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만나고 싶으신 거예요? 아니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으신 거예요?”안수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안씨 대가님과 상의할 일이 좀 있는데, 간 김에 두 분을 만나 뵈려고요.” 하현이 말했다.“당신은 여기가 무슨 포장마차처럼 아무 때나 아무나 올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안수정은 조금 화가 났다. 이놈은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것이지 특별히 자기를 만나러 오는 게 아니었다. “힘드시면 됐어요.” 전화 맞은편에서 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설씨 집안의 일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에 안흥섭이 그를 거절한 이상 그도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 말을 듣자, 방금 전까지 시크했던 안수정은 섭섭한 표정으로 안흥섭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서둘러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나가셨다가 마침 돌아오셨어요. 언제 오실 거예요?”이 말을 들은 하현은 어리둥절했다. 지금 보니 이 안수정 아가씨는 6월의 하늘 같은 아이의 얼굴처럼 표정을 바꾸는 속도가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하현은 쓴웃음을 지었고, 안흥섭 역시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모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좋아요. 그럼 제가 지금 갈게요.”하현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여기서 안수정은 평정을 되찾는 게 쉽지 않았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안흥섭의 표정을 보자 그녀는 조금 멋쩍게 말했다. “할아버지. 방금 제가 조금 흥분해서 우리 안씨 집안의 체면을 구겼네요.”안흥섭은 웃으며 말했다.“사람이 흥분할 때가 있지. 하지만 다음엔 더 조심하면 좋겠다.”안흥섭 같은 사람은 남녀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안수정에게 반항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큰일이다. 더군다나 만약 안수정이 정말 하현을 취하게 된다면 안씨 집안에게 역시 좋은 일이다. 하현을 대응하는 수단으로 안흥섭은 많은 일을 했다. 그가 정식적으로 안씨 집안의 데릴사위가 되기 전까지 안흥섭도 크게 걱정하지는
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늙은 여우들은 단지 말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면전에서는 상대가 무슨 목적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생각이 미치자 하현 역시 군말 없이 바로 직접 차를 한잔 들고 마신 후 감탄하며 말했다. “과연 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차네요. 한 근에 몇 십만 원하니 무섭겠네요?”“몇 십만 원이라고?” 하현의 말을 듣고 안흥섭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건 무이산의 대홍포야. 절벽 위에 있는 저 나무에서 경비원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어. 이 차는 1년 생산량이 10근 남짓인데 밖으로 나가는 건 5근을 넘지 않고 한 근에 1억이 넘어.” “이런 차를 몇 십만 원이라고 말해?”하현은 차에 대해 그다지 정통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씨 집안의 인맥은 보아하니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차는 돈이 있다고 인맥이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씨 집안은 아마도 최고위층 인사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정도겠지?안흥섭이 일부러 이 차를 꺼내서 자신의 기세를 꺾으려 하는 건가? 하현은 할 말을 잃었다. 보아하니 안수정의 일 이후에 골치 아픈 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그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기왕 안씨 대가님이 이미 저의 의도를 아셨으니 바로 말씀드리죠. 오늘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안흥섭은 하현의 뻔뻔함과 직접적인 태도에 놀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물었다.“네가 정말 감히 나에게 입을 열어? 내가 너를 설씨 집안과 이혼시키려고 하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네가 설씨 집안을 대신해서 말하겠다는 거야?” 하현은 부인하지 않았다. “설씨 집안은 대가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해요. 도와주실 수 없으신가요?” “도움을 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보잘것없는 2류 가문은 내 눈에 안 들어와.” 안흥섭의 반응은 당연했다.
