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말할 건 말해야지. 지금도 차은별이 임신했다는 생각에 더 챙겨주는 걸 수도 있잖아. 너도 임신했다는 걸 알면 태도가 달라질 수 있어. 넌 어떻게 생각해?”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것 같지 않아. 사현 씨가 나한테 무관심해진 이유는 임신 때문이 아니야. 차은별 씨와의 과거 때문일 거야.”“난 아닌 것 같은...”“질문 하나 해도 돼?”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윤아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넌 여사친, 남사친 이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윤아율의 당황함은 얼굴에 완전히 드러났다
사흘 후.“좋은 아침이에요.”최나연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병실로 들어왔다.“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어요. 연서 씨 이제 완전히 회복돼서 퇴원해도 좋아요. 남편분이 퇴원 서류에 서명하면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내 얼굴에 즉시 미소가 떠올랐다.“감사합니다, 선생님.”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건강 잘 챙기세요. 집에서도 조심해야 해요.”침대 옆에 앉아 있던 윤아율이 내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네. 정말 잘 됐어.”나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러니까. 신난다.”이때 권사현이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짜증에 시달렸다. 차은별은 일부러 나에게 과시라도 하는 듯 권사현에게 과도한 애정 표현을 했다.그녀는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거나, 장난스럽게 그의 팔에 매달리고는 했다. 그 와중에 룸미러를 통해 비웃는 눈빛을 내게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사현아, 음악 좀 틀어줄래? 나 지루해.”그녀의 콧소리가 차 안의 침묵을 깨며 울려 퍼졌다.“뭘 듣고 싶어?” “고등학교 때 우리 자주 듣던 노래 있잖아. 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그 노래 이제 내 플레이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권사현을 바라봤다. 뭐라도 설명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나를 무시해 버렸다.‘이게 무슨 상황이야? 사현 씨가 나랑 상의도 없이 차은별을 집에 들이기로 한 거야?’“무슨 약속이냐고?”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단호하고 강경했다.“빨리 말해. 무슨 약속이냐고.”“말조심해.”권사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다가 차은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우리 전에 이미 얘기했잖아.”“무슨 얘기?”내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다른 사람을 우리 집에 들이는 거면 적어도 나한테 상의
“난 이해가 안 돼.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냥 밖에서 따로 살라고 하면 되잖아. 집 구하는 게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이야? 도대체 여기서 언제까지 살 생각인데?”“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나는 충격에 숨을 들이마셨다. 내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지금 장난하는 거지? 눈으로 보기에는 임신 5, 6개월 정도인 것 같은데, 앞으로 7개월이나 더 같이 살라는 말이야?”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더 높고 날카로웠다. 충격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그게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이번 한 번만 나를 믿어줘. 은별이가 종종 예민하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가벼운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을 떠보니 권사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녁 준비 다 됐어, 여보.”그는 따뜻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내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저녁?”나는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지금 몇 시야?”창문을 보니 밖은 벌써 어두웠고 방 안은 침대 옆 조명의 불빛으로 환했다.권사현이 웃으며 말했다.“너 네 시간이나 잤어. 너 원래는 잠이 별로 없지 않았어? 몸은 괜찮아?”“응, 괜찮아.”나는 재빨리 대답하며 침대에서 내렸다. 내가 최근 기운이 없고 자꾸 잠드는
내가 하려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이는 내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손은 거의 본능적으로 권사현의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그가 차에서 비밀번호가 내 이름이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정말인지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내 이름을 입력했더니 놀랍게도 휴대폰이 열렸다. 나는 메시지함으로 들어가 차은별의 메시지를 열어봤다.[샤워 끝났어?][끝나면 나랑 같이 있어 줄래?][왜 대답 안 해? 잠든 거야?][아니면 날 무시하는 거야?][권사현!!!]
