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희는 유남준이 이런 일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네. 알겠습니다.”유남준은 또 그를 불러 세웠다. “강 변호사보고 처리하라 해. 반드시 그 언론사들의 사과를 받아내라고 전하고.”“네.”서다희는 밖으로 나가 강연우에게 이 일을 알렸다.강연우도 요즘 되게 예민하다. 조하랑이 김인우에게 시집가려고 하니 말이다.전에는 약혼이었지만 오늘 기사를 보니 정말 결혼을 하려는 것으로 보였다.“강 변호사님, 괜찮으세요?”서다희는 그가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강연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제가 처리하죠.”“그래요. 잘 부탁드려요.”서다희는 마침내 푹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강연우는 일하는 게 꽤 효율적이다. 언론사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증거를 수집하게 한 뒤 변호사 공식서한을 보내라 하였다. 그리고 다른 언론사를 찾아서 진실을 밝히라고 했다. 일하고 있던 박민정도 유남준이 보낸 게시물을 보았는데 믿기지 않았다. 그는 유남준이 당연히 자신을 의심할 줄 알았고 자기를 찾아와 따질 줄 알았다.여론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다들 박민정이 유남준을 두고 다른 남자를 꼬시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기사를 본 윤소현은 바로 이모한테 연락해 기사 하나를 더 내라고 했다. 박민정과 유남준은 일찌감치 이혼했고 지금은 서로 감싸는 척 연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증거를 찾으러 병원에 간 진서연 쪽에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날의 CCTV는 이미 파괴되고 없었다.그녀는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다.역시 박민정의 예상대로였다. 마음먹고 자신을 모함에 빠뜨리려고 한 사람이 증거를 남길 리가 없다. 하지만 들통나기 마련이다. “그럼 병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CCTV도 찾아봐. 뭔가 나올 거야.”“알겠습니다.”진서연이 대답했다.의자 등받이에 기대 휴식을 하던 박민정은 휴대폰 알림 소리
“역시 우리 이모.”윤소현은 자기 이모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러자 여론 방향이 다시 바뀌었다. 네티즌들은 박민정과 에리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에리의 팔로워 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핸드폰 너머 정수미의 여동생인 정현미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이 정도로 뭐. 이렇게 파렴치한 여자는 이래도 싸.”“네. 고마워요, 이모.”윤소현은 기뻐서 전화를 끊었다.이제는 박민정이 유남우를 병원에 데려다주는 것이라는 증거를 찾아도 소용없다. 이전의 여론을 끌어냈으니 말이다.이번에는 에리와 그녀에 관한 것이다.기사를 본 유남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바보.”그가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에리가 또 게시물을 올릴 줄은 몰랐다.서다희도 생각지 못했다.“대표님, 이 에리라는 사람 말이에요. 정말 사모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게시물을 올리지 않았겠죠.”이 말을 들은 유남준은 서다희를 한번 노려보았다.“나도 알거든?”중요한 건, 지금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면서 그와 박민정이 이혼한 사실에 관해 묻고 있었다. 그리고 에리에 관한 것도 있었다.“대표님, 박민정 씨랑 이혼한 사실을 왜 숨겼죠?”“대표님, 박민정 씨한테 버림받은 거 아니에요? 에리가 보낸 게시물을 봤어요.”“함부로 말하지 마. 에리보다 유남준이 훨씬 낫지.”“누가 그래? 유남준이 에리보다 대단하다고. 우리 에리 오빠야말로 최고야. 유남준은 에리에 비하면 아저씨지!”유남준은 이런 댓글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근데 네티즌들이 자신을 에리랑 비교하면서 자기를 아저씨라고 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는 에리랑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게다가 에리 같은 애송이가 볼 것이 뭐가 있냐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아직 회사에 안 왔어?”유남준이 서다희한테 물었다.서다희가 대답했다. “아직이에요.”그의 말을 듣고 유남준은 눈을 살짝 감았다.“이제 오게 되면 직접 나를 찾아오라고 해.”“네?”
