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익...”굉음과 함께 민지훈의 롤스로이스가 저택을 나선다.한편, 조연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녁 식사 시간대에 맞추어 주방으로 내려갔다.식사를 마친 그녀가 다시 2층 방으로 올라가려던 순간,쨍그랑!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별장의 적막을 깨트렸다.“어머, 도대체 정신줄을 어디 두고 있는 거야. 아가씨, 많이 놀라셨죠. 제가 바로 치울게요.”허둥지둥 그릇 조각들을 치우는 아주머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조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주머니. 손 조심하세요.”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조연아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조연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이제 겨우 7시인데 왜 이렇게 졸린 거지...’침대에 누운 조연아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쿵쾅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거칠게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당겼다.“조연아, 말해. 어머니 어디에 숨겼어.”비몽사몽한 상태로 눈을 뜬 조연아는 민지훈이 던진 휴대폰 속 영상을 확인했다.“조연아, 그 계집애 짓이야! 그 계집애가... 읍읍...”영상속 걸상에 묶인 송진희의 표독스러운 외침이 끝없이 반복 재생되었다.“그... 그럴 리가 없어...”민지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조연아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아직도 거짓말이야?”“정말이야. 내가 한 거 아니야. 제발 믿어, 컥!”하지만 민지훈의 큰 손바닥이 가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힘없는 변명은 결국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속으로 되삼킬 수밖에 없었다.“말해! 어머니 지금 어디 있냐고!”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웠지만 조연아는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내... 내가 한 거 아니라고.”질끈 감은 두 눈에서 절망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왜... 왜 내 말은 믿어주지 않는 건데. 왜... 정말 지친다 이젠...’한편, 분노로 달아오른 눈동자에 벌건 손자국이 남은 흰 여자의 목덜미가 들어온 순간, 민지훈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왜...
너무나 사랑하지만, 또 그만큼 미운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그녀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춘 민지훈이 입을 열었다.“그래, 차라리 날 미워해.”“쾅!”민지훈이 저택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고 조연아는 결국 참고 참았던 울음을 뱉어냈다.“흑흑...”11년간 이어온 사랑, 비참하게 끝나긴 했지만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었으니, 최선을 다해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야...’창밖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조연아를 비추고 쓸쓸한 자기 그림자를 바라보던 조연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이 왠지 그녀의 처지인 것만 같아 가슴이 시려왔다.‘저 먹구름 뒤에는 분명 밝게 빛나는 별이 있을 텐데... 한때 내 사랑도 분명 반짝반짝 빛났었는데...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냄새지?’고개를 돌려보니 방문 틈 사이로 짙은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불?’힘 풀린 다리를 겨우 움직인 그녀가 문을 연 순간, 훅 밀려오는 열기에 조연아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다.이미 1층은 화염으로 잔뜩 뒤덮인 상태.‘아니, 갑자기 왜 불이...’“쿨럭쿨럭.”매캐한 연기에 당황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조연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대론 정말 죽을지도 몰라. 어떡하지? 휴대폰도 없고...’순간, 별장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장씨 아주머니의 말이 떠오른 조연아는 천장 구석에 설치된 CCTV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민지훈! 지금 나 보고 있어? 별장에 불이 났어! 쿨럭쿨럭!”“민지훈! 나 몸에 힘이 안 들어가... 나 왜 이러지...”“살... 살려줘...”역한 연기에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버렸지만 조연아의 절망어린 구조 요청은 계속되었다.한편, 1층을 태운 불길이 어느새 계단을 타고
이런 모습인 민지훈은 처음이었다.“민…민지훈”조연아는 눈을 붉힌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민지훈은 항상 이런 식이다. 번마다 잘해줘서 없던 희망도 다시 가지게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희망조차도 주지 않았다.민지훈은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몸에 힘이 빠진 그녀를 자기 품속으로 넣고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아버렸다.“괜찮아?”조연아는 그의 재킷을 꼭 잡은 채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로 젖어있었다.어쩔 줄 몰라 하는 조연아를 보고 민지훈은 심란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그녀를 달래줬다.“다친 곳은 없어?”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걸을 수는 있겠어?”불이 서쪽까지 퍼지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 조연우는 민지훈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조금 풀리긴 했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태다.“나 괜찮아.”울먹이면서 그녀가 대답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타났기에 그나마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따라와.”