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아의 부탁에 장연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건...”“제발요. 한 통이면 되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간절한 그녀의 표정에 주위를 살피던 장연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가씨, 저도 아가씨를 도와드리고 싶지만, 이 별장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요. 몰래 통화하시는 건 불가능합니다.”그녀의 말에 역시나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가 피식 웃었다.‘하긴... 아줌마 한 명 달랑 남겨두고 갈 리가 없지.’“도청도 되고 있는 건가요?”깊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한 장연자가 국그릇을 그녀 앞으로 살짝 밀어주었다.“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혼자 남겨진 조연아는 젓가락을 더 세게 꽉 움켜쥐었다.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단절된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송진희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것뿐이었다.‘그런데 왜...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애초에 어머님이 왜 납치된 거지?’식사를 마치고 다시 2층 방으로 돌아온 조연아는 커다란 침대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제발... 제발 하루빨리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그 뒤로 며칠이 흘렀을까? 그동안 민지훈은 다시 별장을 찾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혔다가 식사 시간 때만 잠깐 거실로 나오는 게 전부인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말 그대로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송진희는 무사한 걸까? 언제쯤이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끝없이 그녀를 괴롭혔다....한편, 민하준의 본가.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민지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오빠! 엄마야!”민지아가 건넨 휴대폰을 받아 든 민지훈이 영상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다음 순간, 입에 테이프를 붙인 채 읍읍 소리만 내고 있는 송진희의 모습이 액정에 나타났다.“엄마!”입을 틀어막은 민지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엄마... 엄마 괜찮아? 걱... 걱정하지 마. 우리가... 우리가 엄마 구해줄게.”“민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동안 사모님 잘 먹고 잘 주무
“끼익...”굉음과 함께 민지훈의 롤스로이스가 저택을 나선다.한편, 조연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녁 식사 시간대에 맞추어 주방으로 내려갔다.식사를 마친 그녀가 다시 2층 방으로 올라가려던 순간,쨍그랑!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별장의 적막을 깨트렸다.“어머, 도대체 정신줄을 어디 두고 있는 거야. 아가씨, 많이 놀라셨죠. 제가 바로 치울게요.”허둥지둥 그릇 조각들을 치우는 아주머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조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주머니. 손 조심하세요.”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조연아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조연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이제 겨우 7시인데 왜 이렇게 졸린 거지...’침대에 누운 조연아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쿵쾅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거칠게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당겼다.“조연아, 말해. 어머니 어디에 숨겼어.”비몽사몽한 상태로 눈을 뜬 조연아는 민지훈이 던진 휴대폰 속 영상을 확인했다.“조연아, 그 계집애 짓이야! 그 계집애가... 읍읍...”영상속 걸상에 묶인 송진희의 표독스러운 외침이 끝없이 반복 재생되었다.“그... 그럴 리가 없어...”민지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조연아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아직도 거짓말이야?”“정말이야. 내가 한 거 아니야. 제발 믿어, 컥!”하지만 민지훈의 큰 손바닥이 가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힘없는 변명은 결국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속으로 되삼킬 수밖에 없었다.“말해! 어머니 지금 어디 있냐고!”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웠지만 조연아는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내... 내가 한 거 아니라고.”질끈 감은 두 눈에서 절망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왜... 왜 내 말은 믿어주지 않는 건데. 왜... 정말 지친다 이젠...’한편, 분노로 달아오른 눈동자에 벌건 손자국이 남은 흰 여자의 목덜미가 들어온 순간, 민지훈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왜...
너무나 사랑하지만, 또 그만큼 미운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그녀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춘 민지훈이 입을 열었다.“그래, 차라리 날 미워해.”“쾅!”민지훈이 저택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고 조연아는 결국 참고 참았던 울음을 뱉어냈다.“흑흑...”11년간 이어온 사랑, 비참하게 끝나긴 했지만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었으니, 최선을 다해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야...’창밖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조연아를 비추고 쓸쓸한 자기 그림자를 바라보던 조연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이 왠지 그녀의 처지인 것만 같아 가슴이 시려왔다.‘저 먹구름 뒤에는 분명 밝게 빛나는 별이 있을 텐데... 한때 내 사랑도 분명 반짝반짝 빛났었는데...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냄새지?’고개를 돌려보니 방문 틈 사이로 짙은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불?’