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흔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표정이 떠오르자 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뭔가 생각이 났어?”“생각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내가 힌트가 될 만한 걸 말해 줄게.”“빅토리아 항 광장에 있다가 삼계호텔로 돌아갔는데 당신은 거기서 이영돈을 만났어.”“그리고 당신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었어.”“마지막에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여기까지 와서 뛰어내리려고 했어.”“못 믿겠다면 당신 핸드폰을 봐.”진소흔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열었다.실제로 동영상이 찍혀 있었다.그러나 진소흔은 아무리 봐도 동영상 속의 사람이 자기 같지 않았다.“당신과 이영돈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그의 연극에서 당신은 그냥 죽는 척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을 거야.”“당신이 정말로 죽어야만 그의 연극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거지.”“하수진을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대상으로 만들어서 항도 하 씨 가문의 핵심에서 내려오게 한 뒤 어쩔 수 없이 이걸윤이라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려는 수작이지.”“왜냐하면 당신이 죽으면 경찰들이 조사를 할 것이고 당신의 죽음이 하수진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여론은 절대적으로 하수진을 향하고 있을 테니까.”“그들은 상황을 이용해 항성 경찰서장과 심지어 정의를 수호하는 항성 총독까지도 내쫓을 수도 있어.”“간단히 말해서 당신의 죽음은 이영돈의 손에 예리한 칼이 될 거란 얘기야.”“불난 집에 부채질도 하고 말이야. 완전히 일석이조인 거지!”“대단해! 정말 대단해!”순간 하현은 감탄을 가장해 비아냥거렸다.이런 비열하고 파렴치한 짓을, 사람의 생명을 장기판의 말처럼 쓰는 이런 짓을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가 있는가!그들의 눈에는 사람의 목숨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었다.하현은 하루 종일 진소흔을 따라다니며 시간을 허비했지만 사건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진소흔은 죽고 하수진은
진소흔은 이영돈과 나눴던 말들을 곰곰이 떠올리다가 문득 깨달았다.하현이 오늘 제때 그녀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녀는 이미 송장으로 발견되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을 것이다.그러나 오후 내내 이영돈과 접촉했던 과정을 떠올리며 자신이 무심코 투신 얘기를 꺼냈던 기억이 떠올랐다.진소흔은 이영돈이 자신을 죽게 할 의도로 그랬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아냐, 그럴 리가 없어...”진소흔은 창백한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 선생님이 어떻게 날 죽게 할 수가 있겠어?”“설령 그가 나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난 그에게 있어 쓸 만한 카드야!”“난 그가 같은 편으로 묶고 싶은 사람한테 살랑거리며 다가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그가 날 왜 죽이겠어? 날 죽인다고 뭐 좋은 게 있다고!”“게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하수진에게 누명을 씌우자는 얘기는 내가 먼저 얘기했어!”“내가 얘기하지 않았다면 이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아예 못했을 거야.”“그래서 난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진소흔 앞에 꺼내놓았다.“오후에 당신 방에 틀어져 있던 영화야. 제목은 ”“방에 들어갔을 때 마침 여주인공이 바다에 뛰어내리는 장면을 봤을 거야, 그렇지?”“그걸 보고 당신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어 하수진을 함정에 빠뜨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이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당신도 식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잖아. 주변의 환경과 암시가 당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당신이 감정이 격해져서 빨리 이영돈에게 뭔가 보여주려 했을 때 마침 이 대목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 뛰어들겠다는 말을 하게 된 거야...”“그리고 이영돈의 능력으로. 성전 기사단이라는 간판으로 당신에게 일종의 심리적 암시를 준 거야. 당신이 깊은 바다에 뛰어들어 정말로 죽는 것이 옳은 일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거지...”“그는 당
”단물 빠진 껌이야. 토사구팽이라고...”하현은 그간의 일을 말하며 탄식하듯 내뱉었다.“이영돈은 정말 대단해. 어쩐지 도박왕 화풍성마저도 그에게 당해 나한테 도움을 손길을 펼치더라니.”하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진소흔은 여전히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저항하고 있었다.“아니야. 난 당신 말 못 믿어!”“이 선생님은 날 죽이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어. 영상을 찍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던 건 내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 몽유병에 걸려서 그런 거라구!”이영돈은 그녀에게 영주권을 준 남자나 마찬가지였다.그녀의 가장 큰 물주이자 후원자였다.