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은 배달 음식 상자를 열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그들은 내가 용문 집법당 당주라는 걸 몰라?”“여기까지 와서 저 소란이라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보지?”“평소 같으면 저 사람들도 당신을 두려워했겠죠.”“그렇지만 지금은 평소와는 다른 특수한 상황이잖아요. 그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겠어요?”“그들이 보기에 당신은 영원히 여기서 나가지 못할 사람으로 보일지도 몰라요.”“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꿍꿍이를 가진 사람들이 저렇게 밀어붙이는 데 우물에 앉아서 저들이 돌을 던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하현은 군만두 하나를 집어 들고 웃으며 말했다.“꿍꿍이를 가진 사람들? 그래 누가 저런 짓을 꾸미는지 알아냈어?”“아직이요. 하지만 상대방 조직은 이렇게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아무 배후도 없이 저렇게 밀어붙이지는 못할 거예요. 분명 누군가 있어요.”“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난 성 씨 가문이 몰살당한 것과 용호태의 죽음이 당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걸 더욱 확신하게 되었어요.”“왜냐하면 상대방이 너무 급하게 당신을 죽이려고 몰아붙이고 있어요.”이 말을 듣고 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상대방도 처음에는 날 죽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라.”“하지만 당신 형이 나타난 이상 그의 성격상 반드시 법을 공정하게 집행한다는 걸 알고 급해진 거지.”“상대는 지금까지 한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까 봐 두려운 거야. 자칫 잘못하다가 허점이라도 발견되면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그들이 지금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여론을 조성해서 당신네 경찰서를 움직이는 거야.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도 빨리 사건을 해결하도록 종용하는 거지.”“날 죽여야만 하니까.”“사건의 근원을 뿌리 뽑아야 발 뻗고 잘 수 있을 테니까...”“그들의 증거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는 걸 방증하는 거야.”“당신네 경찰에서 이 허점을 찾기만 한다면 나의 무죄는 증명하기 쉬울 거야...”하현은
30분 후 무성 경찰서 정문 앞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진주희는 집법당 사람들과 도끼파 패거리들을 데리고 지체 없이 경찰서 정문에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경찰서 수사관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겠지만 용문 집법당과 도끼파들은 할 수 있는 일이었다.다만 상대방도 하현 측에서 보일 수 있는 수단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그래서 양측은 서로 밀고 당기는 충돌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언론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결국 무성의 나팔수였던 무성 방송국도 전문 기자들을 몇 명 보냈다.무성 사람들의 알 권리를 앞세워 사건의 파장을 더 크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이렇게 되자 현장은 이른바 대규모 기자회견장으로 변했다.얼마나 많은 총과 무기가 현장에 깔렸는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만천우는 하현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경찰서 입구에 많은 기자들과 임시로 설치된 뉴스데스크를 보고 있자니 만천우의 안색이 적잖이 어두워졌다.비록 현재 수집한 증거로는 하현이 결백하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범죄 혐의는 경찰서의 사건 처리 원칙에 따라서 확정되지만 대중이 범죄를 인정하는 잣대는 이와 다르다.그들이 보기에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은 범인이 되고 반드시 목숨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뉴스데스크 뒤에서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문자 메시지를 몇 통 보낸 뒤 양복으로 갈아입고 단상으로 걸어갔다.“살인범!”“법의 심판을 받고 목숨을 내놔라!”“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갚아야지!”하현이 단상에 오르는 것을 본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여 하현을 비난했다.일부는 썩은 계란과 썩은 채소를 단상으로 던지기도 했다.그러나 이때 미리 진을 치고 있던 도끼파 패거리들이 재빨리 우산을 펼쳐 하현이 봉변을 당하는 일을 막아 주었다.하현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오늘 이
’10억'과 ‘1억’이라는 단위를 듣자 장내에는 고요한 냉기가 감돌았다.일반인들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그런데 하현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내놓다니!그가 무죄라는 걸 믿게 만들기 충분한 발언이었다.요즘 세상에 이렇게 달콤하고 솔깃한 제안이라니!“거짓말! 거짓말하는 거야!”“그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야! 사람을 죽였다고!”“그가 이렇게 많은 돈을 뿌리는 것은 그가 마음에 찔리는 게 있기 때문이야!”“그렇지 않다면 뭐 때문에 이렇게 많은 돈을 내놓겠어? 하물며 그와 성 씨 가문은 별로 친분도 없는데 말이야!”숨돌릴 새도 없이 사건이 급변했다.파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그러다 군중 속에서 갑자기 무도복을 입은 수십 명의 남녀가 나섰다.그들은 모두 키도 크고 실력도 좋아서 장내를 진압하고 있던 도끼파의 손길을 따돌렸다.또한 집법당 제자들은 이 낯익은 얼굴들을 보고 주저하며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우리가 이렇게 나오도록 만들다니! 우린 모두 용호태 부당주의 가족이야! 우린 진실을 말할 권리가 있어!”“우리한테 아무 소리도 하지 말라는 건 뭔가 찔려서 그런 거 아니야?”“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두려운 거잖아?”“퉤! 살인범이 여기서 허세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 기자회견은 무슨 기자회견이야? 정말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기자들 어딨어?! 내가 진실을 알려주지!”“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빚을 갚아야지! 빚을 졌으면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용호태 가족들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언론사 기자들은 피를 본 상어처럼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켜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돌렸다.무대 아래에 서 있던 진주희와 만천우의 얼굴빛이 살짝 일그러졌다.모든 것이 잠시나마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결국 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이것은 결국 하현을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다분했다.죽이지 않고는 결코 멈추지 않을 심
