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백진은 하구천의 말을 가만히 듣고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임세인은 사람이 가벼워서 아무도 그 여자 말은 믿지 않을 거야.”“하지만 그런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도 분명 문제야.”“기회를 봐서 섬나라 사람들한테 그 여자를 처리하도록 해.”하백진의 냉정한 말 몇 마디가 임세인의 운명을 이미 결론내어 버렸다.바로 그때 하민석의 핸드폰이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는 구석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받았다.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많이 일그러지는 것이 역력했다.하민석은 하구천에게 다급하게 달려와 말했다.“하구천, 큰일 났어!”“당난영이 친위대를 기용해 십 년 전 일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대!”“하현이 옆에서 부추겼다는군!”“임세인의 증언이 이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커.”“촤랑!”하백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하구천도 사나운 얼굴로 씩씩거렸고 무릎을 꿇은 하은수에게 다가가 그대로 발로 걷어차 버렸다.“멍청이 같은 놈!”“쓰잘데기 없는 놈!”“바로 쓰레기 같은 이놈들 때문이야! 그래서 일이 이 지경이 된 거라구!”“안 돼! 절대 당난영이 십 년 전 사건의 진상을 알아서는 안 돼! 절대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내 자리도 장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일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죽을 거야!”하백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겨우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구천아, 흥분하지 마. 그때 일은 우리가 아주 깨끗하게 처리했어.”“아무리 당난영이 대단하다고 해도 절대 단서 하나 찾지 못할 거야.”“이미 이 일에 연루된 사람들은 다 죽었으니까.”말을 마치며 하백진은 곽영준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디서도 본 적 없는 살벌한 눈빛이 곽영준을 쏘아보고 있었다.만약 필요하다면 그녀는 이 사람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것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하구천은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며 극도로 안색
”내가 방법을 강구해서 하현을 설득해 볼게.”“그가 겸손의 겸자도 모르는 인간이라면 바로 손을 써서 죽여 버려야지!”하백진은 결심이 선 듯 결연한 얼굴로 하구천을 도와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안 그래도 이전에 하현에게 당한 일로 벼르고 벼르던 참이었다.하지만 하현이 한발 물러선다면 하백진은 용전 항도에 대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아도 상관없었다....삼계호텔.이슬 같기도 안개 같기도 한 가랑비가 대지를 소리없이 적시며 삼계호텔을 신비롭게 감싸고 있었다.토요타 프라도에서 내린 하현이 로비에 들어서려던 순간 갑자기 거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빨간색 페라리 한 대가 하현의 옆에 사납게 멈춰 섰다.차창이 열리자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한 이목구비와 매끈한 얼굴이 하현의 시야에 들어왔다.게다가 샤넬의 검은 치마와 명품 선글라스로 멋을 낸 그녀는 더없이 세련되고 아름다웠다.인형의 세상에서 툭 튀어나온 것만 같은 여인을 보고 하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항도 하 씨 가문, 하백진.이 여인의 출현은 하현에게 뜻밖이면서도 한편으론 뜻밖이 아니기도 했다.하민석이 그런 큰 판을 벌였으니 분명 당난영이 십 년 전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하구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볼 때 하백진이라는 여인이 하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다만 하현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이 여자가 사람을 몰고 칼부림을 시전한 것이 아니라 우아하게 페라리를 몰고 찾아왔다는 것이다.왜?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하현은 무심코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하현이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하백진은 운전대를 잡고 태연하게 차창에 기대어 하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하현, 얘기 좀 나눌까? 차에 타!”“이렇게 안개 같은 비가 내리는 날 도시 순환 고속도로를 달리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줄게.”담담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슬쩍슬쩍 내비치는 고혹적인
”미인이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그럼 재미있게 놀아 볼까요?”하현은 흥미로운 눈빛을 띠며 하백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이 여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그래서 하현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일단 차 문을 당겨서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하현이 앉는 것을 보고 하백진은 싱긋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그러자 페라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굉음을 내며 들짐승처럼 도시 순환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차는 비 내리는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다가 해안선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하현은 옆에 앉은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부인, 정말 나랑 비 오는 날 드라이브나 하자고 온 건 아니죠?”“나이 든 여자랑 드라이브하는 거 별로 관심 없거든요.”