비서가 노크하고 유남준의 허락을 받고 에리와 그의 매니저를 들여보냈다.에리는 곧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있는 익숙한 모습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그는 유남준을 본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남준을 조사한 적도 있다.하지만 유남준이 쌍둥이 동생이 있고 그 동생은 눈에 이상이 없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유남우인 줄 알았다.“호산 그룹의 대표님, 유남우 씨세요?”에리는 돌려 말하지 않고 다짜고짜 물었다.이 사람이 유남우가 맞는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유남우라면 호산 그룹을 맡으면서 IM 그룹을 차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에리를 보며 말했다. “나는 박민정의 전남편, 유남준이에요. 우리 구면이잖아요.”그는 또박또박 말했다.에리는 다시 한번 놀랐다. “눈이 안 보인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어요?”“나았어요.”에리는 자신의 직속 상사가 박민정의 전 남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제의 자신감은 이미 눈 녹듯 사라졌다. “당신이 IM 그룹을 만들었다고요?”에리는 여전히 믿기지 않아서 계속 물었다.“맞아요. 당신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난 이미 그룹 대표였어요.”유남준은 직설적으로 말했다.에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어쩌다가 자기 라이벌의 부하가 되었으니 말이다. 어쩐지 그룹과 계약을 맺고 나서 자기를 더 크게 키우지 않고 아프리카로 보냈더라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한 거였어요? 민정이가 알면 어쩌려고요?”에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그러자 유남준은 입꼬리를 추어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민정이한테 일러바치겠다는 거예요?”에리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유남준이 이어 말했다. “남자들 사이의 일도 여자한테 일러서 처리해야 하나요?”“그런 뜻이 아니고요...”에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요? 연예인은 역시 딴따라네요. 아쉽게도 연기가 별로네요. 뭐 당신이 창피하지 않다면 민정이한테
유남준은 일찌감치 사람을 시켜 에리의 자산을 조사하게 했다. 에리의 아버지도 조사했다.에리가 계약을 해지하려 해도 절대 그렇게 많은 위약금을 낼 수 없다고 확신했다.아닐라 다를까, 에리와 강연우가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에리가 호통을 쳤다. “4000억이요? 그게 말이 돼요?”“무슨 문제가 있으면 당신 변호사를 찾아와도 돼요.”강연우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에리는 지금까지 돈을 벌지 못한 게 아니라 돈을 모으는 습관이 없는 거였다. 돈을 흥청망청 쓰는 스타일이라 돈이 남을 때면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을 후원했다.지금 그는 그렇게 많은 위약금을 낼 수 없다. 남에게 빌린다 해도 그렇게 많은 돈은 빌릴 수 없다.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소송을 걸 수밖에 없겠네요.”협상이 안 된 이상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강연우는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물론이죠. 좋은 한 마디 드릴게요. 좋은 변호사를 찾는 게 좋을 거예요.”연예인이 계약을 어기고 소송을 거는 것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이 일을 알게 된 매니저는 비아냥거렸다. “내가 유남준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했지? 내 말이 맞지? 근데 IM 그룹 대표가 유남준일 줄은 정말 몰랐네. 이 소식이 알려지면 꽤 떠들썩하겠어.”그는 또 바로 말했다. “4000억은 우리가 구할 수 없어. 이렇게 하자. 네가 유남준한테 가서 사과하고 너와 박민정의 일은 오해라고 말해. 유남준 같은 대표 자리에 앉은 사람이 굳이 너를 난처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에리는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보고 사과하라고?”“안 될 게 뭐야? 너는 그 사람 말고 돈에 허리 굽히는 거야.”매니저가 설득했다.에리는 그의 말이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됐어. 소송을 걸면 돼.”그는 눈을 감고 도는 매니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박민정한테 호감만 느끼고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박민정은 그의 앞길을 비춰준 사람이라 그는 늘 그녀를 고마워했다.박민정이 아니었다면 그
“무슨 방법인데?”박민정이 물었다. 진서연이 그녀에게 말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이런 일에서 빠져나오려면 자신의 결백을 해명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방법이 있더라고요. 바로 상대방의 화제성이 더 강한 스캔들을 까발리는 거예요. 근데 에리 씨 말이에요. 숨겨둔 여자친구가 있나요?”진서연이 물었다.박민정은 무슨 뜻인지 좀 알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없지 않을까?”그녀도 에리를 안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서 에리가 연애하고 있는지 모른다.“공개할 수 있는 여자친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오늘 오후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 너도 같이 가서 한 번 물어보자.”박민정이 말했다.에리를 만난다는 말에 진서연은 눈빛이 반짝였다. “좋죠! 오랜만에 잘생긴 남자 보겠네요.”“진정해.”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진서연은 알았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이곳을 지나가다가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것을 본 최현아는 뭔가 이상했다.지금쯤 급하게 기사를 처리해야 하는 박민정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부하 직원과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설마 이미 해결책을 찾은 건 아닌가 생각했다. 최현아는 은밀한 곳을 찾아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현아, 경계를 놓으면 안 돼. 방금 박민정을 봤는데 엄청 태연하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웃고 있더라고. 아무래도 이미 해결책을 찾은 거 같아.”윤소현은 네티즌들이 몰려들어 박민정한테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쓴맛을 보여줘야겠네요.”“그래.”최현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 하지만 박민정이 싸움에서 진다면 제일 크게 이득을 볼 사람은 윤소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신은 빽이 그렇게 강한 윤소현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최현아는 곧바로 박민정의 사무실로 가서 노크했다. 박민정은 문 쪽을 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최현
