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서는 설강민의 옆에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긴 설강민도 마찬가지였다. 창피한 것인지 설강민은 옆에서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래층으로 끌려가며 김현서는 무의식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설강민!”“설강민, 너 정말 내가 이대로 쫓겨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설연주와 엮이면서 김현서는 단 한 번도 설연주를 상대로 져본 적이 없었다. 김현서에게 있어 설연주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한편, 설강민은 복잡한 얼굴로 계속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호원들이 모두 설강민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탓에 김현서를 구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시선을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각, 설연주는 이미 그녀의 방으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외부의 소란 따위 그녀를 방해할 수 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설강민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득 어쩌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생이지만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설강민의 뇌를 완전히 지배해버렸다.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 설강민은 설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들, 무슨 일이야?”“아버지가 설연주에게 권한이 준거예요? 지금 별장 안의 하인들이 모두 설연주의 말만 듣고 있어요. 아버지, 앞으로 이 집의 물건은 여전히 제 것이에요. 설연주는 그저 남일 뿐이라고요.”설강민의 불평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설준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비록 설준석 본인도 양아치 같은 짓을 많이 하고 다녔지만 최소한 설준석은 전체적인 상황과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운 아들은 기본적인 눈치도 볼 줄 모를 줄이야.“설강민, 설연주는 네 동생이야. 김현서야말로 남이라고. 팔꿈치는 안으로 굽어야지. 너 다시 한번 더 그딴 짓거리 하면 내가 정말 네 카드 다 끊어버릴 줄 알아. 김현서 그 여자가 너와 사귀어주는 이유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아?”설강민은 순간 말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네.”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
반승제 근처의 아우라는 마치 여름이란 겪어본 적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가지.”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문라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단정한 태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던 반제승가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성혜인도 따라 멈춰서서는 덤덤하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너 임경헌한테서 얼마나 받았어?”성혜인은 임경헌과 반승제가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반씨 일가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니 이것도 당연하였다.반승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그냥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사장님 말로는 2억 정도 한다고 했어요.”“이 짓거리를 하는데 사장도 있어?”반승제는 진심으로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문라이트에서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을 임경헌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또 몰랐다.어찌 됐든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고민하기에는 늦었다.반승제는 다시 몸을 돌려 룸으로 걸어갔고 성혜인도 묵묵히 따라갔다.“임경헌 말로 너희가 부르는 값은 높지만, 서비스는 확실하다고 했지?”성혜인은 그동안 많은 고객을 만나왔다. 대부분 사람이 다 부자라서 가격만큼은 충분하게 줬지만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을 듣자마자 기계처럼 대답했다.“반승제 씨, 가격에 관해서는 충분히 서비스와 정비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서비스와 정비례 한다라...’반승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면?”어색한 반응에 가만히 있을 줄밖에 모르던 성혜인에게는 서비스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수억 원을 주고 살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돈 벌기 참 쉬운 직종이군.’성혜인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제가 최
잠깐 놀란 건 사실이지만 성혜인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볼 걱정은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명절에도 반태승만 따로 만났기에 반씨 집안의 다른 가족들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반제승 본인도 자신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더 알 턱이 없었다.어두운 표정으로 떠난 반제승을 떠올리며 성혜인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반승제 씨는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요.”예쁜 여자라면 직업이고 뭐고를 떠나 사족을 못 쓰는 임경헌은 물씬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럴 리가요. 혜인 씨의 디자인은 제가 본 것 중 최고였어요. 저희 사촌 형이 경영을 배우는 동시에 예술도 배웠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보아냈을 거예요. 오늘은 그냥 이혼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 같아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양한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반승제 씨가 결혼했다고요?”임경헌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진작에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혼하느라 변호사랑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에요.”임경헌은 성인이 되고 나서 흥청망청 노느라 집으로 돌아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저 반승제에게 할아버지가 찾아준 아내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결혼 얘기를 처음 들은 양한겸은 궁금한 듯 계속해서 물었다.“저는 네이처 빌리지의 펜션이 신혼집인 줄 알았어요. 만약 신혼집이 아니라면 혼자 사시는 집인가요?”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와서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신혼집이기는 해요. 저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지금의 형수랑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이 집은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면 같이 살려고 준비하는 것 같아요.”임경헌은 이렇게 말하면서 성혜인에게 주스를 건네줬다.“형이 곧 다시 온다고 했으니, 그때 다시 혜인 씨의 설계도를 보여주자고요. 형도 무조건좋아할 거예요.”성혜인은 주스를 받아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제가 후에 꼭 밥 살게요.”임경헌은 성혜인의 당당한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