“이 시간에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왔을 테니 이제 그만 솔직히 말씀하시죠.”하백진은 하현의 말을 듣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당신이 조건을 내걸고 당난영의 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얘기 들었어.”하현은 느물대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역시 소식 한번 빠르시군요. 혹시 당난영이 하구천을 양자로 들이지 않는 게 내 조건이라는 것도 아시려나.”하현의 말을 듣고 하백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빛이 살짝 일그러졌다.하현은 아무렇지도 않는 듯 무심히 말했지만 이 말은 무시무시한 말이었다.결국 하현은 하구천이 당난영의 양자로 들어가는 걸 막겠다는 것이었다.이 조건대로 된다면 하구천은 당난영의 양자가 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하 씨 가문 문주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명분을 잃게 된다.하현은 간단한 듯 보이는 조건으로 하구천을 단번에 쳐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하현,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어.”“당신도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야. 그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강을 건너 온 맹룡이라고 해도 항도 하 씨 가문의 일에 함부로 개입할 수는 없다는 걸 똑똑히 알아야 할 거야.”하백진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붉은 입술을 움직였
’쓰레기'라는 말에 하백진의 눈 밑이 살짝 실룩거렸다.“하현, 당신 말대로 우린 모두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야.”“그러니 당신이 그런 일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전에 당신을 건드린 건 하구천이 잘못한 거야. 내가 돌아가서 하구천을 야단치고 꼭 사과하도록 할게.”“하지만 당신도 조금 성의를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이렇게 해야 양측이 오해를 풀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지 않겠어? 그게 당신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안 그래?”“어쨌든 당신이나 하구천이나 젊은 세대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고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어. 만약 누구라도 죽는다면 이득을 보는 이는 따로 있을 거야.”하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성의를 보여라?”“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어제 용문 도관에서 있었던 일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냐구요?”“한밤중에 오매 도관의 사송란이 대열을 이끌고 날 습격했어요. 정말 몰랐던 일입니까?”“말로는 평화롭게 지내자면서 당신들은 한 발짝 한 발짝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수작 아닙니까?”“내가 당난영의 처소에 가게 된 것도 다 당신들이 판을 짜놓고 날 끌어들인 거잖아요?”하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을 꺼내 낯선 번호로 온 메시지를 보여주었다.“끼익!”메시지의 내용을 본 순간 하백진은 허둥대며 브레이크를 밟았고 빗속을 달리던 페라리는 요동치며 스키드 마크를 그으며 멈춰 섰다.하백진은 하현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이 메시지 누가 당신한테 보낸 거야?!”하백진은 화가 나서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아마도 하구천의 측근일 가능성이 컸다.그렇다면 항도 하 씨 가문 내에 또 다른 세력이 하구천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순간 하백진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마침 하현을 찾아온 것이 뜻밖의 성과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하현은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메시지를 보낸 사람, 하구천 아닌가요?”“내
”하구천 곁에 첩자가 잠복해 있는 게 분명해. 이 일은 우리가 확실히 조사해서 당신한테 설명할게.”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하백진의 얼굴에는 어느새 매섭고 사나운 기운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살뜰한 미소만 남았다.“하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당신이 믿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하지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당난영한테 양자를 들이지 말라는 그 조건 철회하면 안 될까?”“하구천은 당난영의 든든한 아들이 될 수 있어.”“당난영은 지금처럼 들어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편안하게 살 수 있어.”하현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부인, 당신은 도대체 자신의 매력에 너무 과신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나라는 인간이 여자를 본 적도 없어서 여자라면 침이나 흘리는 색마처럼 보여요?”“진한 향내를 풍기고 너른 바다를 보여주고 말 몇 마디 하면 날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원하는 게 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손도 안 대고 코 풀려는 도둑놈 심보 아니냐고요?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셨군요.”하현의 말을 들은 하백진은 사뭇 애처롭고 가엾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하현, 내가 절대 헛수고가 되지 않게 할게.”“당신은 가서 당난영한테 말만 해 주면 돼.”“그리고 당신, 다시는 하구천과 맞서지 않겠다고 맹세해!”“그렇게 한다면 당신과 우리 사이의 모든 원한은 이걸로 청산되는 거야. 약속해!”“앞으로 항성과 도성에서 당신은 우리의 귀빈이 되는 거야. 당신이 가고 싶은 대로 가면 돼.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거야!”“또한 천억 줄게!”“그리고 별장도 한 채 줄게!”“용전 항도의 모든 비밀 커넥션 다 당신한테 넘겨줄게. 당신이 철저히 용전 항도를 장악할 수 있도록 말이야.”“돈, 지위, 권세, 다 줄 수 있어!”“하현, 제발 도와줘.”“심지어 당신이 다른 것을 원한다면 그것도 기꺼이 해 줄게!”하