“얘야, 너의 인심이 이렇게까지 값어치가 있어?” 안흥섭은 웃을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분명 그럴 거에요.”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좋아, 그럼 네가 그렇게 자신만만 하다면 우리 안씨 가문의 가업이 상당히 많으니 아무거나 하나 찾아서 설씨 가문과 합작해봐. 이것도 설씨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는 셈이야.”안흥섭은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큰 손을 흔들었다.그러나 이런 2류 가문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치가 될 것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작고 사소한 프로젝트라 하더라도, 안씨 집안의 허락이 없어도 안씨 집안과 합작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안씨 대가님. 큰 은혜를 소홀히 대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이후에 저에게 뭘 시키신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하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흥섭은 웃으면서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하현의 잠재력을 보고 그를 도왔지만 지금의 하현이 그렇게 큰 실력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은 다 끝난 거죠?”안수정이 옆에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일 다 끝났으면 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가요.” 하현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아가씨, 이제 9시가 넘었어요. 우리 방금 아침을 먹었는데 어떻게 밥을 또 먹겠어요? 아니면 오늘 저녁에 데리러 올까요?”“좋아요.”안수정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현이 떠나자 그녀의 얼굴 표정은 무너져 내렸고 못마땅해 하며 말했다. “이 찌질한 남자. 하루도 나랑 함께 하려고 하지를 않네. 할아버지 그를 돕지 말았어야죠!”“왜 돕지마? 이건 내가 너에게 기회를 만들어 준거야. 이 기회에 설씨네 가서 한 번 놀아봐.” 안흥섭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해다. “설씨네 뭐 재미 있는 게 있어요?”안수정은 본래 냉랭한 성격으로 오직 하현을 만났을 때만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설씨네 가서 그들에게 알려줘. 우리가 설씨 집안을 도와 준건 하현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하현이 없었으면
“당신은 이해할 필요 없어요.”안수정은 냉랭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이번엔 제가 안씨 집안을 대표해서 설씨와 합작에 대해 얘기하러 왔어요.”설씨 어르신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안수정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현 그 폐물이 안흥섭의 마음에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이번에 설씨 가문이 이 데릴사위에게 기대게 된 것은 아니겠지? 이 순간 설씨 어르신의 마음은 보통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안수정은 이어서 차갑게 말했다.“제가 일이 많아서 오늘은 간단하게 얘기 할게요.”“이전에 우리 안씨 집안이 뜻밖의 일로 하현에게 신세를 졌어요.”“오늘 그가 찾아와서 우리 안씨 집안의 은혜 구하면서 당신 설씨 가문을 받아 달라고 했어요.”“우리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프로젝트 하나를 골라 설씨 집안과 합작을 하는 데는 동의하셨어요. 합작을 해서 어떤 결과를 내게 될지, 설씨 가문의 지위를 높일 수 있을 지의 여부는 당신에게 달려있어요.” 설씨 어르신은 이전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소금에 절였던 생선이 죽었다 다시 살아난 듯 하현이 갑자기 개똥 운이 생겨서 안씨 가문이 그를 중요시 여긴 것이라 생각했다. 뜻밖의 일로 안씨 집안이 그에게 신세를 진 것이다. 하지만 이 폐물의 인정이 설씨 가문에게 이런 기회를 줬다면 그야말로 쓸모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설씨 어르신은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안씨 아가씨, 이렇게 우리 설씨 집안에 오셔서 프로젝트 합작까지 제안을 하셨다면 우리 설씨 집안의 실력을 아가씨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우리 설씨 가문이 서울에서 비록 일류 가문은 아니지만 하엔 그룹이 저희에게 투자한 것은 우리 설씨 집안의 저력을 말해줍니다.”“우리 설씨 집안과 합작을 하면 안씨 가문은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설씨 어르신은 거만한 얼굴로 결국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서울 전 지역에서 설씨 가문만이 하엔 그룹의 투자를 받
이 순간 설씨 어르신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합작이 체결되자마자 설씨 집안은 정식적으로 안씨 집안과 합작을 시작하였다. 비록 이것이 안흥섭이 직접 승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설씨 집안에서는 절대 이런 기회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 강남 전체에서 안씨 집안과 합작할 수 있는 집안은 각 지방에서 일류 가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번 설씨 가문이 안씨 가문과 합작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건 일류 가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거기다 쇼핑몰 프로젝트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설씨 가문은 하씨 가문과 안씨 가문 두 동반자를 등에 업은 셈인데, 들고 일어서는 것은 아직 확실치 않다. “너무 감사합니다. 안씨 집안이 우리 설씨 집안에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요.”설씨 어르신은 겸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안씨 아가씨 특별히 저에게 이렇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그리고 안씨 대가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우리 설씨 집안은 반드시 이번 기회를 잘 잡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설씨 어르신은 안흥섭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았지만 지금 그는 안흥섭에게 비할 수 없이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조금도 깔보지 않았다. 안수정은 하현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설씨 어르신이 하현의 공로를 인정 할까봐 두려웠다. 사실, 그녀는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설씨 어르신이 이런 생각을 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하현은 설씨 집안의 개 한 마리 일뿐, 설씨 집안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다 설씨 집안에 보상하는 일일 뿐인데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두고 하현을 마음에 둘 수가 있겠는가? 만약 설씨 집안이 실력이 없었다면 하현이 가서 무슨 말을 하든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안수정이 떠나자 설씨 어르신은 자신의 ‘철 왕좌’에 앉아 흥분해서 온 몸이 떨렸다. 이번에는 설씨 가문의 또 다른 기회였다. 쇼핑몰 프로젝트와도 견줄 만했다.
