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보디가드는은 이미 차에 올라가서 운전을 맡았다.K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현재 잠든 성혜인에게 씌인 정장을 바라봤다.그녀는 지금 아주 깊이 잠들어 있다.반승제는 줄곧 자리에 서 있었다.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의 눈빛은 순간 가라앉았다.그는 뒤에 있는 서주혁에게 물었다.“반승우는 어디 있어?”“제어 당했어. 그 칩을 내놓지 않겠다고 해서 백겸 할아버지가 조금 화났더라.”그 칩은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배현우는 당연히 내놓지 않을 것이다.한 번 내놓으면 그는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되며, 백겸 등 이들의 눈 아래에서만 살게 되니까.반승제는 옆 차에 올랐다.“내가 가서 할아버지한테 반승우를 달라고 할게.”서주혁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재빨리 차 문을 잡으며 말했다.“승제야, 개인적인 감정은 국가이익에 비하면 매우 사소해. 백겸 할아버니가 네 편에 설 거라 생각해? 승우 형은 지금 다른 나라에서도 주목받는 사람이야. 그런데 할아버지가 너한테 그를 내주겠냐? 그리고 내주더라도 승우 형이 순순히 따를 거라 생각해? 지금의 승우 형은 예전과 다르잖아. 그가 네 손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국가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지도 몰라.”하지만 반승제는 서주혁을 힐끔 쳐다보면서 눈빛으로 그에게 암시했다.“차에 타.”서주혁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들은 서로 몇 년 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서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차는 계속해서 비밀 지역으로 향했다.거기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부터 시작해 저격총의 반사광이 이미 주변 도로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어떤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되면 그들은 차 안에서 직접 사살당할 것이다.반승제가 오늘 타고 있는 이 차는 상대적으로 특별한데, 앞에는 작은 깃발이 꽂혀 있어 어떤 비밀 장소에도 출입할 수 있다.홀에 도착한 다음 그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거실에는 여러 주요 인물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그를 보고 이마를 찡그렸다.하지만 반승제는 백겸 곁에 다가갔다.“할아버지, 할 얘기가 있어요
백겸은 그의 앞에 말없이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만약 어느 날 반승우가 뚜렷한 이상 행위를 하면 어떻게 할 거야?”“총으로 쏴 죽일 거예요.”“그렇게 하면 진정한 반승우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데도? 승우가 예전에 승제 너를 많이 아껴준 거로 알고 있는데?”반승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백겸은 우산을 들고 천천히 쭈그리고 앉았다.“지금의 반승우는 통제가 안 되고 있어. 칩도 내놓으려 하지 않고, 성격 또한 나빠져서네가 너희들 형제애로 일깨우려는 건 불가능해. 심지어 널 죽이려고 하고 있고 너희 집안과 이 나라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어. 그만 돌아가거라, 승제야. 난 너의 텅 빈 약속 하나로 너를 지지할 순 없어.”무릎을 꿇고 있는 반승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도 단단했다.“할아버지, 제가 열네 살 되던 그해를 기억하세요? 그때 저한테 플로리아로 가라고 하시면서 지하 격투장에서 살아난 놈은 한 놈도 없다고 했었죠. 거기서 관리자가 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고 하셨고. 제가 거기서 죽을 거라고 했는데 전 살았어요. 덩치가 산채만 한 스물몇 살짜리 남자와 싸웠고, 짐승과도 싸웠지만 결국 전 살아남았어요. 그들과 엄청 큰 내기를 하고서도 살아남았고요. 할아버지가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제가 기적을 만들어 낸 거라고. 지금까지 지하 격투장에서 유용한 정보를 많이 가져다준 걸 봐서라도 열네 살 때처럼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제발 빌게요, 할아버지.” 백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폭우가 그의 우산 위로 떨어지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안개비가 자욱하여 주위는 산수화를 방불케 하였고 바닥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가시거리가 현저히 떨어졌다.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들어 반승제의 어깨를 두드렸다.“너에게 반승우를 맡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위험부담이 커. 너 그걸 감수할 수 있겠니?”“네, 얼마든지요.”반승제의 예리한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백겸은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몇 번 가볍게 두드리더니 말했다.“구체적인 방