박민정은 그녀의 꿍꿍이를 꿰뚫고 있었다. 사람은 이익을 따지는 동물이다. 최현아 역시 그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박민정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를 찾아가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은 반드시 그녀 혼자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소현이 이렇게 나오니 박민정도 방법이 없었다.기사를 본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증거도 없는 뜬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박민정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고 결혼하기 전에 남자친구를 얼마나 많이 사귀었는지 비슷한 것 말이다. 결혼하고 해외에 나갔는데 해외에서도 남자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심지어 외국인과 아이도 낳았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이 널리 퍼질수록 많은 사람이 이를 사실로 믿고 박민정을 나무랐다. “어머, 어쩜 이리 파렴치한 여자가 있다고. 외국인이 그렇게 좋으면 귀국하지 말 것이지.”“그러니까. 난 이런 사람이 제일 싫어.”“유남준은 지금 되게 슬프겠지? 너무 불쌍해.”진서연은 이 악플들을 보고 어이없어했다.“정말 역겹네요.”근데 박민정은 개의치 않았다. “악플 그만 봐. 신경 안 써도 돼.”이 일은 점점 더 커져서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끔 보는 박예찬도 알게 되었다.“이런!”박예찬은 감히 자기 엄마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그 악플러들을 보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컴퓨터를 해킹했다. 하지만 박예찬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그저 소문을 심하게 퍼뜨리는 악플러와 언론사밖에 처리하지 못했다.그는 박윤우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남들이 우리 아빠가 외국인이래.”박윤우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서 한참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의아해했다.“누가 그래?”“인터넷에 많은 사람이 그러던데? 오늘 밤 돌아가서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공개해.”박예찬이 말했다.박윤우는 바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왜 외국인의 아이가 되었는지 영문을 몰라고 하였다. 이건 자기 엄마를 모함하는 것인 걸 알아차린 박윤우는 그들이 참으로 나쁜 사람
화면에 뜬 것은 다름이 아닌 이 블로거의 스캔들이었다.동시에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갖는다든지, 팬을 무시하고 팬들을 욕하는 것에 관한 스캔들이었다.원래 이 블로거를 응원하던 팬들도 안티로 되어 이 블로거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계정으로 라이브를 보고 있던 블로거는 이것을 보고 빠르게 댓글을 달며 해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든 흑역사와 스캔들이 폭로되었다.선생님이 예찬이보고 컴퓨터를 그만 하라고 말리지 않았으면 블로거의 모든 것이 밝혀질 판이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본 계정에 로그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계정 아래는 온통 악플로 쏟아졌다.3분도 안 돼서 몰래 사귀던 팬 여자친구들이 다 헤어지자고 찾아와 그의 스캔들을 까발리기 시작했다.그제야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샀다는 것을 알았다.회사 상사에게 연락했을 때, 그의 계정은 이미 정지되었다.이 일을 안 상사는 그 블로거를 대하는 태도가 몹시 차가웠다. “너 이런 사람이었어? 백만 팔로워나 되는 계정을 네 손으로 망쳤구나. 기다리고 있어. 곧 회사 변호사 서한을 보낼 거야.”이 헛소문을 퍼뜨린 블로거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주저앉았다. 그는 더없이 후회했다.이 블로거가 이렇게 됐는데도 트래픽과 명성을 얻기 위해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다른 블로거들을 깨우지 못했다.박예찬은 유치원 선생님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가르치는 수업을 들으며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수업이 끝나고 조하랑이 그를 데리러 왔다.“하랑 이모, 뉴스 봤어?”그가 물었다.조하랑은 화가 나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당연히 봤지. 다들 진짜 너무하네.”박예찬은 컴퓨터를 꺼내 열어봤다. 헛소문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가 처리하던 블로거의 계정이 정지된 것을 보았다.“이것은 모두 헛소문이야. 윤우보고 해명하라고 할 거니까 이모가 저녁에 좀 도와줘.”“그래.”조하랑은 박예찬을 아이로 여기지 않고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어떻게 도와줘야
