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우스워?”말을 마친 유남준은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침실을 나섰다.혼자 자리에 남겨진 박민정은 그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어딘가 불안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이 일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남준과 한 달 동안 부부로 지낸다 한들 절대 그녀와 윤우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된 이상 유남준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윤우를 데려갈 수밖에 없다.또다시 연지석에게 신세지기 싫었던 박민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고 윤우와 함께 떠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쿵!아래층에서 유남준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혼자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유남준이 윤우와의 만남을 허락해야만 단둘이 정림원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나 다름없다.도망칠 기회를 얻었다 한들 진주를 벗어나는 것도 큰 산이다.이때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오른 그녀는 정민기가 준 핸드폰에 낯익은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곧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변호사님, 저 민정이에요.”장명철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민정이니? 살아있었어?”“네.”“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장명철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그건 나중에 제가 차차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장명철은 박민정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신임했던 변호자이자 진주시에서 꽤 많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다.“그래, 뭐가 됐든 말만 해.”“출국할 신분이 두 개 필요한데 구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이 일은 절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돼요.”사실 돈으로 얼마든지 주민등록증을 살 수 있지만 직접 사면 유남준이 무조건 의심하기에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언제쯤 필요한데?”“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알겠어.”위조 주민등록증을 얻으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이 소요되기에 무조건 일주일 내에 윤우를 데려올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전
이한석이 허둥지둥 지하실로 달려갔을 때 유남준은 이미 없었고, 그곳에 남은 건 구석에 숨어서 벌벌 떨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이혜림뿐이었다.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혜림아, 왜 그래?”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한석 집사님, 대표님께서 더 이상 혜림 씨를 유씨 가문에 들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부로 당장 진주시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한석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해외로 보낼게요.”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린 이혜림은 이한석의 다리를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아빠, 전 떠나고 싶지 않아요.”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게 다 박민정 때문이에요...”이한석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으나 눈빛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 시각 별장 밖. 차에 올라탄 유남준은 서다희의 업무 보고를 들으며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지석 씨의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밑지는 장사인 만큼 주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서다희는 눈치를 살피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유남준이 데이트하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회사 임원들은 자기가 주인이 된 것처럼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으며 면박을 줬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유남준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예전이라면 자신 있게 예측했겠지만, 연지석 씨의 뒤를 지키는 그룹들이 워낙 뼈대가 굵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평범한 외국계 회사라면 유남준의 공격 속에서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하지만 연지석은 무려 5년을 버텼다.물론 유남준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손해가 두렵지 않은 듯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계속 진행해. 그 철옹성 같은 장벽이 언제 무너지는지 궁금하네.”그는 연지석이 해외에서 몇 번이나 암살당할 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건 뒤에서 지켜주는 세력이 많다는 뜻이기도
박민정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살짝 떨었다.그제야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유남준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어느새 박민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고였고, 그가 멈추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깊은 밤.박민정을 품에 안고서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던 유남준은 아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이른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유남준은 더 이상 곁에 없었다.어젯밤의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공허하게 다가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씻으러 갔다.거울 앞에 서서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쓰던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침실을 나섰고, 서재 앞을 지나며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유남준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평소의 싸늘함을 되찾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순간 계획이 떠오른 박민정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무슨 일이야?”