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송소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보니 정장을 입은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함께 서있는 두 사람은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한눈에 봐도 완벽한 커플이었다.순간, 윤혜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이준혁이 지금 임세희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건가?분명 어제까지 윤혜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경고했는데 그럼 지금 그의 행동은 대체 뭘까?이준혁은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한 건가?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첫사랑을 데리고 참석하는 건 두 사람 사이를 공개하겠다는 뜻인데.윤혜인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왠지 웃을 힘조차도 남지 않았다.이준혁, 참 대단한 사람이네!곁에 서있던 송소미도 윤혜인의 표정 변화를 발견했고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비웃었다.“참 불쌍해. 네 표정을 보니 오늘밤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데리고 참석할 줄은 몰랐나 보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속으로 자신에게 괜찮다고, 어차피 저 두 사람은 언젠가 서로를 공개할 거라고 위로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너무 아프고 쓸쓸했다.그녀는 여전히 두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고 곁에서 망연자실한 윤혜인을 지켜보던 송소미가 신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했다고 뭐가 달라져? 넌 영원히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해. 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한 건, 할아버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거야.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준혁 오빠와 세희 언니를 좀 봐,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넌 지금 뭐 같은 지 알아? 못난이 같아. 그것도 자기 분수를 모르는 못난이!”송소미의 비웃음이 이어지던 그때, 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누구에게 분수를 모른다고 지껄이는 거야?”의기양양하던 송소미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 목소리에 대꾸했다.“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이 천박한…”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게 뺨을 한 대 맞았고 순간 휘청거리던 송소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감히 어떤 놈
이준혁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윤혜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작은 흉터가 있는 걸 보니 그래도 상처는 처치한 듯했다.문현미가 아들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내가 일찍 와서 혜인이 좀 챙기라고 했잖아!”“일이 생겨서 좀 늦었어요.”“어떤 일인데 네 아내보다 중요해? 근데 그 이마는 왜 그렇게 된 거야?”퉁명스럽게 말을 하던 문현미가 이준혁 이마에 난 상처를 발견했고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고양이한테 긁혔어요.”순간 움찔한 윤혜인이 이준혁을 힐끗 쳐다보았고 이준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의미심장하게 윤혜인을 주시했다.두 사람의 눈짓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문현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고양이는 갑자기 어디서 났어? 파상풍 주사는 맞았어?”“얼마 전에 키우기 시작했어요. 아직 더 길들여야 할 거 같아요.”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이준혁은 드레스를 입은 윤혜인의 모습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드레스 색깔과 디자인이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렸기에 오늘 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아름답긴 했지만 허리 부분에 속살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가 조금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무뚝뚝하게 서있던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윤혜인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누가 이런 드레스를 골라준 거야?”“안 예뻐요?”윤혜인은 별 기대 없이 대충 되물었지만 그녀의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이 몇 초 정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예뻐.”예뻤다. 솔직히 그녀를 주머니에 넣고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반면, 갑자기 돌직구를 날리는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심장이 움찔했다. 조금 전에 그녀는 홧김에 일부러 그에게 되물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혜인은 이런