김현서는 설강민의 옆에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긴 설강민도 마찬가지였다. 창피한 것인지 설강민은 옆에서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래층으로 끌려가며 김현서는 무의식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설강민!”“설강민, 너 정말 내가 이대로 쫓겨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설연주와 엮이면서 김현서는 단 한 번도 설연주를 상대로 져본 적이 없었다. 김현서에게 있어 설연주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한편, 설강민은 복잡한 얼굴로 계속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호원들이 모두 설강민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탓에 김현서를 구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시선을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각, 설연주는 이미 그녀의 방으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외부의 소란 따위 그녀를 방해할 수 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설강민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득 어쩌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생이지만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설강민의 뇌를 완전히 지배해버렸다.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 설강민은 설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들, 무슨 일이야?”“아버지가 설연주에게 권한이 준거예요? 지금 별장 안의 하인들이 모두 설연주의 말만 듣고 있어요. 아버지, 앞으로 이 집의 물건은 여전히 제 것이에요. 설연주는 그저 남일 뿐이라고요.”설강민의 불평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설준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비록 설준석 본인도 양아치 같은 짓을 많이 하고 다녔지만 최소한 설준석은 전체적인 상황과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운 아들은 기본적인 눈치도 볼 줄 모를 줄이야.“설강민, 설연주는 네 동생이야. 김현서야말로 남이라고. 팔꿈치는 안으로 굽어야지. 너 다시 한번 더 그딴 짓거리 하면 내가 정말 네 카드 다 끊어버릴 줄 알아. 김현서 그 여자가 너와 사귀어주는 이유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아?”설강민은 순간 말
설연주는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두운 눈빛은 쉽사리 감출 수가 없었다. 설강민이 나쁜 놈인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설연주에게는 거의 밑바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마 설씨 가문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진즉 찌꺼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것이다.그런데 누가 또 환생시켜 주겠는가?결국, 인생은 운이었다.설준석이 떠나고 설연주는 다시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 막 침대 위에 누웠는데 저 멀리 김현서의 목소리가 또다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보아하니 오늘도 찾아온 모양이다.관계를 끝마치고 김현서는 또다시 설연주의 방문 앞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예전이었다면 절대 상대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설연주는 방문을 열고 냉담하게 씩씩거리는 김현서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김현서가 팔짱을 끼며 설연주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나 지금 배고파. 빨리 요리해줘.”“네가 직접 해.”“이 년이!”화가 치밀어 오른 김현서가 손을 들어 올려 설연주의 뺨을 향해 내려쳤지만 그 손길은 설연주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가로막히고 말았다.이윽고 설연주는 발을 들어 올려 김현서의 배를 거세게 가격했다. 힘이 얼마나 센 것인지 김현서는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반 미터 정도 날아가 버렸다.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김현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과거 순순히 뺨을 맞고 개 짖는 흉내를 내라면 그대로 따라 하던 진연주는 어디 갔단 말인가?‘감히 나한테 손을 대?’“너 죽고 싶어? 어디 감히 나한테 발길질이야!”혼쭐을 내주기 위해 김현서는 다급히 바닥에서 기어올랐지만 설연주는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짝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깜짝 놀란 설강민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자신의 침실에서 달려 나와 물었다.“무슨 일이야?”“흑흑흑, 강민 씨, 저 천박한 년이 감히 나한테 손찌검을 했어.”설강민이 나타나자마자 김현서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그에게
설연주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준석 역시 이미 집에 들어와 있었다.웬일로 멀쩡하게 차려입은 설준석은 설연주를 보자마자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연주야, 네 설의종 삼촌이 방금 전화를 주셨는데 주식 양도 건은 일주일 안에 처리될 거라고 하시더구나.”곧이어 설연주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준비된 진수성찬을 보고 마침내 설준석이 갑자기 그녀에게 친절하게 구는 이유를 알아냈다.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설준석은 설연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식탁 앞에 직접 앉혀주었다.“앉아, 어서 앉아. 넌 앞으로 이 큰돈을 어떻게 쓸 예정이니?”설준석의 물음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나약한 기색이 역력해졌다.“저, 제가 직접 이 돈을 기획해도 될까요? 하지만 현서 언니가 이 돈은 언니가 갖고 싶다고 했거든요.”김현서의 존재라면 설준석 역시 대충 알고 있다. 설강민의 오래된 여자친구이고 가끔 별장에서 부딪힌 적도 있었다. 