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은 싱긋 웃으며 손에 든 보이차를 한 모금 마셨다.자신의 설득이 별 효과가 없자 진소흔은 손을 벌벌 떨며 말했다.“하현, 당신들은 아랫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독을 쓴다는 걸 알고 있어.”“내가 별 가치가 없다 생각되면 날 독살해. 그러면 내가 배신할까 봐 두려운 일은 없을 거 아니야.”“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난 이제 어딜 갈 수도 없어. 당신 보호 없이 밖에 나갔다가는 당장 차에 치여 죽을 거야!”“하현, 내가 몸을 던지고 진심을 보여주기 싫다는 게 아니라 뭘 대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선 독약 같은 거, 나한테 없어. 설령 내가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게 당신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는데 내가 왜 독약을 낭비하겠어?”“그리고 사람은 변하기 쉬워. 나라를 배신하고 부귀영화를 좇는 당신 같은 사람은 더욱 변덕스럽지.”“난 당신한테 약점 잡힌 것도 없고 진심이 담긴 성의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을 보호해야 해?”“단순히 이영돈을 미워해서?”“그럴 필요가 있을까?”“그러니까 당신이 내놓을 것도 없고 성의도 보이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가도 된다는 말이야.”“잘 가. 배웅은 생략할게.”하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마쳤다.이걸윤 밑에 있었던 여자를 어떻게 유용하게 써먹을지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했겠는가?하현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여자는 그동안 적어도 세 자릿수에 달하는 노국의 귀족과 재벌들을 상대했다고 했다.그녀의 체력에 탄복해 마지않으며 하현은 다른 사람에게 모질고 자신에겐 더 모진 진소흔에게 분명 특별한 한 수가 있다고 믿었다.지금까지 미친 척 바보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가진 패를 다 까놓고 말하면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결국 그녀가 정말로 이걸윤 일행을 하현에게 판다면 그와 함께 끝까지 싸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그래서 하현은 가련한 척하는 이 여자의 표정에 속지 않았다.어찌 되었건
”그동안 내가 숏폼 동영상 올린 것도 그렇고.”“하수진의 식당에 가서 난리를 피운 거.”“빅토리아 항 광장에서 있었던 해프닝, 인터넷에서의 댓글 부대...”“전부 다 이영돈 지시로 이뤄진 거야.”“물론 이영돈이 분명하게 말로 지시를 내린 건 아니야. 단지 몇 마디 말로 심리적 암시를 줬을 뿐이기 때문에 아무런 증거가 없어.”“그의 주선 아래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가 누군지도 모를 때도 있었어...”“그래서 나는 아는 게 많지가 않다고 말했던 거야.”“내가 알고 있는 건 정말 이 세 가지뿐이야. 당신한테 이게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하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있잖아, 그게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이 말할 필요가 없어 최종 결정권은 나한테 있으니까.”진소흔은 하현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첫째 이걸윤은 비록 성전 기사단 부단장이지만 대하인이었기 때문에 노국 황실 안에서의 인맥에 기댔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성전 기사단에서 자신을 따르는 패를 만들었지.”“그의 휘하에는 기본적으로 노국을 유랑하던 대하계 후손들이 많았어.”“이 사람들은 피부색과 인종이 노국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항상 따돌림을 당해서 무리 지어 일했지.”“성전 기사단 안에서 이걸윤의 패거리들은 그의 말만 듣고 성전 기사단장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다고 들었어.”“노국 황실의 장공주 명령도 따르지 않았다고 했어.”하현은 약간 의아했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대하계로서 성전 기사단 같은 곳에서 똘똘 뭉치지 않으면 그들은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이다.“둘째 이걸윤 본인에 관한 것인데, 그가 도대체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성전 기사단의 단장과 맞붙어 승부가 나지 않았던 적도 있었대.”“하지만 그 이후로 성전 기사단장은 그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고 해.”하현은 유라시아에서의 전장을 떠올렸다.성전 기사단장이 비록 하현에게
”어때? 이 정도 성의면 관문을 통과한 거야?”“만약 통과했다면 이젠 당신이 날 어떻게 보호해 줄지 말할 차례야, 안 그래?”진소흔은 하현은 지그시 바라보았다.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는 쉽게 이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런 얘기를 해서 이걸윤과 이영돈을 팔아버린 것은 그녀가 앞으로 갈 길은 한곳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을 보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아까 승합차를 운전하던 기사는 남양 쪽 사람이야.”“때마침 지나가던 형사님은 동 씨 집안사람이고...”“그들은 모두 내 사람들이야.”“개자식!”진소흔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벌떡 일어나 하현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러나 욕설을 퍼붓고 난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이미 그녀가 아는 정보를 다 말해 버렸다.그것은 이미 그녀에겐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진소흔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하현은 알약을 꺼내 진소흔 앞에 놓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이건 천축국에서 비싸게 사 온 구식단이야. 먹으면 정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이지.”“하지만 의사가 조금만 손쓰면 금방 산소를 공급해 당신을 구할 수 있어.”말을 마친 후 하현은 손가락을 튕겼다.어수룩하지만 성실해 보이는 어부 한 명이 구석에서 나왔다.그의 몸은 축축하게 젖은 채 강한 생선 비린내를 풍겼다.“이 형님이 당신을 바다에서 건진 거야.”“큰 재난에도 죽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 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잖아. 당신은 바다에 뛰어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잊었을 뿐이고.”“핸드폰도 물에 잠겨서 SNS에 올리려던 영상도 올리지 못했어.”“알아들었어?”진소흔은 눈썹을 찡그렸다.“하현, 도대체 무슨 뜻이야?”하현은 웃으며 말했다.“당신은 큰 재난에도 죽지 않았고 많은 것을 잊었어. 그러니 당신의 이 선생님은 이대로 당신을 죽이기는 아까울 거야.”“당신이 죽지 않은 이상 하수진을