독한 계모 밑에서 자란 문현미는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예전에 그녀라면 이기려고 아옹다옹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겉과 속이 다르고 낯까지 두꺼운 사람은 찍소리도 할 수 없게 무찔러버려야 한다.그녀는 손을 뻗어 임세희를 잡으며 비꼬았다.“적당히 하고 얼른 일어나지 못해?”하지만 그녀의 손이 임세희에 닿기도 전에 임세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줌마, 때리지 마세요...”임세희는 이준혁의 다리를 끌어안고 애원하고 있었다. 문현미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인 것처럼 말이다.문현미는 단단히 화가 났다.“그 손을 놓지 못해? 감히 유부남의 다리를 잡아? 미쳤어?”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이미 다른 이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어머님.”윤혜인은 재빨리 문현미를 불렀다. 그녀는 천식을 앓고 있어서 흥분하면 안 된다.“엄마!”눈살을 찌푸린 이준혁도 손을 뻗어 문현미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그때 임세희가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그렇게 그의 손이 방향을 잃더니 그대로 윤혜인을 밀치고 말았다.“악-!”그녀의 뒤에는 바로 계단이었다. 비명 지르는 윤혜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겁에 질린 그녀는 눈앞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그가 잡아주길 바랐다.이준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도 손을 내밀고 싶었다...하지만 임세희가 그를 너무 꽉 안고 있어서 그는 한발 늦었다.불과 몇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닿지 못하고 있다.윤혜인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걸쳤던 겉옷이 떨어지고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자신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문현미가 그녀를 잡았다.위험에서 벗어 난 후.문현미를 잡고 있는 윤혜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방금전 화면이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마치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후벼파고 있었다.“준혁이! 너! 켁켁...”문현미는 기침하기 시작했다.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준혁은 자신이 그녀에게 위험을 가하게 될 줄은 몰랐다.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에 그는 마음이 아팠다.품에 안고
진짜 윤혜인을 사랑하게 된 건 아니겠지?임세희 눈에 짙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그때 송소미가 다가와 임세희를 부축했다.“언니, 돌아가서 쉬어.”두 사람은 어느 한 방으로 들어갔고 송소미가 방문을 잠갔다.“언니도 아줌마한테 맞은 거예요?”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송소미의 입술이 터져있었다.임세희도 순간 깨달았다.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너도 아줌마한테 맞았어?”송소미는 이를 갈았다.“모두 윤혜인, 그년 때문이에요.”윤혜인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어떻게 문현미에게 맞을 수 있을까.임세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이제 더 이상 너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말한 투자 방안은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아줌마의 태도가 보다시피 너무 완강하셔. 거기에 혜인 씨는 임신까지 한 상태라 오빠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전에 그녀는 송소미를 불렀고 그녀의 투자방안에 흥미를 느끼는 척하며 그녀에게 계약금 2억을 주면서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여야지만 투자할 수 있다고 했다.“임신했다고요?”“응, 하지만 오빠는 모르고 있어. 아마 아이를 낳은 다음 오빠를 협박하려는 건 가봐...”송소미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내가 뜻대로 되게 하지 않을 거야.”윤혜인과는 악연이었던 송소미기에 그녀가 이씨 가문의 손자를 낳게 된다면 송소미에게 이로울 게 없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언니는 포기하면 안 돼요. 오빠가 언니를 좋아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임세희는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아줌마는 혜인 씨와 배 속의 아이만 예뻐하잖아.”그때 송소미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는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 거예요.”임세희는 너무 기뻤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보람이 있다.하지만 겉으로는 속내를 숨기며 순진한 얼굴을 했다.“그게 무슨 뜻이야?”송소미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냉소를 지었다.“언니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해요. 내가 꼭 사모님이 되게 해줄게요.”임세희
문고리를 잡은 그의 기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에 차디찬 서리가 끼었다.그러다 결국 손을 놓고 돌아서 자리를 떴다.방 안.문현미는 설득해 보려 했지만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랐다.화해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들이 돌이킬 수 없이 막 나와 버렸으니.거기에 임세희까지 덤비고 있으니 윤혜인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갔다.“혜인아, 네가 속상한 걸 알고 있어. 할아버지만 아니면 나도 허락했을 거야. 한 달만 더 참아줄 수 있겠니? 할아버지는 막 약을 바꾸고 있는 단계라 차질이 생기면 안 돼.”“네. 고마워요. 어머님.”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제가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할게요.”문을 열고 나온 윤혜인은 도우미를 찾았고 문현미에게 식사를 올리라고 했다.그녀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또 문현미가 걱정되어 하는 수 없이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그녀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고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누군가가 윤혜인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그렇게 다행히 기둥에 머리를 박지 않았다.인사하려고 한발 물러서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구운 선배? 여기는 어떻게?”“아버지 심부름하러 왔어.”한구운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다정함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뭘 생각하느라 기둥을 못 봐?”윤혜인은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아무 것도 아니에요. 고마워요. 선배...”“고맙긴...”한구운은 손을 뻗어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멈칫하던 윤혜인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그녀의 행동에 한구운의 손이 경직되었다.그는 재빨리 사과했다.“미안, 너를 보면 동생이 생각나서... 그 애도 너처럼 귀여웠거든.”한구운의 말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상대는 그저 동생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자신이 과민 반응했다.이준혁에게 너무 많이 물든 것 같다.선배가 어떻게 자신을 좋아한단 말인가?그녀는 미소를
