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그게 가당키나 해?”맹인호는 최문성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한껏 비꼬다가 갑자기 수류탄을 꺼내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당신이 이걸 삼켜 버리면 허민설을 대신해 내가 약속하지. 당신이랑 화해한다고!”막무가내인 맹인호의 행동을 지켜보던 하현의 눈 밑이 소리 없이 파동을 일으켰다.이어 그의 시선은 포도송이처럼 수류탄이 매달려 있는 맹인호의 허리춤에 떨어졌다.흑주에서 돌아왔으니 맹인호의 몸에 이런 물건이 달려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긴 했다.맹인호는 모든 사람들을 화염 속에 빠뜨리는 것도 모자라 자신도 그 불구덩이 속에 허우적거릴 것이 정녕 두렵지도 않는 것인가?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들도 이런 맹인호의 행동에 놀라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몇 명 아리따운 여자들은 핏기를 잃은 얼굴로 맹인호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다.살기를 띠고 있는 이런 남자는 아무 생각 없는 여자들에게는 몹시 매력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모양이다.여자는 항상 강한 남자에게 끌리게 마련이다.최문성은 맹인호가 그런 행동을 보이건 말건 무시하며 시선을 허민설에게 던졌다.“내가 말했잖아. 화해를 청하러 왔다고.”“듣자 하니까 강옥연을 납치했다던데. 그래서 내가 그녀를 구하러 온 거야.”“내 체면을 봐서 강옥연을 좀 풀어줬으면 좋겠어.”“뭐? 강옥연?”“지금 당신 강 씨 집안의 그 강옥연 말하는 거야?”허민설이 냉랭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제 발로 돌아다니는 강옥연이 어떻게 나한테 있을 수 있겠어?”“게다가 뭐? 강옥연을 풀어줘?”“최문성. 말을 할 때는 머리를 잘 써서 해야 해. 먹는 음식은 함부로 먹어도 되지만 말은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거야.”“허민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잘 알 거야.”최문성은 물러서지 않고 밀어붙였다.“고아신은 이미 우리 손에 넘어왔어. 우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왔다고...”허민설의 눈동자에 매서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고아신이
최문성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허민설에게 뺨을 맞았다.찰진 소리가 귓전에서 쟁쟁거렸다.그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떠올랐고 이를 악물고 참아왔던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허민설!”최문성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때 갑자기 사방팔방에서 십여 명의 허 씨 가문 경호원들이 달려들었다.경호원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총기가 들려 있었고 모두 최문성의 이마를 가리키고 있었다.그가 경거망동하는 순간 이 경호원들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하현과 동리아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다.“내 이름, 당신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야!”“가당키나 해?”허민설이 마뜩잖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당신네 최 씨 집안은 단지 평범한 상류층 가문에 불과해. 당신 누나가 용전 항도 지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세상을 다 가진 줄 아는 모양이지?”“당신네 최 씨 가문은 화 씨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니야. 분수를 알아야지!”“예전에는 화 씨 가문을 등에 없고 기고만장하더니 이제는 하현이야? 하현이 뒤에 딱 있다 생각하니까 없던 용기도 생기고 그래?”“최 씨 집안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이 난리야?”“잘 들어. 예전에 당신 집안과의 정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봐 주는 거야. 안 그랬으면 벌써 당신은 총 맞아 죽었어!”“아직도 내가 당신 체면을 세워 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야 해?”“말 같지도 않은 소리!”어젯밤 하현에게 뺨을 맞은 후 허민설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오늘 허지강과 함께 이런 판을 벌인 건 하현을 수세로 몰아넣어 어떻게든 칠 기회를 찾기 위해서였다.그런데 하현은 뒷전에 있고 최문성이 쓸데없이 나서서 이런 소란을 피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허민설의 마음속엔 분노로 가득 찼다.만약 뒷일이 걱정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최문성을 죽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얼굴을 찡그리며 옆에 서 있던 동리아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허민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모두
지척에서 허민설을 바라보는 최문성의 눈꺼풀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그의 오른손이 움찔움찔했지만 끝내 손을 쓰지는 않았다.그는 어떻게 해서든 감정을 억누르려고 안간힘을 썼다.“찰싹!”최문성이 손을 쓰지 않고 화를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 허민설은 다시 손바닥을 휘둘러 이번에는 최문성의 다른 쪽 뺨을 때렸다.“쓰레기 같은 놈! 천하의 쓸모없는 놈! 당신은 전설의 병왕이 아니라 그냥 종이호랑이일 뿐이야!”“여자한테 맞아도 아무것도 못하면서!”“감히 체면은 무슨 체면?”“체면이란 게 당신한테 있기나 해?”허민설은 눈앞에 있는 최문성을 향해 극도로 경멸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항성과 도성을 이끄는 젊은 세대 중 한 명이었지만 자신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것이었다.이런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여야 속이 시원할까?죽어야 이 분통이 사그라질까?최문성은 입가에 흐르는 핏자국을 무심히 닦으며 얼굴을 가렸다.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지 얼마나 낭패스러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현장에 있던 남녀들은 이 장면을 보며 깔깔대며 웃었고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술잔을 마주치며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듯 흥미로워했다.