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유남준이 잠잠해진 후였다.그의 이마를 만져보니 조금 전보다 더 뜨거워진 상태라 박민정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다.구급상자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약품의 유통기한이 모두 지났다. 다른 비상약도 없어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낸 후 천에 꼭 싸고는 그의 이마에 올렸다.그리고 곧바로 인터넷으로 약을 주문했다.유남준에게 약을 먹일 때 그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꿀을 조금 섞은 후에야 그는 겨우 약을 목구멍에 넘겼다. 밖에서는 카리스마 있고 위풍당당한 유남준이 쓴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을 줄은 누가 알겠는가?박민정은 유남준을 소파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는 워낙 무거웠고, 또 그녀에게도 힘이 남아돌지 않았으니 그를 그대로 바닥에 뒀다. 그래서 에어컨 온도를 높인 후, 그에게 얇은 담요까지 덮어줬다.한참을 고생했으니 어느덧 그녀도 소파에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노을빛이 얼굴에 비치자 유남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팔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자 소파에 엎드려 잠이 든 박민정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자기 몸에 덮인 담요와 옆에 놓인 젖은 수건, 그리고 약을 멍하니 바라봤다.유남준은 살며시 담요를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때 머리가 핑 돌았다.‘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아팠었나?’“드디어 깼어요?”인기척에 박민정도 잠에서 깼다.유남준은 벌써 정신을 차렸고, 또 큰 문제가 없어 보이니 박민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오늘 내가 대표님 간호했잖아요. 그걸 봐서라도 하랑이 풀어줘요. 하랑이는 나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하랑이 대신 이지원 씨에게 사과할게요. 죄송해요.”유남준은 막 잠에서 깨었는지라 정신이 없어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아이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니.”“하랑 씨는 왜?”박민정이 설명했다.“인터넷에서 이지원 씨가
박민정이 흠칫했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소파에 앉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몸이 많이 불편해서 그러는데, 남아서 나 간호해 줘.”“내가 간호해 주면 하랑이를 풀어줄 거예요?”“응.”유남준의 잠긴 목소리는 유난히 감미롭게 들렸다.“알겠어요.”박민정도 어차피 유남준에게 접근하려던 참이었으니 그의 제의에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유남준은 위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젯밤에 에스토니아로 출국한 후로 지금까지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아직 요리하는 거 까먹은 건 아니지? 나 배고파.”“배달 음식을 주문할게요.”박민정이 휴대폰을 꺼내 주문하려던 참에 유남준이 미간을 구긴 채 그녀를 말렸다.“당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싶은데?”“요리하려면 적어도 한두 시간 걸려요.”박민정이 말했다.“기다릴 수 있어.”유남준은 그윽한 눈망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에게서 한 시라도 눈을 떼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런 그의 눈빛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그럼 지금 요리 시작할게요.”그녀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을 살짝 움직였다.주방은 마치 금방 인테리어를 끝낸 듯이 깨끗했다. 물론 냉장고도 새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내가 떠난 후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인터넷으로 식자재를 주문했다.유남준은 거실 소파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자의 소리를 들었다. 마치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간 듯했다.몸은 힘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법무팀 책임자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여론을 정리해 유남준에게 보고했다.이지원의 부정적인 여론을 보면서도 유남준은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책임자에게 말했다.“조하랑 풀어줘.”그러고는 휴대폰을 껐다.이지원은 고영란의 생명 은인일 뿐, 그녀의 사생활에 관해서 유남준은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다만 주상 엔터테인먼트는 유앤케이 그룹 산하의 회