”뭐!”하현의 말에 하백진은 정신이 멍해졌다.자신의 눈에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완벽한 항도 하 씨 가문 후계자가 하현의 눈에는 천하의 몹쓸 놈으로 비췄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하지만 하백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녀도 물러설 여지가 없었다.그녀는 하현을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당신이 말한 일들 모두 사실이야.”“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큰일을 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아선 안 돼.”“하구천은 부득이하게 그런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어.”“그가 후계자 자리에 오른다면 대하를 동남쪽 세력으로부터 굳건히 지켜줄 거야!”“그가 이런 야망과 애국심이 없다면 용전 전주 부인인 내가 어찌 이렇게 그를 도와주겠어?”“하구천과 나 하백진은 못 믿어도 용전은 믿을 수 있잖아, 안 그래?”“이것이 대하를 외부로부터 지키는 초석이자 대하에 충성을 표하는 초석이야!”“용전은 절대 틀리지 않아.”하백진은 말을 마치며 계속 몸을 앞으로 숙였다.얼굴 전체가 거의 하현에게 닿을 정도가 되었고 두 사람의 숨소리가 지척에서 느낄 수 있었다.달콤한 향내가 그의 얼굴에 퍼지며 그윽하게 내려와 가슴에 스며들었다.고혹적인 분위기와 그림 같은 이목구비가 남자라면 누구나 설렐 만했다.“하현, 내가 방금 제시한 조건들이 흡족하지 않다면 원하는 걸 말해도 돼.”“이 일만 해결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게.”“구천이만 후계자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어...”하현은 눈앞의 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아무래도 의아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하백진, 하구천의 고모 아닌가?고모가 조카를 위해 모든 걸 다 바치겠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하백진은 용전 전주 부인이다!항성과 도성에서는 지위도 매우 높았다.그런 그녀가 조카 때문에 이렇게 비굴하고 굽신거리며 부탁을 하다니!?이건
하현은 차량 행렬이 사라진 곳을 보다가 담담한 눈빛으로 하백진에게 시선을 돌렸다.“부인, 일부러 이런 겁니까? 나랑 당신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그런데 원하는 대로 다 됐는데 왜 날 계속 여기 가두려는 거죠?”“내 뒤통수를 친 뒤 찾아올 후환이 두렵지도 않습니까?”하현은 눈앞에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하현이 오늘 차에 탄 목적은 하백진을 함정에 빠뜨려 하구천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하백진도 의도적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려 당난영과의 취약한 동맹을 언제든 깨뜨릴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하려는 속셈이었다.참 요물 같은 여자라 할 수 있다.여자의 미색을 이용해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속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위 이런 속셈들이 하현의 눈에는 그저 아이들의 유치한 장난처럼 느껴져 언급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당난영이 이미 지나갔으니 지금 나가도 못 따라잡을 거야. 게다가 밖에 바람도 불고 비도 오니 까딱하다간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하백진은 자리에 앉아 여유로운 자태로 여전히 여색을 뿜어내고 있었다.오만한 눈빛으로 하현을 바라보는 하백진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운이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이런 방법이 먹히겠어요?”하현은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말했다.“당난영과 나의 관계는 원래 비즈니스 관계 같은 거예요.”“그녀가 내 조건에 동의한 이유는 내가 그녀의 마음의 병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십 년 전의 진실을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에요.”“당난영이 지금 그 자리에 앉게 된 건 순전히 그녀가 총명한 사람이기 때문이고요.”“우리 둘이 차 안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당난영이 본다면 그녀가 날 내치고 십 년 전 일을 조사하는 걸 멈추고 모든 것을 포기할 거라고 당신은 생각했겠죠.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정말로 순진한 사람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군요!”하백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난영은 항도 하 씨
”증거가 있습니까?”하현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당신과 내가 차를 한 번 같이 탄 것이 열애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당신의 넷째 오빠는 어쨌든 항도 하 씨 가문 문주인데 그렇게 순진하겠어요?”“믿을 거야.”하백진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넷째 오빠는 날 아주 싫어하지만 항도 하 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건 못 참지.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이 가문의 명예거든.”“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불며 하소연한다면 어떨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놈이 날 더럽히려고 할 뿐만 아니라 당난영에게 불손한 의도로 접근했다는 것도 알게 될 거야. 그러면 그는 당연히 당난영을 의심하게 되지.”“조금이라도 증거가 있으면 당신을 죽이려고 들 것이고.”“그리고 하현, 이걸 알아둬야지. 내가 증거를 만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걸. 나한텐 식은 죽 먹기야!”“그렇게 되기 싫거든 당장 무릎 꿇고 빌든지 지금부터 하구천의 개가 되는지!”“아니면 죽음을 맞게 될 테니 딱 기다리고 있어!”