힘 풀린 다리를 겨우 움직인 그녀가 문을 연 순간, 훅 밀려오는 열기에 조연아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다.이미 1층은 화염으로 잔뜩 뒤덮인 상태.‘아니, 갑자기 왜 불이...’“쿨럭쿨럭.”매캐한 연기에 당황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조연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대론 정말 죽을지도 몰라. 어떡하지? 휴대폰도 없고...’순간, 별장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장씨 아주머니의 말이 떠오른 조연아는 천장 구석에 설치된 CCTV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민지훈! 지금 나 보고 있어? 별장에 불이 났어! 쿨럭쿨럭!”“민지훈! 나 몸에 힘이 안 들어가... 나 왜 이러지...”“살... 살려줘...”역한 연기에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버렸지만 조연아의 절망어린 구조 요청은 계속되었다.한편, 1층을 태운 불길이 어느새 계단을 타고
이런 모습인 민지훈은 처음이었다.“민…민지훈”조연아는 눈을 붉힌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민지훈은 항상 이런 식이다. 번마다 잘해줘서 없던 희망도 다시 가지게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희망조차도 주지 않았다.민지훈은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몸에 힘이 빠진 그녀를 자기 품속으로 넣고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아버렸다.“괜찮아?”조연아는 그의 재킷을 꼭 잡은 채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로 젖어있었다.어쩔 줄 몰라 하는 조연아를 보고 민지훈은 심란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그녀를 달래줬다.“다친 곳은 없어?”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걸을 수는 있겠어?”불이 서쪽까지 퍼지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 조연우는 민지훈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조금 풀리긴 했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태다.“나 괜찮아.”울먹이면서 그녀가 대답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타났기에 그나마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따라와.”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코를 막은 채 서쪽의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타오르는 불길은 이미 동쪽의 별장을 집어삼켰고 서쪽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별장의 출구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버렸기에 그들이 여기를 빠져나가려면 객실을 뚫고 깨져버린 창가로 뛰쳐나가야 한다.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맹수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듯했다. 뜨거운 불길에 온몸이 데는 듯했고 연기에 숨이 쉬어지지 않는듯했다.갑자기 민지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품에 안긴 그녀를 향해 물어왔다.“무서워?”기회는 한 번뿐이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어질 것이다.연아는 아무 대답도 없는 채 그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의 의문을 꺼냈다.“내가 여기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거야?”민지훈은 표정도 없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연아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말했다.“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이번엔 널 평생 후회하게 할 거야.“따라와!”민지훈은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서쪽의 창가는 유일한 탈출 기회다. 객실만 지나갈 수 있다면 이곳에서 떠날 수 있다.그녀는 힘을 다해서 민지훈의 손을 잡고 그의 발걸음을 따라 빠른 속도로 객실을 향해 달려갔다.불길은 위로 향해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곧 객실을 지나가려던 찰나, 아슬하게 달려있던 샹들리에가 높은 온도 때문에 터져버리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순식간에 조연아는 그를 앞으로 밀쳐냈다.“쾅—”샹들리에는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버리면서 조연아의 길을 막아버렸다.찰나에 불길이 또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그녀는 창가 밖으로 민지훈을 밀쳐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갇혀버린 조연아를 바라보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조연아!”민지훈은 다시 그녀를 구하려고 했지만, 옆에 서 있던 오민이 극구 말렸다.“도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이젠 구할 기회가 없어요!”불길이 점점 세차게 타오르고 있고 연아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을 거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빨간 불길 사이로 민지훈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제일 잔인하면서도 제일 따뜻한 말을 하고 있었다.“원망하고 사랑해.”짧고 간단한 말이지만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오빠, 나 이번엔 진짜 떠나가는 거야.몇초도 지나지 않아 거센 불길이 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이젠 진짜 삶과 죽음으로 갈려진 둘이다.“팍—”기둥이 떨어지는 소리로 다시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불길이 그녀를 완전히 삼켜버렸다.“안돼! 조연아!!”찰나에 기억이 돌아왔다. 버려진 창고, 하늘을 찌르는 불길, 그리고 오빠라고 부르던 그 여자애. 마치 그녀가 그의 귓가에서 말 하는듯하였다.--오빠, 커서 꼭 나랑 결혼하는 거다. 알겠지?--그래. 꼭 결혼하는 거야.--그럼 약속하는 거다. 변하지 않기!“ 그래. 꼭 결혼하는 거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계속 내가 생각나길 기다리는