일부는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기도 했다.누군가 처참히 당하는 꼴은 인터넷에 올라오기만 하면 바로 핫이슈감이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동리아가 입을 열었다.“허민설, 너무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허민설의 횡포와 맹인호의 세력을 보니 도저히 자신이 가진 힘과 인맥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진정 허민설의 기세는 대단했다.그녀의 세력과 역량이 대단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최문성도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온전히 당하고만 있는 것이다.“허민설, 우리 말로 풀어 보자고.”“당신은 항성 4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허 씨 집안 아가씨이자 미래에 항도 하 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잖아?”“나 최문성이 배짱을 부리는 날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그건 강 씨 집안의 지분이지 당신네 최 씨 집안 지분이 아니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설득한다는 거야?”“아니면 당신 뒤에 있는 배후가 이미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다른 사람한테 욕을 먹을망정 모든 것을 스스로 내걸었단 말이야?”허민설은 냉랭한 눈빛으로 최문성을 노려보았다.자신에게 달콤한 뭔가를 던져 주고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알아채려고 유심히 최문성의 표정을 살폈다.그러나 최문성은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허민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다시 한번 묻겠어. 당신 도대체 나와 이 거래를 이어갈 의향이 있는 거야?”허민설은 최문성에게 천천히 다가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이렇게 좋은 조건이라면 당연히 해야지. 하지만 아쉽게도 난 정말 강옥연을 감금하지 않았어!”“감금했더라도 당신 뒤에 있는 배후가 이렇게 통 크게 선심을 써서 강옥연을 데리고 가려는데 내가 직접 그 배후와 담판을 짓는 게 더 재미있지 않겠어?”“당신 배후에 있는 그 사람, 아무리 총명하고 배포가 크다고 해도 이 항성과 도성 바닥에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걸!”“그러니까 내 말은 그 사람, 너무 순진하다는 거지!”“나오지도 못하고 당신을 앞세워 담판을 지으려 하다니! 그냥 다른 사람 다 필요 없고 그 사람 나오라고 해!”허민설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오늘 이 모든 것은 결국 하현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하지만 하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쉽게 최문성과 거래를 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그녀는 하찮은 최문성 따위는 그녀와 직접 담판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최문성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허민설, 당신은 내 체면 따위 봐 줄 마음이 없다는 거지?”“당신 체면은 당연히 세워 줘야겠지.”허민설은 샴페인 잔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당신 체면을 봐서 고아신 일은 내가 더
”체면을 안 봐 주면 어쩔 건데?”“내가 또 당신 얼굴 때리면 어쩔 거냐고?”허민설은 천천히 소파로 돌아와 치마 사이로 하얀 허벅지를 드러내며 앉았다.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최문성을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굴욕을 계속 참아오던 당신이, 평화로운 담판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본색을 드러낼 준비라도 되어 있는 건가?”“아니면 이제 날 건드릴 작정이라도 한 거야?”“자자, 건드려 봐!”“최문성, 당신이 날 어떻게 건드리는지 똑똑히 볼게!”“당신 정말...”최문성이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였다.갑자기 뒤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잠시 후 제복 차림에 총을 멘 수십 명의 남녀가 나타나 장내를 가득 채웠다.제복을 입은 사람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모습으로 긴 다리를 움직이며 최영하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허민설, 우리 최 씨 집안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있는데 혹시 나 최영하한테 물어보고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거야?”“혹시 뒷일을 생각해 본 적 있어?”최영하는 말을 하면서 최문성에게 천천히 다가왔다.붉게 부풀어 오른 얼굴과 너덜너덜해진 그의 몸을 바라보며 최영하의 얼굴에 겨울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흘렀다.“오호! 최영하, 최 씨 집안 아가씨가 오셨군!”“왜? 요즘 용전 항도 지부를 맡더니 자기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지?”“머리에 총 맞았어?”“감히 금옥클럽에 와서 소란을 피울 생각을 하다니!”“감히 나 허민설과 대적하려 하다니 말이야!”허민설은 한껏 비꼬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하구천이 하 씨 가문 안주인 생신 일 때문에 잠시 바빠서 당신을 혼내주지 못했을 뿐이야.”“꼬리를 감추고 잠자코 웅크리고 있지는 못할망정 감히 내 앞에 와서 위세를 부리려 해?”“사는 게 지겨워?”“꺼져!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 얼굴 가죽을 싹 다 벗겨 버릴 테니까!”옆에 있던 맹인호도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거들었다.“최영하, 총