VIP병동 곳곳에는 진소흔의 팬이 선물한 축하 문구와 함께 꽃들이 가득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상태인지 아무도 모른다.이영돈은 백합꽃 꽃다발을 손에 들고 문을 밀며 들어섰고 핏기를 잃고 병상에 누워 있는 진소흔을 흐릿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진소흔, 좀 어때?”말을 건네는 그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진소흔은 왜 이렇게 운이 좋단 말인가?진소흔을 구했다는 어부를 조사해 보니 조상 때부터 대대로 어업 일을 해 오던 진짜 어부였고 그 시간에 우연히 빅토리아 항을 지난 것이었다.이영돈의 마음속에는 이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적잖은 후회가 밀려왔다.어찌 되었건 모든 일에는 변수를 동반하기 마련이다.어젯밤 진소흔이 정말로 죽었다면 그는 하수진을 향해 더욱 비난의 강도를 더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한 번에 끌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일은 이미 이렇게 흘러가 버렸으니 바다에서 죽지 않은 진소흔을 또다시 죽이려는 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이영돈과 진소흔이 일부러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하수진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재주 피우려다 일을 망치는 꼴이 되고 만다.그래서 이영돈은 어쩔 수 없이 진소흔을 계속 살려 두기로 결정했다.다음에 그녀의 목숨을 이용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진소흔은 비록 이영돈이 가진 바둑돌에 불과하지만 꽤 가치가 있는 바둑돌이기도 했다.“이 선생님, 이렇게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이제 괜찮아요.”진소흔은 창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이영돈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렇지만 바다에 뛰어들었던 탓인지 아직 머리가 많이 어지럽고 기억이 잘 안 나요.”“하수진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제가 바다에 뛰어들기로 제안했다는 것만 기억나요.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참, 제 핸드폰도 물에 잠겨 고장이 났어요. 새 핸드폰 좀 마련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핸드폰이 없으니 불편하네요.”보아하니 진소흔은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제안한 것만 기억할 뿐
이영돈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얀 마스크를 쓴 하현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진소흔은 비스듬히 누워 반쯤 죽은 사람처럼 하고 있다가 하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당신이 시킨 일은 이미 다 했어.”“이제 당신이 날 지켜주겠다는 말 꼭 지켜야 돼.”“신분을 바꿔서 안전한 곳으로 숨는 게 좋을 것 같아.”“안 그러면 조만간 이영돈이 날 죽이러 올지도 몰라.”진소흔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했다.분명 방금 이영돈에게서 살의를 느꼈을 것이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요즘은 좋은 사람 되기 참 힘든 것 같아!”“당신은 대하를 배신하고 숏폼에 조국을 비난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우리 대하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기 때문이지.”“하지만 당신은 노국의 작은 비밀 하나 팔아넘겼을 뿐인데 그냥 도망치고 싶어 하잖아.”“그 차이는 정말 큰 거야.”진소흔은 자신의 태도가 하현을 거슬리게 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이를 깨물며 말했다.“하 씨. 당신 약속 안 지키면 절대 안 돼!”“내가 언제 당신한테 약속했어?”하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 나서 손을 뻗어 진소흔의 창백한 얼굴을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당신이 날 도와줬으니 적어도 당신 목숨을 지켜줄 거야.”“앞으로 며칠 동안은 계속 여기 누워 환자 연기나 잘 해.”“할 수 있으면 혼수상태인 척하는 것도 좋아. 당신이 죽을 것 같다고 상대가 느끼게 하는 게 가장 좋거든.”“내가 사람을 보내 당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퍼뜨릴게.”“이틀 후에 그가 도성에 가서 화 씨 가문과 도박을 할 때 기회를 봐서 구룡성에 있는 남양회관에 가. 내가 이미 당신을 위해 준비해 놓았어.”“그곳에서 당신은 신분을 바꿔 양 방주 밑에 있는 시녀가 될 거야. 열몇 평 되는 기숙사에서 살게 될 거야. 남양말을 하는 동료들이 있을 거고.”“잘 살 거라 믿
”남양쪽에 가서는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 할 거야. 양 방주가 비록 내 친구이긴 하지만 당신이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그녀도 당신을 뻥 차버릴 수 있으니까.”하현이 한마디 귀띔했다.“걱정하지 마. 난 딴따라지 바보가 아니야.”“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도망치는 거야. 지금 세상을 떠돌며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남은 내 체면을 세우는 일이야. 난 내 목숨을 걸 정도로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진소흔은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린 듯 하현을 쳐다보며 말했다.“맞다,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당신은 날 전면에 내세워서 하수진이 직면한 여론의 압박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어.”“그런데 왜 날 전면에 내세워 해명하게 하지 않았어?”하현은 아무런 표정 없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의 해명이 여론을 압박하지 못한다면 이영돈 쪽에서는 또 다른 수법을 쓸 궁리를 할 거야.”