그녀는 자신의 부귀영화와 미래에 딸려올 고귀함이 모두 이 남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이제 그녀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고 이 남자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진소흔의 성격으로 볼 때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었다.“몽유병?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하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진소흔, 눈 똑바로 뜨고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당신의 능력은 정말 경이로워. 인정! 인정!”“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스스로를 속이려는 의도 아니야?”“그가 가벼운 최면술로 당신한테 심리적 암시를 준 거, 당신 정말 눈치 못 챘어?”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만약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당신을 보고 그가 놀라는지 안 놀라는지 시험해 보면 알 거 아니야.”“물론 갑자기 나타난 당신을 그가 죽일지도 몰라. 그건 꼭 염두에 둬.”“그리고 내가 당신을 구한 것은 당신한테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있는 것이 나한테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하지만 이영돈이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걸 믿지 않는 한 뭐 내가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없지.”“당신 알아서 해.”하현은 헛헛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진소흔의 얼굴을 가볍게 툭툭 건드린 후 명함을 남겼다.“난 이영돈이랑 달라.”“난 책임감 있는 남자거든!”“적
삼십 분 후 삼계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하현은 지금 이곳에 살지 않지만 보안은 여전히 매우 좋았다.진소흔과 방금 이 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용전 항도 지부 사람들의 호위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꼭대기 층에 있는 공중 정원에서 하현은 보이차를 우려내었다.따뜻하고 깔끔한 뒷맛이 일품이었다.그는 진소흔이 온몸을 벌벌 떨며 맞은편에 앉자 직접 차를 따라 그녀에게 주었다.“자, 대스타님, 보이차 한 잔 하시고 진정하시죠.”“올해 막 올라온 거야. 한 근에 몇 천만에 육박하는 귀한 차야.”진소흔은 차를 마실 기분이 영 아니었지만 하현이 건네주자 마지못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이 모습을 본 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눈앞에 있는 좋은 차를 음미하지 못하는 진소흔이 안타까웠던 것이다.진소흔은 정상급 인플루언서인 만큼 매너를 아주 중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슴처럼 주변을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하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천천히 차를 마시며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십여 분 동안 벌벌 떨던 진소흔은 마침내 좀 진정이 되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하현, 난 죽고 싶지 않아.”“날 구해줄 수 있어?”“당신 정말 날 구해줄 수 있긴 한 거야?”“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노국의 남작이자 성전 기사단 부단장인 이걸윤 휘하에 있는 맹장이야, 맹장!”“아무렇게나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당신을 믿게 하려면 나한테 당신 능력을 보여줘야 해!”하현이 그녀를 보호할 하등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녀는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을 태세였다.“나 하현이야. 내 앞에서 그런 신분 따위 아무 의미 없어. 난 용문 집법당 당주야. 이거면 충분하겠지.”“항성과 도성에서 용전 항도 지부와 용문 항도 지회 모두 내가 통제하고
진소흔은 별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하현이 어딘가에 메시지를 보낸 뒤 자신이 해피톡 플랫폼에서 차단된 일을 떠올렸다.지금 그들은 삼계호텔 가장 꼭대기 층에 있었고 이곳은 왕족이나 귀족들이나 묵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이 사실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하현이 보여준 능력은 진소흔을 보호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이미 보여준 것이었다.어찌 되었건 용전 항도 지부와 용문 항도 지회를 모두 아우르는 인물이라면 항성과 도성에선 거의 따를 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게다가 항성의 최고지도자와 도성의 최고지도자가 모두 하현과 막역한 사이라니!생각에 이에 이르자 진소흔의 가슴이 뛰었다.하현의 품에 안겨 그의 신임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의 말 한마디로 다시 대하 연예계 정상을 탈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진소흔은 얼굴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하현, 내 성의를 보여주려면 뭘 해야 해?”“그건 당신한테 달렸지.”하현은 웃으며 찻잔을 쥐었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잖아.”“내 몸?”진소흔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나같이 속물적이고 닳고 닳은 여자는 하현 당신 눈에 안 찰 텐데, 안 그래?”“아, 물론 당신이 관심이 있다면 나야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지.”