설민혁이 별장에 도착하자 지체 없이 안씨 집안과의 합작에 대한 일을 말했다. 그러면서 약간 사색하는 기색을 띠며 말했다. “민혁아, 이번 합작은 안수정이 직접 맡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네가 이 기회를 꼭 잡아야 돼. 만약 이 기회를 빌미로 네가 그녀를 데려와 네가 안씨 집안의 데릴사위라도 된다면 할아버지가 허락해 줄게!”설민혁은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최고로 아끼시는데 어떻게 자기를 데릴사위로 만들려고 하시는 건가? 나를 포기하시려는 건가? 설민혁의 생각을 눈치챈 듯 설씨 어르신은 퉁명스럽게 말했다.“민혁아, 안심해라. 네가 안씨 집안의 데릴사위가 되도 설씨 집안은 여전히 네 꺼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안수정의 일은 네가 가서 해봐도 돼. 듣기로 안수정이 안씨 집안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대. 만약 데릴사위라도 돼서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나중에 그녀의 윗자리에 앉아 그녀의 실권을 잃게 만들면 돼!”“오래지 않아 안씨 집안을 설씨 집안으로 바꾸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설민혁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설씨 어르신이 이렇게까지 깊게, 멀리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할아버지.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이번 일을 잘 처리해서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설민혁은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단지 접근하는 일이라면 그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를 꼬시는 일에는 정말 뛰어났다. 안수정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분명 남자친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여자라면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매우 쉽게 그녀를 거느릴 수 있을 것이다. 설씨 어르신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이 일에서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에 이 일을 잘 처리하면 내가 회장 자리를 너에게 맡길게!” 이 말은 그야말로 가소로웠다. 뻔뻔하게 안수정에게 구애를 해서 진전시켜야 하는 것인가?……설씨네 회사. 하현이 모처럼 설씨네 회사에 왔다. 설
하현은 눈을 찡그렸다. 이 때 어이가 없어 하늘만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도록 이것을 물어보는 것인가?그 일은 정말 설명이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하현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은아야, 너 그냥 나 믿어주면 안돼? 나랑 서연은 진짜 친구 관계일 뿐이야. 만약 우리가 특별한 관계였다면 내가 밖에 나가다 차에 치이겠다!”설은아는 바로 손을 뻗어 하현의 입을 가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치, 거리낄 것 없다고 함부로 말하지마. 너 믿으니까 됐어!”이쯤 되자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고 서로 미소를 지으며 이전에 개운하지 않았던 감정이 눈 녹듯 풀리는 느낌이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만 하현과 설은아의 관계는 너무 특이해서 그들은 진정한 부부 관계가 아니라 이름만 부부일 뿐이라 이렇게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 왔다. “하현, 나 일해야 돼. 너 먼저 나가봐. 오늘 밤 일찍 들어와.”설은아는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오늘 밤 선을 넘어야겠다고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자신의 남편을 정말 다른 사람에게 뺏길 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은아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바로 이 때, 하현의 핸드폰이 갑자기 급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좋았던 두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 하현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끊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우리 두 사람은 계속, 괜찮아, 영향 받지 말고……”“너……”설은아는 말문이 막혔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결국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고 하현의 전화가 또 울리기 시작했다.“아니면, 내가 누군지 좀 볼까?”설은아는 조금 화가 났다. 하현이 어쩔 수 없이 전화를 연결하자 맞은 편에서 안수정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하현씨. 안씨 집안이 방금 당신의 요구에 따라서 설씨 집안과 프로젝트 합작하기로 얘기 했는데 지금 나 몰라라 하고 저랑 한 약속도 잊은 거예요?” “안수정?”설은아는 순식
저녁 무렵 하현은 회사를 떠나 포르쉐를 타고 안수정을 데리러 갔다. 운전을 시작하자 안수정은 기뻐했다. 그녀는 원래 하현이 전동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올 줄 알고 전동차에서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현이 포르쉐를 몰고 올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하현이 나를 중요시 여기나 보다. “왜 웃어요?” 하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 아이의 마음은 정말 이상하다. 변했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변한다. 안수정이 창 밖을 바라보며 살짝 웃으며 말했다. “별 일 없어요.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그래요. 그럼 안돼요?”“되지요! 