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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화

Author: 유나
차은별은 권사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을 되새기며 충격에 빠진 채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아려왔다. 차은별의 말 때문만이 아니라, 그 말을 권사현이 아닌 차은별에게서 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나는 권사현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지나쳤다. 그가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연서야, 내 말 좀 들어줘.”

권사현이 내 손을 잡으려고 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을 툭 쳐내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맺힌 채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지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이때 내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권사현이었다.

[미안해.]

나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잠들었을 때조차 뒤숭숭한 꿈이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보니 내 곁은 텅 비어 있었다. 그건 곧 어젯밤 권사현이 여기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늘 그렇듯 손님 방에서 잤을 것이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그랬으니까.

‘설마 차은별이랑 같은 방에서 잔 거 아니야?’

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잠시 그런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최근 일들로 권사현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권사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준비를 마친 다음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권사현이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 좋은 아침.”

나도 쿨하게 대답하려고 애썼다.

“연서야, 어제 일 말인데...”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쩌면 너무 차분했다.

“은별이가 첫 임신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나름대로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은별이도 너한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야.”

나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다른 여자를 두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야 나도 임신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임신한 것도 알고 있을까? 당연히 모르겠지. 난 차은별한테 밀려나서 소식을 전할 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한 거짓말을 그냥 넘기라는 거야? 네가 한밤중에 날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갔다는 것도?”

그는 한숨을 쉬며 약간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거짓말한 게 아니야. 밤은 회사에서 보냈어. 은별이를 데려온 건 그냥...”

“여기가 편하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둘이 친군지 뭔지 난 상관없어, 사현 씨. 근데 나한테 숨기는 건 다르지. 난 이제 사현 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오해했어, 연서야. 난 네 곁에 있어.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출근할 거야. 오늘 집에 돌아왔을 때는 차은별 씨랑 마주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 말 이해하지?”

직장에서의 하루는 특별한 일 없이 요리와 청소로 지나갔다. 마침내 퇴근 시간이 되어 사무실에서 정리를 하고 있을 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내가 물었다.

“저 다빈이에요.”

내 후배 셰프 강다빈이 대답했다.

“엄청 잘생긴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잠시 멈칫했다.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나?’

나는 급히 가방을 챙겼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지금 나갈게요.”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권사현이었다. 그는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입구에 서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실화야? 이제 와서 다정한 남편 코스프레라도 하려고? 그 얼굴에 내가 또 넘어갈 줄 알아?’

나는 금세 마음을 가다듬고 강다빈을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기대했던 훈남은 아니네요. 정말 유감스럽게도 저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강다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권사현이 이곳에 처음 온 건 차은별 때문이었으니 직원들이 모를 만도 했다.

권사현은 가까이 다가오며 미안한 기색을 띤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권사현 씨. 여긴 무슨 일이세요?”

“사과하러 왔어.”

내 비아냥에도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은별이 얘기를 진작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내가 잘못했어, 연서야. 날 용서해 줄 수 있을까?”

그는 꽃다발을 내려다본 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주말에 우리 좀 쉬러 가는 건 어때? 우리가 처음 같이 꾸민 집으로.”

그가 언급한 집은 우리가 결혼 후 함께 선택하고 꾸민 펜트하우스였다. 그 집이 언급된 순간 내 마음은 순식간에 약해졌다. 그곳은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래, 같이 가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차를 타고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차 안의 공기는 최근 계속 맴돌던 긴장감에서 벗어난 듯했다. 나는 권사현을 바라보며 괜히 한마디 했다.

“그래서... 차은별 씨를 20년이나 짝사랑했어? 개인적으로 난 사현 씨 취향이 결혼한 뒤에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해.”

권사현은 나를 힐끗 보며 장난스럽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너 조심해. 오늘 밤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니까.”

나는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은 짓궂었지만 긴장감이 사라진 후의 분위기는 아주 가벼웠다.

한 시간 후, 우리는 고급 단지 내 펜트하우스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우리 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권사현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거 봐.”

나는 창문에 비친 불빛을 가리켰다. 권사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 우리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 불을 안 끄지 않았겠지.”

내가 말을 보태려고 할 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밝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차은별이었다.

나는 권사현과 눈을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놀라서 넋이 나가 있었다.

“차은별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차은별은 태연하게 말했다.

“진정해요, 연서 씨. 사현이 어머니가 주소를 알려줘서 왔어요. 제가 새집을 구할 때까지 여기 머물라고 하셨어요. 임신 중이니까 편안한 환경이 필요하다면서요.”

“차은별 씨는 여기서 지낼 자격이 없어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여긴 내 집이에요. 차은별 씨가 무슨 권리로 오는 건데요?”

차은별은 머리를 기울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제가 실수했나요? 저도 두 사람이 여기에 올 줄은 몰랐죠. 미안해요. 바로 나갈게요.”

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아낼 수 없는 사과였다.

권사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선 들어가서 얘기하자, 연서야.”

그는 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나는 차은별을 노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서 권사현은 차은별을 향해 돌아섰다. 목소리는 침착하지만 단호했다.

“여긴 나랑 연서한테 특별한 곳이야. 우리 둘만의 기억이 있는 곳이라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을 들일 수는 없어.”

차은별은 과장되게 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해해.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지금 당장 나갈게...”

권사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냥 여기 있어. 임신한 애가 어딜 나가려고 그래. 정리는 내일에 하자.”

차은별은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정말 안 그래도 돼.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싫어.”

“제발 말대로 해줬으면 좋겠네요.”

내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권사현은 고개를 저으며 차은별에게 천천히 말했다.

“네 잘못 아니야. 내일 다시 얘기하자.”

그는 다시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치, 연서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상황을 해결하기보다는 더 악화시키는 듯했다. 대신 나는 말없이 집 안 깊숙이 걸어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익숙한 방들을 둘러보던 중 무언가 눈에 띄었다. 방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내가 권사현과 함께 고르고 배치했던 장식들이 바뀌어져 있었다.

가구들은 재배치되었고, 낯선 물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차은별이 여기에 오래 머물며 내 집을 자기 공간처럼 꾸민 게 분명했다.

화를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거실로 돌아가 그녀와 맞서기로 결심했다. 내가 다가가던 중, 차은별이 기뻐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손에 꽃다발을 든 채 권사현에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던 꽃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정말 감동이야, 사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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