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추준인 건가?’조연아가 다시 액셀을 밟으려던 그때.“연아 씨, 저 오 비서입니다!”다급한 오민의 목소리에 핸들을 꽉 부여잡았던 핸들을 손에 힘이 턱 풀렸다.“연아 씨, 저희 대표님 만나셨습니까?”차에서 내린 오민이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제 옆에 있어요. 다쳐서 얼른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네? 대표님께서 다치셨다고요?”조수석 문을 벌컥 여니 창백한 안색의 민지훈이 모습을 드러냈다.피로 물든 흰 셔츠를 바라보던 오민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표정 짓지 마. 별일 아니니까.”“대표님, 얼른 병원으로 가시죠.”오민이 그를 부축하려던 그때, 민지훈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식은땀으로 차갑게 식은 조연아의 손을 살짝 잡았다.“아직 완전히 안전해진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주는 듯한 그의 눈빛에 조연아의 가슴이 파르르 떨려왔다.“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한시가 다급한 상황에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다급해진 오민이 조연아를 설득했다.“연아 씨, 부탁드릴게요. 저희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지금 거절하시면 저희 대표님 절대 치료 안 받으실 거예요. 제발... 제가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조연아가 무릎을 꿇으려는 오민의 팔을 붙잡았다.“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일단 병원으로 가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아 씨...”의사가 총알을 꺼낼 때까지 민지훈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의사도 살다살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환자가 민하그룹 민지훈 대표이니 안 된다는 소리는 못하고 애원어린 눈으로 조연아를 바라볼 뿐이었다.“휴.”한숨을 내쉰 조연아가 어린 아이를 달래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지훈, 이 손 좀 놔. 선생님께서 곤란해 하시잖아.”“꼭 놓아야 해? 나 무서워. 아프면 어떡해?”이게 무슨 억지란 말인가?어이가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를 구하려다 다쳤으니 이를 악물고 애써 짜증을 밀어냈다.“마취
이에 조연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확신해요. 사촌오빠의 목소리를 착각할 리가 없으니까요.”지하주차장에 울리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해 조연아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네,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부탁드리겠습니다.”경찰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조연아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민지훈을 노려보았다.“도대체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건데?”“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민지훈!”짜증을 내는 모습도 어쩜 이렇게 귀여운지.민지훈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똑똑똑.이때, 오민이 병실로 들어왔다.“대표님.”“어떻게 됐어?”민지훈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대포폰이라 신분을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두 사람의 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조연아가 물었다.“대포폰? 그게 무슨 소리예요?”“아, 아직 모르셨습니까? 오늘 정체불명의 남자가 대표님께 전화를 걸어 연아 씨가 위험하다고. 어서 임천병원 지하주차장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총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고요. 그래서 대표님께서 그렇게 여러 번 전화를 거셨던 겁니다.”“그랬군요...”‘그래서 부재중통화가 그렇게 많이 와있었던 거구나. 그리고 내가 문자로 위치를 보내자마자 바로 도착한 것도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누구지? 그 사람은 내가 위험해질 거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이때 오민이 말을 이어갔다.“전화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대포폰이더군요. 꽤나 신중한 상대인 것 같습니다. 뭐, 연아 씨가 무사하니 다행이지만요.”이때 조연아를 잡은 민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추준이 널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그러니까요. 가족끼리 서로 죽고 죽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기막힌 사건에 경찰들도 혀를 끌끌 차던 모습을 떠올리며 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연아 씨... 왜 그렇게 가족운이 없으실까.’“연아 씨가 스타엔터를 빼앗은 게 고까워서 그런 걸까요?”오민의 질문에 조연아
“오 비서님.”민지훈의 시선이 오민에게로 향했다.“추준,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 조사해 보세요.”“네.”고개를 끄덕인 오민이 돌아서던 그때, 190센치의 거구가 병실 문을 벌컥 열어제쳤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백장미 ... 그러니까 하율 씨 어머니께서... 병실에서 자살했답니다.”“뭐라고요?”충격적인 소식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조연아가 휘청거리고 민지훈이 그녀를 부축했다.순간 안색이 창백해진 조연아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만두가 말을 이어갔다.“저기... 병원 주차장에서 하마터면 큰일 나실 뻔했다면서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전 괜찮아요.”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애써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다.“언제... 발견된 건데요?”“15분 전, 병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하율이는? 하율이는 이 사실 알고 있어요?”이에 만두가 고개를 저었다.“아직 하율 씨에겐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경찰도 도착했으니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겠죠.”“알겠어요.”고개를 끄덕인 조연아가 백장미의 병실로 향하려던 그때, 민지훈이 그녀를 붙잡았다.“같이 가.”“아니야. 당신은 푹 쉬어. 그리고... 오늘 구해줘서 고마워.”“널 혼자 보내고 내가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을 것 같아?”지하주차장에서 하마터면 사촌오빠 손에 죽을 뻔한 것도 모자라 새엄마의 자살 소식까지.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하루, 지금 사건 현장을 목격한 조연아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고집 좀 그만...”민지훈의 고집을 꺾을 시간 따위 없다는 생각에 조연아는 말끝을 흐리고 돌아섰다.‘뭔가 이상해.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잠시 후, 조연아 일행이 6층에 도착했을 땐 먼저 온 경찰이 복도 전체를 봉쇄한 뒤였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입니다. 사망자... 가족이기도 하고요.”“아, 현장 상황만 봐서는 자살로 보입니다. 유서에 조연아 씨의 어머니인 추현 회장님을 살해한 과정이 적혀