안씨 집안의 큰 아가씨니 강남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전역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하현이 말했다. 그는 안씨 가문이 비록 한 손으로 강남을 다 가릴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지위는 절대적으로 남다르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우리 먼저 쇼핑부터 하고 내가 충분히 구경을 하면 밥 먹으러 가요.”안수정이 말했다. 하현은 시계를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아가씨, 6시까지 1시간 동안 쇼핑하는 걸로 정해도 될까요? 오늘 드디어 제 아내가 저와 말을 맞췄거든요. 밥 사드리고 저 일찍 들어가서 같이 있어야 되요!” “보아하니 두 분은 애정이 넘치시는가 봐요! 잘 됐네요.”안수정은 살짝 웃었지만 눈빛은 약간 복잡했다. 백화점에 도착해서 두 사람은 큰 길을 걸었는데 마치 연인들처럼 느껴져 적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 돌아보게 했다. 안수정은 명품 브랜드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쇼핑을 하지 않고 브랜드가 없는 층으로 들어갔다. 일반 의류와 신발, 모자, 액세서리만 판매했다. 안수정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작은 액세서리를 볼 때는 끊임없이 고르고 또 골랐다. 하현은 그녀가 앞으로 가는 것을 보고 머리를 흔들며 그녀가 가는 방향에 주얼리 샵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여기 와서 한번 봐요.”안수정은 그곳에 주얼리 샵들이 모여
”손님, 다시 한번 자세히 보세요!”“손님 옆에 있는 남자가 밥 먹는 거 말고 뭘 할 줄 알겠어요?”“보세요! 지금도 아무 거절도 못 하잖아요!”“그런데 왕 도련님은 어때요? 손님 옆에 있는 저 남자보다 몇천 배는 더 좋죠! 만약 손님이 이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예요!”말을 하면서 여자 종업원은 하현에게 눈을 내리깔았다.그녀는 줄곧 하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궁상스럽기 짝이 없는 이 남자를 무시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녀의 눈에 금정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남자는 오직 왕인걸이었다.설은아는 더 이상 여자 종업원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홧김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저리 꺼져요!”여자 종업원도 냉소를 흘리며 지지 않고 대꾸했다.“손님, 정말 어지간하시네요!”“그렇게 있는 척하면 뭐가 좋아요? 무슨 소용이 있냐구요?”설은아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말했다.“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 사장한테 말해서 당신을 해고해 버릴 거예요! 두고 보세요!”바로 그때 이들의 모습을 흐릿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왕인걸이 와인잔을 움켜쥐고 천천히 걸어왔다.걸을 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얼마나 당차고 당당한지 보는 사람들마저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의 길을 막고 있던 일부 손님들은 얼른 길을 내주었다.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왕인걸은 마치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겠다는 듯 거만하고 당당하게 걸어왔다.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지금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왔다.“쯧쯧쯧, 결국 왕인걸이 이렇게 여자를 빼앗는군!”“자고로 왕인걸의 눈에 띈 여자가 도망갈 곳이 어디 있겠어? 순순히 그의 품에 안기는 게 능사지!”“예전에 청순미녀라고 이름을 날리던 어린 스타가 처음에는 왕인걸한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었지.”“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어? 왕인걸이 모든 지원을 끊자 결국엔 그에게 기어들어왔지.”“그리고 자기가 여신급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줄 알고 왕
”안녕하세요.”하현과 설은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곱게 화장을 한 종업원이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 들고 다가왔다.“저분이 두 분께 드리는 것이니 받아주세요.”종업원은 설은아와 하현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귀한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술을 보냈어요? 82년산 라피트를?”하현과 설은아는 모두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종업원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지방시에서 옷을 맞춰 입은 멋진 남자가 와인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는 젊고 멋있고 부유해 보였다.딱 봐도 금정에서 성공한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의 곁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몇 명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순간 그들은 하현과 설은아를 바라보며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하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설은아가 주저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죄송하지만 난 저분을 몰라요. 그러니 이거 가져가세요!”“그게...”설은아의 차가운 눈빛에 여자 종업원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손님, 손님 뜻은 알겠지만 왕 씨 가문 도련님이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대하는 건 아주 드물어요. 그러니 저분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예요.”“어쨌든 금정에 왔으니 저분이 젊고 잘생기고 부유하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테니까요!”“많은 여자들이 저분한테 시선 한 번 받으려고 해도 좀체 기회가 없었다구요!”“저분이 와인을 한 병 주셨어요. 그것도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요! 설마 당신들은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왜 거절하시는 거예요?”예쁜 종업원은 설은아가 배려라는 걸 너무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보아하니 왕 씨 가문 도련님은 이곳의 단골이고 신분이 범상치 않으며 이 여자 종업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모양이었다.이것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있는 안줏거리를 씹었다.계속 먹자니 맛이 나쁘지 않았다.방금 비행기