이 간단한 한마디는 이준혁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폐?이미 그를 골칫거리라고 생각하며 선배와 함께하려고 제대로 안달난 것 같다.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한구운의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그는 윤혜인이 불편해질까 재빨리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후, 윤혜인은 혐오의 눈빛으로 이준혁을 쏘아본 뒤 몸을 돌렸다.이준혁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그는 긴 다리를 움직여 그녀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윤혜인은 격렬하게 몸부림쳤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쾅-!이준현은 방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그에서 벗어난 윤혜인은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그에게 또다시 상처를 받은 후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이었다.그녀의 행동에 이준혁은 총 맞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해명 안 해?”이준혁이 그녀를 노려보며 한 발짝씩 다가왔다.뒤로 물러서다 그녀의 몸이 차가운 벽에 닿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그녀이기에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미친 짓 그만 해요. 선배와는 우연히 만난 거예요.”“우연?”한구운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머리를 쓰다듬던 모습이 떠올르자, 이준혁은 분노했다.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윤혜인은 거부했다.가녀린 팔에 문현미가 잡아주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준혁은 숨이 턱 막혔고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제했다.“방금...”그가 해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그녀는 아무런 해명도 듣고 싶지 않았다.사람의 무의식은 거짓이 아니다.그는 영원히 임세희를 버리고 그녀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그 장면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시렸다.부부의 인연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대가로 얻은 것이 다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밀어낸 것이라니...그녀는 씁쓸함을 억누르며 말했다.“이혼을 원하는 거 알아요. 어머님도 동의했으니 한 달만 참아요.”윤혜인은 그의 다급함을 느꼈다.오늘은 밀침이었지만 그녀가 물러서지 않으면 다음엔 죽여서라도 임세희에게
화가 난 윤혜인은 몸이 떨렸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선배와 난 친구예요. 선배에겐 나는 그저 동생일 뿐이에요.”동생?이준혁은 콧방귀를 꼈다. 같은 남자로서 그가 잘못 짚었을 리 없다.한구운의 그 음흉한 눈빛은 절대 동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윤혜인의 몸매를 바라보며 침을 흘렸고 드러난 허리에 흥분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더욱이 파티를 싫어하는 윤혜인이 오늘따라 정갈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나타났다.여러 가지 정황들은 그를 화나게 했다.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이글거렸다.“그래서 오늘 그 사람을 꼬시려는 거야?”윤혜인은 폭발할 것 같았다. 믿으려 하지 않으면 그뿐이지 이제는 모욕하려 든다.그녀는 왜 아직도 그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고 있는 걸까?제멋대로 그녀를 판단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이제 함부로 집적거린다는 죄명을 붙이고 있다.그야말로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았는데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질책하고 있는가.오랜 시간 참아왔던 것이 폭발할 것 같았다.그녀도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 없었다.“내가 선배와 연락한다고 뭐라 하는데 당신은? 당신이야말로 임세희랑 놀아나고 있잖아요!”“우리는 아주 정상적으로 만나요. 당신들처럼 숨어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는 않아요.”“당신은 그래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된다는 법 있나요?”드디어 폭발한 윤혜민은 참았던 눈물까지 쏟아냈다.분명 잘못한 것은 그들인데 왜 항상 그녀가 죄인인지 알 수 없다.그녀가 그를 사랑한 이유인가?그녀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멋대로 괴롭혀도 된단 말인가?그런 거라면 이런 고통스러운 사랑, 이제 하고 싶지 않다.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차갑게 말했다.“만약 선배가 사라진다면 나도 함께 사라질 거야.”“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이준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독기는 가히 그녀를 찢어버리고도 남았다.윤혜인은 마음이 너무 시렸다.이준혁에게는 임세희와 가족의 생명 외엔 중요한 건 없을
