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윤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준혁이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를 내야 하는 건 그녀 아닌가?이준혁은 증거도 없이 그녀를 모함한 것도 모자라 매번 임세희의 편에 서서 그녀를 괴롭힌 주제에…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윤혜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 제발 좀 천천히 달려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덜컥 겁이 난 윤혜인이 엉엉 울면서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이준혁 씨, 제발 차 좀 멈춰요! 저 진짜 토할 것 같아요. 제발 멈추라고요! 멈춰주세요… 웩…”결국 참다못한 윤혜인이 입을 막은 채 헛구역질을 했고 그제야 이준혁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채 차를 세웠다.십 분도 안 된 사이에 두 사람은 스카이 별장에 도착한 것이다. 차가 멈추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별장 안에 있는 1층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와락 토를 했다.하지만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녀는 속이 비어 있었기에 죽을 것처럼 아팠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했다.이때, 이준혁이 그녀의 곁에 나타나 따듯한 물 한잔을 건넸고 윤혜인이 얼른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 마시고 나서야 속이 좀 편해진 윤혜인은 홱 돌아서서 이준혁의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이준혁 씨, 당신한테 생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저는 살고 싶어요! 흑흑… 진짜 너무 놀랐단 말이에요…”엉엉 우는 윤혜인의 모습에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껴안았고 그의 셔츠 위로 떨어진 눈물은 그대로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조금 전에 너무 놀란 탓에 윤혜인은 아랫배에 통증이 조금씩 느껴졌고 혹시라도 뱃속의 아이에게 문제라도 생기진 않았을까 너무 걱정되었다.창백해진 윤혜인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이준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아파?”“이준혁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뱃속의 아이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 윤혜인이 그를 힘껏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고 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윤혜인은 화장실의 차가운 벽에 등을 붙인 채 이준혁의 갈취를 받아내고 있었고 이 순간, 자신이 너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반항도 못하고 이렇게 이준혁에게 휘둘리다니.짜고 달달한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입술에 흘러 들자 그는 마음속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고 언짢은 듯 윤혜인을 놓아준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은 모습이었다.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때리려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이준혁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어디 감히!”다시 한번 다른 남자를 위해 그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이준혁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찢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이준혁이 너무 꽉 잡고 있었던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고개를 홱 돌린 채 그와의 스킨십을 피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입술이 다른 여자의 몸에 닿은 적이 있다는 생각만 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반항하면 그녀만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윤혜인이 조금 전보다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단 이거 놔요.”간만에 부드러워진 윤혜인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이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놓아주었고 단 일초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않은 윤혜인은 홱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이준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를 잡아당겨 다시 벽에 밀쳤다. 두 사람의 거리는 또다시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난 분명히 놨어.”이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두 번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말문이 막힌 윤혜인이 화가 난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이준혁은 왠지 화를 내는 윤혜인의 모습이 좋았으며 오늘 병원 주차장에서 영혼 없이 고분고분하던 그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조금 전에 거칠었던 행동과 달리 이번에 이준혁이 선사한 키스는 매우 섬세했다. 목덜미로부터 시작하여 고