저녁 6시, 금정 쇼핑센터 맞은편에 있는 금정 포장마차.포장마차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곳은 금정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하나이고 매일 수천 번까지 번호가 매겨진다고 한다.그리고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는 모두 각양각색의 고급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설은아는 진작부터 하현을 이곳에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그래서 그녀는 가방에서 번호표를 꺼냈을 때 적잖이 놀랐다.두 사람이 차를 세우고 금정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저녁 식사가 절정인 이때 화려한 옷을 입은 손님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설은아는 종업원에게 번호표를 제시했고 두 사람은 미리 남겨둔 자리로 안내되었다.이 과정에서 설은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었다.화장을 곱게 하고 팔과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과 달리 설은아는 별로 화장기도 없지만 외모나 기질로 보아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기 충분했다.예쁜 여자를 옆에 둔 남자들도 설은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눈에선 뜨거운 시선이 광선처럼 빛났다.이 사람들 중에는 금정의 부잣집 2세들도 있었고 이제 막 사업에 분투해 성공 가도에 진입한 사람들도 있었다.물론 의기양양하고 패기 넘치는 스타트업 종사자들도 많았다.기질과 스타일로 볼 때 이 사람들은 하현을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그래서 설은아 옆에 있는 하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그러나 설은아는 이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은 후 테이블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주문 기계에 몇 가지 특별 요리를 주문한 다음 손을 뻗어 하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모처럼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을 느끼며 하현은 술을 한잔 마신 뒤 설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샤넬의 코트를 입은 그녀는 늘씬하고 매력적인 몸매를 가졌다.여기에 옥처럼 빛나는 외모와 가끔 다리를 꼴 때마다 흘러내리는 미끈한 각선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달나게 했다.하현은 설은아가 사업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슈퍼우먼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찻잔
이때 간민효는 하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서 잔뜩 호기심이 솟아올랐다.그녀는 다시 하현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하현, 오늘 밤 시간 있어? 같이 밥 한 끼 할까?”“고맙지만 오늘 밤 하현은 시간이 없어!”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설은아가 마침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당당하게 걸어와 하현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겨 팔짱을 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하현은 오늘 밤 나와 함께 저녁을 먹을 거거든.”간민효는 설은아를 보고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말했다.“설은아, 이 사람이 그 능력 없는 네 전남편이야?”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나이대의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설은아와 간민효가 아는 사이?하지만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것이 정상이었다.모두 금정에서 내로라하는 정상급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설은아는 간민효에게 무슨 설명을 하기도 귀찮아서 얼른 하현을 끌고 VIP 출구로 나와 자신의 빨간 페라리로 들어갔다.그 후 그녀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는 굉음을 내며 쌩하니 그 자리를 떠났다.갑자기 혼자가 된 간민효는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조수석에 탄 하현은 안전벨트를 매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만난 전처, 아니 와이프라고 해야 하나?이런 어색하고 떨떠름한 자리라니!차는 금정 국제공항을 빠져나왔고 하현이 금정의 가을빛을 감상할 사이도 없이 설은아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그리고 가속페달을 사정없이 밟으며 그녀는 떠보는 듯 입을 열었다.“간민효, 예쁘고 상냥하지?”맞는 말이었다.간민효는 전신급에 달하는 독술을 가졌으면서도 아름답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그리고 몇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현은 그녀의 기질이 참 따뜻하고 상냥하다는 것도 알았다.