 위로 가랑비가 내렸고 그녀의 눈빛에서는 심란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얼마 후, 등 뒤로 차 한 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랜드로버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고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달려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왜 전화 안 받아?”박민정의 맑은 두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따지려고 찾아온 거죠?”유남준은 뜬금없었다. 말없이 제멋대로 떠나고 전화도 받지 않았는데 따지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그녀는 유남준을 밀어내더니 비를 맞으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보름밖에 안 남았으니까 괜히 헛수고하지 말아요.”잔뜩 어두워진 눈빛으로 박민정을 따라 걸음을 옮긴 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게 무슨 뜻이야?”박민정은 가랑비 사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한 달 동안 부부로 지내자고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윤우 돌려주고 이만 헤어져요.”유남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저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래? 나 때문에 화난 거야?”그의 손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의 차가운
그는 어느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긴 다리를 꼰 채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있었다.아직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고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 속에는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그냥 문 열고 들어왔는데?”여유롭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몸에 두른 가운을 꽉 조였다.“나가요.”유남준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왜 화난 거야?”아직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으니 박민정이 직접 말해주기를 기다렸다.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듯 대충 핑계를 대며 둘러댔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얼른 나가요. 옷 갈아입을 거예요.”유남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래.”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유남준을 등지고 옷을 갈아 입었고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시선은 박민정의 매끈한 등을 향했다. 그러다가 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에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을 꺼내 보디가드에게 연락했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디가드에게 메시지가 왔다.[대표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끝에 알아냈습니다. 이한석 집사님의 딸인 이혜림 씨가 민정 씨를 모욕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르신께 알리겠다고 협박하면서 유씨 가문에서 나가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묵묵히 메시지를 읽고 난 후, 그의 살벌한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당장 데리고 와.]문자를 보낸 뒤 핸드폰을 끄고 다시 박민정을 바라봤을 때, 박민정은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왜 나한테 직접 얘기하지 않는 거야?”그는 자기 아내를 쫓아낸 사람이 유씨 가문의 일개 도우미라는 사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박민정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사실대로 얘기하면 믿어줄 거예요?”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유남준과 달리 박민정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한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남준 씨의 선택이니까 강요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우스워?”말을 마친 유남준은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침실을 나섰다.혼자 자리에 남겨진 박민정은 그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어딘가 불안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이 일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남준과 한 달 동안 부부로 지낸다 한들 절대 그녀와 윤우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된 이상 유남준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윤우를 데려갈 수밖에 없다.또다시 연지석에게 신세지기 싫었던 박민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고 윤우와 함께 떠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쿵!아래층에서 유남준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혼자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유남준이 윤우와의 만남을 허락해야만 단둘이 정림원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나 다름없다.도망칠 기회를 얻었다 한들 진주를 벗어나는 것도 큰 산이다.이때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오른 그녀는 정민기가 준 핸드폰에 낯익은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곧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변호사님, 저 민정이에요.”장명철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민정이니? 살아있었어?”“네.”“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장명철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그건 나중에 제가 차차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장명철은 박민정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신임했던 변호자이자 진주시에서 꽤 많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다.“그래, 뭐가 됐든 말만 해.”“출국할 신분이 두 개 필요한데 구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이 일은 절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돼요.”사실 돈으로 얼마든지 주민등록증을 살 수 있지만 직접 사면 유남준이 무조건 의심하기에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언제쯤 필요한데?”“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알겠어.”위조 주민등록증을 얻으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이 소요되기에 무조건 일주일 내에 윤우를 데려올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전
이한석이 허둥지둥 지하실로 달려갔을 때 유남준은 이미 없었고, 그곳에 남은 건 구석에 숨어서 벌벌 떨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이혜림뿐이었다.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혜림아, 왜 그래?”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한석 집사님, 대표님께서 더 이상 혜림 씨를 유씨 가문에 들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부로 당장 진주시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한석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해외로 보낼게요.”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린 이혜림은 이한석의 다리를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아빠, 전 떠나고 싶지 않아요.”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게 다 박민정 때문이에요...”이한석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으나 눈빛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 시각 별장 밖. 차에 올라탄 유남준은 서다희의 업무 보고를 들으며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지석 씨의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밑지는 장사인 만큼 주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서다희는 눈치를 살피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유남준이 데이트하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회사 임원들은 자기가 주인이 된 것처럼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으며 면박을 줬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유남준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예전이라면 자신 있게 예측했겠지만, 연지석 씨의 뒤를 지키는 그룹들이 워낙 뼈대가 굵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평범한 외국계 회사라면 유남준의 공격 속에서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하지만 연지석은 무려 5년을 버텼다.물론 유남준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손해가 두렵지 않은 듯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계속 진행해. 그 철옹성 같은 장벽이 언제 무너지는지 궁금하네.”그는 연지석이 해외에서 몇 번이나 암살당할 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건 뒤에서 지켜주는 세력이 많다는 뜻이기도