깊게 알아보지 않아도 욕심이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설준석 본인도 비록 쓸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자들의 목적에 대해서라면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런데 설연주의 말까지 들으니 설준석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아직 시집도 오지 않은 남이 감히 설씨 가문의 지분을 탐내? 어림도 없지.“김현서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든?”“네. 어젯밤에 별장에 왔는데 엄청 흉악한 어투로 절 협박했어요. 아버지, 언니가 절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떡하죠?”“김현서 쟤가 무슨 자격으로 너한테 그런 말을 해? 김현서 그 여자는 아직 시집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연주야, 겁먹지 마. 이 일은 내가 반드시 잘 처리해둘게.”그 순간, 설연주는 공포에 삼켜진 얼굴을 하고는 설준석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했다.“아버지, 제가 아버님께 말했다는 것을 알면 기필코 또 저를 찾아와 못살게 굴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집에 계시지 않으니 아무도 저를 지켜줄 수 없어요.”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좋은 사람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설우현은 그대로 거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느샌가 설연주의 장난에 휘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하지만 더 이상 설연주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친구를 찾아가 술을 마셨다.그렇게 설우현이 별장을 떠난 후에야 설연주는 비로소 천천히 눈을 뜨고 눈앞에 드리워진 꽃밭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유리 꽃밭은 온통 잘 핀 꽃들로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다는데 바람둥이라서 그런지 설우현은 이러한 낭만적인 놀이를 잘하는 편이었다.이윽고 설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살펴보았다.핸드폰 화면에는 온통 그녀를 저주하는 김현서의 욕지거리와 그녀가 보낸 잠자리 사진이었다.대학교 시절 설강민과 사귀게 되면서부터 김현서는 설강민과의 잠자리 사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물론 잠자리 장면이 전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자고 있거나 두 사람의 팔이 드러난 사진 등 관계 후에 찍은 사진임이 명확했다.처음엔 차단을 해보기도 했지만 차단을 하면 꼭 김현서에 의해 잡혀버렸다.설연주에게 김현서는 악랄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친구들 옆에서 김현서는 대범하고 밝은 여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사람이라면 반에서 절대 잘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설연주는 늘 김현서의 가장 큰 적이었다.사진만 슬쩍 확인한 설연주는 바로 시선을 돌리고 옆에 환히 핀 꽃 한 다발을 잡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꽃냄새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김현서를 연상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끝을 살짝 꺾으면 연약한 꽃은 힘없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부러지고 약간의 즙만 손바닥에 남을 뿐이었다.묵묵히 손가락을 바라보던 설연주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김현서가 정승후한테 연락했어요?”“네, 연락했습니다.”“그럼 다음에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날 때, 두 사람의 영상을 설강민에게 보내줘요. 물론 학교 카페에도 보내세요.”“
컴퓨터에 머물러 있던 설우현의 손길이 멈칫했다.‘이 세상에 아직도 커피를 마셔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하지만 설연주는 워낙 뻔뻔하고 속임수에 능하니 설우현은 그녀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겼다.한편, 설연주는 배가 고팠는지 손에 든 과일을 다 먹고 손가락까지 깨끗하게 빨았다.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는 설연주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휴지 한 장을 뽑아 설연주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설씨 가문이 너 굶겼어? 왜 그렇게 먹어?”설우현의 질책에 설연주는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잠자코 휴지를 주워들어 손가락 사이에 묻은 과즙을 닦아냈다.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설연주에 설우현은 또다시 혹여나 말이 심하진 않았는지 반성하기 시작했다.비록 지금은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부족한 것 없겠지만 과거에는 틀림없이 배를 굶주리며 나날을 보내왔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식권을 모아두었으니 그 이후로는 틀림없이 잘 먹고 잘살았을 테지.그리고 김현서와 설강민의 그 같잖은 괴롭힘 수단이라면 정말 볼품없었다.설우현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높은 세력을 누비며 살아왔는지라 일반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하여 그에게는 볼품없는 괴롭힘 수단이었지만 김현서와 설강민의 괴롭힘은 일반인 한 명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설연주가 계속하여 침묵을 지켰다.마침내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인지 설우현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과일 접시를 그녀에게 넘겨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먹어. 누가 먹지 말래?”그러자 설연주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설우현의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과일을 하나 더 집어 들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는 늘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면 혼자 반성하더라고요. 도덕 기준이 상당히 높나 봐요.”어색하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곧이어 설우현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일부러 그랬어?”그러자 설연주는 혼자 추측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이른 아침부터 또다시 화가