하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백진에게 시선을 옮겼다.이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하백진, 똑똑하게 한다고 한 일이 결국 일을 그르친다는 말 알아요?”“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그런 당신이 내 앞에서 당신의 속셈을 다 털어놓는다?”“누굴 바보로 아는 겁니까?”“나를 자극해서 화나게 한 다음 내가 당신 뺨이라도 때리길 바라는 거죠?”“뒷좌석에 카메라 숨겨 놓고 있는 거 내가 눈치 못 챌 거라 생각한 거예요?”“아니면 당신과 하구천과의 상상을 뛰어넘는 관계를 내가 눈치 못 챌 거라 생각한 겁니까?”순간 하백진이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하현은 얼른 손을 뻗어 자동차 뒷좌석에 있는 동물 모양의 쿠션 하나를 집은 다음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뜯어 버렸다.그러자 쿠션 속에서 툭 하고 초소형 카메라와 녹음펜이 떨어졌다.“사랑하는 사람을
30분 후, 하현의 일행과 양호남의 일행이 양 씨 가문 장원의 대청에 모였다.양 씨 가문 장원은 산과 물을 따라 지어져 있었으며 남양 지역 특색의 건축 양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대하의 강남 스타일과 북유럽의 건축양식이 잘 어우러져 건축가의 웅장한 이상과 포부를 엿볼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지금 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은 이미 위태로워져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대청홀은 200평방미터 가까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귀한 침향목 의자가 놓여 있었다.양옆에는 황화목으로 만든 의자가 늘어져 있어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하현 일행이 자리를 잡자마자 뒤쪽에서 일련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대여섯 명의 남녀가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을 둘러싸고 걸어 나왔다.이 노부인은 몸집이 약간 작고 등이 구부러져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전체적으로 매우 야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꼿꼿하게 날이 서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외부인인 하현에게 떨어졌다.마치 예리한 침으로 정곡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라 하현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은 양 씨 가문 안주인이자 양제명의 아내였다.곧이어 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자손들이 나타났다.그들은 모두 구석에 서서 기웃거렸다.다만 하현과 양유훤 두 사람을 바라볼 때는 눈에서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 몇 명은 양유훤이 머리가 나쁘거나 안목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입을 삐죽거렸다.하현처럼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을 데려오다니!그녀들은 양 씨 가문은 절대 양유훤이 데려온 저 남자를 데릴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들의 고귀한 가풍이 더럽혀지면 안 될 일이다!“할머니!”양호남, 양신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노부인은 이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의자에 가서 앉았다.그런 다음
하현은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성격상 이런 굴욕적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양유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들은 할아버지의 목숨을 가지고 날 위협하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양호남 일행에게 차가운 눈빛을 떨어뜨렸다.양 씨 가문 사람들이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만약 자신이 떠났더라면 양유훤 혼자 저들에게 마음대로 휘둘렸을지도 모른다.하현의 눈빛을 본 양호남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뭘 봐? 우리 집안의 손해가 이렇게 막대한데 대가를 치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연한 거야!”“양호남의 수법이 다소 과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잘못은 양유훤이 한 거야!”염소 수염을 한 양 씨 가문 어른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우리 양 씨 가문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아!”“어렵게 페낭 무맹과의 협력을 이뤄냈는데 양유훤 때문에 망치게 생겼어!”“난 방금 전까지도 양유훤을 살짝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어!”“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는 거리낌 없이 사람을 때렸어!”“이런 남자를 선택하다니 앞으로 양유훤이 어떻게 되겠어?”“아주 개념 없는 연놈들이야!”“우리는 어서 양유훤을 양 씨 가문에서 출가시켜 다시는 우리 가문의 체면을 구기지 못하게 해야 해!”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양유훤은 눈살을 찌푸렸다.자신 때문에 페낭 무맹의 납품권이 사라지게 된 것에는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수혁에게 시집가라고 강요하고 양제명을 독살하려 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호남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수백억의 납품권을 위해서.”“집안사람을 강제로 시집보내고.”“그것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독살하려 했어.”“양 씨 가문은 정말 단결력이 강하고 우애도 깊군.”“뭐라고!”양호남의 안색이 살짝 변하며 흠칫했다.“할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니?!”“우린 사람을 보내 할아버지를 돌보게 했을 뿐이
