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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화

작가: 유나
“아율아, 나 이제 끊어야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윤아율과 전화를 끊고 나서도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권사현은 언제나 우아하고 배려심 깊으며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혼한 3년 동안 나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는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두둔했고 약속도 두 번이나 어겼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광경을 마주하고 말았다.

차은별은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권사현의 어머니 정미경도 함께 있었고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권사현은 그들 옆의 싱글 소파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나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물었다.

내가 다가가자 권사현은 몸을 일으켜 부드럽게 내 코트를 받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은별이를 보고 싶어 하셔서 데려왔어.”

그의 톤은 절제되어 있었다.

“그럼 나한테 말이라도 했어야지.”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게 네가 말했던 조율이라는 거야?”

권사현은 잠시 나와 눈을 맞췄다. 사과의 기색은 잠깐만 비쳤다. 그는 내 코트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제 이 상황은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차은별은 집주인인 양 태연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아, 연서 씨. 반가워요. 저는 어머니랑 얘기 나누고 있었어요.”

나는 차은별을 노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리고 왜 어머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

정미경도 고개를 들어서 나를 봤다. 하지만 표정은 차은별과 말할 때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왔니?”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차은별을 바라봤다.

“계속 얘기해 보렴, 은별아.”

나는 집에서조차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모욕감과 창피함이 밀려왔다.

권사현을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한 순간 무너졌다. 지금은 그가 차은별과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단순한 친구라면 어떻게 그의 어머니와 이토록 친할 수 있단 말인가?

“아, 제가 말씀드렸던 게요.”

차은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 그것도 일부러 내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사현이 생일을 축하하려고 외국에서 돌아왔거든요. 덕분에 오늘 연서 씨를 처음 봤어요.”

차은별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녀의 억지스러운 명랑함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나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그리고 어떤 태도로 권사현을 자기 남편이라고 주장했는지도 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래?”

정미경은 흥미롭다는 듯이 대답했다.

“재벌한테 셰프 아내라니, 조금 믿기 어려워요. 나쁜 뜻은 아니에요. 근데 요리사가 그다지 명예로운 직업은 아니잖아요. 재벌의 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도발적인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한쪽 눈썹을 올리고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사현 씨는 맨날 손님만 신경 쓰고 자긴 뒷전이라면서 불평해요. 하루도 빠짐없이 재벌 입맛 맞추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차은별은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아, 저는 연서 씨 업무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사현이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결국 저를 선택한 걸 어쩌겠어요.”

차은별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됐다, 연서야. 은별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정미경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겠죠.”

나는 비꼬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곧장 차은별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은별아, 이제 연서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원래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 어서 여행이 어땠는지 알려줘.”

나는 눈을 굴리며 소파에 앉았다. 이때 차은별의 말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어젯밤 여기에 도착했는데...”

어젯밤, 권사현이 일하러 간 시간이다.

그들의 대화는 배경음처럼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추려고 애썼다. 차은별은 내가 침묵하고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퍼즐이 맞춰진 순간 깨달음이 밀려왔다. 권사현은 어제 일하러 간 것이 아니라 차은별을 데리러 공항에 간 것이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왜 그는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천천히 결혼에 대한 의심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난 사현 씨를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걸까?’

이때 정미경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연서야, 내가 은별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하지? 은별이는 사현이랑 오래전부터 친구였어. 둘이서 특별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너도 은별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차은별과 잘 지내라니... 나는 그녀와 같은 방에 있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정신 좀 봐.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걸 내와야겠다.”

정미경이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차은별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장난기 어린 반짝임이 있었다.

“참, 연서 씨. 저랑 사현이 오랜 친구라는 얘기 했었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태연한 매력을 풍기며 흘러나왔다.

“저희는 유치원 때 만났어요.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죠. 그때부터 사현이는 20년 동안 저를 따라다녔어요.”

속이 뒤틀렸지만 나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20년이라... 권사현은 한 번도 내게 이런 얘기를 한 적 없었다.

차은별은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진짜예요! 사현이는 저를 정말 좋아해요. 제가 부탁하는 건 뭐든 들어줬죠. 저희 같이 연회에 간 적도 있어요. 사현이가 저희 이니셜을 버드나무에 새겨 넣은 게 그날이었을 거예요. 정말 낭만적이지 않아요? 그때는 정말 질투가 심해서 저한테 다가오는 남자들은 전부 쫓아냈어요.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았거든요.”

그녀가 과거 이야기를 할 때, 호기심과 질투가 뒤섞인 감정이 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나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말했다.

“전부 과거 얘기네요. 차은별 씨, 사현 씨는 지금 저랑 결혼했어요. 이건 뭐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에요.”

차은별의 미소가 잠깐 흔들렸지만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현이는 제가 출국하자마자 결혼했었네요. 흥미로운 시점이 아닌가요?”

“그만해, 은별아. 연서한테 할 필요 없는 말이야.”

권사현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내 시선을 살짝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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