이준혁이 손을 뻗어 그녀 손에 있던 크리스탈 장식품을 빼앗았고 그대로 벽에 던져버렸다.쨍그랑!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 장식품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고 깜짝 놀란 윤혜인이 비명을 지르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턱을 꽉 잡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기억해,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만나면 난 그 놈을 서울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말을 마친 이준혁이 문을 쾅 닫은 채 화장실을 나섰고 윤혜인은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꼭 끌어안고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아랫배에서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윤혜인은 힘겹게 배를 꼭 끌어안았다.이때, 문이 벌컥 열렸고 다급하게 뛰어들어온 도우미 아주머니는 엉망진창이 된 화장실 바닥을 보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재빨리 부축했다.“여기에 왜 피가 있어요? 사모님 어디 다치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걱정된 듯 묻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제 피가 아니에요.”“그럼…”도우미 아주머니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더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사모님, 일단 방에 가서 좀 쉬세요.”윤혜인을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온 아주머니가 윤혜인을 침대에 눕힌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조금 전에 제가 쌍화차를 끓였는데 한 잔 드릴까요?”“고마워요, 아주머니. 근데 전 지금 별로 입맛이 없네요. 누워서 좀 쉬고 싶어요.”윤혜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힘겹게 대답했고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서서 방을 나서던 아주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전했다.“사모님, 요즘 도련님이 매일 사람을 시켜 산삼이며 녹용이며 귀한 송이까지 보내오십니다. 이 약재들을 끓이는 방법까지 친히 배워 오셔서 주방장에게 가르치셨어요. 사모님 안색이 안 좋다고 저희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예전에 두 분은 서로를 많이 아끼고 좋아하셨잖아요. 옛정을 많이 돌이켜 보시고 작은 다툼 때문에 그 정까지 잃지는 마세요.”“네, 알겠어요.”윤혜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
휴게실에서 나온 남자는 다름아닌 한구운이었다. 카키색 바람막이를 입고 금색 테두리 안경을 낀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점잖고 잘생겨 보였다.“혜인이는 누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확실해요.”한구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와 임수향은 사촌누나와 남동생으로 평소에 사이가 꽤 좋았다.그의 말에 임수향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법이다.“조금 전에 나와서 인사하지 왜 숨어 있었어?”임수향의 물음에 한구운이 다정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한구운은 윤혜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설마 저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린 거야?”임수향이 그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구운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 여자 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러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이력서를 보니까 기혼이라고 적혀 있던데, 설마 남의 가정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지?”조금 전에 한구운이 휴게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윤혜인은 아직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듯했기에 임수향이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타일렀다.“구운아, 네 조건으로 어떤 여자도 찾을 수 있어. 절대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내연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아니에요.”한구운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대답했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윤혜인에 대한 그의 마음은 아직 겉으로 드러내서는 절대 안 된다.임수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가지 않았다. 한구운은 겉으론 점잖고 온순해 보이지만 사실상 꽤 사악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결심한 일은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남의 가정에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임수향도 굳이 나서서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한편, 작업실에서 나온 윤혜인은 이 좋은 소식을 외할머니에게 제일 먼저 전하려고 병원에 찾아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저녁밥을 두 공
로비로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2층으로 올라갔다. 문현미의 외할아버지는 올해 백세가 되셨지만 여전히 정정하셨으며 말도 잘 알아들었다.축복의 말을 올린 윤혜인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문현미의 외할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바로 윤혜인에게 옥패 하나를 선물했다.그 옥패는 색깔도 예쁘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기에 윤혜인이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문현미가 계속 그녀에게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윤혜인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 옥패를 받게 되었다.그 뒤로 문현미와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집안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대충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함부로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길을 잃을까 봐 윤혜인은 2층 거실만 조용하게 둘러보고 있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은 윤혜인은 옆에 있던 난간에 기대 수다를 떨고 있던 두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오늘밤 이씨 가문 그 남자도 온다고 하던데 반드시 이 기회를 잘 잡아야 돼. 그 남자는 어떤 여자를 좋아할까?”“됐거든, 넌 기회도 없어. 듣는 소문에 의하면 그 남자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를 좋아한대.