방에 돌아와 막 잠이 든 설연주는 곧바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버렸다.먼저 김현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설강민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그러나 몸을 한 번 뒤척일 뿐 설연주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자 김현서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더욱 언성을 높여 신음소리를 흘려보냈다.관계가 끝나고 김현서는 일부러 설연주의 방을 찾아갔지만 방문은 꽁꽁 잠겨있어 문고리를 비틀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화가 난 김현서는 이내 언성을 높이고 쾅쾅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설연주, 당장 나와!”하지만 진즉 시끄러운 방 안에서 잠에 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김현서가 바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설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설씨 저택에 입주한 이 한 달은 설연주가 살면서 가장 편안하게 잠을 잔 시간이다. 적어도 옆집 이웃이 한밤중에 그녀의 집에 쳐들어올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고, 좁은 화장실에 숨어서 경찰에 신고할 필요도 없고, 입을 가리고 몰래 눈물을 훔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편에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분명 설연주가 먼저 꼬셨으니 남자가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며 그녀를 나무랐다.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 적어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문을 두드리고 발로 걷어차도 꼭 잠긴 방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화가 난 김현서는 씩씩거리며 옷을 여미고 설강민을 바라보았다.“천박한 년 주제에 다 컸네? 이제 우리 말도 무시해?”과거의 진연주는 개 짖는 흉내를 내라고 시키면 말없이 따르곤 했었다.그런데 지금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아?하지만 씩씩거리고 있는 김현서와 달리 설강민은 오히려 하품하며 김현서를 꼭 끌어안았다.“현서야, 오늘은 너무 늦었다. 일단 자자.”“그래, 오늘은 먼저 자고 내일 아침 다시 혼내 주지.”다음 날 아침 6시, 설우현이 계단을 내려오는데 도우미가 그에게 다가와 누군가 대문 앞에 앉아있다고 말해주었
설연주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피곤한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차 안은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졌고 설우현은 또다시 음악을 틀었다.이윽고 그들이 탄 자동차는 설준석이 사는 별장에 멈춰 섰고 설우현은 고개를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짙은 화장 아래, 짙은 피곤함이 몰려왔다.원래라면 큰소리를 내어 설연주를 깨었을 테지만 무슨 일인지 설우현은 손을 뻗다가도 다시 움츠러들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나서야 설연주는 잠에서 깨어났다.시간을 확인한 설연주는 이내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이내 설연주는 손을 흔들며 유유히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설우현도 더 이상 이곳에 더 머물지 않고 바로 차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같은 시각, 김현서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핸들을 꼭 잡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오랫동안 설우현의 뒤를 밟으며 언젠가는 손을 쓸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지만 설우현이 갑자기 카지노에 찾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김현서는 회원권이 없기에 카지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설우현이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지만 이번에는 설연주 그 천박한 년이 설우현의 뒤를 따라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파도처럼 몰려오는 질투심에 삼켜진 김현서는 당장이라도 핸들을 부러뜨리고 싶을 지경이었다.한편, 왜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냐며 그녀를 재촉하는 설강민의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지만 현재 김현서의 머릿속은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다.게다가 방금 그들이 탄 자동차는 별장에 도착하고도 30분 동안 바깥에 멈추어 서 있었다. ‘두 사람 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두 사람 친척 아니었나?’김현서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남자를 꼬셨으니 설연주라면 분명 이런 짓도 할 수 있다.김현서는 여전히 설우현과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어려운데 진연주는 이미 설우현의 조수석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정말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
방금 도착했다는 설우현의 말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설연주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제 가시는 건가요? 저 오빠 차 타고 가도 돼요?”설우현은 묵묵히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를 옆 휴지통에 버릴 뿐 설연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러자 설연주는 넉살 좋게 따라오며 설우현의 뒤에 서서 고개를 내밀었다.“오빠, 설마 나더러 택시를 타고 돌아가라는 건 아니겠죠? 카지노 여기 택시 잡기 어려워요.”설우현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과거는 의심일 뿐이었다면 현재 설연주에 대한 설우현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번져갔다.설연주는 단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신분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뿐이고 설씨 가문은 아주 좋은 이용수단이었을 뿐이다.왜 두 번의 친자확인에서 모두 통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보아하니 진연주는 진짜 설연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자신의 자동차 옆으로 다가간 설우현은 가엾게 밖에 서 있는 설연주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화가 나 버럭 언성을 높였다.“제니?”순간 움찔한 설연주는 이내 머쓱한 듯 코끝을 긁적였다.“그건 그냥 아르바이트하기 위한 가명일 뿐이에요. 게다가 오빠도 밖에서는 날 여동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잖아요. 모르는 척하는 게 오빠한테도 좋을 거예요.”그 말에 설우현은 피식 냉소를 터뜨리며 말없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설연주도 얼른 뻔뻔하게 설우현을 따라 조수석에 앉았다.“뒷좌석으로 꺼져. 조수석은 내 여자친구 자리야.”그러나 설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맸다.“오빠는 여자친구도 많잖아요. 그럼 이 자리에 앉아본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뭐하러 굳이 그런 걸 신경 써요. 그래도 불편하다면 그냥 저를 여자친구라고 생각하세요.”그 순간, 핸들을 잡은 설우현의 손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어떻게 이토록 뻔뻔한 여자가 존재할 수가 있는 거지?더 이상 말을 하기도 귀찮았던 설우현은 바로 액셀을 밟고 출발했다.잠시 후, 차 안의 고요함이 불편해진 설우현이 음악을 틀었다.뜻밖에도 설연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