양유훤을 다독인 후 하현은 양호남에게 냉담한 시선을 떨어뜨렸다.이제야 하현은 양유훤이 왜 자신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안사람들의 천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라도 하현이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개자식! 어디서 튀어나온 망나니 같은 놈이 감히 우릴 때려?”이때 양신이가 정신을 차리며 얼굴을 가린 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죽여버릴 거야!”“당신 같은 연놈들은 칠흑 같은 감옥에 갇혀 평생을 고통스럽게 썩어야 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구!”“아하, 당신이 양유훤이 말한 그 남자 맞지?”양호남도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나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이 개자식아! 여자는 수치도 모르고 남자는 제멋대로구만! 짐승만도 못한 것들!”양호남은 하현을 죽이기 위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하현의 행동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 알고 있어서 그저 하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됐어! 이 개 같은 연놈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해 봐야 소용없어. 관청에 보고하고 그들을 끌어내면 돼!”머리를 풀어헤친 양신이도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렀다.“내가 저 연놈들을 가만히 두면 성을 갈겠어!”“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하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을 뻗어 양유훤의 몸에 몇 개의 혈을 짚으며 그녀의 상처와 통증을 완화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유훤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동안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그녀는 원래 하현이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하현이 이미 이곳에 나타났으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이렇게 된 이상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하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어젯밤에 양유훤이 당신 같은 뻔뻔한 남자를 위해 여수혁을 다치게 했어!”“오늘 아침, 여수혁의 아버지이자 페낭 무맹의 부맹주이신 여영창 어르신이 우리 양 씨 가문을 찾
”개자식!”자신의 여동생이 뺨을 맞고 날아가는 것을 본 양호남은 욕설을 퍼부으며 반사적으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매서운 표정으로 양호남의 목을 조른 뒤 그의 머리를 눌러 가장자리에 있던 대리석 테이블 위에 찧어 버렸다.양호남은 저절로 절을 하는 꼴이 되었고 ‘퍽'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의 찻잔이 그대로 으스러졌다.양호남의 머리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하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호남을 발로 차 내동댕이쳐서 날려버렸다.한쪽에 서 있던 양 씨 가족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이때 그중 한 명이 의자를 들쳐업고 하현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눈길도 주지 않고 손바닥을 날려 그를 내동댕이쳤고 뒤이어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손바닥을 날려 쓰러뜨렸다.이 모든 것이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사람들과 그들의 경호원들이 얼굴이 붓고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어이, 젊은이, 당신이 어떤 경력이 있든 어떤 묘수가 있든 간에!”“이곳은 양 씨 가문 땅이야!”“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이라구!”“개나 소나 다 마음대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구!”전통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셋째 집안 어른이 나서서 의젓한 표정으로 하현을 호통쳤다.“우리 사람을 때리고 다치게 하다니! 도대체 당신 눈엔 법도 뭣도 안 보이는 거야?”“이 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당신...”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은 셋째 집안 어른의 잔소리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손바닥을 휘갈겼다.“양호남 무리들이 손찌검을 할 때는 왜 제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는 법 운운하시겠다?”“지금 뛰쳐나와서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현의 말에 이번에는 수염을 기다랗게 기른 또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양호남은 뻔뻔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안사람들을 혼내려 했을 뿐, 그 방법이 좀 과격하다고
”빨리 대답해!”양신이가 또 채찍을 휘둘러 양유훤을 때렸다.양신이의 눈에는 질투와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예쁜 양유훤을 미워했다.오늘 이렇게 양유훤을 혼내줄 기회를 잡았으니 양신이가 어찌 사정을 봐주겠는가?“어서!”또 한 번 채찍에 맞아 비틀거리던 양유훤은 거의 똑바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박또박 대꾸했다.“난 여수혁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뜰을 둘러보았다.양제명이 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양제명의 회복을 방해라도 한다면 결과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게 된다.“왜? 아직도 저 늙은이 걱정할 시간이 있어? 그럴 시간에 당신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양신이는 양유훤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냉소를 흘렸다.그리고 양유훤에게 다가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곧 누군가가 노인네한테 약을 먹일 거야.”“늙은이가 죽은 뒤 우린 그 누명을 당신한테 뒤집어씌우면 돼. 