용이국이 모습을 드러내자 하현은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판을 너무 작게 만드는 거 아니야?!”“이런 판에는 용천오가 나와야 제 격이지!”“뒤에 숨어 파렴치한 소인배 노릇이나 하면서 대신 당신 같은 피라미를 보내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구도가 좀 안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용천오? 판을 작게 만든다고?”하현의 말에 용이국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하 씨.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른 사건일 뿐이야. 우린 이 일에 정의를 지킬 뿐이고. 그런데 용천오가 이런 데를 올 필요가 뭐 있겠어?”“정말 가증스럽군!”“여기 피해자 가족들, 시민들, 기자들 눈빛이 서슬 퍼렇게 당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거야?”“아무도 당신 말에 속지 않아!”그러면서 용이국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간략하게 진술하는 한편 이전 영상과 증거를 제시해 현장에서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이 장면은 현장에 있던 기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일이 이 지경에까지 발전했으니 정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이것은 틀림없이 내일 아침 빅뉴스가 될 것이다.순간 기자들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하 선생님, 피해자 가족과 대질하실 의향 있습니까?”“당신이 결백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이 말을 듣고 용문 집법당 제자들과 도끼파 패거리들은 마치 전장에서 적을 마주한 것처럼 표정이 굳어졌다.어쨌든 그들은 하현과 한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만약 하현이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면 그들도 재수 없게 같이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용호태 가족들은 분명 용이국을 지지하고 있는 듯했다.그들이 이렇게 나타난 이상 분명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을 터였다.“피해자 가족들과 대질하실 의향 있으십니까?”하현의 일행들이 그를 말리려 했을 때 하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나 하현은 바르게 행동하고 똑바로 살아왔습니다. 내
이 장면을 본 많은 사람들은 넋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소리치며 울부짖는 모습은 사람들을 뭉클하게 만들기 충분했다!기자들의 눈은 피를 본 상어처럼 혈안이 되어 있었다.이 촬영으로 헤드라인은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살인범은 혐의를 부인하고 피해자 가족은 피를 토한다...”하현은 상대방의 연기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이 모습은 기자들의 눈에 들어갔고 하현이 조금도 죄를 뉘우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기자들은 법의 처벌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는 데 목소리를 높였다.다른 피해자 가족들도 잇따라 성토하기 시작했다.그들 외에서 일부 성 씨 가문 친척들과 친구들도 군중을 헤치고 나와 한마디씩 덧붙였다.다들 하현이 살인범이고 반드시 죽어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현장에 있던 기자들과 사람들은 모두 하현이 범인이라고 확신하며 격분했다.게다가 살인범이라면 당연히 경찰서에서 체포하고 억류해야 하는데 버젓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분노케 만들었다.“하현, 하 선생님.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이렇게 많은 피해자 가족들이 당신을 살인자로 지목하고 있습니다!”“아직도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용이국은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하현을 보고 있었다.만천구의 출현으로 하현이 혐의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고 용천오가 말하긴 했지만 용이국은 관청과 경찰서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 여론이라는 걸 잘 안다.여론의 압박이야말로 법의 쇠사슬보다 더 강력할 때가 있다.피해자 가족이 피를 흘리며 성토하게 하는 모습을 전파에 내보냄으로써 하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들려는 것이 용이국의 의도였다...간단히 말해서 하현은...어떻게 해서든 죽어야 했다!억울해하고 분노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에 용이국은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어쨌든 그는 돈도 얼마 들이지 않고 원하던 것을