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중간에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계속 반복했대. 임씨 가문 아가씨가 요 근래 귀국했는데 두 사람 기사만 해도 엄청 많이 났어.”“임씨 가문 그 비실대는 여자는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그런 남자를 손에 넣은 거지?”“그 여자가 첫사랑이래. 근데 이씨 가문 그 남자가 꽤 많이 좋아하나 봐.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나거나 연애설이 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에휴, 참 부럽네. 저런 남자에게 시집만 갈 수 있다면 타이틀만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난 좋아.”“야, 꿈도 꾸지 마. 하하하, 이씨 가문 사모님의 타이틀을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두 사람의 대화에 윤혜인은 왠지 씁쓸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이씨 가문 사모님 타이틀을 원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절대 다른 여자와 그 남자를 공유하고 싶어
윤혜인이 송소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보니 정장을 입은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함께 서있는 두 사람은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한눈에 봐도 완벽한 커플이었다.순간, 윤혜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이준혁이 지금 임세희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건가?분명 어제까지 윤혜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경고했는데 그럼 지금 그의 행동은 대체 뭘까?이준혁은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한 건가?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첫사랑을 데리고 참석하는 건 두 사람 사이를 공개하겠다는 뜻인데.윤혜인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왠지 웃을 힘조차도 남지 않았다.이준혁, 참 대단한 사람이네!곁에 서있던 송소미도 윤혜인의 표정 변화를 발견했고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비웃었다.“참 불쌍해. 네 표정을 보니 오늘밤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데리고 참석할 줄은 몰랐나 보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속으로 자신에게 괜찮다고, 어차피 저 두 사람은 언젠가 서로를 공개할 거라고 위로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너무 아프고 쓸쓸했다.그녀는 여전히 두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고 곁에서 망연자실한 윤혜인을 지켜보던 송소미가 신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했다고 뭐가 달라져? 넌 영원히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해. 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한 건, 할아버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거야.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준혁 오빠와 세희 언니를 좀 봐,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넌 지금 뭐 같은 지 알아? 못난이 같아. 그것도 자기 분수를 모르는 못난이!”송소미의 비웃음이 이어지던 그때, 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누구에게 분수를 모른다고 지껄이는 거야?”의기양양하던 송소미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 목소리에 대꾸했다.“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이 천박한…”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게 뺨을 한 대 맞았고 순간 휘청거리던 송소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감히 어떤 놈
이준혁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윤혜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작은 흉터가 있는 걸 보니 그래도 상처는 처치한 듯했다.문현미가 아들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내가 일찍 와서 혜인이 좀 챙기라고 했잖아!”“일이 생겨서 좀 늦었어요.”“어떤 일인데 네 아내보다 중요해? 근데 그 이마는 왜 그렇게 된 거야?”퉁명스럽게 말을 하던 문현미가 이준혁 이마에 난 상처를 발견했고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고양이한테 긁혔어요.”순간 움찔한 윤혜인이 이준혁을 힐끗 쳐다보았고 이준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의미심장하게 윤혜인을 주시했다.두 사람의 눈짓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문현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고양이는 갑자기 어디서 났어? 파상풍 주사는 맞았어?”“얼마 전에 키우기 시작했어요. 아직 더 길들여야 할 거 같아요.”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이준혁은 드레스를 입은 윤혜인의 모습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드레스 색깔과 디자인이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렸기에 오늘 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아름답긴 했지만 허리 부분에 속살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가 조금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무뚝뚝하게 서있던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윤혜인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누가 이런 드레스를 골라준 거야?”“안 예뻐요?”윤혜인은 별 기대 없이 대충 되물었지만 그녀의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이 몇 초 정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예뻐.”예뻤다. 솔직히 그녀를 주머니에 넣고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반면, 갑자기 돌직구를 날리는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심장이 움찔했다. 조금 전에 그녀는 홧김에 일부러 그에게 되물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혜인은 이런