평소 과묵한 성격의 서주혁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었다.“젠장!”그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동댕이쳤다. 찻잔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해외에 다녀와야겠어.”그때 온시환은 순간적으로 냉정을 되찾았다. 그의 집안과 윗선은 연줄이 끈끈하지 않은 데다가 서주혁의 전화는 지금 수시로 감시당하고 있다.“너까지 출국하면 승제 죽이려는 사람들을 누가 말려? 그러지 말고 국내에 머물러있어.승제도 그쪽에서 너의 협조가 필요할지도 몰라. 아무튼 우리한테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두 사람은 모두 진심으로 반승제를 걱정하고 있었다.서주혁은 심란한 마음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에서 불꽃이 튕겨 나올 것만 같았다. ...성혜인은 자기가 떠난 일이 이런 크나큰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랐다.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나흘 뒤였다.눈이 안 보이는 대신에 후각이 매우 예민해져 이곳의 공기가 네이처 빌리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순간 그녀는 경계하며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그리고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내 가벼운 숨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누구야?”미스터 K는 이번에 가면을 쓰지 않았고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돌아온 걸 환영해.”성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심지어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잠이 들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네이처 빌리지에 있었는데, 왜 갑자기 깨어나니 이 남자 옆에 있는 것일까.“반승제가 직접 널 나한테 넘겨줬어. 성혜인, 네 머릿속에는 오직 사랑만 가득 들어차있겠지만 그는 나라와 대의를 더 중히 생각하는 거야.”“무슨 말이에요, 그게?”미스터 K는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일어나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바깥 햇살은 너무 눈부셨다. 여기는 플로리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넌 BK 미래의 수령이야. 그리고 BK는 신비한 조직이지. 앞으로 제원, 심지어 나라에도 무수한 위험을 초래할 거야. 그인들 왜 저랑 맞는 집안의 여자와 연애하고 싶지
성혜인은 한 실내 훈련장으로 오게 되었고 남자는 그녀한테 방패를 손에 쥐여주었다.“너의 기억은 성여에 의해 조작된 것일 거야. 성여의 최면술은 사람의 기억을 흐트러뜨릴 정도로 매우 완벽해. 내가 봤을 땐 너의 순발력과 맷집은 매우 훌륭한데, 다만 그동안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을 뿐이야.”성혜인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물건을 보았다. 비록 보이진 않았지만 손으로 만져볼 순 있었다.“내가 이제 널 채찍으로 때릴 거야. 네 눈이 회복되는 이 한 달 동안, 난 계속 이 방법으로 널 훈련해 순발력을 제고할 거야. 넌 지금 너무 약해.”약하다는 단어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제원에 있을 때 그녀는 수없이 많이 기도했다. 자신이 좀 더 강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반승제와 이렇게 만났다가 헤어짐을 반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한테 자신이 보호하고 싶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성헤인은 갑자기 상념에 빠졌다. 반승제가 그녀를 껴안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난 그저 일반인에 불과해. 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나도 아직 배워야 하는 게 있고 너도 아직 다 못한 사명이 있잖아. 만일 어느 날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고 해도 열심히 살아서 내가 널 찾으러 갈 때까지 기다려줘, 응?” 그 생각을 하며 온몸에 힘이 실리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팔이 채찍에 의해 심하게 맞았다.남자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고 말투까지 차가웠다.“여기가 만약 전쟁터라면, 네가 방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순간 넌 이미 죽었어. 다시!”그는 또다시 채찍을 휘둘렀다.이러한 훈련은 처음이라 성혜인은 적응이 어려웠다.남자가 채찍을 열 번 휘두르는 동안, 딱 한 번을 제외하고 나머지 채찍은 다 그녀의 몸으로 떨어져 살갗이 찢어지고 피멍이 들었다.이마에도 어느새 땀이 흥건했고 땀방울이 턱밑으로 흘러내려 옷을 흠뻑 적셔버렸다.채찍을 스무 번 휘두른
반승제가 지하 격투장으로 돌아가자, 장미가 대문 밖에서 그를 맞이했다.“승제야.”반승제는 그녀한테 혼수상태에 빠진 남자를 데려가라고 했다.장미는 반승제와 비슷한 그 남자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아랫사람한테 눈짓했다.배현우는 두 손이 쇠사슬에 묶여 발끝만 땅에 닿을 수 있었고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그를 만났을 때 반승제는 그와 거래하고 싶다고 했고, 이윽고 그를 기절시켜 지하 격투장으로 데려왔다.반승제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했다.“물 끼얹어서 깨워.”한 잔의 찬물이 배현우의 얼굴에 끼얹어졌다.그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귀티 나는 남자를 보자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승제야, 이건 무슨 짓이야?”검은색 의자에 앉아 있는 반승제는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그의 양복 차림은 이 격투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여기는 누구도 관여 안 하는 곳이에요. 지금 있는 이곳은 지하 격투장 7층이고요.”배현우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플로리아에서 세력을 갖고 있는 그도 당연히 이 격투장을 알고 있었지만 반승제의 것인 줄은 몰랐다.너무나 의외였다. 반승제가 GOD였다니...그는 머릿속으로 반승우와 연락을 취했다.“동생이 만만치 않네. 지하 격투장까지 손에 쥐고 있다니, 더 죽이고 싶어졌는데? 내가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반승우?”반승우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안 나타난 지 오래되었다.너무 오래되어 배현우도 그가 진짜 사라졌는지 의심이 들 만큼.반승우와 연락이 닿지 않자 그는 반승제한테 시선을 돌렸다. 그때 반승제의 한마디가그를 멍하게 만들었다.“첫 번째 인격은 반승우일 테고... 그럼 두 번째 인격은 이름이 뭐예요?”반승제는 마치 이중인격이 그한테는 그다지 신경 쓸 만한 큰일이 아닌 것처럼 담담한 말투로 운을 뗐다.배현우의 안색은 순간 굳어졌다. 그는 불현듯 반승제가 그의 별장에서 며칠 동안 잠복해 있으며 성혜인과 몰래