유남준은 박민정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라 더 이상 식사를 이어가려는 마음도 없었다.‘왜 예전에는 저렇게 말을 잘하는 걸 몰랐지?’어느덧 어둠이 찾아왔다. 암울한 하늘에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번개가 번쩍였다.휴대폰을 확인하자 시간은 벌써 저녁 8시였다.이때면 박민정은 보통 은정숙에게 연락해 예찬의 상황을 물어보곤 했다.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남준이 어느샌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것이었다.“뭘 보고 있어?”박민정이 바로 휴대폰을 거두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남자의 얼굴색은 방금보다는 밝아졌지만 여전히 예리한 눈빛을 보였다.“식사 끝냈죠? 그럼 나 이만 가봐도 돼요?”“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 연지석에게서 연락이 온 거야?”유남준이 심드렁하게 물었다.‘이상하네, 왜 오늘 말끝마다 지석이 얘기를 꺼내지?’하필 이때, 박민정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힐끔 확인했는데 연지석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 박민정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유남준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5분 줄게. 전화 받고 바로 돌아와.”그 얘기를 듣고 박민정은 곧장 별장 밖으로 나갔다. 주위에 CCTV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유남준이 윤우를 데려갔어.”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박민정은 그제야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남준 씨가 왜 윤우를 데려가? 윤우를 언제 발견했는데? 그럼 유남준 씨도 윤우의 신분을 알고 있어? 참. 예찬이는? 예찬이는 지금 어디 있어? 별일이 없는 거야?”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박민정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유남준이 이렇게 빨리 윤우를 발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이쪽 일을 다 처리하고 바로 돌아갈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침착함을 유지하는 거야. 유남준은 윤우의 정체를 아직 모를 거야. 알았다고 해도 자기 아들이니 윤우를 해치진 않을 거니까 겁먹지 마.”하지만 박민정은
“나 갖고 노는 거 재밌어? 연지석이 그러라고 가르쳤어?”눈가가 빨개진 유남준이 차갑게 물었다.밖에는 큰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잇따라 귀를 찌르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박민정도 더는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하지 않았다.“나는 그저 과거를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요.”유남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더 가까이 다가갔다.“과거를 잊는 방법이 죽는 척하는 거야? 내 기분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유남준의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제야 그녀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내가 무서워?”박민정은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유남준 씨, 제발 아이를 돌려줘요. 유남준 씨가 아닌 지석이와 나의 아들이라고요. 제발 부탁이니까 내 아이를 돌려줘요.”박민정에게서 윤우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유남준은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당신은 우리가 이혼한 지 두 달도 안 되지 않았을 때 연지석에게로 가지 않았어? 그때 벌써 그 사람이 좋아졌던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은 척한 거였어? 그리고 내 아들은 어디에 있어?”눈시울이 붉어진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주었다.박민정은 이러다가 손목이 부러져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에게 윤우를 뺏길 고통과 비교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내가 말했었잖아요.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박민정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당신이 내 몸에 두 번째로 손을 댔을 때 난 이미 임신한 상태였어요. 아이를 죽인 건 남준 씨 본인이에요.”비겁하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도 박민정은 유남준이 죄책감 때문에 아이를 빨리 돌려주기를 바랐다.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뭐라고?”그는 제대로 이성의 끈을 놓았다. 박민정을 침대로 밀어버리고는 그녀 위로 올라탔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광기 어린 눈빛의 유남
유남준은 박씨 가문에 의해 사기 결혼을 당한 것 외에도, 박민정이 죽은 척하고 연지석과 외국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낸 사실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박민정은 고통에 잠겼다.“그때 일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요?”“하지만 당신도 이득을 봤잖아, 아니야?”유남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그는 오로지 사기 결혼 때문에 죄책감을 가진 박민정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를 더 답답하게 만든 건 박민정이 죽은 척 사라진 일에 대해, 그리고 연지석과 아이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박민정은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한참 동안의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유남준은 홀로 베란다로 가고는 담뱃불을 지폈다.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기침이 끊이질 않았다. 눈시울은 어느샌가 붉어져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유남준도 자신이 왜 이런 방법을 선택해 박민정을 곁에 남겨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분노 때문이었다.