하현은 쓰잘데기 없는 말에 대답하기도 귀찮은 듯 심드렁한 기색을 보였다.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진소흔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필살기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조금은 불쾌한 듯 긴 다리를 움츠린 진소흔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이걸윤에 대해 알고 싶은 거야?”“미안하지만 내가 그의 덕을 보자고 밑에 있었던 건 맞지만 핵심 측근이 아니어서 이 소주에 대해 아는 게 없어.”“그것도 아니면 SNS에 하수진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거라도 올리란 말이야?”“그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 가지고 몸을 던진다고 할 수 있겠어?”“어쨌거나 내가 당신한테 빚을 지
하현은 싱긋 웃으며 손에 든 보이차를 한 모금 마셨다.자신의 설득이 별 효과가 없자 진소흔은 손을 벌벌 떨며 말했다.“하현, 당신들은 아랫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독을 쓴다는 걸 알고 있어.”“내가 별 가치가 없다 생각되면 날 독살해. 그러면 내가 배신할까 봐 두려운 일은 없을 거 아니야.”“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난 이제 어딜 갈 수도 없어. 당신 보호 없이 밖에 나갔다가는 당장 차에 치여 죽을 거야!”“하현, 내가 몸을 던지고 진심을 보여주기 싫다는 게 아니라 뭘 대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선 독약 같은 거, 나한테 없어. 설령 내가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게 당신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는데 내가 왜 독약을 낭비하겠어?”“그리고 사람은 변하기 쉬워. 나라를 배신하고 부귀영화를 좇는 당신 같은 사람은 더욱 변덕스럽지.”“난 당신한테 약점 잡힌 것도 없고 진심이 담긴 성의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을 보호해야 해?”“단순히 이영돈을 미워해서?”“그럴 필요가 있을까?”“그러니까 당신이 내놓을 것도 없고 성의도 보이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가도 된다는 말이야.”“잘 가. 배웅은 생략할게.”하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마쳤다.이걸윤 밑에 있었던 여자를 어떻게 유용하게 써먹을지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했겠는가?하현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여자는 그동안 적어도 세 자릿수에 달하는 노국의 귀족과 재벌들을 상대했다고 했다.그녀의 체력에 탄복해 마지않으며 하현은 다른 사람에게 모질고 자신에겐 더 모진 진소흔에게 분명 특별한 한 수가 있다고 믿었다.지금까지 미친 척 바보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가진 패를 다 까놓고 말하면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결국 그녀가 정말로 이걸윤 일행을 하현에게 판다면 그와 함께 끝까지 싸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그래서 하현은 가련한 척하는 이 여자의 표정에 속지 않았다.어찌 되었건
”그동안 내가 숏폼 동영상 올린 것도 그렇고.”“하수진의 식당에 가서 난리를 피운 거.”“빅토리아 항 광장에서 있었던 해프닝, 인터넷에서의 댓글 부대...”“전부 다 이영돈 지시로 이뤄진 거야.”“물론 이영돈이 분명하게 말로 지시를 내린 건 아니야. 단지 몇 마디 말로 심리적 암시를 줬을 뿐이기 때문에 아무런 증거가 없어.”“그의 주선 아래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가 누군지도 모를 때도 있었어...”“그래서 나는 아는 게 많지가 않다고 말했던 거야.”“내가 알고 있는 건 정말 이 세 가지뿐이야. 당신한테 이게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하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있잖아, 그게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이 말할 필요가 없어 최종 결정권은 나한테 있으니까.”진소흔은 하현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첫째 이걸윤은 비록 성전 기사단 부단장이지만 대하인이었기 때문에 노국 황실 안에서의 인맥에 기댔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성전 기사단에서 자신을 따르는 패를 만들었지.”“그의 휘하에는 기본적으로 노국을 유랑하던 대하계 후손들이 많았어.”“이 사람들은 피부색과 인종이 노국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항상 따돌림을 당해서 무리 지어 일했지.”“성전 기사단 안에서 이걸윤의 패거리들은 그의 말만 듣고 성전 기사단장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다고 들었어.”“노국 황실의 장공주 명령도 따르지 않았다고 했어.”하현은 약간 의아했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대하계로서 성전 기사단 같은 곳에서 똘똘 뭉치지 않으면 그들은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이다.“둘째 이걸윤 본인에 관한 것인데, 그가 도대체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성전 기사단의 단장과 맞붙어 승부가 나지 않았던 적도 있었대.”“하지만 그 이후로 성전 기사단장은 그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고 해.”하현은 유라시아에서의 전장을 떠올렸다.성전 기사단장이 비록 하현에게
