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오빠. 알겠어.”오늘부로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며, 서로의 인생에는 더 이상 서로가 없을 것이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찍 자.”“알겠어. 오빠도 잘 자.”“잘 자.”전화를 끊고 나서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갔다. 결혼기념일도 거의 끝나 갔다.그녀는 창밖의 작아지는 눈보라를 바라보면서 식탁의 물건들을 깨끗이 치우고 식판을 닦고는 일어나려 했다.“아이고, 왜 인사도 없이 가요?”오 씨 아주머니가 현관에 서 있는 조연아를 훑어보더니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왜요? 내가 나갈 때도 아주머니한테 보고해야 하나요?”조연아는 고개를 돌려 오 씨 아주머니를 응시했고,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지만, 말투는 오히려 독살스러웠다.오 씨 아주머니는 말문이 막혀서 큰 소리로 소리쳤다.“도련님은 그쪽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데, 들러붙다가 결국 이렇게 됐네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난 그쪽처럼 아부할 필요는 없어요.”조연아는 말을 끝내고 나서 별장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순간, 눈보라가 뒤섞여 그녀의 뺨을 때리는 듯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오 씨 아주머니가 푸념을 늘어놓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뻔뻔스럽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니...... 뭐가 대단하다고, 이혼한 여자가 잘난 체를 해? 중고 주제에 누가 좋아하겠어?”조연아는 눈썹을 찡그린 채 문손잡이를 움켜쥐고 문을 쾅 닫았다.그 굉음에 겁을 먹은 오 씨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뜨거운 눈물이 흘러 그녀의 하얀 두 뺨에 가득 맺혔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끄고 코트 깃에 얼굴을 파묻은 채 산 아래로 걸어갔다. 그녀는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한 채 뚜벅뚜벅 걸었다.......전체 도시가 폭설로 뒤덮였고, 멀리서 불길이 타올랐다. 민지훈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아마 불이 난 것 같아요. 건조하니까 화재가 자주 나요. 이달에만 몇 번 불이 났는지 몰라요.”기사가 대
민지훈은 미리 도착한 오민을 향해 소리쳤다.“이리로 가져 와!”“네.”오민은 땅에 버려진 종이상자를 민지훈한테 내밀었다.“열어.”오민이 종이상자를 여는 순간, 붉은색으로 물든 수의가 나타났고 또 작은 인형이 있었다.민지아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고, 즉시 민지훈의 뒤에 숨어서 덜덜 떨며 말했다.“이 작은 인형에 엄마 이름이 있어. 엄마를 저주하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나는 냄새가 너무 익숙해.”민지훈이 오민을 향해 눈짓을 보냈고, 오민은 즉시 옷에서 향기가 나는지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확실히 향기가 납니다.”그러자 민지아가 재빨리 외쳤다.“맞아! 이건 연아 언니 담배 냄새야! 오빠한테서도 똑같은 냄새가 나. 오빠랑 언니 같이 있었던 거야?”민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옷을 집어 들었고, 확실히 조연아의 몸에서 나던 냄새와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범인이 연아 언니 아니야? 엄마를 미워해서 그럴 수도 있잖아. 엄마 때문에 연아 언니 애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납치한 거 아니냐고! 당장 연아 언니 찾아갈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따질 거라고! 이건 범죄잖아!”민지아는 이성을 잃은 채 조연아한테 가려고 집을 나서려 했다.“막아!”민지훈의 명령에 오민은 단숨에 민지아의 앞길을 막았다."오빠, 막지 마. 꼭 물어봐야 해. 도대체 엄마를 어디에 숨겼는지, 왜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한 건지! 우리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야 성에 차는지! 오빠, 내가 친딸은 아니지만 엄마는 나를 친딸처럼 대해줬어. 우리한테 엄마는 한 명뿐이잖아! 잘못되면 안 된다고!”민지아는 서럽게 통곡했다.“너 지금 이성을 잃었어. 그만 해.”“오빠, 지금 그 언니 편을 드는 거야? 연아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어? 오빠는 살벌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언니를 싫어했잖아! 지금 또 왜 감싸고 도는데?”민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민지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내가 연아를 감싸는 말을 한 적 있어?”그의 단호한 말투에 민지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휴대전화 반대편에서 들려왔다.“도련님, 날이 밝기도 전에 눈보라를 맞으면서 가셨어요. 