독한 계모 밑에서 자란 문현미는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예전에 그녀라면 이기려고 아옹다옹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겉과 속이 다르고 낯까지 두꺼운 사람은 찍소리도 할 수 없게 무찔러버려야 한다.그녀는 손을 뻗어 임세희를 잡으며 비꼬았다.“적당히 하고 얼른 일어나지 못해?”하지만 그녀의 손이 임세희에 닿기도 전에 임세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줌마, 때리지 마세요...”임세희는 이준혁의 다리를 끌어안고 애원하고 있었다. 문현미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인 것처럼 말이다.문현미는 단단히 화가 났다.“그 손을 놓지 못해? 감히 유부남의 다리를 잡아? 미쳤어?”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이미 다른 이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어머님.”윤혜인은 재빨리 문현미를 불렀다. 그녀는 천식을 앓고 있어서 흥분하면 안 된다.“엄마!”눈살을 찌푸린 이준혁도 손을 뻗어 문현미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그때 임세희가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그렇게 그의 손이 방향을 잃더니 그대로 윤혜인을 밀치고 말았다.“악-!”그녀의 뒤에는 바로 계단이었다. 비명 지르는 윤혜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겁에 질린 그녀는 눈앞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그가 잡아주길 바랐다.이준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도 손을 내밀고 싶었다...하지만 임세희가 그를 너무 꽉 안고 있어서 그는 한발 늦었다.불과 몇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닿지 못하고 있다.윤혜인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걸쳤던 겉옷이 떨어지고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자신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문현미가 그녀를 잡았다.위험에서 벗어 난 후.문현미를 잡고 있는 윤혜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방금전 화면이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마치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후벼파고 있었다.“준혁이! 너! 켁켁...”문현미는 기침하기 시작했다.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준혁은 자신이 그녀에게 위험을 가하게 될 줄은 몰랐다.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에 그는 마음이 아팠다.품에 안고
이준혁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윤혜인은 전화가 오자마자 단 한 번의 신호음도 지나기 전에 받았다.“준혁 씨, 어떻게 됐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소원이 무슨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주 비서에게 최고의 인력을 동원해서 수색을 맡겼고 경찰에도 신고했어. 하지만 소원 씨가 실종된 장소에서는 소원 씨를 찾지 못했어. 아직 계속 수색 중이야.”이준혁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윤혜인의 성격상 무언가를 숨기려 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만약 소식이 계속 닿지 않는다면 그녀는 직접 나서서 소원을 찾으러 갈 것이었고 그러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윤혜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소원이... 정말 위험한 상황인 건가요...”“걱정하지 마. 내가 경한이에게도 연락했거든. 경한이가 있으면 곧 소원 씨를 찾을 수 있을 거야.”이준혁이 차분히 말했다.“뭐라고요?!”그러자 깜짝 놀란 윤혜인이 소리를 질렀다.“어떻게 육경한한테 그걸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그 살인자잖아요! 소원이가 서울에서 무슨 원한을 산 적이 있겠어요? 예전에 소원이네 아버지 회사가 망했을 때도, 빚을 내서 직원들에게 보상금까지 준 사람이에요. 서울에서 소원을 해치려는 사람은 육경한 말고는 없다고요!”“경한이가 아니야.”이준혁은 냉정하게 말했다.“혜인아, 나 믿어봐. 소원 씨는 경한이의 애 엄마야. 절대 소원 씨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 소원 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경한이뿐이고.”1분, 아니 1초라도 더 지체하면 위험이 커질 수 있었다.그러나 이 말을 윤혜인에게 직접 전하면 그녀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뻔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이 정말 순수하게 유진이를 자기 아이로만 생각할 것 같아요?”하지만 윤혜인은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육경한은 항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그가 저지른 많은 행동들은 너무나 지나쳤고 윤혜인은 그가 유진이의 엄마라
이준혁은 회의를 서둘러 마무리한 후 주훈의 보고를 기다렸다.30분 후, 주훈이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두 대가 있었지만 차 안이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원 씨의 핸드폰은 차 안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차량에서는 어떤 개인 물품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차량의 번호판은 위조된 것으로 차량 소유자의 신원을 당장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이준혁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수색 범위를 넓혀 계속 찾아봐.”그러자 주훈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후, 이준혁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내심 그는 육경한이 소원을 해치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육경한과 소원의 관계는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육경한이 소원을 향해 품은 감정은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컸다.