”어때? 이 정도 성의면 관문을 통과한 거야?”“만약 통과했다면 이젠 당신이 날 어떻게 보호해 줄지 말할 차례야, 안 그래?”진소흔은 하현은 지그시 바라보았다.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는 쉽게 이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런 얘기를 해서 이걸윤과 이영돈을 팔아버린 것은 그녀가 앞으로 갈 길은 한곳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을 보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아까 승합차를 운전하던 기사는 남양 쪽 사람이야.”“때마침 지나가던 형사님은 동 씨 집안사람이고...”“그들은 모두 내 사람들이야.”“개자식!”진소흔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벌떡 일어나 하현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러나 욕설을 퍼붓고 난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이미 그녀가 아는 정보를 다 말해 버렸다.그것은 이미 그녀에겐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진소흔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하현은 알약을 꺼내 진소흔 앞에 놓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이건 천축국에서 비싸게 사 온 구식단이야. 먹으면 정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이지.”“하지만 의사가 조금만 손쓰면 금방 산소를 공급해 당신을 구할 수 있어.”말을 마친 후 하현은 손가락을 튕겼다.어수룩하지만 성실해 보이는 어부 한 명이 구석에서 나왔다.그의 몸은 축축하게 젖은 채 강한 생선 비린내를 풍겼다.“이 형님이 당신을 바다에서 건진 거야.”“큰 재난에도 죽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 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잖아. 당신은 바다에 뛰어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잊었을 뿐이고.”“핸드폰도 물에 잠겨서 SNS에 올리려던 영상도 올리지 못했어.”“알아들었어?”진소흔은 눈썹을 찡그렸다.“하현, 도대체 무슨 뜻이야?”하현은 웃으며 말했다.“당신은 큰 재난에도 죽지 않았고 많은 것을 잊었어. 그러니 당신의 이 선생님은 이대로 당신을 죽이기는 아까울 거야.”“당신이 죽지 않은 이상 하수진을
순간 장천중의 얼굴엔 제대로 영글지 못한 모자란 손자를 향한 한탄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그 후로도 그는 장용호의 얼굴을 계속 때렸다.어느새 장용호은 피범벅이 된 채 얼굴이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랐다.장촌중은 장용호의 멱살을 잡고 바로 하현 앞에 내동댕이치며 무릎을 꿇었다.“대사, 용서해 주게.”“내가 잘못 가르쳤네.”“내가 이놈에게 화자결을 알려줬어!”“배움이 부족한 이놈이 자네 앞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용서해 주게.”“제발 한 번만 봐줘!”대사?!황보동이든 장용호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장천중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진홍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라 불리며 대하 풍수계에서 지위가 상당한 만세당 장천중이 하현을 대사라 칭하며 무릎을 꿇을 줄은!이 소식이 금정 전체에 퍼진다면 아마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이놈아, 잘 들어!”“화자결은 하 대사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르쳐 주신 거야!”이때 장천중은 손을 들어 또다시 장용호의 얼굴을 내리쳤다.장용호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하현은 내 스승일 뿐만 아니라 네 조상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야!”“넌 지금 조상님에게 대드는 하극상을 보인 거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 거라고! 얼른 용서를 빌어!”장천중은 배움이 모자란 손자가 황보정의 몸을 살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손자가 목숨을 잃을까 봐 얼른 달려온 것이다.역시나 모자란 자신의 손자는 잘난 척 기고만장해서는 도리어 하현에게 비법을 도둑질했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이 광경을 본 장천중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안하무인한 짓을 할 수 있는가?이런 행동을 하면 만세당의 그 수많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는 걸 모르
황보정은 온몸이 약간 회복된 듯 보였으나 갑자기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약간의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용호는 이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자세를 보였다.“자,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쓰겠습니다.”“화자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거기, 당신은 좀 나가주지. 내가 하는 방법을 몰래 훔쳐볼 생각하지 말고!”“이건 우리 만세당의 독점술이나 마찬가지니까!”“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걸 배우면 곤란하지!”말을 마친 뒤 장용호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를 보였다.하현이 떠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독점술?”하현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흘렸다.“장천중이 알려줬어?”“개자식! 어디서 함부로 내 할아버지 함자를 입에 올리는 거야?”“게다가 우리 독점술을 누가 알려줬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장용호는 하현과 실랑이를 벌였다.“아무튼 간에 난 당신 같은 나쁜 놈은 보고 싶지 않아!”“여기서 당장 꺼져 주지 않으면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옆에 있던 진홍민도 나서서 장용호의 말을 거들었다.“하현, 당신은 그냥 나쁜 사기꾼일 뿐이야!”“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면 장용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거야!”“왜냐하면 당신이 몰래 촬영해서 그 영상을 누구한테 팔지 모르는 일이니까!”“당신 같은 사람이 못 할 짓이 뭐야?”간민효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하현이 손을 가로저으며 그녀를 만류했고 이어 장용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기운을 풀어주려고 마지막 한 수로 침을 놓을 때 꼭 명심해. 반드시 주사 광물을 찍어야 해.”“풀어진 기운은 몸 안에 유입되어야 해. 공중에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 돼.”“그렇지 않으면 황보정은 숨이 막혀서 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오