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코를 막은 채 서쪽의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타오르는 불길은 이미 동쪽의 별장을 집어삼켰고 서쪽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별장의 출구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버렸기에 그들이 여기를 빠져나가려면 객실을 뚫고 깨져버린 창가로 뛰쳐나가야 한다.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맹수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듯했다. 뜨거운 불길에 온몸이 데는 듯했고 연기에 숨이 쉬어지지 않는듯했다.갑자기 민지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품에 안긴 그녀를 향해 물어왔다.“무서워?”기회는 한 번뿐이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어질 것이다.연아는 아무 대답도 없는 채 그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의 의문을 꺼냈다.“내가 여기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거야?”민지훈은 표정도 없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연아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말했다.“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이번엔 널 평생 후회하게 할 거야.“따라와!”민지훈은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서쪽의 창가는 유일한 탈출 기회다. 객실만 지나갈 수 있다면 이곳에서 떠날 수 있다.그녀는 힘을 다해서 민지훈의 손을 잡고 그의 발걸음을 따라 빠른 속도로 객실을 향해 달려갔다.불길은 위로 향해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곧 객실을 지나가려던 찰나, 아슬하게 달려있던 샹들리에가 높은 온도 때문에 터져버리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순식간에 조연아는 그를 앞으로 밀쳐냈다.“쾅—”샹들리에는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버리면서 조연아의 길을 막아버렸다.찰나에 불길이 또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그녀는 창가 밖으로 민지훈을 밀쳐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갇혀버린 조연아를 바라보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조연아!”민지훈은 다시 그녀를 구하려고 했지만, 옆에 서 있던 오민이 극구 말렸다.“도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이젠 구할 기회가 없어요!”불길이 점점 세차게 타오르고 있고 연아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을 거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빨간 불길 사이로 민지훈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제일 잔인하면서도 제일 따뜻한 말을 하고 있었다.“원망하고 사랑해.”짧고 간단한 말이지만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오빠, 나 이번엔 진짜 떠나가는 거야.몇초도 지나지 않아 거센 불길이 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이젠 진짜 삶과 죽음으로 갈려진 둘이다.“팍—”기둥이 떨어지는 소리로 다시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불길이 그녀를 완전히 삼켜버렸다.“안돼! 조연아!!”찰나에 기억이 돌아왔다. 버려진 창고, 하늘을 찌르는 불길, 그리고 오빠라고 부르던 그 여자애. 마치 그녀가 그의 귓가에서 말 하는듯하였다.--오빠, 커서 꼭 나랑 결혼하는 거다. 알겠지?--그래. 꼭 결혼하는 거야.--그럼 약속하는 거다. 변하지 않기!“ 그래. 꼭 결혼하는 거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계속 내가 생각나길 기다리는
오민은 이성을 잃은 고주혁한테로 달려가 그를 말렸다.“주혁씨, 저희 도련님도 마음이 안 좋으십니다! 도련님도 아가씨를 구하려 했습니다!”“하…”고주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 새끼가 연아를 구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아를 죽이려고 한 건 아니고?”그는 민지훈은 가리키면서 욕해왔다.“ 연아는 네가 몇 년간 의심하고 모질게 군 걸 참아오면서 지냈어. 너희 민씨네 집안도 연아를 괴롭혔잖아! 너희 가족 모두가 연아한테 빚진 거야. 그중에서도 너가 제일 많이!”“너희 집안을 살려준 그 계약, 연아가 끊임없이 어르신네 집으로 찾아가서 따온 건 알아?”고주혁의 눈가는 이미 붉어졌다.“뭐라 그랬어?”민지훈은 화를 내는 고주혁을 보더니 일어나 그를 향해 걸어갔다.그의 눈동자는 핏기로 가득 찼고 미친 듯이 고주혁을 향해 소리를 쳤다.“ 방금 한 말 다시 해.”고주혁은 피식 웃었다.“ 뭘 더 말해. 모든 사람이 연아가 파일을 훔쳤다고 했을 때 아무리 해석해도 믿어주지 않았잖아! 민지훈, 넌 연아가 너 몰래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아? 걔가 준 사랑을 넌 영원히 갚지 못해.”민하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고주혁이 화를 내고 있는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마치 혼을 잃은 것처럼.“민지훈 도련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연아를 데리고 집에 갈 겁니다.”고주혁은 자기를 말리고 있는 오민을 밀쳐내고 나서 바닥에 꿇은 채로 울고 있는 조연준을 일으켜 세웠다.“연아 데리고 갈 생각하지 마! 데려가고 싶다면 날 죽여.”고주혁은 발걸음을 멈추고 화가 난 눈빛으로 민지훈을 노려보았다.“민지훈. 연아가 목숨까지 너한테 바쳤는데 대체 왜 끝까지 놔주지 않는 거야?!”“ 걘 내 사람이야.”내 사람이니까 그 누구도 데리고 갈 수 없어.세찬 바람의 그의 머리는 이미 엉망이 되었고 잘생긴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마음을 이미 불길로 활활 타오른 나머지 폐허로 변해버렸다.어둠 속에서 자라왔던 그한테 있어서 조연아는