차갑게 얼어붙은 최영하의 눈에는 맹인호를 향한 분노로 들끓었다.맹인호의 행동은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은 행동이었다.그녀는 용전 항도 지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고 하현의 뜻을 이행하는 사람이었다.그런 그녀에게 누가 감히 함부로 뺨을 때릴 수 있는가?순간 최영하는 허리춤에 있던 총기를 빼내며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맹인호를 쏘아보았다.“맹인호, 당신이 보기엔 용전 항도 지부장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최영하의 말소리에 사방에 있던 십여 명의 부하들이 일제히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든 총기의 안전장치를 풀고 맹인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그러나 무력으로 위협하는 것은 맹인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최영하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은 무단으로 금옥클럽에 침입해서 허민설 앞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으면 누굴 건드리겠어?”“최영하!”“용전 항도 지부장님, 당신은 다른 사람을 이렇게 위협할 수는 있어. 하지만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어. 지금 최문성 하나 살려 보겠다고 이렇게 나선 거야?”“허세 좀 그만 부려!”최영하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아하니, 당신 나랑 한번 해 보자는 거로군.”“왜? 사람도 많고 총도 많으니 날 한번 건드려 보시지?”맹인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자! 총으로 어디 날 한번 쏴 봐!”“날 쏘지 못하면 당신네 최 씨 집안은 대대로 나의 노예가 되고 여자는 대대로 남자들의 노리개가 될 거야!”말을 마치며 맹인호는 자신의 외투를 풀어헤쳤다.그러자 그의 옷 안에 거무스름한 수류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이게 터진다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다.저런 위험한 것을 몸에 달고 다니다니!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얼어버렸다.수십 명의 용전 항도 지부 사람들과 경호원들은 모두 본
”하하하하!”“쓰레기는 쓰레기야!”“찌질하기는!”“당신들 지금 어떤 모습인지 좀 봐!”최문성을 비롯해 낭패한 얼굴로 얼어붙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맹인호는 험상궂게 웃었다.“이러면서 아직도 내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어?”“뭐? 나한테 그대로 돌아온다고?”“난 수류탄을 던지지도 않았는데 겁먹은 모습들이라니!”“정말로 내가 수류탄을 던지기라도 한다면 당신들은 울기라도 할 모양이군, 하하하!”“당신들 정말 못 쓰겠구만!”“최 씨 가문? 동 씨 가문?”“웃기지들 마!”“당신과 경쟁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인자가 될 수 있었던 거야.”“당신들이 우리와 대적할 만한 상대가 된다고 생각해?”“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맹인호는 말할 수 없는 오만함을 앞세워 최문성의 얼굴을 때리며 패악을 부렸다.임세인을 비롯한 여자들은 모두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거렸다.오늘 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동 씨 집안이든 최 씨 집안이든 항성과 도성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최문성은 사나운 맹수 같은 눈빛으로 맹인호를 노려보았다.오늘 밤 현장에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면 벌써 맹인호와 죽기 살기로 한 판 붙었을 것이다.“오늘 밤 당신들한테 충분히 기회를 주었는데도 당신들이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버틴다면 정말 국물도 없어. 나중에 우리한테 걸리기만 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맹인호는 한껏 비웃으며 말했다.“길에서 날 보거나 허민설을 보면 멀리서라도 도망쳐. 우리가 있는 곳에 동 씨 집안이나 최 씨 집안사람들이 나타날 자격 없으니까!”“안 그러면 나한테 혼쭐이 날 줄 알아!”“나 맹인호, 똑똑히 말했어!”“어서 고아신을 풀어주고 돈이나 보내!”“그렇지 않으면 바로 죽여 버릴 거야, 알겠어?”말을 하는 동안에도 맹인호는 탁자 위에 놓인 샴페인 병을 집어 들고 최문성의 머리를 탁 쳤다.맹인호는 최문성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항성 이 바닥에서 감히 나한테 정의네
”둘째, 당신이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스스로 뺨을 열 대 때리고 사과할 만큼 사과해. 그러면 오늘 일은 그냥 과거의 일로 묻을 거야.”“어떻게 할지는 당신이 선택하는 거야. 내가 끝까지 함께해 줄게. 어때?”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맹인호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맹인호는 순간 넋이 나간 듯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당, 당신 도대체 누구야?”그는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발로 걷어차 버리고 싶었지만 안전장치가 뽑힌 수류탄이 자신의 손에 있었고 그 손을 하현이 쥐고 있었다.만약 하현이 힘을 주기라도 한다면 맹인호의 손에 있던 수류탄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그 이후엔...모두가 가루가 되어 함께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이런 이유로 맹인호는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겠지, 안 그래?”하현은 담담하게 말을 하면서 손에 힘을 지그시 주었다.“정 못 고르겠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하현이 손에 힘을 주자 맹인호의 손가락뼈에서 찌직 소리가 났고 그의 손은 더욱 헐거워졌다.수류탄이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았다.“미친놈! 당신은 미친놈이야! 미쳤다구!”오만하기 그지없었던 맹인호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하현에게 손목이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맹인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터질 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소파 뒤에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허민설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극도의 공포가 가득 들어찼다.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극도의 공포감이 그녀를 압도했다.그녀는 누가 나타난 것인지 똑똑히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맹인호의 손이 풀리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죽음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살아 있더라도 사지 멀쩡한 채로는 살지 못할 것이다.“자! 다 같이 죽자구!”하현이 계속 힘을 주며 소리쳤다.맹인호는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