장용호는 진홍민의 눈빛을 알아듣고 헛기침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다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요즘 그런 소문이 들리더라고요.”“누군가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 집복당을 무료로 준다고요, 사실입니까?”황보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홍민을 쳐다본 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당신이 내 손녀를 구해 줄 수만 있다면 이 집복당을 가져도 돼.”“게다가 우리 황보 집안을 잇게 되는 거야.”황보동의 말을 듣고 진홍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용호, 걱정하지 마. 우리 이모할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키는 사람이야!”“그래도 당신이 안심을 못 하겠다면 내가 나서서 보증할게!”“퍽!”황보동은 다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귀찮아 서가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장용호 앞에 내던지듯 내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이미 계약서까지 다 준비해 두고 있었어.”“누구라도 내 손녀를 구해 낸다면 바로 이 계약서를 가져갈 수 있어.”진홍민은 흥분된 표정으로 계약서를 얼른 낚아채 눈을 반짝이며 살펴보았다.“맞아. 이 계약서는 원본이고 유효해. 양측이 여기 서명만 하면 돼.”“좋아요. 황보대사님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저도 모든 걸 다 쏟아 보겠습니다!”“여러분들에게 주역에서 가장 뛰어난 풍수술과 화자결을 보여드리죠!”말을 마치며 장용호는 호탕한 웃음을 보인 뒤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은침 한 개와 붉은 주사 광물을 꺼냈다.“우선 황보정의 온몸에 가득 찬 살기를 제거하여 그녀의 몸을 회복시킨 다음 기력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하현은 장용호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용호는 바로 은침을 쥐고 소독한 후 약간의 주사 광물을 묻힌 후 천천히 황보정의 눈썹 위에 찍었다.이를 지켜보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작부터 틀렸어.”장용호는 이 말을 듣고 미간
서류 뭉치에는 하현의 사진과 철인도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진홍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허! 가짜 증명서인 게 틀림없어!”그녀는 냉소를 연발했다.“이모할아버지, 정말로 이 사기꾼을 믿기로 하신 건 아니죠?”“야! 사기 치려고 별짓을 다하는구나!”진홍민의 비아냥거림에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장용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앞으로 나왔다.“황보대사님, 어디서 이런 사기꾼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요.”“왜 이런 사기꾼을 믿게 된 거예요? 도저히 모르겠어요.”“전 단지 지금 황보정의 상황은 우리 만세당 말고는 절대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요.”황보동은 자신감 넘치는 장용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유가 뭔가?”“이유요?”장용호는 팔짱을 진 채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주역의 ‘화자결’을 전수받았기 때문이죠.”“세상의 모든 재앙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요!”‘화자결’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황보동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 주역?”“그럴 리가 없는데. 주역은 오래전에 전수가 끊겼는데.”“자네 날 속일 셈인가?”황보동이 의아한 눈빛으로 몰아붙이자 장용호는 더욱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얼마 전 진정한 고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셨죠. 쉬쉬하며 음성적으로 전해지던 주역의 ‘화자결’을 몽땅 전수해 받았다고요!”“이걸 전수받은 풍수지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가 있어요!”여기까지 말한 장용호는 세상을 발아래 둔 사람처럼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가 보기엔 황보정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이런 벌을 받은 거예요!”“내가 그녀를 그 업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이 말을 듣고 진홍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이모할아버지, 어서 장 대사님을 오라고 하세요!”“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주역의 화자결?하현은 이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