내가 무심코 한 말에 권사현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팔은 굳어 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다. 순간 내가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였다.“아, 내가 실수로 네 샴푸를 썼나 봐.”권사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태연한 척 말했다.가슴이 쓰라렸다. 거짓말은 원래도 아픈 것이었지만 답을 알고 물었을 때 듣는 거짓말이 더 고통스러웠다.그의 몸에서 나는 샴푸의 향은 바닐라였다. 나는 바닐라 샴푸를 쓰지 않는다. 그 향은 차은별에게서 온 것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녀가 그의 어깨에
권사현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로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방금 그 소리 뭐지?”나는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모르겠어...”권사현은 대답하려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외치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은별아!”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거실에 도착할 때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뛰었지만 거실에서 본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차은별은 소파에 늘어져 태연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은별 씨, 뭐 하시는 거예요? 방금 그 비명은 뭐였어요?”나는 숨을 고르며 다급히
“진심이야?”윤아율이 전화기 너머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차은별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가!”사무실에 도착해 책상을 정리하자마자 나는 윤아율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듯했다.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솔직히, 차은별이 갑자기 화내면서 나한테 달려들 줄 알았어. 항상 자기 뜻대로만 하던 사람이 거절당하는 걸 처음 겪으니 정말 충격받은 것 같더라고.”“정말 잘했어! 이런 걸 더 자주 해야 해. 차은별에게도 세상은 자기 마음
“뭐라고? 끊었다고 했잖아!”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나한테 거짓말한 거야?”“아니야.”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그냥... 너랑 다투고 숨 좀 쉬고 싶었어.”나는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왔다.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흡연자였다. 하지만 내가 흡연을 싫어한다고 하자, 그는 금연을 약속했고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와의 다툼 때문에 다시 담배를 피운 것이다.“미안해.”나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그는 고개
권사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긴장감을 이어갔다.“방금 뭐라고 했어?”그는 충격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차은별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냐고 물었어.”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분명 내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
권사현은 어김없이 익숙한 다정한 남편처럼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연서야, 오늘도 집에 안 들어올 생각이야?”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사현아, 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내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왜? 아직도 화가 나 있어? 제발, 연서야. 집에 가면 내가 다 설명할게.”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
권사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차은별은 황급히 손을 떼고 돌아섰다. 차가웠던 눈빛은 순식간에 따스함으로 변했고 그녀의 이런 태도 변화는 언제 봐도 놀라웠다.“별일 아니에요. 연서 씨가 이제 막 도착해서 많이 걱정했다고 말하고 있었어요.”차은별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서야?”권사현은 내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말했다.“너 때문에 정말 걱정 많이 했어.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그냥 안전한 곳에 있었어.”나는 권사현의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율 씨한테 연락했는데 너랑 같이 있지 않다고 해
------시간은 어느덧 월요일이 되었다. 월요일은 새로운 업무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나는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윤아율이 준 옷까지 입고 준비를 마쳤다. 윤아율은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필요한 신분증을 챙길 예정이었다.집 근처에 도착해서 나는 속으로 권사현이 출근했기를 기도했다. 나는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우리의 결혼 생활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지만, 아직 그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냥 집에 잠깐 들러 아무 방해 없이 옷만 갈아입고 나가고 싶었다.차은별은 아마 집에 있을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이 없는 날이라 정말 감사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뒤 TV를 보는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었다. 윤아율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연서야.”그녀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옆 소파에 앉았다.“무슨 생각해?”나는 그녀를 한 번 흘끗 보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끝난 거야?”이 질문은 윤아율이 새벽에 일어나 집 입구 양옆에 있는 꽃들을 다듬고 있었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일을 다 끝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응. 이제 꽃들이 훨씬 깔끔해졌
나는 윤아율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멈췄다. 그러다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거 농담이지?”“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윤아율이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이혼이라...’나는 그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비현실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내가 이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 결혼에 모든 걸 쏟아부었고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말이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아니야, 그건 말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