아무리 얽히고설킨 감정이라도 그는 소원을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때문에 이준혁은 이 일이 단순한 오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하지만 자신이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소원을 가장 빠르게 찾는 방법은 바로 육경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었다.망설임 없이 그는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육경한은 마침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로 방민아와 함께 야식을 먹고 있었다.그와 이준혁은 최근 거의 교류가 없었다.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인연을 붙잡고 있는 김성훈이 아니었다면 이미 멀어졌을 관계였다.육경한은 이준혁이 중요한 용건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방민아 앞에서 대놓고 전화를 받았다.“응, 준혁아.”“어디야?”이준혁의 말투는 간결했다.“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지금 밥 먹고 있어.”육경한이 대답에 이준혁은 그가 소원의 실종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확신했다.그러나 분명 육경한 주변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소원이 서울로 돌아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았다.때문에 육경한이나 그의 주변 사람 외에는 의심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소원 씨에게 일이 생겼어
“말해봐, 서두르지 말고. 괜찮으니까 일단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 내가 바로 갈게.”윤혜인은 애타는 목소리로 소원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러자 소원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그 사람이 잘 지내면 난 그걸로 충분히 행복해.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이 일로 죄책감 느끼지 않았으면 해...”이 말은 서현재에게 꼭 전하고 싶은 소원의 진심이었다.그녀는 서현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면 그는 자신을 원망하며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서현재가 하는 행동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오히려 기억이 없기에 그는 복잡한 감정 없이 순조롭게 서진태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서진태 또한 그를 어렵게 만들지 않았다.소원은 유진을 되찾으려면 육경한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 싸움에 서현재가 엮이지 않는 편이 그녀에게 훨씬 수월했다.무엇보다 소원은 서현재가 이 모든 일로 자신을 탓하지 않기를 바랐다.그때 차에 간신히 시동이 걸렸고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통화가 끊어졌다.하지만 소원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오늘만 살아남으면 안지철의 무모한 행동만으로도 주석훈이 충분히 증거를 모아 재조사를 신청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 윤혜인은 다급한 마음에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 제발 좀 도와줘요! 소원이 지금 위험해요! 누군가 소원이를 죽이려고 해요...육경한이에요. 틀림없어요. 그 나쁜 놈이 소원이를 죽이려고 하는 거라고요!”긴장한 나머지 윤혜인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진정해. 심호흡 한 번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말해봐.”이준혁은 태평양 건너편의 지사에서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윤혜인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은 그는 손짓으로 회의를 멈추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소원 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그러자 윤혜인은 눈물이 맺힌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 소
소원은 뒤에 있는 안지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그동안의 조사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안지철은 잔머리를 잘 굴리고 이익을 좇는 성격이긴 하지만 대단한 악행을 저지를 용기는 없는 사람이었다.심지어 소원이 안지철의 이익을 건드렸다고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목숨을 노릴 이유는 없었다.결국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쫓아오는 것은 분명 누군가의 지시 때문일 것이다.‘설마...육경한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나한테 해를 끼치려는 걸까?’이때, 차 안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보니 윤혜인이었다.소원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실수로 받기 버튼을 눌러버렸다.수화기 너머로 윤혜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아, 너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육경한 그 쓰레기가 너랑 아이를 뺏으려고 한다는 걸 말이야!”윤혜인은 오늘 주석훈을 찾아가 개인적인 일을 물어보려다가 우연히 육경한의 소송장을 발견했다.주석훈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소송 내용을 본 윤혜인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육경한이 소원과 아이를 두고 싸움을 벌이려 한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주석훈에게 따지지 않았다.소원이 자신을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숨겼을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윤혜인은 육경한의 뻔뻔함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쓰레기 같은 놈, 내가 가서 그 자식한테 한마디 해야겠어! 정말 너무 화나!”분노에 가득 찬 그녀는 소원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흥분해서 말했다.소원은 간신히 차분하게 대답했다.“난 괜찮아. 그 사람 찾아가봤자 아무 소용 없어. 네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거야. 