박민정을 거의 5년 동안 찾아다녔는데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그리고 10년 넘게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가 갑자기 사랑이 식었다며 떠나려 했는데 분노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지금까지도 유남준은 박민정이 처음 이혼 얘기를 꺼낸 후 소탈하게 자리를 뜨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그때 유남준은 박민정이 정말 손을 놓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이혼을 결정한 건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오랜 계획 끝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유남준은 담뱃불을 끄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밖에 있던 냉기도 덤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가자, 집에 가자.”집이라...박민정은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나에게 집이 있나?’차에 올라탄 후.유남준은 운전하면서도 계속 기침했다.박민정은 그런 기침 소리를 신경 쓰지도 않은 듯 하염없이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만을 바라봤다.사랑하지 않으니 작은 관심마저 베풀려 하지 않은 게 아닐까?유남준이 백미러
탁!박민정은 듣다못해 숟가락을 식탁에 확 내려놓았다.“배불러서 이만 일어날게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자리를 뜨려 했다.유남준은 그제야 그녀가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의 뒤를 쫓아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왜 화가 났어?”박민정이 손을 빼내며 말했다.“화 안 났어요.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저와 제 친구의 배움이 짧아요, 아니면 제 친구가 괜히 경찰서에 하루나 갇혔겠어요?”‘이런데도 화 안 났다고?’유남준은 체면을 내려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나 정말 이지원이 말한 변호사가 당신 친구인 줄 몰랐어.”박민정은 그저 듣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박민정을 살살 달래며 말했다.“어떻게 해야 당신 친구가 갇혔던 일을 만회할 수 있을까? 사람 시켜 사과하라고 할까?”박민정은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답도 하기 전에 대문 쪽에서 누군가의 어색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서다희가 당황한 얼굴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그녀를 발견한 유남준의 얼굴색은 순간 어두워졌다.“왜 아직도 안 갔어?”“혹시나 대표님께서 더 필요한 게 있으실까 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서다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 박민정이 있을 때는 그녀가 유남준의 일상생활을 모두 책임졌다.하지만 박민정이 떠난 후로 모든 책임은 서다희에게 떠넘겨졌다.유남준은 그야말로 까다로운 상전이었다. 아침을 일찍, 또는 늦게 가져오면 항상 화를 냈고, 그가 요구하는 대로 옷을 준비하지 않아도 혼나기 일쑤였다.한 번은 우유가 원하는 온도가 아니라고 노발대발하더니 배달원을 해고하기도 했다.그래서 유남준의 집에서 일했던 가정부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받는다고 해도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모두 사퇴했다.유남준의 비서로서 서다희는 어쩔 수 없이 직접 그의 일상생활까지 돌봐야 했다.그리고 직접 겪어보고서야 박민정의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유남준의 각종 이상한 요구도 모두 참아 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유남준은
“죄송합니다.”서다희는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 유남준에게 개인적인 충고를 한 것도 나중에 그가 후회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였다.박민정이 사라진 근 5년 동안 유남준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유남준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질책하지 않았다.서다희가 떠난 걸 보고 유남준은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박민정은 마침 조하랑의 전화를 받아 그녀가 경찰서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민정아, 너 혹시 유남준 씨 찾으러 갔어?”어젯밤에 박민정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아 조하랑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응, 어제 이 일에 대해 얘기했거든.”박민정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혹시 너를 난처하게 만들었어?”조하랑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아니.”박민정은 실내로 들어온 유남준을 보며 말했다.“이따가 다시 얘기하자.”박민정이 전화를 끊었다.유남준이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누구에게서 걸려 온 전화야?”“내 친구, 하랑이에요.”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선 후 유남준을 보며 물었다.“윤우는 어디 있어요? 윤우가 몸이 약해서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하거든요.”“아이 옆에 의료진 붙여놨어.”그 말인즉 박민정은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윤우는 내 아들이에요, 꼭 윤우를 만나야겠어요!”유남준이 한 번 거절한 일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박민정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유남준이 자기 말을 믿지 않고 윤우와 친자 확인 검사를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 윤우는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거짓말이 모두 들통날 것이니 말이다.“얌전히 집에 있으면 아이를 만나게 해줄게. 그런데 아이에 관한 얘기를 제외하고 따로 나에게 할 말은 없어?”박민정이 의문스러운 얼굴을 보였다.“그동안 외국에서 뭐 했어? 왜 갑자기 돌아오게 된 거야?”유남준은 자선 경매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 때문에 당혹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박민정은 또 유