그러나 차 안을 뒤덮은 질투의 불길을 느끼며 하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간민효가 어느 정도 사람 좋고 매력적이라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비행기는 어느새 금정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하현과 간민효는 함께 VIP 통로를 걸었다.얼핏 보면 두 사람이 한 쌍의 연인처럼 보였다.이에 간민효의 뒤를 따르던 양복 차림의 남자는 못마땅한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두 사람은 공항의 VIP 출구에 다다랐고 간민효는 하현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가는 길까지 내가 데려다줄게.”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비행기 탔을 때 이미 아내한테 내 일정을 보냈어.”“아마 마중 나올 거야.”“아내?”‘아내’ 라는 말을 들은 간민효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네 번째 손가락을 쳐다보았다.반지가 없었다.간민효의 눈빛을 알아차린 하현이 입을 열었다.“아, 이제 전처라고 봐야지.”하현의 말을 듣고 간민효는 그제야 소리 없이 웃었고 한층 더 하현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하현, 당신에게 아내가 있든 없든 간에 내가 말했듯이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 금정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자, 우리 작별의 포옹이라도 해!”이 말을 들은 몇 명의 사내들이 모두 순식간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나같이 험악한 얼굴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자, 다음에 또 봐!”하현도 험악한 표정의 남자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가 간민효와 포옹을 나누고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참, 마침 내가 무학에 어느 정도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신 몸에 뭔가 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아마 십중팔구는 입신에 이르는 독술과 관련이 있을 거야.”“그래서 말인데 내가 필요할 땐 언제든 연락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말을 하면서 하현은 쪽지 한 장을 여자의 가슴에 쑤셔 넣었다.이 행동은 예의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하현은 침착하게 기운의 광선을 통과해서 여자의 심맥을 보호했다.“내 병을 눈치챘어?”
그들의 눈에는 하현이 간민효를 잡아먹기라도 할 짐승처럼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민효의 손을 놓았다.하지만 그의 손아귀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간민효는 아무 말없이 미소를 보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현, 어쨌든 당신 덕에 위기를 모면했어요.”“내가 미리 독을 넣긴 했지만 비행기가 그대로 출발해서 폭발하기라도 했다면 무고한 생명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음을 당했을 거예요.”“이 무고한 생명들의 죽음은 모두 나한테 책임이 있었을 거구요.”간민효는 멍한 눈빛으로 말을 마친 후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서 이래저래 난 하현 당신에게 신세를 졌어요.”“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나 간민효의 친구가 된 거예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나 간민효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 거예요!”“진부한 말이지만 이게 내 진심이에요!”“내가 없어도 내 명함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거나 혹은 약혼자를 찾아가도...”말을 하면서 간민효는 명함을 꺼내 하현의 손에 쥐여주었다.“그들은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와줄 거예요!”하현은 손안에 든 명함을 보았다.이것은 특수 목기로 조각한 것이었다.이름 하나와 전화번호만 새겨져 있어서 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이런 명함은 딱 봐도 아무나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히 명함을 살피기 시작했다.명함 모서리에 몇 가지 비밀 문양 같은 것이 있었다.역시 금정 간 씨 가문다웠다.5대 문벌 중 문벌의 기원지인 금정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금정 간 씨 가문!금정 간 씨 가문은 다른 오래된 문벌보다 신비에 가까운 기세를 가진 강력한 집안이었다.이 여자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신분도 간석준보다 훨씬 높았다.이런 생각들이 하현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그는 간민효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아, 고맙습니다.”그러나 하현은 간민효의 명
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특히 깁스를 한 여자가 죽기 직전에 한 ‘독’이라는 말에 눈앞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이 아름다운 검은 옷의 여인에게 신의 경지에 가까운 독술이 있을 줄은 몰랐다.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자칫하다가 사소한 부주의로 의외의 실패를 맛볼 수가 있다.동시에 하현은 상대방의 정체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신분이 비할 바 없이 높고 독극물에 대해서도 해박하다.게다가 간 씨 성을 가지고 있다.이쯤 되고 보니 상대의 신분은 알 만할 것 같았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하현은 그녀의 신분을 캐지 않았다.하현은 이제 죽은 여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상대가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한 이유지만 죽은 사람에겐 더 이상 관심을 둘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곧이어 중년 수사대장이 하현을 찾아와 간단한 조서를 작성했다.