“괜찮아. 고마워.”박민정은 에리가 부축하려는 것을 거절했다.진서연은 이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스타 님, 우리 보스랑 스캔들도 났는데 좀 조심해. 우리 보스 난처하게 하지 말고 말이야.”그녀는 말하면서 박민정의 의자에 폭신한 쿠션을 놓아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며 걸어가 앉았다.“에리랑 그런 장난치지 마. 누군가가 나쁜 마음먹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잖아.”“알았네요.” 진서연은 바로 대답했다.에리는 박민정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속이 속이 아니었다.박민정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리야, 너도 빨리 앉아. 주문해야지.”박민정은 전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그래.”세 사람은 가정식 요리를 시켰다.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진서연은 참지 못하고 에리한테 물었다. “에리야, 너 여자친구 있어?”에리는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물어본 건데. 내가 실례했나?”진서연이 물었다.에리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실례까지야. 민정이는 알잖아. 내가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광고 촬영을 했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그렇구나.”이 대답을 들은 진서연은 희망을 잃은 표정이었다.“왜?”에리가 의아해서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너랑 우리 보스 스캔들이 떠돌고 있잖아. 네가 애인이나 부인이 있으면 공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진서연은 에리랑 솔직하게 얘기했다. 에리가 스타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박민정 덕분이다.진서연은 박민정이 도움이 필요할 때 에리가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에리는 처음에 박민정이 자신의 연애 상황이 알고 싶어서 진서연을 시켜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한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이런 이유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그는 섭섭한 마음에 물었다. “아니면 내가 가짜 여자친구를 만들까?”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했다. “아니야. 없으면 없는 거지. 다른 방법을
“소현아, 엄마 퇴원 수속 밟아줘.”정수미가 말했다.오랜 세월 함께한 딸이었다. 비록 친딸은 아닐지라도 정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인하고 싶었다. 윤소현이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지.윤소현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좋아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비서를 힐끗 쳐다보았다.“비서님, 저야말로 엄마의 건강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이에요. 엄마가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훨씬 빨리 회복하실 거예요.”비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가 거만하게 병실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윤소현이 사라지자 비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절대 집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왠지 모르게 정수미가 집으로 돌아가면 무언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최상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검진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의사는 혹시 음식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정수미는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고 조용히 손을 토닥였다.“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나는 안심할 수 없어.”비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표님의 몸을 담보로 삼아선 안 됩니다.”“괜찮아.”정수미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만약 정말로 소현이가 그랬다면 내가 괜한 정을 준 거겠지.”윤소현은 곧바로 퇴원 수속을 마쳤고 정수미를 집으로 데려갔다.하지만 첫날 밤 그녀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한편, 지엔 그룹은 박민정이 취임한 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직원들은 모두 만족스러워하며 입을 모았다.“다행히 새 대표가 박민정이지, 윤소현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제야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겠어.”“그러게 말이야. 윤소현이 대표였다면 우리 보너스는 커녕, 회사 분위기도 엉망이 됐을걸? 게다가 윤소현은 마치
정민기가 가져온 녹음 파일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들렸다.윤소현이 외부 세력과 손잡고 정씨 가문을 와해시키려 한다는 것, 심지어 지엔의 주식까지 조작하려 한다는 사실까지.박민정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토록 배은망덕할 줄이야.이 일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마침 정호철의 사무실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회사 내에서 오래된 경영진들에게 박민정이 휘둘릴까 걱정되어 틈틈이 찾아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묻곤 했다.하지만 박민정은 과거 그가 자신과 박예찬에게 가했던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서늘하게 대했다.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업무뿐이었다.정호철도 이를 알고 있었고 그가 아직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순전히 박민정이 그를 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정수미와 그녀의 가족을 지켜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병원에서 정수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깨어 있는 시간보다 혼수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틈틈이 윤소현의 딸을 찾아가 보곤 했는데 그 아이가 안쓰러워서 였다.“소현이는 한 번이라도 와서 아이를 봤어?”그녀가 묻자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께서 요즘 많이 바쁘신 듯합니다. 한 번도 다혜를 보러 오신 적이 없습니다.”아이의 이름이 무색하게 윤소현은 한 번도 진심으로 이 아이를 아껴준 적이 없었다.