“유남준 씨가 윤우를 데리고 갔다고?”윤우의 일을 알게 된 조하랑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응, 남준 씨가 윤우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몰라.”박민정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그리고, 내가 기억 잃은 척하는 것도 알게 되었어. 앞으로 당분간 거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예찬이는 네가 잘 좀 돌봐줘, 부탁할게. 남준 씨가 예찬이까지 발견하면 안 돼.”“걱정하지 마. 예찬이를 잘 숨기고 있을게.”조하랑은 자신 있게 장담하더니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민정아, 혹시 유남준 씨가 지금 너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아니면 왜 꼭 너를 두원 별장에 두려는 걸까?”박민정은 흠칫하더니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부인했다.“이지원이 한 얘기 중에 이것만은 맞는 말이야.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 있어. 남준 씨는 어떻게 내가 몇 년 동안 사라졌다고 갑자기 내가 좋아졌겠어?”조하랑은 한참 생각하더니 짜증이 확 몰려왔다.“유남준이라는 사람, 완전히 쓰레기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구속한대?”박민정이 조하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됐어. 이 얘기는 그만해. 오늘 금요일이니까 이따가 같이 예찬이 데리러 가자.”예찬이의 얘기에 분위기가 한껏 밝아졌다.“좋아.”조하랑은 아직 이지원을 고소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경찰서에 갇힌 것 때문에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조하랑이 박민정에게 네티즌의 댓글을 보여줬는데 그들은 모두 이지원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박민정은 댓글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봤다.[사람이 유명해지니 별 이상한 사람들이 다 물어뜯네.][그러게, 정말 뻔뻔하다니까.][우리 지원이 언니는 유남준 대표님을 생각하면서 그 곡을 만들었단 말이야. 외국의 그 작곡가는 어떻게 곡을 창작했대?][완전 동의. 지원이 언니의 신곡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잖아. 그 작곡가가 그렇게 떳떳하다면 자기가 창작한 곡도 공개하든가.]박민정은 어금니를 깨물더니 입꼬리를 올렸다.“하랑아,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곳을 떠날 생각하지 마.”윤소현은 박민정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며 소리쳤고 박민정은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었다.“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무릎 꿇고 사과해!”윤소현은 단호하게 네 글자를 뱉었다.그녀는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 틈을 타 그녀를 망신시키고 고통받게 하고 싶었다.‘무릎을 꿇으라고?’박민정은 아이를 해친 적이 없기에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그건 못 해요.”윤소현은 다시 정수미와 고영란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보셨죠? 증거가 다 있는데도 저렇게 나오잖아요. 사과조차 하지 않겠다고요.”그녀는 이어 말했다.“이제 경찰서에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요.”윤소현은 휴대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었다.고영란과 정수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정말 박민정이 그렇게 어린아이를 해쳤다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을 터였다.그러나 박민정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고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다.아이의 상처는 모두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었고 박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만한 다른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그녀는 간단히 사건 경위를 설명한 뒤, 임시로 구금되었다.혼자 차가운 공간에 남겨진 박민정은 종종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 유남준이 그녀를 보석으로 풀어주었다.“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 유남준이 물었다.그는 본가로 돌아갔다가 박민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하인들에게 물어본 끝에 그녀가 병원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이후 고영란과 연락을 취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박민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도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내가 그 아이를 해쳤다고 믿어요?”유남준은 거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누가 뭐래도 네가 했을 리 없어. 넌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박민정은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