절망적인 순간, 민지훈의 따뜻한 위로에 애써 쌓았던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장미야! 장미야!”이때, 역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조학찬이 흰 천으로 덮혀 실려나오는 백장미의 시체를 향해 달려들었다.“이러지 마세요. 현장 보호해야 합니다. 진정하세요.”“내일 아침에... 내가 따뜻한 아침 가져다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경찰에 가로막힌 조학찬은 한참을 오열하다 스르륵 주저앉았다.“서랍장에서 백장미 씨의 유서를 발견했습니다. 그중에는 전 아내인 추현 씨의 사인도 적혀있었고요.”경찰의 말에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흘리던 조학찬이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뭐라고요? 추현이 죽은 거랑 장미가 무슨 상관인데요!”“백장미 씨가 유서에 본인이 추현 씨를 밀어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지... 지금 그게 무슨...”경찰의 말에 충격을 받은 조학찬이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장미가 추현을 죽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애초에 장미가 무슨 수로 스타엔터 건물 내부로 들어가. 추현은 자살이야. 우리 장미한테 뒤집어 씌우지 마!”“백장미 죽은 것만 슬프고... 우리 엄마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슬프지도 않은가 보지?”조학찬의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따져 물었다.“엄마가 왜 돌아가셨나고... 혹시 백장미 저 여자가 한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 뭐라고 하셨어요. 말 좀 해보세요!”그제야 조연아를 발견한 조학찬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네, 네가 왜 여기에. 너지. 네가 우리 장미 죽인 거지. 그래. 네가 죽인 거야...”이미 이성을 잃은 조학찬은 미친 사람처럼 경찰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형사님, 저 계집애 당장 체포하세요. 우리 장미가 자살일 리가 없어요. 쟤가 바로 용의자라고요!”“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기막힌 상황에 조연아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그녀를 미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대로 친딸을 살인 용의자로 몰 줄이야...
“어디까지나 현장에 타살 흔적이 보이지 않아 자살로 추정될 뿐입니다. 혐의가 없으면 조사는 곧 끝날 테니 협조해 주십시오.”“알겠습니다.”조금은 이성을 되찾은 조학찬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체면이고 뭐고 울부짖는 조학찬의 모습과 몇 년 전, 추현이 세상을 떴을 때 너무나 무덤덤하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조연아의 가슴이 저려왔다.‘왜... 우리 엄마한테는 그렇게 매정했던 건데...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잖아.’조학찬이 경찰과 함께 자리를 뜨고 그제야 고개를 돌린 조연아는 묘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바라보았다.‘아까... 날 지켜준 건가?’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잠시 후 주위에 몰려들었던 구경꾼들도 흩어지고 다시 조용해진 복도에 달콤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언니,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어떻게 된 거야?”병원복 차림의 조하율이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하율 씨!”벌떡 일어선 만두가 그녀를 막아서려 했으나...병실 내부의 참상을 목격한 조하율은 입을 틀어막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기 누워있는 게 우리 엄마라고?”“하율아...”“엄마!”만두도 이성을 잃고 병실로 뛰어들어가려는 조하율의 앞을 가로막았다.“하율 씨, 이러지 마세요.”“이거 놔요...”조하율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저게 우리 엄마일 리가 없잖아요.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내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거니까 이거 놓으라고요!”“하율아, 진정해.”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조하율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언니, 다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해줘. 저기 누워있는 사람 우리 엄마 아니지? 나 언니 말이라면 믿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지금 이 상황에서 거짓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조연아는 고개를 저었다.“미안해, 하율아...”“아니야... 아니야...”다시 병실로 고개를 돌린 조하율이 울부짖었다.“엄마! 엄마! 눈 좀 떠