하하하!”양신이가 악마처럼 웃어젖혔다.“네가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네의 말로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게 다 너, 양유훤 너 때문이라고!”양유훤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함부로 행동하지 마. 당신들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야!”“할아버지?”양호남은 코웃음을 지으며 포악한 얼굴로 양유훤을 향해 또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노인네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야?”“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신이지 폐인이 아니야!”“우리 양 씨 가문은 당신을 포함해 폐인은 다 버릴 수밖에 없어!”“자, 승낙을 할 거야? 말 거야? 승낙하지 않는다면 노인네는 이대로 죽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전
양유훤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그 이후에도 양호남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휘날렸다.이 광경을 보고 양호남이 데리고 온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양유훤은 정말 남한테 피해를 입힌다니까. 이전에도 시집가기 싫어 멀리 항성과 도성에 가서 우리 양 씨 가문을 곤란하게 했지!”“이제 와서 또 우리 가문을 죽이려 하다니! 절대 가만둘 수 없지!”“여영창 어르신도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나셨어. 만약 그가 우리 가문과 페낭 무맹의 모든 거래를 끊는다면 우리 집안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거야!”“양유훤이 이 일을 다 책임질 수 있겠어?”“집안 큰집이라고 아주 떠받들어 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결국 이렇게 우리 집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어!”양 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했다.가문의 권력을 대표하는 몇몇 장로들은 양유훤의 행동에 단단히 실망한 듯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양유훤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납품권은 내가 해결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줘.”“당신이?”“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야? 당신 얼굴로? 아니면 몸으로?”양유훤이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호남은 아주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그는 양유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고 옥처럼 고운 양유훤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결국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었다.“이번에 당신이 남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양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어. 당신이 큰집을 대표하여 우리 가문의 권세를 되찾고 다시 남양 3대 가문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어!”“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 가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어!”“이 일에 대한 해결책은 내가 이미 다 생각해 뒀어!”“당신이 여수혁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여 씨 가문은
”야비한 남자 때문에 여수혁에게 미움을 사다니!”“야비한 놈을 우리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감히 말하고 다녀?!”“당신 부끄러움도 몰라?!”“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양호남이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당신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페낭의 웃음거리가 된 걸 알기나 해?!”여기까지 말하며 양호남은 더는 못 참겠는지 양유훤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양호남의 말에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양유훤은 갑자기 뺨까지 맞게 되었다.조각처럼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바닥 자국이 크게 생기더니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이를 본 양신이와 몇몇 그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한결같이 통쾌해하는 표정이었다.“양호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당신이 일부러 나서서 날 가르칠 필요는 없어.”양유훤은 밀려오는 고통과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분명 양 씨 가문 둘째와 셋째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호남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우리는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잘 들어. 오늘 아침 여 씨 집안사람이 우릴 찾아왔어!”“페낭 무맹 부맹주 여영창 어르신이 직접 사랍들을 이끌고 우리 양 씨 가문을 찾아와 해명을 하라고 했어!”“똑똑히 들어. 이 일은 네가 우리 양 씨 가문을 대표해 반드시 여 씨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해!”“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양유훤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순전히 나를 노리고 한 일이니 여 씨 가문은 나를 직접 찾아와 결판내면 될 일이야.”“셋째 집안과는 무슨 상관있어?”“뭐 더 할 말 있어?”양호남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여 씨 가문은 이 일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페낭 무맹 납품권을 끊어버리려고 한다고!