밖에 눈이 많이 와서 산길을 내려가기 불편하실 것 같아서 좀 더 머무르라고 했는데도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다급하게 가시더라고요. 오히려 상관하지 말라고 화를 내셨어요.”민지훈이 매섭게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민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정말 그 언니랑 같이 있었던 거야?”민지아는 실눈을 뜨며 낮은 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 언니랑 정말 잘되고 있는 거야? 그 언니 분명 일부러 판을 짜놓은 걸 거야. 오빠랑 잘 되면 오빠가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알리바이가 확실해지니까 말이야! 엄마를 납치한 사람이 잡혀도 그 언니가 돈만 들이밀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악독할 수가 있어? 우리 엄마 어떡해? 지금 무사하기는 한 거겠지?”곧바로 굉음과 함께 민지훈은 휴대전화를 바닥에 힘껏 내리쳤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의 표정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과도 같았다.“조연아의 행적을 알아야겠어!”오민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알겠습니다!”......이른 아침,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연아는 홀로 쌓인 눈을 밟으며 조인 주업까지 갔다.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조연아가 고개를 들자, 눈을 쓸고 있는 조연준을 발견하고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연준이니?”“누나! 지금 오는 거야?”조연준은 그녀가 고개를 들자 곧 빗자루를 내려놓았고, 재빨리 자동 철문을 열고는 다시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누나, 오늘 아침에 퇴원했잖아. 여섯 시밖에 안 됐는데......”“어제 조기 퇴원했어.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너 얼굴 좀 보려고 왔어.”“나 괜찮아. 튼튼해! 어제 눈 많이 와서 직원들이랑 눈 쓸었어. 운동도 하고 좋지.”조연준은 말을 마친 후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아, 맞다. 누나, 주혁이 형 말로는 누나 곧 떠
“누난 너 믿어.”속없이 미소 짓는 조연아와 달리 연준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누나, 조심해. 그쪽 주주들도 다들 누나 지분만 노리고 있을 거야.”어리게만 생각했던 남동생의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새어 나오는 조연아였다.“남매끼리 아침부터 무슨 작당모의실까?”“형, 안녕. 누나 데리러 온 거야?”고주혁을 발견한 조연준이 환하게 웃었다.“응, 8시 항공편이라 지금 떠나야 할 것 같아.”“형, 앞으로 우리 누나 잘 부탁해.”진지한 얼굴로 부탁하는 조연준의 모습에 고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형 못 믿어?”“믿지. 내가 형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아, 그리고 우리 누나 이제 솔로인 거 알지?”“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건방지게 어디서 형한테 훈계질이야.”조연준의 이마를 툭 건드린 고주혁이 조연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이제 가야겠다.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 짐은 더 안 챙길 거야?”달랑 핸드백 하나를 챙긴 조연아를 훑어보던 고주혁이 물었다.“응.”어차피 조연아의 물건들 중 대부분은 민지훈의 집에 있으니 이미 전부 내다 버렸을 게 분명했고 설령 그대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굳이 챙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새로운 곳에서 완벽한 새 물건들과 함께 새 시작을 하고 싶었으니까.“그래. 양주에 가서 전부 다 새 걸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오빠도 알잖아. 나 이제 빈털터리인 거.”조연아는 괜히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오빠가 다 새 걸로 사줄게. FW시즌 신상으로, 오케이?”“풉.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이렇게 환하게 웃는 조연아를 보는 게 얼마 만인지.한때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달콤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고주혁의 입가에도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이제 가자.”차에 탄 조연아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액정에 찍힌 부재중 전화번호를 만지작거리던 조연아는 고개를 저었다.‘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했잖아.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이젠 정말 끝