”퍽퍽!”피해자 가족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그들은 모두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이윽고 그들의 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남자들은 나 죽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여자들은 피해자의 영혼을 달래듯 통곡을 늘어놓았다.비명과 고성이 뒤섞여 장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기자들과 구경꾼들은 모두 넋이 나간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피해자 가족들이 이렇게 격렬하게 항의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가족이 죽었으니 그 억울함이야 오죽했으랴!매수당했다고?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어떻게 약간의 돈으로 목숨을 건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당신들!”진주희 일행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아무리 봐도 계획한 듯한 냄새가 진동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용이국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한 사람당 겨우 오십만 원 정도, 앞뒤로 다 따져봐도 겨우 몇천만 원으로 이런 퍼포먼스를 보이다니!지금 보니 수억 원의 가치가 있는 퍼포먼스였다!역대급 할리우드 연기는 평소에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기자들은 이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서둘러 셔터를 눌렀고 전후의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했다.이를 보던 사람들은 하현의 이마에 살인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있었다.하현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썩은 벌레 보듯 능멸하는 눈빛이 역력했다.만약 현장에서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았다면 분노한 군중들이 당장에라도 하현에게 달려들 기세였다.“하현,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만천우는 이 장면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하현이 이미 뭔가를 대비했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눈앞의 장면은 도무지 통제 불능이었다.군중들은 당장이라도 인간 벽을 뚫고 앞으로 돌진할 태세였다.이때 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미리 써 놓은 메시지를 어디론가 보냈다.“팅팅팅!”하현이 메시지를 보낸 지 몇 초도 지
”무슨 메시지 말입니까?”용이국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궁금한 기자들도 피해자 가족들이 보여준 문자 메시지를 힐끔 보았다.그러자 모두들 기자들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모두들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움직이질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사람들에게 전달했던 일억 원을 철회한다고?”“일억!?”“수십 명의 가족들한테 주었던 일억을 철회한다고?”“그럼 이게 얼마야?”“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용이국이 피해자 가족에게 인당 일억을 줬다고?”“그리고 이제 와서 그 돈을 다 빼앗았다고?”금융을 좀 아는 기자는 몇 번만 보면 이것이 어떻게 조작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아마도 용이국이 먼저 은행에 가서 계좌이체를 예약했을 것이고 원래대로라면 24시간 후에 돈이 입금될 것이다.하지만 지금 예약을 철회했으니 이체도 당연히 없던 일이 된다.기자들은 웅성거리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용이국의 낯빛은 순식간에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일억은 무슨? 철회라니요?”“이 돈은 내가 철회한 게 아닙니다.”“철회한 게 아니라면 돈을 주세요, 그럼!”피해자 가족들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따졌다.“이건 우리랑 약속한 거랑 완전히 다르잖아요? 우리가 당신 말대로 하기만 하면 일억 주기로 했잖아요? 안 그래요?”“지금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목숨 걸고 연기했는데 철회라니요?”“맞아요! 우리를 이용만 하고 돈은 안 주겠다는 거예요? 우릴 바보로 아는 겁니까?”한 무리의 피해자 가족들은 모두 의분에 차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돈 주세요! 빨리 돈 달라구요!”“그 돈은 정말 내가 철회한 게 아니에요. 난 당신들한테 일억을 주지도 않았어요!”망자의 영혼을 목놓아 부르며 열연을 펼치던 피해자 가족들이 갑자기 달려들자 자신이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짰다고 생각했던 용이국은 머릿속이 하얘졌다.“내가 어디에 그런 많은 돈이 있어서 당신들한테 줄 수 있겠어요?”“나
”다행히 우리는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라 미리 문자 알림 설정을 해 두었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린 모두 당신한테 깜빡 속았을 거예요!”“경고하는데 우린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했어요. 당신이 돈을 주지 않겠다면 단단히 각오하세요!”“우린 기자와 경찰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방금 하현에 대해서 했던 말들이 모두 당신이 외우라고 시킨 거란 걸 폭로해 버릴 거예요!”“하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우리한테 사주한 거잖아요!”“당신이 계약금조로 준 오십 만원이 우리 수중에 있어요. 계좌이체 기록도 있구요!”“처음에 돈을 줬을 때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당신을 믿지도 않았을 거라구요!”“용이국, 우린 더 이상 이런 연극하지 않을 거예요. 더 이상 당신한테 놀아나지 않겠다구요!”용이국은 그야말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자신이 철저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도 더 이상 하현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캐묻는 모습을 본 용이국은 얼른 곁에 있던 십여 명의 남녀들을 데리고 일어났다.“가자!”“가?!”“어딜 간단 말이야?”“돈도 안 주고? 돈을 안 준다면 아무 데도 못 가!”피해자 가족들은 용이국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모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이 사람들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용이국의 경호원들과 맞닥뜨려도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결국은 서로 봐줄 의사가 없는 사람들끼리 주먹다짐이 벌어지며 난장판이 되었다.진주희와 만천우는 어이없어 하며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한 무리의 기자들은 잠시 멍해 있다가 모두 앞다투어 달려가 진상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아무리 잘 쓴 드라마도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는 없다!이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뉴스 헤드라인감이었다.하현은 자신에게 음모를 뒤집어씌우려다 난장판이 된 모습을 눈앞에서 덤덤한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