오민은 이성을 잃은 고주혁한테로 달려가 그를 말렸다.“주혁씨, 저희 도련님도 마음이 안 좋으십니다! 도련님도 아가씨를 구하려 했습니다!”“하…”고주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 새끼가 연아를 구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아를 죽이려고 한 건 아니고?”그는 민지훈은 가리키면서 욕해왔다.“ 연아는 네가 몇 년간 의심하고 모질게 군 걸 참아오면서 지냈어. 너희 민씨네 집안도 연아를 괴롭혔잖아! 너희 가족 모두가 연아한테 빚진 거야. 그중에서도 너가 제일 많이!”“너희 집안을 살려준 그 계약, 연아가 끊임없이 어르신네 집으로 찾아가서 따온 건 알아?”고주혁의 눈가는 이미 붉어졌다.“뭐라 그랬어?”민지훈은 화를 내는 고주혁을 보더니 일어나 그를 향해 걸어갔다.그의 눈동자는 핏기로 가득 찼고 미친 듯이 고주혁을 향해 소리를 쳤다.“ 방금 한 말 다시 해.”고주혁은 피식 웃었다.“ 뭘 더 말해. 모든 사람이 연아가 파일을 훔쳤다고 했을 때 아무리 해석해도 믿어주지 않았잖아! 민지훈, 넌 연아가 너 몰래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아? 걔가 준 사랑을 넌 영원히 갚지 못해.”민하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고주혁이 화를 내고 있는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마치 혼을 잃은 것처럼.“민지훈 도련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연아를 데리고 집에 갈 겁니다.”고주혁은 자기를 말리고 있는 오민을 밀쳐내고 나서 바닥에 꿇은 채로 울고 있는 조연준을 일으켜 세웠다.“연아 데리고 갈 생각하지 마! 데려가고 싶다면 날 죽여.”고주혁은 발걸음을 멈추고 화가 난 눈빛으로 민지훈을 노려보았다.“민지훈. 연아가 목숨까지 너한테 바쳤는데 대체 왜 끝까지 놔주지 않는 거야?!”“ 걘 내 사람이야.”내 사람이니까 그 누구도 데리고 갈 수 없어.세찬 바람의 그의 머리는 이미 엉망이 되었고 잘생긴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마음을 이미 불길로 활활 타오른 나머지 폐허로 변해버렸다.어둠 속에서 자라왔던 그한테 있어서 조연아는
떨리는 손 때문에 휴대폰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이제 오빠가 돌아왔어.”민지훈은 다시 답장 없을 그 번호에 문자를 보냈다.‘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은 거야...’바람 때문인지 유난히 활활 타오르던 불길은 날이 밝아서야 겨우 잦아들었다.“찾았습니까?”민지훈이 오민에게 물었다.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애써 참아가며 그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찾았습니까?”“화재 시발점은 주방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화재 원인은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연아 찾았냐고요.”순간 민지훈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이에 오민이 고개를 숙였다.“3시간 넘게 이어지는 화재로 별장 전체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골이라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아예 못 찾을 수도 있고요...”“찾으세요. 시간은 얼마든지 걸려도 좋으니까. 뼛조각 하나라도 좋으니까 무조건 찾으라고요!”“네.”민지훈이 넋을 잃은 사람처럼 폐허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이 전화가 그녀에게서 온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저 헛된 희망일 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역시나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건 민지아의 목소리였다.“오빠, 경찰쪽에서 연락 왔는데 엄마 찾았대. 엄마 괜찮대!”“그래.”“오빠 지금 어디 있어?”그녀의 질문에 민지훈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꽤 큰 규모의 화재였지만 민지훈이 힘을 쓴 덕에 조연아의 죽음은 완전히 묻혀버렸다.매정한 불길은 결국 모든 걸 삼켜버렸고 조연아의 유골을 찾는 데는 결국 실패, 조연아의 장례는 결국 빈 관 상태로 치뤄졌다.결혼기념일 다음 날이 기일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한편, 조인주업 사무실.분노에 가득 찬 고주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연준아, 너 어떻게... 장례를 민하그룹 쪽에 완전에 맡길 수 있어. 그 사람들이 뭔데 연아 장례를 치르는데!”“누나의 뜻이었어.”“뭐... 뭐라고?”고주혁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죽어서도 살아서도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민지훈의
민지훈이 조연아에게 선물했던 유일한 물건, 그런데 그것마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있나 싶었다.“고마워요.”민지훈은 조연아의 영정사진 앞에 조심스레 오르골을 내려놓았다.오르골이 열리는 순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오로라가 찍한 사진 몇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리고 언젠가 조연아가 그에게 했던 말이 민지훈의 머릿속을 맴돌았다.“오로라를 보면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던데. 그거 다 거짓말이더라. 백년해로 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우리 결국 이혼했잖아.”씁쓸한 미소와 함께 사진을 다시 오르골에 넣으려던 그때, 사진 뒷면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문구.“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최고의 행운을 너에게 줄게. 민지훈, 사랑해.혼자 보내는 신혼여행, 그 먼 핀란드 땅에서 덩그러니 남겨져 그가 원망스러울 법도 했을 텐데 오로라를 보며 떠올린 게 그의 얼굴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어떻게든 그녀의 온기가 느껴질까 오로그로을 꼭 끌어안은 민지훈의 시선이 환하게 웃고 있는 조연아의 사진으로 향했다.“사랑해, 그런데 그만큼 네가 너무 미워.”“평생 후회속에서 살아가야겠지?”민지훈이 나지막히 속삭였다.“처남 말이 맞아. 설령 네가 다시 살아돌아온다 해도 난 날 용서할 수 없을 거야.”창밖에서 불어오르는 바람이 민지훈의 눈가에 묻은 물기를 날려버렸지만 고통으로 잠긴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평생... 네게 사죄하면서 살게.”...1년 뒤, 임천시.최근, 조인주업의 내부 권력 암투에 대한 뉴스가 매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기자회견장,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백장미는 눈물을 흘리고 있고 조학찬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백장미 이사님, 이사님 말대로라면 조연우 대표가 조인주업을 물려받은 뒤로 독단적인 행보를 이어왔고 모든 주주회의에서도 두 분을 완전히 배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온갖 술수로 두 분의 지분을 노리고 있다는 거죠?”얼굴을 가득 묻은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