“동생”급박한 순간이긴 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생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조연아는 비로소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죽도록 미운 백장미의 딸이지만 어느새 조하율을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조연아였다.조하율이 병실로 옮겨지고 그 옆에 서있던 조연아는 잔뜩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지율이랑 백장미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모자라 추준이 날 죽이려 했고... 백장미는 결국 자살했어.’단 하룻 동안 일어난 세 건의 사고.‘이게 우연일 리가 없어.’“선생님, 저희 동생 괜찮은 거예요?”“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기절입니다. 별 문제 없으니 푹 쉬고 안정을 취하세요.”한숨을 푹 내쉰 의사가 말을 이어갔다.“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렇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이럴 때일수록 다른 가족들이 더 마음을 보듬어주셔야 합니다.”“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사가 병실을 나서고 조연아는 깊게 잠든 조하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대표님, 여긴 제게 맡기시고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대표님도 많이 놀라셨잖아요. 하율 씨는 제가 지키겠습니다.”“그럼... 잠깐 집에 들렀다 올게요.”탁.병실을 나선 조연아의 시야에 다친 몸으로 내내 그녀의 곁을 지켰던 민지훈의 모습이 들어왔다.“오늘... 고마웠어.”‘운 건가?’민지훈의 손이 조연아의 얼굴을 향했지만 그녀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색하게 허공에 멈춘 손을 거둔 그가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아니야. 내가 알아서...”“어머님 유품, 내 차에 있어.”“...그래.”잠시 후, 민지훈이 그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타.”“운전 내가 할게. 당신 다쳤잖아.”“별거 아니야. 운전 내가 할 수 있어.”“아니, 그냥 내가 한다니까...”“말 들어.”억지로 조수석으로 그녀를 밀어 넣은 민지훈은 안전벨트까지 매주었다.“우리 엄마 물건, 얼른 줘.”“앞에 열어봐.”달칵.조심스레 나무상자를 연 조연아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서렸다
오랜만에 보는 추현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그녀에겐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민지훈.”상자를 닫고 고개를 든 조연아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여긴 우리 집으로 가는 길도 민지훈 집으로 가는 길도 아니잖아.’“지금 어디 가는 거야?”“가보면 알아.”애매한 대답에 조연아의 의아함은 더 커져만 갔다.두 사람을 실은 차량은 약 30분 정도를 달려 해변가에 멈춰섰다.“바다? 여긴 왜 온 거야?”서늘한 새벽 바닷바람에 조연아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너 때문에 다쳤으니까 나랑 같이 일출 보자.”‘일출?’잠시 후. 어두운 저 하늘 너머가 점차 밝아지더니 눈부신 태양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예쁘다.”햇살을 맞으며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갈매기, 어딘가 비릿한 바다내음을 느끼던 조연아는 씨익 미소를 짓고 민지훈은 넋을 잃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모든 걸 다 가진 남자, 완벽한 남자라 불리는 민지훈이 이렇게 순수한 사랑의 감정으로 설렐 수도 있다는 거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네가 훨씬 더 예뻐.”갑작스러운 고백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조연아가 물었다.“그런데 갑자기 일출은 왜?”“일출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니까.”‘새로운 시작...’민지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기에 방금 전까지 조금 들떠있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우리 둘 사이에 시작 같은 건 없어. 난 널... 다시 사랑하지 않을 거야.”“그럼 내가 널 짝사랑할게.”‘널 위해 죽게 된다고 해도... 아낌없이 널 사랑할게.’한 번 뱉은 말은 꼭 지키는 민지훈에게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조연아는 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나 주혁이 오빠랑 결혼할 거야. 그래도 나 좋아할 거야?”“응.”‘아니, 넌 고주혁 그 자식이랑 결혼 못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막을 테니까.’아무것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린 조연아는 한동안 조용히 일출을 바라보았다.“빌라로 돌아가고 싶어.”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려던 그녀는 또 민지훈이 괜
할 말을 마친 민지훈이 어느새 먼저 운전석에 탑승했다.“타.”하룻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조연아에게 운전까지 맡기고 싶지 않은 민지훈이었다.게다가 여긴 그가 데리고 온 거니까.‘하여간 고집은...’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결국 조수석에 올라탔다.돌아가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어머님을 살해한 범인... 잡힌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 일은 그만 파.”방금 전 민지훈이 했던 말이 끝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무릎에 올려둔 나무상자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당신이 날 구한 대가로 일출 보러 온 거니까 이제 서로 쌤쌤인 거지? 이제 서로 연락하지 말자.”잠시 후, 빌라 앞에 도착한 조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동문서답인 민지훈의 모습이 답답했지만 조연아는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아파트로 들어섰다.이때, 아침운동을 하러 나오는 아주머니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아이고, 이제 오는 거야?”“안녕하세요.”평소 오며 가며 안면을 튼 데다 흉흉한 요즘 세상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주는 아주머니들이라 조연아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안녕하세요.”“그런데... 저기 저 총각은 남자친구인가? 어쩜 인물이 저렇게 훤해!”“...”말문이 막힌 조연아가 괜히 눈치만 살폈다.“어머, 차도 좋고... 얼굴도 완벽해. 저런 남자 꽉 잡아야 해.”“그러니까. 우리 아가씨랑 같이 서면 아주 선남선녀겠네.”“그럼 우린 청접장만 기다리고 있을게.”“아, 아주머니들. 얼른 약수터로 가보셔야죠. 안 그럼 좋은 기구 다 빼앗기세요.”조연아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자 아주머니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어머, 어머. 우리 정신 좀 봐. 그럼 다음에 다시 얘기해!”서둘러 문을 나서던 아주머니들은 민지훈을 향해 손을 젓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총각, 힘내!”“총각, 우리 아가씨 인기 아주 많아! 얼른 낚아채야지!”“결혼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