그의 표정을 보자 배현우는 자신이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아까는 은연중에 그런 느낌만 들었을 뿐인데 거기에 술 저장 창고가 있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기억을 꼼꼼히 정리해 봐도 격투장에 온 적은 확실히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서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하지만 반승제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고, 비수를 그의 목구멍에 갖다댔다. “넌 이름이 뭐야?”두 번째 인격의 이름을 묻는 것이었다.“배현우.”‘정말로 배현우가 맞았구나.’반승제의 눈에는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자 배현우의 목에는 즉시 가는 핏자국이 생겼다.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승제가 연구 기지를 알고 싶어한다면 그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역시나 반승제는 비수를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일어나 배현우를 훑어보았다.배현우가 고개를 들며 반승우의 대표적인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반승제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 징그러운 웃음, 그만 집어치워.”배현우의 얼굴이 삽시에 굳어지며 사나운 진짜 면모를 드러냈다.그리하자 반승제도 질문을 시작했다.“그 사람들이 반승우 몸에서 실험을 했고, 그래서 네가 생긴 거 맞지? 너는 그들이 만든 두 번째 인격이야? 너의 역할은 뭐야?”배현우는 다른 사람이 이 일에 대해 묻는 것을 가장 싫어했고 반승우의 제2인격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줄곧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전에 그의 이름이 뭐였는지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해보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지금 그의 안색은 유난히 어두웠다.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고, 미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모든 것을 파괴할 것만 같았다.반승제는 그제야 비로소 진실한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과 반승우는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럼 도대체 이 인격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가 생겨난 목적은 또 무엇일까? 오직 연구기지 자료를 많이 더 알아야 그한테 승산이 있다.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그녀는 반승제의 맞은편에 앉아 저절로 와인을 한 잔 따랐다.“지난번에 네가 돌아왔을 때부터 묻고 싶었어.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너를 그렇게 넋을 잃게 만든 거야? 한국에서 도주범으로 다 몰리게 만들고. 저 안에 있는 남자, 네 형 맞지? 중요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 이미 국제 수배령이 내려졌다는데? 승제야,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동원을 하면서까지 한 사람을 잡겠다고 하는 걸 봐선, 국내에서 아마 너에 대한 논란이 엄청 날 거야.”일반인들은 이런 소식을 접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주식은 전부 관리 기구에 넘겼고 주식에 대한 권한은 전부 심인우한테 있다.그가 BH 그룹을 지키고 있는 한 그룹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고, 반승제도 그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제원 상층 인사들이 동향을 살피고 있겠지만, 그것이 또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그가 지금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소위 말하는 BK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였다.“승제야, 나랑 그 여자에 대해 말해 줄래?”장미는 반승제와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되었다.이 지하 격투장에는 전 세계 최고의 미녀들이 모여있다. 여기서 미모는 일종의 화폐와도 같다.예전에 반승제한테 여자를 소개해 주려고 했지만 그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고 여자가 재미없다고만 했다.여자한테서 재미를 느끼느니 화면에서 반짝이는 데이터를 쳐다보기만도 못하다고 했다.그러다가 어느 날, 반승제가 여기로 돌아왔을 때,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장미는 그제서야 그의 할아버지가 제멋대로 그한테 아내를 만들어 주고 혼인신고까지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때는 그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기껏 해봐야 결혼을 했다 뿐인데. 또한 반태승 어르신의 안목은 그리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유전자는 반드시 대를 이어 물려줘야 마땅하다고 생각되기도 했고, 그럴 바에 그 여자한테 아이를 낳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싶었다.그때 반승제는 이렇게 대답했다.“누난 몰라. 나의 아내가 될 사람은 윤단미밖에