어떻게 여기서?낯선 방에서, 할아버지의 생신날에 그녀를 겁탈하려 들수 있지?그녀의 몸부림은 너무나 비약해서 남자의 거대한 힘을 당할 수 없었다.“네가 자초한 거야.”이준혁이 눈빛이 짙어졌다.‘찌찍’소리와 함께 그녀의 옷이 남자에 의해 찢겼다. 희고 가느다란 다리가 드러났다.눈물이 적신 촉촉한 눈빛은 한 남자를 미치게 하고도 남았다.이준혁은 침을 삼켰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다른 남자가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살인 충동까지 느꼈다.윤혜인은 포악한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뭐 하는 거야?”“널 가질 거야!”이준혁은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그녀는 정신이 아득했다.이런 말을 어떻게 이리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거지?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그는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에 고정하고 귓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었다.“넌 내꺼야. 아무도 건드리지 못 해!”그의 손이 그녀의 찢어진 치마를 위로 찢어 올렸다...그때 문밖에 인기척이 들려왔다.절망적인 것은 문은 그저 닫힌 상태였고 잠그지 않았다.지나가는 사람이 가볍게 밀기만 하면 그들이 무얼 하는지 볼 수 있었다...윤혜인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가랑이를 발로 찼다.준비가 없었던 이준혁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하지만 손은 여전히 그에게 잡혀 있었다.다시 이준혁에 잡히고 말았다.그는 담담하게 비꼬았다.“2년인데 나를 미워하기엔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닥쳐!”윤혜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항상 너무 쉽게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붉어진 눈, 흐트러진 머리에 화가 나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는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을 가졌다.이준혁 다시 입을 다셨다.“아직 충분하지 않아...”화가 났다.임세희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여자를 품으려는 거야?꿈도 야무지네.그녀는 너무 역겨웠다.이준혁을 노려보던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돌려 세게 깨물었다.손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이준혁은 시선을 내리깔았다.새끼 고양이가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
윤혜인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이준혁과 함께했던 위험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해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윤혜인을 위해 이준혁은 얻은 수많은 상처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사랑의 증표였다.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했다.그러니 더 이상 윤혜인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윤혜인의 마음은 이제 분명했다.이준혁에 대한 감정은 결코 동정이 아니었고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준혁을 사랑하기 때문에.외롭고 긴 밤마다 끝없는 악몽 속에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를 잃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이준혁을 사랑했다.그와 함께, 그리고 한 가족으로 평화롭게 함께 지내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하여 윤혜인은 이준혁의 사무실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마음을 전하려 했다.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윤혜인은 남자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맡기고 그의 다리를 덮었던 듯한 어두운색 담요를 집어 스스로를 덮었다.곧 그의 독특하고 따뜻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며 윤혜인은 그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회의가 끝난 후 이준혁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비서에게 물었다.“제 사무실에 아직 사람이 있나요?”비서가 답했다.“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결국... 갔구나.’윤혜인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준혁은 그녀의 선의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잠깐의 동행 후에 떠나는 것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길 테니 차라리 짧은 고통이 나을 것이었다.‘내가 고집을 부리면 우리 두 사람 결국 모두 불행하게 될 거야. 차라리 혼자 그 고통을 감당하는 편이 낫지.’...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을 자다가 한기를 느껴 깨어났다.밤이 된 북안도는 얼음 창고나 다름없었다. 난방이 없으면 젊고 강한 사람이라도 얼어 죽을 수 있을 만큼 추운 곳이었다.“에
윤혜인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이 그녀를 휘감았다.이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밖의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시간 맞춰서 갈 겁니다.”비서는 대답을 듣자마자 얼른 문을 닫아주고 나갔다.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품에서 몸을 떼려 했지만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그러자 당황한 윤혜인이 물었다.“그... 회의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준혁은 태연히 대답했다.“1분 정도는 문제없어.”윤혜인의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조금 전의 용기도 사라지고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듯했다.“일단 회의에 가세요. 우린 이따가 얘기해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날렵하고 힘 있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물었다.“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거야?”이 질문 하나로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가 준혁 씨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동정하고 있는 건가? 정말 그런 건가?’