괜히 속만 상할 뿐이지.”“그래도 가서 욕이라도 해야겠어! 안 그러면 나 속 터질 것 같아. 요즘 이렇게 나쁜 사람 처음 봤다니까!”윤혜인은 단단히 결심한 듯 보였다.그리고 소원은 그녀의 말에 약간 안심했다.오랫동안 이렇게 악랄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이준혁에게서 잘 보호받고 있다는 뜻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안지철은 코피가 터져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병약한 여자 하나도 처리 못 해?”소종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운전 실력이 꽤 좋아 보였습니다. 저보다 나은 것 같아요. 저도 사람을 들이받은 적이 없어서... 감을 못 잡겠어요.”“빨리 끝내.”상대방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안지철은 몸을 떨며 말했다.“저 그만두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저는 오늘 밤이라도 바로 떠나겠습니다.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게요. 안 될까요?”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안지철은 그저 몰래 도망치고 싶었다.다른 방식이면 몰라도 사람을 죽이라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처음에 그는 소종에게 돈을 받고 유시연을 통해 혈액 샘플을 빼돌리게 했다.그러고는 일이 끝나면 바로 해외로 떠나겠다고 약속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하지만 유시연과 이전부터 내연 관계였던 그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다가 일이 지체되고 만 것이다.사실 안지철은 이미 내일 떠날 계획을 세우고 정식 경로가 아니라도 은밀히 빠져나갈 방법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그런데 이런 일이 터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혼란스러워진 안지철은 소종에게 연락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소종은 그녀를 차로 들이받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라고요?”안지철은 살인을 저지를 용기가 전혀 없었다.그러자 소종은 말했다.“그래, 안 해도 돼.”안지철은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안심하세요. 저 절대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겁니다...”“하지만 받은 돈은 전부 돌려줘야 할 거야. 잔금도 지급하지 않을 거고.”여전히 싸늘한 소종의 목소리에 안지철은 당황하며 외쳤다.“그건 안 됩니다!”“일은 제가 다 했잖아요. 약속을 어기시면 저도 입을 다물지 못할 겁니다!”안지철이 소종을 협박했다.“그럼 지금 당장 떠들어봐. 어차피 그 여자 오늘 죽지 않으면 당신 정체도 전부 탄로 날
하지만 만약 안지철을 뒤쫓는다면 그는 절박해져서 소원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은 주석훈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대신 상황을 문자로 알렸다.의외로 주석훈은 자고 있지 않았는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제가 이 사람에 대해 알아볼게요.]소원은 차로 돌아와 유시연의 집으로 다시 가 잠복할 준비를 했다.유시연을 돌파구로 삼아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었다.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는 육경한의 감정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부족했다.확실한 증거, 예를 들어 자백 같은 것이 필요했다.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육경한은 항상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고 매수한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혹적인 조건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또한 협박을 통해 입을 다물게 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가 매수한 사람들은 보통 쉽게 입장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었다.하여 소원은 증거를 더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특히 두 사람이 사적으로 교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를 증거로 활용할 수 있었다.이를 잘 이용하면 여론을 조성하거나 감정소를 압박해 육경한에 대한 재검사를 요구할 수 있었다.그렇게 차를 출발시켜 코너를 돌았을 때, 소원은 갑자기 정면에서 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그 차량은 눈부신 상향등을 켜고 있었고 그 빛 때문에 소원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눈을 깜빡인 찰나, 차량은 순식간에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그 속도는 마치 질주하듯 위협적이었다.이내 소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 차... 분명 나를 겨냥하는 거야!’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소원은 핸들을 급히 틀어 옆으로 차를 돌렸다.겨우 목숨을 건진 그녀는 차량이 은색 승용차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바로 조금 전 급히 떠났던 안지철의 차량이었다.소원은 곧바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급히 기어를 넣고 출발하려 했지만 차는 하도 낡아 얼마 가지도 못하고 시동이 꺼졌다.고요한
소원은 차에서 내려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그리고 그의 이름을 바로 불렀다.“안지철 씨.”남자는 깜짝 놀랐다. 이미 감정소를 퇴직한 그는 소원을 알 리 없었다.“누구세요?”그러자 소원이 가까이 다가서며 담담히 말했다.“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묻고 싶은 건, 이달 13일에 감정소의 혈액 샘플에 손을 댄 적이 있냐는 겁니다.”그러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소원을 쳐다보더니 입을 움직였다.“무슨 헛소리 하는 거예요?! 난 벌써 퇴직했는데 감정소에 어떻게 손을 대겠어요?”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소원은 그의 표정에서 이미 뭔가 수상한 점을 느꼈다.하여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퇴직한 것 맞죠. 하지만 유시연 씨는 퇴직한 게 아니잖아요?”이 말에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유시연 씨랑 난 아무 상관 없어요.”