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을 짊어진 아이구나.”비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병실로 돌아가 쉬셔야 합니다, 대표님. 너무 오래 밖에 계시면 안 됩니다.”“그래.”병실로 돌아온 정수미는 문득 물었다.“민정이는 회사에서 잘 지내고 있나?”“정 매니저님께서 도와주고 계셔서 작은 아가씨께서는 큰 문제 없이 지내고 계십니다.”“그렇다면 다행이군.”정수미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소현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도록 해. 그 아이의 성격을 내가 잘 알잖아. 민정이의 아래에 머물고 있을 인물이 아니야.”비서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정은 이상했다. 진서연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변비라도 걸린 걸까?그녀는 여전히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정민기를 보며 진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연아,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진서연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민기 씨... 갔어요?”박민정은 의아했다.“아니, 안 갔는데? 왜?”“그럼 전 계속 화장실에 있을래요.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나갈게요.”진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박민정은 그제야 그녀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서연아, 민기 씨는 널 기다리려고 여기 있는 거야. 그냥 나와.”“절 기다린다고요?”진서연은 이해하지 못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그냥 가라고 해 주세요.”그녀는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네 생각 안 들어보고 싶어? 대체 무슨 일로 널 찾아온 건지 궁금하지도 않아?”“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진서연은 한숨을 쉬며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박민정은 어제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내가 대신 물어봐 줄까?”박민정은 정민기가 진서연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는 않았다.진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정말 가능해요? 그럼... 도와주세요.”“알았어.”전화를 끊은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다가갔다.“서연이가 속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서연이를 찾은 이유가 뭐예요? 내가 대신 전해줄까요?”정민기는 그녀가 배가 아프다는 말에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혹시 뭘 잘못 먹었어요? 약이라도 가져다줄까요?”박민정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그는 역시 진서연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아니었으면 그녀가 배가 아픈 것보다 자신을 왜 피하는지 먼저 물었을 테니까.정민기가 약을 가지러 가려 하자 박민정은 그를 붙잡았다.“어젯밤에 서연이한테 한 말, 거짓말이었죠? 난 알아요. 민기 씨가 서연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요.”정민기의 걸음이 멈췄다.“그리고... 서연이와 에리의 관계, 진짜인
정민기는 박윤우의 말에 흥미가 동했다.“서연이 아줌마가 왜?”박윤우는 입을 삐죽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서연이 아줌마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귀엽고 싸움도 잘하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많죠.”그는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정민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운전 속도도 들쭉날쭉해졌다.“그래?”“당연하죠. 예전에 엄마랑 같이 일할 때도 고객들이 줄줄이 서연이 아줌마한테 관심을 보였어요.”박윤우는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했다.“솔직히 아저씨도 좀 분발해야 해요. 맨날 저런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니까 여자들이 다 도망가는 거잖아요.”“아저씨도 이제 제법 나이가 많으신데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안 하셔요?”부모 얘기가 나오자 정민기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딱 굳어졌다. 그는 박윤우가 계속 말하는 걸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숙제는 다 했어? 안 했으면 빨리 해.”박윤우는 더 놀리고 싶었지만 숙제 얘기가 나오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정민기는 박윤우를 유치원에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이 떠올랐다. 원래 그는 다른 남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자신이 에리나 진서연의 과거 남자들과 비교하면 어떤지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차는 지엔 그룹 앞에 멈춰 서 있었다.정민기는 지엔 그룹 외부에서 진서연이 쉴 때쯤 이야기를 나누려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문득, 눈에 띄는 한 차량이 있었다. 그는 직업적 감각으로 이상함을 느꼈고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자 곧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한 사람은 윤소현,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윤석후였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후 잠시 기다리자 최현아와 그녀의 시아버지 유석진까지 차에서 내렸다.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모두 같은 차에 올라탔다.정민기는 이들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직감하고 즉시 차를 몰아 뒤를 밟았다.차는 한 호텔 앞에 멈춰섰고 정민기는 조용히 그들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안 중요하다고요?”진서연은 더욱 서러워졌다.“어디가 안 중요해요? 