잠시 동안 윤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이준혁의 깊은 눈동자에는 점차 어두운 빛이 어렸다.“네 동정은 필요 없어.”이준혁이 말했다.그는 그녀가 자비로운 마음에 얽매이는 걸 원치 않았다.감정이란 단순한 감동이나 연민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만약 동정으로 얻게 되는 감정이라면, 이준혁은 차라리 윤혜인을 자유롭도록 놓아주고 자신이 홀로 평생 아픔을 감수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곧 이준혁은 윤혜인은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가 제대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말했다.“이제 돌아가.”그런 다음 스위치를 눌러 휠체어를 움직여 윤혜인 앞에서 천천히 떠났다.윤혜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조금 전 왜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마음속으로는 이 감정이 동정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이준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 많은 고통이 함께 밀려올
이준혁은 모든 과정을 매우 능숙하게 해냈다.한눈에 보기에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이 분명했다.동작이 빨랐지만 윤혜인은 그의 한쪽 다리가 무력하게 늘어져 있는 걸 분명히 보았다.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며 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표정을 본 이준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혹시 주 비서가 뭔가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건가?”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도 눈이 있으니까...”하지만 이준혁은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했다.요즘 주훈이 점점 겉으로는 알아듣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항상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주훈이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지금 모습만 봐도 주훈이 분명 무슨 말을 했구나 싶었다.‘탄페니아에서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네? 아직 더 단련시켜야겠어.’윤혜인이 주훈에게서 아무 말도 들은 게 없다고 부정하자 이준혁도 굳이 그 말을 들춰내지는 않았다.대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다리는 괜찮아. 보이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아.”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그가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문득 자신이 미워졌다.‘준혁 씨는 자신의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늘 자존심 강하고 뛰어났던 사람인데...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거야.’정말이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이준혁은 혼자서 견뎌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을 떠나고 그를 밀어내는 동안, 이준혁은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큰 손에 의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순간 윤혜인은 모든 것을 잊고 이준혁을 껴안았다.뒤이어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양복을 적셨다.“준혁 씨... 많이 아팠죠?”‘많이 아팠죠?’라는 말은 이준혁의 마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이준혁이 일하는 회의장 밖에 도착했다.이미 소식을 들은 주훈이 미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주 비서님, 우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번엔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나요?”주훈은 순간 멈칫하며 혹시 이준혁이 자신의 피의 대부분을 헌혈한 사실을 윤혜인이 알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그는 약간 망설였다.지난번에도 사실을 말하다가 이준혁에게 한 소리 듣고 근 반년 동안 탄페니아에 보내져서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급여나 처우는 그대로였지만 황토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고단한 생활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 하나 찾기 힘든 환경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그곳의 여자들은 주훈을 보고 마치 신선이라도 만난 것처럼 여기며 하룻밤에도 서너 명이 그의 천막으로 찾아와 친해지려 하는 일들이 많았다.겁이 난 나머지 주훈은 급히 벽돌로 집을 짓고 문을 굳게 닫고 지냈다.물론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주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말씀하세요.”윤혜인은 물었다.“대표님의 다리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요.”주훈은 두어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다리에 대해 질문한다는 건, 이준혁이 어떻게 다리를 다쳤는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였다.‘그럼 이제 그 얘기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곧 주훈은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대표님은... 북안도의 전문가들 소견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평생 목발과 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거라네요.”“회복 불가능하다고요?”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고 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수술받으면 서서히 회복될 거라 하지 않았나? 심지어 퇴원하기 전에는 혼자 서 있는 모습까지 봤었는데?’그녀는 주훈의 팔을 꽉 쥐고 다급히 물었다.“그날 밤, 오빠 보러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