유남준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어제는 내가 실수했어요.”박민정은 뜬금없이 사과했다.“너무 억울해서 본의 아니게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손에 서류를 든 유남준의 시선은 줄곧 첫 번째 단어에 머물러 있었고 전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곧이어 그는 서류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봤다.사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거기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더해지자 괜스레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이런 모습은 예전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뭐가 다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이리 와.”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갔다.“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요. 혜림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요.”유남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얇은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사과하고 싶은 게 맞아? 뭔가 이상한데?”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솔직히 말하면 사과하고 싶지 않은데 남준 씨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그는 주의깊게 박민정을 훑어보았다.예전에는 그녀의 비굴한 모습
저택에 도착해 유남준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박민정은 고영란의 문자를 받았다.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순간 망설여진 그녀는 유남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가고 싶지 않으면 거절해.”퉁명스럽게 내뱉은 그 한마디가 인사치레인지 진심이 담긴 말인지 알 수 없었다.“갈게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을 만나러 갔다.바깥 정원.한복 차림의 고영란은 직접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자연스레 도우미에게 물조리개를 건넸고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여긴 예전부터 꽃이 잘 안 피더라고. 그래서 싹 다 바꿨어.”“그렇군요.”언뜻 봐서는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 같아도 그 속에는 손주를 안고 싶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박민정은 당연히 그 의도를 알아챘지만 당황하지 않고 일부러 태연하게 행동했다.“민정아, 그거 아니? 내가 최근에 엄청 귀여운 아이를 만났어. 남준이 어렸을 때랑 똑 닮았거든.”결혼생활 3년 동안 유남준이 밤늦게 집에 있는 날이 손꼽힐 정도였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아. 요즘 둘 사이는 어때? 좋아졌어?”고영란은 더 이상 이지원에게 그 어떤 기대도 없었다.특히나 지난번 유남준과 박민정이 방에서 키스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본 이후로 박민정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고영란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예전에는 내가 많이 실수했어. 이제부터 네가 남준이의 아이를 임신한다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장담할게.”여장부라고 소문난 천하의 고씨 가문의 아가씨도 손자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말만 해.”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던 예전과 달리 한없이 다정해진 고영란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박민정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돌변하는 고영란의 모습이 역겨운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죄송해요. 이런 건 약
고영란은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미리 챙겨온 값비싼 장난감들을 그에게 건네줬다.그러나 박예찬은 장난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할머니, 너무 감사하지만 엄마가 낯선 사람이 주는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박민정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그러나 아직 고영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확실한 상황이라 절대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박예찬의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고영란은 ‘낯선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예찬아, 할머니가 왜 낯선 사람이야? 우리 적어도 몇 달은 알고 지냈잖아. 할머니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박예찬이 언급한 엄마가 조하랑인 줄 알았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이었다.“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추석 지내고 나면 할머니가 직접 엄마를 만나서 얘기할게. 그럼 이제 낯선 사람이 아닌 거지?”박예찬은 엄마를 함부로 대하며 괴롭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이러는 게 이해 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무려 20일을 유지훈을 데리러 온다는 핑계로 유치원을 찾아왔다.매번 거절했음에도 고영란은 늘 선물이나 음식을 가져왔다.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박민정에게 했던 무자비한 행동을 떠올리면 그런 마음마저 사라졌다.“할머니, 제가 비록 어린아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요. 누군가를 싫어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니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절대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걸요.”그 말 한마디에 고영란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리에 얼어붙었다.비수 같은 말에 상처받은 것도 있지만 그의 모습이 어릴 적의 유남준과 너무 똑 닮아있어 기분이 착잡했다.“왜 할머니를 싫어하는 거야?”슬픔에 허덕이는 고영란과 달리 박예찬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에게는 진짜 할머니가 있거든요.”혈육 간의 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박민정은 다시 한번 느꼈다.어찌 보면 고영란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건 친아들