“민 대표님, 그만하시죠.”고주혁이 민지훈 앞을 막아섰다.“그쪽이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건방지게...”발걸음을 멈춘 민지훈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그와 동시에 롤스로이스 뒤를 따르던 지프차에서 장명 네댓명이 내리더니 고주혁과 차량 주위를 둘러쌌다.바로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한 고주혁이 매서운 눈으로 민지훈을 노려보았다.“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당신 이미 연아랑 이혼까지 했잖아요.”하지만 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민하준이 조수석 문을 벌컥 열었다.“네가 알아서 내릴래 아니면 내가 끌어내릴까?”어젯밤 친절하던 민지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차가운 목소리에 조연아의 가슴이 아릿하게 저렸다.‘역시... 그날은 억지로 내 장단에 맞춰준 거였나...’찬 바람이 차로 흘러들고 정신이 번쩍 든 조연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여기서 오빠까지 끌어들일 순 없어.’“연아야, 내가 차에 있으라고 했잖아.”당황한 고주혁이 그녀에게 다시 다가가려 했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민지훈의 경호원들을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오빠, 괜찮아.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먼저 공항으로 가.”조연아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주혁도 나름 능력이 뛰어난 엘리트 변호사였지만 민하그룹 민지훈 대표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의 말 한 마디면 그 어떤 로펌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 그녀 때문에 은인같은 고주혁의 커리어에 오점을 남길 순 없었다.“연아야...”“괜찮아. 조금 있다가 봐.”“얘기 끝났어?”터벅터벅 다가온 민지훈은 거칠게 조연아의 손목을 낚아채곤 돌아섰다.“민지훈! 이거 놔!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조연아의 외침에도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던 민지훈은 그녀를 억지로 차 안으로 쑤셔 넣었다.“탁.”“지금 이게 뭐... 읍...!”차문이 닫히고 좌석에 드러눕다시피 한 조연아의 불만 섞인 목소리는 거친 키스에 잠식되었다.두 손으로 가슴을 내리치는 조연아의 반항이 우습다는 듯 민지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조연아의 턱을 꽉 부여잡았다.“납치범 주제에 어딜 도망치려고.”턱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보다 황당한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납치범?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민지훈은 대답 대신 상자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열린 상자 틈 사이로 붉게 물든 인형 하나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이... 이게 뭐야?”“끝까지 발뺌을 하시겠다?”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조연아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떨리는 손으로 인형을 집어 든 조연아는 다시 기겁하며 인형을 던져버렸다.핏빛 액체로 물든 인형의 옷에 “송진희” 세 글자가 기괴하게 수놓아져 있었다.“설마... 내가 어머님을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 어제 저녁 내내 당신이랑 같이 있었잖아. 당신도 나랑 같이 있다가 아가씨 전화 받고 어머님이 납치됐다는 걸 알게 된 거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정말 깜박 속을 뻔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내 곁에 있으면 알리바이를 조작할 수 있을 것 같았어?”민지훈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하... 어떻게 그런 생각을.”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었기에, 마지막은 좋은 추억으로 장식하고 싶어서, 그래서 추운 겨울밤 별장까지 찾아간 거였는데... ‘뭐? 알리바이 조작?’하지만 더 기가 막히는 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잔인한 남자를 여전히 사랑하는 자기 자신이었다.눈물을 머금은 조연아가 고개를 저었다.“그래, 나 어머님 싫어해. 아니, 끔찍해. 우리 아기 어머님 때문에 유산된 거니까. 나도 어머님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까. 그래도 나 복수 같은 거 할 생각 안 했어. 당신 어머니니까. 엄마 잃은 자식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엄마 없이 살아가는 게 얼마나 외롭고 슬픈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당신은... 당신은 그런 고통 모르고 살길 바랐으니까...”하지만 진심 어린 고백에 돌아온 건 민지훈의 비웃음뿐이었다.“조연아, 넌 항상 이런 식이야. 세상 가련한 척 날 바라보