“속내를 쉽게 내보이는 것보다 여론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게 더 나아.”“필요할 때 나서면 되니까.”“그러니까 잘 살아 있어. 당신이 언젠가 나서야 할지도 모르니까.”“다음에도 연기를 잘 해준다면 누가 알아?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해 당신한테 멋진 집 하나 마련해 주고 당신은 그 안에서 편하게 살 수 있게 될지.”진소흔에게 마지막 당근을 확실히 주고서야 하현은 돌아섰다.그에게 있어 이 여자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어쩌면 요긴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하지만 남겨두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을 수 있다.하현의 말에 진소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하현에게 이용할 가치가 있는 한 그녀는 계속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그러자 그녀는 돌아서는 하현을 막아서고 나지막이 말했다.“참, 이걸윤에 관한 사실 중 당신한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하현은 진소흔이 자신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진소흔이 하현을 가로막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
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어느 가문이 대하 쪽이고 어느 가문이 노국 쪽인지 당신 알아?”진소흔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항성 이 씨 가문이 틀림없는 노국 쪽인 건 알아. 다른 가문은 아는 게 없어.”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혹시 빠진 건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다음에 당신과 내가 언제 만날지 모르니까.”“당신이 뭔가를 숨기고 있어도 나중에 그때 가선 아무 가치도 없을지도 몰라.”하현의 말에도 진소흔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그녀는 하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지금으로서는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아. 아무 조건도 없이 당신한테 이걸 말한 건 내가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야.”“당신이 날 잘 대우해 준다면 혹시 또 모르지. 다른 생각이 떠오를지...”“참, 내가 듣기론 이걸윤과 하구천이 의형제라고 했어...”“둘 다 전신이라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라고 들었어!”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엷은 미소를 보였다.“의형제에 둘 다 전신이라, 그것참 재미있는데.”...하현이 이걸윤과 하구천이 의형제라는 사실을 듣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이영돈은 이미 업무용 도요타 차 안에 있었다.볼륨감이 남다른 여비서는 공손한 태도로 이영돈에게 태블릿PC를 건네주며 말했다.“이 선생님, 지금도 인터넷상의 여론은 여전히 하수진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몇 마디 말이 오고 갈 뿐 뜨겁지는 않습니다.”“항도 하 씨 가문 아가씨가 손님을 괴롭혔다는 정도의 글입니다.”“그런데...”여비서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그런데 뭐?”이영돈의 미간에 언짢은 빛이 잔뜩 들어앉았다.“그런데 하수진 쪽에서는 진소흔이 조상의 은공을 잊고 조국을 배반했다는 글을 인터넷에 가볍게 올렸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런 사람의 말을 믿으세요?”“이제 인
어둠이 짙게 깔린 항성 국제공항 상공.노국에서 도착한 비행기 한 대가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사방에는 노국에서 날아온 수십 대의 전투기가 상공을 선회하며 호위하고 있었다.항성 공항은 안팎으로 봉쇄되었다.공항을 봉쇄하고 보안을 책임지기 위해 항성 최고 4대 가문 모두 역량을 총동원하여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보안에 투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항성 최고 4대 가문이 이렇게 힘을 합친 것은 수년 만에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이 모든 것은 단지 슈퍼스타의 왕림 때문이었다.항도 하 씨 가문의 핵심 인물들을 제외하고 항도 하 씨 가문 고위층들은 단지 노국의 남작이자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이 곧 올 거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이 전설 속의 슈퍼스타가 바로 이걸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지금 공항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정을 해 보았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다.통로 입구에서 이영돈은 두 손을 뒷짐진 채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서성거렸다.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대하계 남성들이 기사복을 입고 있었다.이 사람들은 모두 이영돈이 항성에 왔을 때 데리고 온 성전 기사들이었다.입이 바짝 마르는 초조한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출국장이 떠들썩해졌다.“부단장님!”입국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고 성전 기사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성전 기사들의 눈에는 경외스러움과 열렬한 환영의 눈빛이 뒤섞여 있었다.성전 기사단이 설립된 지 수백 년 만에 대하계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성전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한 세대를 책임질 전신!그는 한때 기사장총을 들고 적군을 휩쓸었다고 전해졌다.흑주에서 침략전쟁을 치르고 전신에 봉인되었다.게다가 그는 악랄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배를 갈라 처참하게 죽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특히 묘령의 소녀의 배를 가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갖가지 전설이 이걸윤의 악명을 만들었고 그의 위상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대하계 전신 이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