남자는 소원이 이미 며칠 동안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또한 그녀가 자신과 유시연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입조심해요. 헛소리 계속하면 입 찢어버릴 거니까!”남자는 으름장을 놓았다.지금은 한밤중이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남자는 소원이 여자라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기회 삼아 위협하려 한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오히려 그가 자신을 해치며 이 기회에 그를 경찰에 넘겨 조사하게 만들 수 있겠다 생각하며 말이다.“아까 안지철 씨랑 유시연 씨가 이 식당에서 차례로 나왔잖아요. 이 안에 그런 곳이 있나 봐요? 지금 제가 경찰에 신고하면 안지철 씨는 조사받게 될 텐데... 어떡할래요?”그러자 남자는 잠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당... 당신 나 따라다녔던 거예요?”“물론이죠. 안지철 씨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유시연 씨는 남편이 있잖아요. 그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소원은
“그건 절대 안 됩니다.”소원이 아무리 설득하고 애원해도 강백호는 단호했다.감정소에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고 강백호는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도무지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던 소원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벽에 적힌 ‘자원봉사자 모집’ 문구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소장님, 제가 자원봉사자로 일하면 안 될까요?”그러자 강백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고 소원은 급히 손을 들어 보이며 약속했다.“걱정 마세요. 감정소의 물건을 훔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제 인품이 어떤지는 주석훈 변호사님께 물어보셔도 됩니다.”하지만 강백호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다.“그래도 이렇게 하시면 제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소원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소장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퇴직과 관련된 상황을 직접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작은 희망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이렇게 솔직한 태도에 강백호는 오히려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게다가 그는 소원이 조사한다고 해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녀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오히려 감정소에 대한 그의 신뢰는 더욱 확고해질 터였다.“자원봉사자 모집은 담당 직원에게 문의해야 합니다.”강백호는 말했다.“면접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 제가 관여하지는 않을 겁니다.”소원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감사합니다, 소장님.”곧바로 소원은 자원봉사자 모집 담당자를 찾아가 절차를 밟았고 비교적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자원봉사자로 합격했다.주 2회 근무 조건으로 그녀는 매번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성실한 태도로 인해 감정소 직원들에게도 호감을 얻었고 일을 하며 틈틈이 정보를 수집해 최근 반년 동안 퇴직 의사를 밝혔던 직원들을 파악했다.소원은 단 한 명의 정보도 놓치지 않으려 범위를 넓혀 조사를 이어갔다.육경한처럼 신중한 사람이 무언가를 꾸미려 했다면 반드시 정밀하게 준비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그 결과, 최근
“감사합니다, 주 변호사님.”소원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보를 얻기가 더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너무나 성의껏 도와주자 소원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다음에 제가 수고비 추가로 드릴게요.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요.”“그럴 필요 없습니다.”그러자 주석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처음에 합의한 금액 그대로 주시면 됩니다. 저는 사건 단위로 일을 처리하지 시간을 기준으로 하진 않아요.”“예전에 이선 그룹 이준혁 대표님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이번 일도 이선 그룹 사모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거라 사건을 맡은 이상 전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소원 씨,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저와 상의하세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그렇게 주석훈과 헤어진 후, 소원은 주소에 적힌 감정 기관으로 택시를 타고 향했다.도착해서 본 기관은 규모도 크고 분위기가 엄숙했다.벽에는 여러 신고 관련 홍보 문구가 붙어 있었다.홍보 문구에는 ‘의사나 조수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익명 신고 시 거액의 포상이 지급된다’고 쓰여 있었다.이런 점을 보면 이 기관이 사법 당국에서 전문 기관으로 지정된 것은 인맥이 아닌 철저한 절차와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소원은 육경한이 어떻게 이런 철저한 검사를 피해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주석훈이 소개해 준 동창, 강백호를 찾아가 감정 과정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강백호는 말했다.“저희는 각 과정마다 최소 다섯 번 이상 검증을 거칩니다. 이렇게 철저히 검증하는 이유는 어떤 작은 오류나 부정행위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초반 두 번의 검사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후반 세 번의 검사는 다른 기관으로 혼합 샘플을 보내 재검사하기 때문에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 재검사 기관들은 모두 비공개로 운영되며 샘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작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