난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당장 대답해 봐요. 날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대체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그녀의 손에 쥐어진 정민기의 옷이 구겨질 정도였다. 정민기는 눈빛을 잠시 깔며 살짝 짜증이 섞인 기색을 보였다.“안 좋아해요.”그는 한때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진서연 역시 과거의 약혼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그렇다면 그가 다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진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가득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갔다.“정말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이제 나가줄래요?”정민기의 냉정한 한마디에 진서연은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왜 처음에 나랑 연애를 시작했어요?”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이 세상에 연애를 하면 꼭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어요? 사귀기 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우리는 안 맞아요.”정민기는 단호하게 말을 끝맺고 방으로 돌아서려 했지만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에리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나로는 부족해요?”“네?”그 한마디에 진서연의 인내심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정민기에게 날렸다.사실, 정민기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그녀의 주먹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꽂혔다.“그, 그게... 왜 안 피한 거예요?”그녀의 주먹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손을 내린 순간, 정민기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위로 짙푸른 멍이 퍼지는 것이 보였다.정민기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제 됐어요?”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진서연은 더 이상 버텨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그래요. 이제 알겠어요. 지금 당장 떠
“보스, 역시 대기업은 우리 같은 작은 회사와는 차원이 다르네요. 아까 대단한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어요.”진서연이 감탄하며 말했고 박민정도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그러게, 앞으로 배울 것도 많겠어.”“네, 근데 오늘 윤소현이 망신당한 건 정말 통쾌했어요.”진서연은 윤소현의 잘난 체하는 태도가 정말 싫었다.박민정은 그녀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후, 오늘 회의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윤소현이 며칠 사이에 회사에 단행한 개혁이 예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회사의 모든 인사 배치가 그녀의 손을 거쳤다.이를 본 박민정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녀는 속으로 자신의 계획을 정리했다. 시간이 늦어졌지만 진서연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서연아, 이제 그만 쉬어.”“저 가기 싫어요.”진서연은 자신이 머무는 곳을 떠올리는 순간, 정민기와 함께 있는 것이 떠올라 가기가 싫어졌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는데 오직 일에 몰두할 때만이 모든 걸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그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정민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보스, 저 요즘 민기 씨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요.”진서연이 훌쩍이며 말했다.“울고 싶을 정도로 속이 막막해요.”박민정이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며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괜찮아. 언젠가 너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하지만 그 말에 진서연은 오히려 더 속상해졌다.“보스도 민기 씨가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죠?”박민정이 순간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그런데도 절 좋아했다면 왜 저랑 헤어졌겠어요?”진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기 씨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게 맞는 것 같아요.”박민정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실연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한편 옆에서 조용히 있던 유남준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벌써 밤 11시였다.‘얘는 상황 파악도
“소현아, 무슨 일이니?”정수미는 윤소현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윤소현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엄마, 왜 민정이를 회사에 들이신 거예요? 게다가 회사의 모든 업무를 민정이에게 맡기다니요?”“그야 당연한 일이지. 앞으로 민정이가 회사를 맡게 될 거야. 그러니 네가 잘 도와주도록 해라.”정수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소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장 따지고 싶었지만 다행히 윤석후가 그녀를 말렸다.윤소현은 간신히 감정을 다잡고 목소리를 낮췄다.“엄마, 저도 이해해요. 민정이가 엄마의 친딸이니 회사를 물려주시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지금 민정이는 회사 업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잖아요. 이런 식으로 대표 자리에 앉으면 직원들이 납득하지 않을 거예요.”“그래서 배우게 하려고 회사에 들인 거다. 