떨리는 손 때문에 휴대폰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이제 오빠가 돌아왔어.”민지훈은 다시 답장 없을 그 번호에 문자를 보냈다.‘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은 거야...’바람 때문인지 유난히 활활 타오르던 불길은 날이 밝아서야 겨우 잦아들었다.“찾았습니까?”민지훈이 오민에게 물었다.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애써 참아가며 그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찾았습니까?”“화재 시발점은 주방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화재 원인은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연아 찾았냐고요.”순간 민지훈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이에 오민이 고개를 숙였다.“3시간 넘게 이어지는 화재로 별장 전체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골이라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아예 못 찾을 수도 있고요...”“찾으세요. 시간은 얼마든지 걸려도 좋으니까. 뼛조각 하나라도 좋으니까 무조건 찾으라고요!”“네.”민지훈이 넋을 잃은 사람처럼 폐허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이 전화가 그녀에게서 온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저 헛된 희망일 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역시나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건 민지아의 목소리였다.“오빠, 경찰쪽에서 연락 왔는데 엄마 찾았대. 엄마 괜찮대!”“그래.”“오빠 지금 어디 있어?”그녀의 질문에 민지훈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꽤 큰 규모의 화재였지만 민지훈이 힘을 쓴 덕에 조연아의 죽음은 완전히 묻혀버렸다.매정한 불길은 결국 모든 걸 삼켜버렸고 조연아의 유골을 찾는 데는 결국 실패, 조연아의 장례는 결국 빈 관 상태로 치뤄졌다.결혼기념일 다음 날이 기일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한편, 조인주업 사무실.분노에 가득 찬 고주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연준아, 너 어떻게... 장례를 민하그룹 쪽에 완전에 맡길 수 있어. 그 사람들이 뭔데 연아 장례를 치르는데!”“누나의 뜻이었어.”“뭐... 뭐라고?”고주혁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죽어서도 살아서도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민지훈의
민지훈이 조연아에게 선물했던 유일한 물건, 그런데 그것마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있나 싶었다.“고마워요.”민지훈은 조연아의 영정사진 앞에 조심스레 오르골을 내려놓았다.오르골이 열리는 순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오로라가 찍한 사진 몇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리고 언젠가 조연아가 그에게 했던 말이 민지훈의 머릿속을 맴돌았다.“오로라를 보면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던데. 그거 다 거짓말이더라. 백년해로 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우리 결국 이혼했잖아.”씁쓸한 미소와 함께 사진을 다시 오르골에 넣으려던 그때, 사진 뒷면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문구.“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최고의 행운을 너에게 줄게. 민지훈, 사랑해.혼자 보내는 신혼여행, 그 먼 핀란드 땅에서 덩그러니 남겨져 그가 원망스러울 법도 했을 텐데 오로라를 보며 떠올린 게 그의 얼굴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어떻게든 그녀의 온기가 느껴질까 오로그로을 꼭 끌어안은 민지훈의 시선이 환하게 웃고 있는 조연아의 사진으로 향했다.“사랑해, 그런데 그만큼 네가 너무 미워.”“평생 후회속에서 살아가야겠지?”민지훈이 나지막히 속삭였다.“처남 말이 맞아. 설령 네가 다시 살아돌아온다 해도 난 날 용서할 수 없을 거야.”창밖에서 불어오르는 바람이 민지훈의 눈가에 묻은 물기를 날려버렸지만 고통으로 잠긴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평생... 네게 사죄하면서 살게.”...1년 뒤, 임천시.최근, 조인주업의 내부 권력 암투에 대한 뉴스가 매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기자회견장,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백장미는 눈물을 흘리고 있고 조학찬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백장미 이사님, 이사님 말대로라면 조연우 대표가 조인주업을 물려받은 뒤로 독단적인 행보를 이어왔고 모든 주주회의에서도 두 분을 완전히 배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온갖 술수로 두 분의 지분을 노리고 있다는 거죠?”얼굴을 가득 묻은 눈
또각또각.기자회견장 문이 열리고 아리따운 여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매혹적인 빨간 입술, 몸에 꼭 들어맞는 섹시한 옷차림.스크린에서 내뿜는 불빛이 여자의 얼굴에 비추고 그녀의 정체가 공개된 순간, 술렁대던 기자회견장에 정적이 드리웠다.“저 사람은... 조연아잖아!”“저 여자가 왜 여기에!”“1년 전에 실종된 거 아니었어?”물론 백장미, 조학찬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조학찬이 바로 눈물을 글썽였다.“연... 연아야. 우리 연아 맞지? 그 동안 도대체...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이 아빠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그 가식적인 모습에 조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역겨운 사람...’반면 백장미는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조학찬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네가... 네가...”다른 사람들이야 조연아가 실종되었다고로만 알고 있지만 백장미를 비롯한 측근들에게까지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저 계집애는 분명... 1년 전 그 사고로 죽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어머니도 그 동안 제 생각 많이 하셨나 봐요? 말도 제대로 못하시는 것 보면.”조연아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뭐, 상관없어요. 지금부터 두 사람은 그냥 닥치고 제 말 듣기만 하시면 되니까.”말을 마친 조연아가 기자들을 향해 돌아섰다.그녀를 향한 수많은 플래시 세례에도 조연아의 표정은 의연하기만 했다.“여러분들이 보셨던 이 영상은 1년 전, 저와 제 동생 조연우 대표가 양조장에서 백장미 이사가 고용한 조폭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희를 구하러 달려오신 이모님의 차량 블랙박스에 찍혔던 거죠. 사실... 가족들 사이의 불화를 밝히는 건 제 얼굴에 침 뱉기인 것 같아 숨기고 인내했지만... 저희의 자비에 악당들이 더 의기양양해지는 걸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이렇게 나서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조연아는 핸드백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방금 전 백장미 이사는 제 동생이 두 사람을 양조장 쪽방으로 내쫓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