진세운이 손을 멈칫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설씨 가문 막내딸, 그 사람 진짜 딸 아니야. 설씨 가문 회장님께서 승제한테 진짜 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대. 그런데 승제가 떠나는 바람에 그 어린 공주님을 찾는 일은 내가 맡게 된 거지.”그가 고개를 숙여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자연스럽게 진세운에게 건넸다.진세운이 담배를 건네받으려 하자 서주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너도 담배를 필 줄 아는 사람이었어?”진세운이 씩 웃더니, 담담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곤 입에 갖다 댔다.“외국에 있을 때부터 진작 피기 시작했지. 그냥 수술 끝나고 가끔 피는 정도.”서주혁이 따라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공감하듯 미간을 찌푸렸다.“의사가 힘들긴 하지. 1년 내내 네가 쉬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환자에서 수술대에서 죽게 되면 또 가족들이 얼마나 난리를 피우겠어. 너도 참 고생한다.”“그럼 그 막내딸에 대한 단서는 좀 찾았어?”“그럴 리가. 벌써 20년이나 더 된 일인걸. 부인이 임신했을 때 마침 두 사람이 갈라지게 됐고, 나중에 만났을 때는 이미 부인이 아이를 낳은 후였어. 그 뒤 두 사람은 바로 함께 플로리아로 돌아갔고 그 과정에 모든 자료가 사라졌어. 뭔가 이상하지 않아? 난 이 사건의 키가 왠지 그 부인한테 있는 것 같거든. 그런데 회장님께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길 바라셔서.”진세운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의사이기에 이런 명문가들에 대한 가십거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서주혁이 그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형제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진세운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며 친구라 해도 그들 몇 명뿐이기 때문이었다.진세운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서주혁이 담배 한 대를 더 내밀었다.“한 대 더 펴. 이따 시환이 만나면 알려줘야겠다. 너도 담배 피운다고.”“하나면 됐어. 나 요새 계속 병원에 있으니까 도움 필요하면 말해.”서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이전에는 연승혁의 주변에 여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원아정 한 명뿐이었다. 원아정과는 단순히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났던 거라서 그녀와의 경험은 그저 상쾌함만 느껴졌고 내면의 만족감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공지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연승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피부를 만지기 시작했고 무기력하게 기대어 있는 공지민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연승혁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공지민이 다 씻은 후 옆에 있던 타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침대에 누운 공지민은 곧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연승혁은 욕구를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무해한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고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이 손끝으로 그녀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쓰다듬을 때 공지민은 가끔 눈을 떠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승혁은 더욱 불타올랐지만 그녀가 현재 아픈 상태라는 걸 잊지 않았다.연승혁은 몸을 숙여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겼고 공지민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후 그한테 물었다.“오빠, 우리 정말 약혼한 사이에요?”그녀의 질문에 연승혁은 순간 몸이 굳었다.공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냥 우리 둘 사이가 너무 순수해 보여서요.”연승혁이 그녀의 목을 힘껏 깨물자 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다.연승혁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순수해 보여? 오늘 밤, 네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겨줄게.”공지민의 볼이 빨개졌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연승혁은 그냥 말해본 거였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그가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허리를 굽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연승혁이 그녀의 몸에 키스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고 자신이 지금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흔적을 하나하나 남길 적마다 그의 이성은 사라졌고 오늘 밤만은 그녀