하현은 그윽한 눈동자로 양유훤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돌아가는 정세가 그렇게 복잡해? 복잡해서 날 지킬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날 내쫓으려는 거고?”“아니면 내가 페낭에 남아서 당신 밥그릇이라도 한몫 챙길까 봐 그러는 거야?”양유훤은 하현을 바라보고 잠시 후 담담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라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할아버지를 이 정도로 회복시켜 준 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야.”“다른 소소한 일은 더 이상 당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일등석 세 장이야.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 당신한테 페낭에 한 번 더 오라고 초대하면 그때 반드시 이 은혜를 다 갚을게.”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하현 앞에 봉투를 놓으며 깊은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보다 돌아섰다.양유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현은 손을 뻗어 봉투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날 여기 두고 싶지 않은가 봐. 정말 재미있군. 내일 아침에 우리 같이 어르신 뵈러 가자구. 그때 모든 게 다 정상이라면 돌아갈게.”말이 끝나자마자 하현도 돌아서서 성큼성큼 병원을 나섰다....다음날 정오, 양 씨 가문 별채.별채 입구에 선 양유훤은 페낭 국제공항 쪽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바로 그때 양 씨 가문 별채 정문 앞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이어 짙은 녹색 랜드로버 오프로드 차량이 선두에 섰고 뒤따라온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정문 앞으로 무작정 돌진해 와 정성껏 가꾸어 놓았던 화단을 으스러뜨렸다.그러자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가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왔다.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선두에 선 남자
양유훤의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남들은 당신을 쓰레기네 뭐네 하지만 난 원래부터 믿지 않았어.”“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사람을 꼬시고는 이내 도망쳐 버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하현은 입가를 쌜쭉거리며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놀림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모두들 아름다운 여자의 친절함과 관심에는 참아낼 재간이 없다고 말한다.양유훤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타입은 하현이 절대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자 하현은 애써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방금 여수혁과 당신이 하는 대화를 대충 들었는데 양 씨 가문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남양지역에서 페낭을 중심으로 양 씨 가문은 남양국 황실 다음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3대 가문이야.”양유훤도 더는 숨길 뜻이 없었다.“이 씨 가문, 원 씨 가문 그리고 우리 양 씨 가문.”“이 외에도 무맹과 수많은 일류 가문들, 그리고 기타 중소 세력들이 남양에서 혼란스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어.”“수십 년 전에는 우리 양 씨 가문과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의 3파전으로 남양국은 확고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어.”“각 세력도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지.”“고고한 황실은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고.”“우리 세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황실도 무너지지 않고 공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우리 세 가문이 계속 각축을 벌이는 한 황실의 막대한 이익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이 모든 게 우리 할아버지가 전신이 되고 나서 달라졌어.”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양 씨 가문이 치고 나왔군, 그렇지?”양유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슷해.”“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고 양 씨 가문에서 전신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 씨 가문과 원 씨 가문을 제압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