“그래.”차갑지만 단호한 한마디가 비수처럼 조연아의 가슴에 꽂혔다.‘조연아, 잘 봐. 네가 사랑하는 이 남자를. 저 남자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상처뿐이야. 기대를 품었다 실망하고 절망하고... 천번, 만번도 겪은 일이면서 왜... 왜 자꾸만 기대하는 건데. 도대체 무슨 답을 바라는 거야... 네가 원하는 말, 절대 해줄 리가 없다는 걸 알잖아...’“하긴, 당신 눈에 난 항상 그런 사람이었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독한 여자. 그게 나잖아? 이해해. 날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서 날 의심하는 거겠지.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말 믿어준 적 없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나 혼자 착각하고 나 혼자 상처받고 그런 거였지 뭐.”“됐고. 네가 결백하다는 증거 찾기 전까지 어디든 못 가니까 그런 줄 알아.”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눈빛에도 조연아는 겁먹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결백한 그녀였으니까.“증거 있어? 내가 납치를 사주했다는 증거 있냐고? 그딴 얄팍한 심증으로 날 가둬두겠다고? 당신이 뭔데!”“내가 조인주업 최대주주니까.”민지훈이 파일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양조장 개조 프로젝트”, 조연아는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파일 커버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았다.“미쳤어? 양조장을 리조트로 개조한다고? 조인주업은 조인그룹에서 가장 큰 수익을 내고 있는 계열사야. 이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뭔데!”아무리 그녀가 싫다지만 뼛속까지 비즈니스맨인 민지훈이 이런 멍청한 결정을 내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왜? 그 양조장이 소중하긴 한가 보지?”조인주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전화위복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던 양조장, 추연이 벽돌 하나하나까지 골라가며 세운 양조장이니 그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네가 뭔데 이딴 종이 쪼가리 하나로 거길 엎어버려.”입술을 꽉 깨문 조연아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런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
당황한 조연아가 옷깃을 여며쥐려 하지만 힘으로 민지훈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이거 놔...”그녀의 의미 없는 반항은 또다시 거친 키스와 함께 자취없이 사라졌다...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목적지에 도착한 건지 차량이 멈추고 운전기사는 눈치껏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정장 재킷으로 반라상태인 조연아를 감싼 민지훈이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여긴 어디지...?’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의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거세게 흔들렸다.아직 대외적으로 분양을 시작하지도 않은 민하그룹 산하의 별장, 민하준의 의도를 알아챈 조연아가 그의 품속에서 버둥거렸다.“날 여기 가둬둘 셈이야?”“당연한 거 아니야? 용의자를 도망치게 둘 순 없으니까.”별장에 들어선 민하준은 조연아를 짐짝 부리듯 침대에 휙 던졌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가둬! 이건 범죄야!”“네게 선택할 권리 따윈 없어.”단번에 조연아를 제압한 민지훈이 오싹한 목소리로 말했다.“양조장도 네 동생도 지키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차가운 경고를 날리곤 방을 나서려던 민지훈이 발걸음을 멈추었다.“전에 말이야... 네가 했던 그 말 사실이야?”“무... 무슨 말?”조연아가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내가 너랑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는 그 말.”“뭔, 뭔가 기억난 거야?”민지훈의 질문에 벌떡 일어난 조연아가 다급하게 물었다.“아니.”차가운 대답만을 남긴 민지훈이 돌아서고 조연아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몸에 걸친 정장 재킷에서 민지훈의 향수 냄새만이 은은하게 퍼지며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점점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조연아의 마음은 다시 차가운 지옥으로 추락했다. 난방이 잘 되어 있는 방임에도 차갑게 식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혼자 남겨진 조연아는 바로 창가로 달려갔다.임천시에서 가장 끝내주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별장이었지만 아름다운 풍경 따윈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탄탄한 유리창은 아무리 봐도 그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