걱정 마라, 이미 내부 직원들에게 다 얘기해 뒀으니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거야.”정수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네가 못마땅한 건 아니겠지?”그 말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겨우 입을 떼었다.“그, 그럴 리가요.”“그럼 됐다. 이제 내 몸도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앞으로 민정이를 잘 도와줘라.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는데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그녀는 목소리를 죽여 중얼거렸다.“저 늙은 여우, 너무하잖아! 이제 친딸이 생겼다고 나 같은 양녀 따위는 완전히 내팽개치는 거야? 게다가 내가 그 애를 돕게 만들다니! 웃기고 있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지 그래?”윤석후가 그녀를 얼른 끌어당겨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소현아, 진정해. 정수미 저 늙은 여자가 얼마나 더 살겠냐?”윤석후가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여태껏 회사 사정을 전혀 몰랐던 애송이가 하루아침에 대표가 됐다고 해 봐. 정수미가 죽고 나면 우리가 그 애를 쥐락펴락하는 건 식은 죽 먹기
“그래.”윤석후는 윤소현을 따라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막상 내려가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수많은 고위 임원들에게 둘러싸인 인물은 다름 아닌 박민정이었다.그녀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정수미와 꼭 닮아 있었다.정호철은 그녀를 보자마자 마치 젊은 시절의 정수미를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대표님.”그가 공손히 인사하자 뒤따르던 임원들도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대표님”이에 박민정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별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이제 막 오셨으니 우선 위층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정호철이 말했다.“좋아요.”박민정은 정호철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그녀는 예상치 못한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윤소현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윤소현은 박민정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길을 막아섰다.“박민정,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이어 그녀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정호철을 노려보았다.“아저씨! 설마 이 사람이 아저씨가 말한 신임 대표라는 거예요?”“그래요.” 정호철이 단호하게 대답했고 순간 윤소현의 머릿속은 텅 빈 듯 멍해졌다.“말도 안 돼! 겨우 저런 보잘것없는 촌뜨기가 무슨 자격으로 회사를 맡아요?”그러나 이번에도 정호철은 단호했고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작은 아가씨는 정 대표님의 친딸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 대표님께서 직접 이분을 지엔의 대표로 임명하셨습니다.”이 두 마디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윤소현의 가슴을 짓눌렀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 정도였다.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박민정을 노려보았다.“박민정,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왜 엄마가 너한테 회사를 맡긴 거지?”하지만 박민정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 할 뿐이었다.그러나 윤소현은 포
박민정은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뭘 봐야 하죠?”“지금은 몸과 정신을 잘 추슬러야 해. 내일 출근해서 회의 도중 졸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네 위치를 확고히 하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그의 말을 듣자 박민정도 슬슬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그럼 나 먼저 쉬러 갈게요. 당신도 일찍 자요.”“응.”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유남준은 노트북을 꺼주고 휴대폰을 들었다.그는 전화를 걸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민정이가 지엔에 출근해. 혹시라도 해결 못 할 일이 생기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지엔 그룹 안에도 유남준의 사람이 있었다....윤소현은 최근 들어 더욱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병원에서 몇 차례나 아이의 위독 통보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한편, 그녀는 아버지 윤석후를 회사로 들여보냈고 부녀가 함께 회사를 점점 혼란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수미는 이미 박민정을 새 총괄자로 임명하고 회사를 넘길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회사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을 세웠다.“이 물건들은 전부 대표님이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정말 다 버리시겠습니까? 만약 대표님이 회복되신다면 찾으실 텐데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윤소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창고에 쌓아 두면 되겠네.”“하지만...”“하지만은 무슨. 지금 회사 관리는 내가 하고 있어. 내 스타일대로 꾸미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그녀는 단호히 말했고 그때 윤석후가 들어왔다.“딸, 내 사무실은 옆방으로 하면 되겠군.”그가 가리킨 곳은 정호철의 사무실이었다.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호철과 함께 고위 임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정호철은 어제 박민정과 만났던 지라 상황을 잘 파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