하현은 금정으로 가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에 두 스튜어디스에게 공을 넘겼다.양효리라는 이름의 스튜어디스는 잘 협조할 생각이었지만 이다송이 그녀를 막았다.이 모습이 하현의 흥미를 끌었다.양효리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다송 같은 여자와 절친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하룻밤 사이에 두 남자와 뒤엉키는 여자는 아무리 보아도 보통은 아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양효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부지불식중에 이다송에게 물들어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이미 자신과 얽힌 일은 모두 끝났기 때문에 하현도 더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았다.곧 일등석은 말끔히 청소되었고 특수 약물을 뿌린 뒤여서 그런지 좀 전의 피비린내는 모두 싹 사라졌다.하현은 자신의 좌석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향기로운 바람이 코끝을 스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그러자 간 씨 성을
경찰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여자의 말이 틀린 데가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하현은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깁스를 했다고 불법은 아니지. 하지만 깁스 안에 규조토를 섞으면 불법이지.”하현은 천천히 손에 든 홍차를 깁스 위에 뿌렸다.하현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여자의 안색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규조토는 매우 특별한 화학 물질이었기 때문에 약용이나 C4 총기의 원료로만 쓰인다.“규조토를 폭발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물질이 필요하지. 게다가 그건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야. 바로 알코올이지!”“규조토 위에 소주, 보드카 등 독한 술을 한 잔만 뿌려도 끔찍한 폭발이 일어날 수 있어!”“그 폭발의 위력은 아주 무서워!”“이론적으로 깁스 형태로 만들 정도로 규조토를 썼다면 그 폭발력은 어마어마해. 아마 이 비행기는 중간 어느 지점에서 두 동강이 나고도 남아!”“아마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공중에서 폭발했을 거야!”“그러면 이 비행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죽는 거지!”“뼈도 하나 못 추릴 만큼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는 거야!”여기까지 말한 하현은 스튜어디스에게 비상 탈출구를 열라고 지시한 다음 작은 깁스 부스러기를 집어서 떨어뜨리며 보드카 한 잔을 뿌렸다.“쾅!”보드카와 깁스 부스러기가 닿는 순간 굉음과 함께 불꽃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이다송과 양효리는 모두 아연실색했다.만약 정말로 비행 중인 비행기 안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모두 죽는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간단히 말해서, 하현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듯했지만 그의 행동이 모두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깁스를 한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이 자신의 계략을 모두 간파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중년 형사는 식은땀을 쫙 흘렸다.신고가 들어온 비행기를 자신이 살핀 뒤에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흥미로운 듯한 눈빛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녀는 분명 하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려는 심사인 듯했다.“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죠.”“여러분의 시야의 사각지대를 노리고 뭔가를 숨기는 사람도 많으니까요.”하현은 홍차를 한 잔 따라 마시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공항 경찰이라 그런가? 별로 프로답지 못하시군요들!”“내가 경찰서장이라면 다른 일 다 제쳐두고 당신들 해고하는 일부터 할 겁니다!”“당신들은 스스로가 다 찾아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C4 총기를 가장 잘 숨기기 좋은 곳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거예요!”말을 하면서 하현은 들고 있던 홍차를 여자의 다친 왼손에 부었다.“아!”여자는 뜨거운 찻물에 데여 비명을 지르며 하현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개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다친 손인데 조사할 게 뭐 있다는 거야?”“내가 정말 C4 총기를 숨기고 있는 줄 알아?”“설마 나 스스로 내 목숨을 끊고 당신들과 이 자리에서 죽으려고 한다고 거야?”“난 연봉 수억을 받는 임원이야. 내 목숨은 누구보다 소중해!”말을 하면서 여자는 수사대장에게 지갑에 든 명함을 꺼내 신분을 증명하려고 제시하려고 했다.그러자 제일 앞에 있던 중년의 수사대장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젊은이, 여기서 이렇게 함부로 굴지 마. 우쭐대고 싶어서 주위의 시선을 좀 모으려나 본데!”“방금 우리가 확인했어. C4 총기 같은 건 전혀 없었어!”하현은 중년 형사의 경고를 무시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왼손을 다쳤다고 했지만 몸에서는 아무 약 냄새도 나지 않아.”“그리고 지금 보니 당신은 얼굴에 아주 풀메이크업을 했군. 분명 본인이 한 거겠지.”“그런데 말이야. 한 손으로는 이렇게 완벽한 화장을 할 수 없어.”“무엇보다 팔을 다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