공지민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곳은 온시환이 차를 세워둔 위치였다.오후부터 그녀는 강한 시선이 느껴졌고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온시환이라는 걸 알았다. 온시환은 열 몇 시간 동안 은밀한 곳에 숨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지민은 연승혁를 향해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연승혁은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차로 돌아간 후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그녀의 몸에 덮어줬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공지민을 안고 안방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악몽을 꾸는 듯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가지 마요.”“날 괴롭히지 마요.”그런 공지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는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중간에 공지민이 눈을 떴지만 그가 돌아온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도우미가 몸보신하는 죽을 들고 오면서 물었다.“도련님, 제가 지민 씨 먹여드릴까요?”연승혁은 손을 들어 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제가 할게요.”도우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연승혁은 공지민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어 깨웠다.“지민아, 얼른 일어나서 이거 좀 먹어. 너 지금 열도 나고 저녁에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공지민은 어렴풋이 눈을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오빠 돌아왔네요.”연승혁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한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공지민은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근데 또다시 나갈 건가요?”연승혁은 늦어도 날이 밝은 후 일 보러 다시 나가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민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고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그렇다고 이상우를 불러 공지민의 기억을 되돌리고 온시환 곁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걸 생각만 해도 연승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그녀한테 죽을 먹여준 다음 옆에 있던 휴지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염정아는
염정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지민은 그녀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그다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회가 끝나갈 무렵 염정아는 갑자기 공지민한테 다가가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지민 언니, 나는 내가 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공지민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눈이 따가워졌다.염정아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경찰을 따라 다시 들어갔다.홀로 남은 공지민은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웠고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는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서 문 앞까지 나온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복수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마침 연승혁의 전화가 걸려 와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공지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있었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연승혁은 드디어 도망간 사람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어 그 사람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공지민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한 거였다.“나 지금 경찰서에요. 내 친구가 사람을 죽였어요. 오빠, 나 걔랑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요. 고등학교 때 우린 둘 다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근데 우리를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연승혁은 그녀들을 괴롭힌 사람이 이미 죽은 원아정이란 걸 알고 있었다.그가 목을 가다듬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공지민이 울기 시작했다.“오빠, 보고 싶어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요. 나 지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아요.”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자 연승혁의 심장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원래는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러 가야 했지만 그녀가 걱정되어 조종사한테 목적지를 바꾸라고 말했다.“우린 먼저 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추적하라고 해.”조종사는 조금 놀랐다. 보스가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고 이제 겨우 단서를 얻었는데 제국으로 돌아간다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