박민정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살짝 떨었다.그제야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유남준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어느새 박민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고였고, 그가 멈추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깊은 밤.박민정을 품에 안고서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던 유남준은 아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이른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유남준은 더 이상 곁에 없었다.어젯밤의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공허하게 다가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씻으러 갔다.거울 앞에 서서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쓰던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침실을 나섰고, 서재 앞을 지나며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유남준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평소의 싸늘함을 되찾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순간 계획이 떠오른 박민정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무슨 일이야?”유남준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어제는 내가 실수했어요.”박민정은 뜬금없이 사과했다.“너무 억울해서 본의 아니게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손에 서류를 든 유남준의 시선은 줄곧 첫 번째 단어에 머물러 있었고 전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곧이어 그는 서류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봤다.사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거기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더해지자 괜스레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이런 모습은 예전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뭐가 다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이리 와.”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갔다.“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요. 혜림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요.”유남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얇은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사과하고 싶은 게 맞아? 뭔가 이상한데?”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솔직히 말하면 사과하고 싶지 않은데 남준 씨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그는 주의깊게 박민정을 훑어보았다.예전에는 그녀의 비굴한 모습
저택에 도착해 유남준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박민정은 고영란의 문자를 받았다.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순간 망설여진 그녀는 유남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가고 싶지 않으면 거절해.”퉁명스럽게 내뱉은 그 한마디가 인사치레인지 진심이 담긴 말인지 알 수 없었다.“갈게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을 만나러 갔다.바깥 정원.한복 차림의 고영란은 직접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자연스레 도우미에게 물조리개를 건넸고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여긴 예전부터 꽃이 잘 안 피더라고. 그래서 싹 다 바꿨어.”“그렇군요.”언뜻 봐서는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 같아도 그 속에는 손주를 안고 싶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박민정은 당연히 그 의도를 알아챘지만 당황하지 않고 일부러 태연하게 행동했다.“민정아, 그거 아니? 내가 최근에 엄청 귀여운 아이를 만났어. 남준이 어렸을 때랑 똑 닮았거든.”결혼생활 3년 동안 유남준이 밤늦게 집에 있는 날이 손꼽힐 정도였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아. 요즘 둘 사이는 어때? 좋아졌어?”고영란은 더 이상 이지원에게 그 어떤 기대도 없었다.특히나 지난번 유남준과 박민정이 방에서 키스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본 이후로 박민정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고영란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예전에는 내가 많이 실수했어. 이제부터 네가 남준이의 아이를 임신한다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장담할게.”여장부라고 소문난 천하의 고씨 가문의 아가씨도 손자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말만 해.”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던 예전과 달리 한없이 다정해진 고영란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박민정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돌변하는 고영란의 모습이 역겨운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죄송해요. 이런 건 약
고영란은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미리 챙겨온 값비싼 장난감들을 그에게 건네줬다.그러나 박예찬은 장난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할머니, 너무 감사하지만 엄마가 낯선 사람이 주는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박민정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그러나 아직 고영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확실한 상황이라 절대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박예찬의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고영란은 ‘낯선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예찬아, 할머니가 왜 낯선 사람이야? 우리 적어도 몇 달은 알고 지냈잖아. 할머니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박예찬이 언급한 엄마가 조하랑인 줄 알았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이었다.“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추석 지내고 나면 할머니가 직접 엄마를 만나서 얘기할게. 그럼 이제 낯선 사람이 아닌 거지?”박예찬은 엄마를 함부로 대하며 괴롭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이러는 게 이해 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무려 20일을 유지훈을 데리러 온다는 핑계로 유치원을 찾아왔다.매번 거절했음에도 고영란은 늘 선물이나 음식을 가져왔다.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박민정에게 했던 무자비한 행동을 떠올리면 그런 마음마저 사라졌다.“할머니, 제가 비록 어린아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요. 누군가를 싫어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니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절대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걸요.”그 말 한마디에 고영란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리에 얼어붙었다.비수 같은 말에 상처받은 것도 있지만 그의 모습이 어릴 적의 유남준과 너무 똑 닮아있어 기분이 착잡했다.“왜 할머니를 싫어하는 거야?”슬픔에 허덕이는 고영란과 달리 박예찬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에게는 진짜 할머니가 있거든요.”혈육 간의 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박민정은 다시 한번 느꼈다.어찌 보면 고영란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건 친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