저택으로 돌아온 후.고영란은 신중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며 박민정을 설득했다.“현실이 얼마나 잔인한지 네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혼한 여자가 무슨 수입이 있겠니? 박씨 가문도 그렇고... 이제는 의지할 구석이 없잖아.”박민정은 유남준의 방 밖에 있는 발코니에 서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고영란의 말을 머릿속에 되새겼다.이혼한 여자는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없다는 뜻인가?박민정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성공한 모습을 기필코 보여주리라 다짐했다.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손에 든 물컵을 내려놓고 조하랑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민정아, 무슨 일이야?”조하랑은 과일을 먹고 있었다.“예찬이랑 얘기하고 싶어.”“그래? 잠깐만 기다려.”조하랑은 재빨리 카메라를 돌렸고 곧이어 단정한 옷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있는 박예찬의 모습이 보였다.“엄마.”박민정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고영란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보고 싶어 고민하던 찰나 뜻밖에도 박예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나 오늘 엄마를 봤어.”박민정은 흠칫 놀랐다.“그런데 왜 아는 척을 안 했어?”사뭇 박예찬이 어른처럼 성숙해 보이는 순간이다.“엄마가 나한테 다가오지 않았잖아. 바쁜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방해하지 않았어.”박예찬은 일부러 고영란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엄마, 혹시 유치원 입구에서 엄청 나이 드신 어르신 봤어? 유치원에서 한번 만난 이후로 요즘 계속 나 보러 오거든.”줄곧 우아함을 유지하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고영란이 나이 먹은 사람으로 표현되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고 모든 의혹이 말끔히 사라졌다.“그건 우리 예찬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잖아.”그녀의 말에 박예찬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엄마, 내일 추석이잖아. 그래서 엄마를 대신해서 할머니한테 추석 안부를 전했어.”“정말이야? 고마워.”박민정은 당장이라도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었다.유씨 가문에서는 길게 영상 통화할 수 있
유남준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아이인 유지훈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에 애써 감정을 억제했다.유성혁 부부는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방을 나섰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돌변했다.“남준이 저 자식은 위아래가 없는 건가? 감히 나한테 덤벼?”최현아도 분노를 못 이겨 씩씩거리며 유지훈을 끌고 나왔다.“동생이라면서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어르신이랑 지훈이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체면을 짓밟을 수가 있죠?”최현아는 유남준이 머문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방금 우릴 비웃는 거 봤어요?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유성혁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무슨 뜻이야?”“민정 씨를 다시 데려왔다는 소식 못 들었어요?”“그게 왜?”유성혁은 예쁜 박민정이 난청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보청기를 착용하는 게 불쌍하다고 여겼다.“여보, 걱정하지 마요. 오늘 받은 모욕은 반드시 되갚아 줄 거예요.”최현아는 이를 악물었다.“비밀 하나 얘기해줄까요? 민정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도련님이 아니에요.”이 일은 최현아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박민정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 싶어 지금껏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남준에게 한 방 맞고 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유남준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박민정은 이미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은은한 불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유난히 매혹적이었다.유남준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어머니가 뭐래?”박민정이 그를 바라봤을 땐 바지만 남은 상태였다.다부진 상체가 고스란히 눈에 보이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아이를 임신하면 4,000억을 준대요.”“그래서 동의했어?”유남준은 곧장 침대에 올라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아니요. 전 아이를 팔고 싶지 않거든요.”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입술은 마침 유남준의 볼에 닿았다.순간 가슴이 찡해지며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로 알려진 유남준이 이런 뻔뻔한 면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듯싶다.유남준은 옆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앞으로도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그렇게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야 박민정은 잠이 들었다.추석날.유씨 가문은 늘 그렇듯 수많은 친척들이 모여 시끌벅적했다.유일하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은 이 자리에 박민정이 있다는 것이다.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 것처럼 사석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남준 오빠가 직접 데려왔다고? 도대체 왜?”“진짜? 저 여자가 먼저 연락한 게 아니라고?”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지던 그 시각 박민정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몸을 일으켰다.침대에서 일어나자 준비된 드레스와 한쪽에 놓인 화려한 주얼리가 보였지만 재빨리 시선을 떼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남준은 드레스를 갈아입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파티라도 하는 건가? 아무튼 전 참석할 생각 없어요.”박민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왜? 이유를 말해봐.”유남준은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이유가 왜 필요하죠?”박민정의 질문에 유남준은 위압감을 풍기며 한 걸음 다가갔다.“이번에는 다를 거야.”박민정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가고 싶지 않아요.”‘달려졌다고? 날 괴롭히는 방법이 달라진 건가?’5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면전에서 얼마나 많은 핀잔을 줄지 안 봐도 뻔하다.유남준은 오늘 박민정을 데리고 직접 가족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늘 서럽다고 얘기했으니까.“친구들은 남편이랑 같이 파티도 가던데 나만 혼자예요... 다들 지켜줄 사람이 있는데 나만 없고...”하지만 이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지금의 박민정은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싶을 만큼 연악하지도 않았다.유남준의 손은 허공에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