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이 소원을 두 팔에 가둔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긴 싫어? 밖에 가서 할래? 소씨 집안 공주님이 얼마나 방탕한 여자인지 보여주고 싶어?”입술을 덜덜 떨고 있던 소원이 육경한의 팔을 잡은 채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다.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이 남자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저번에 소원은 그저 싫은 내색을 조금 보였을 뿐인데 육경한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소씨 가문 회사의 주식을 폭락하게 만들었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소원이 아무리 빌고 애원해도 육경한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이제 드디어 그녀를 만나준 이상, 소원은 절대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한편, 육경한이 싸늘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원을 쳐다보며 그녀가 더러운 몸으로 순진한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가 한국에 없던 이 몇 년 동안, 그녀의 몸은 수많은 남자들에게 놀아났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육경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어버린 뒤, 치마를 위로 올렸다.소원은 그렇게 목이 조인 채 소파에 누워 육경한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연민도 없었으며 소원에게 끝없는 고통만 남겨주었다.소원은 시체 마냥 누워서 육경한의 갈취를 버텨내 수밖에 없었다.두 시간 뒤, 육경한은 소원의 몸 위에서 내려와 곁에 있던 옷을 바닥에 툭 던졌고 소원에게 입으라고 눈치를 줬다.소파에서 일어난 소원이 바닥에서 옷을 주웠다. 그 옷에서는 술집 아가씨들이 자주 쓰는 저렴한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겼다.소원은 코를 찌르는 향기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녀가 입고 온 옷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졌기에 그가 준 옷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우리 소씨 공주님이 표정이 별로 안 좋네, 왜? 만족 못했어?”육경한이 코웃음을 치며 비꼬자 휘청거리던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이 남자는 분명 조금 전에 그 여자와 충분히 즐겼을 텐데 대체 어떻게 아직도 힘이 저렇
하지만 윤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준혁이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를 내야 하는 건 그녀 아닌가?이준혁은 증거도 없이 그녀를 모함한 것도 모자라 매번 임세희의 편에 서서 그녀를 괴롭힌 주제에…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윤혜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 제발 좀 천천히 달려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덜컥 겁이 난 윤혜인이 엉엉 울면서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이준혁 씨, 제발 차 좀 멈춰요! 저 진짜 토할 것 같아요. 제발 멈추라고요! 멈춰주세요… 웩…”결국 참다못한 윤혜인이 입을 막은 채 헛구역질을 했고 그제야 이준혁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채 차를 세웠다.십 분도 안 된 사이에 두 사람은 스카이 별장에 도착한 것이다. 차가 멈추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별장 안에 있는 1층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와락 토를 했다.하지만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녀는 속이 비어 있었기에 죽을 것처럼 아팠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했다.이때, 이준혁이 그녀의 곁에 나타나 따듯한 물 한잔을 건넸고 윤혜인이 얼른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 마시고 나서야 속이 좀 편해진 윤혜인은 홱 돌아서서 이준혁의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이준혁 씨, 당신한테 생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저는 살고 싶어요! 흑흑… 진짜 너무 놀랐단 말이에요…”엉엉 우는 윤혜인의 모습에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껴안았고 그의 셔츠 위로 떨어진 눈물은 그대로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조금 전에 너무 놀란 탓에 윤혜인은 아랫배에 통증이 조금씩 느껴졌고 혹시라도 뱃속의 아이에게 문제라도 생기진 않았을까 너무 걱정되었다.창백해진 윤혜인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이준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아파?”“이준혁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뱃속의 아이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 윤혜인이 그를 힘껏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고 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윤혜인은 화장실의 차가운 벽에 등을 붙인 채 이준혁의 갈취를 받아내고 있었고 이 순간, 자신이 너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반항도 못하고 이렇게 이준혁에게 휘둘리다니.짜고 달달한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입술에 흘러 들자 그는 마음속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고 언짢은 듯 윤혜인을 놓아준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은 모습이었다.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때리려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이준혁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어디 감히!”다시 한번 다른 남자를 위해 그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이준혁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찢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이준혁이 너무 꽉 잡고 있었던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고개를 홱 돌린 채 그와의 스킨십을 피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입술이 다른 여자의 몸에 닿은 적이 있다는 생각만 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반항하면 그녀만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윤혜인이 조금 전보다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단 이거 놔요.”간만에 부드러워진 윤혜인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이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놓아주었고 단 일초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않은 윤혜인은 홱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이준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를 잡아당겨 다시 벽에 밀쳤다. 두 사람의 거리는 또다시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난 분명히 놨어.”이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두 번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말문이 막힌 윤혜인이 화가 난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이준혁은 왠지 화를 내는 윤혜인의 모습이 좋았으며 오늘 병원 주차장에서 영혼 없이 고분고분하던 그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조금 전에 거칠었던 행동과 달리 이번에 이준혁이 선사한 키스는 매우 섬세했다. 목덜미로부터 시작하여 고
이준혁이 손을 뻗어 그녀 손에 있던 크리스탈 장식품을 빼앗았고 그대로 벽에 던져버렸다.쨍그랑!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 장식품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고 깜짝 놀란 윤혜인이 비명을 지르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턱을 꽉 잡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기억해,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만나면 난 그 놈을 서울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말을 마친 이준혁이 문을 쾅 닫은 채 화장실을 나섰고 윤혜인은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꼭 끌어안고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아랫배에서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윤혜인은 힘겹게 배를 꼭 끌어안았다.이때, 문이 벌컥 열렸고 다급하게 뛰어들어온 도우미 아주머니는 엉망진창이 된 화장실 바닥을 보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재빨리 부축했다.“여기에 왜 피가 있어요? 사모님 어디 다치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걱정된 듯 묻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제 피가 아니에요.”“그럼…”도우미 아주머니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더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사모님, 일단 방에 가서 좀 쉬세요.”윤혜인을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온 아주머니가 윤혜인을 침대에 눕힌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조금 전에 제가 쌍화차를 끓였는데 한 잔 드릴까요?”“고마워요, 아주머니. 근데 전 지금 별로 입맛이 없네요. 누워서 좀 쉬고 싶어요.”윤혜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힘겹게 대답했고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서서 방을 나서던 아주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전했다.“사모님, 요즘 도련님이 매일 사람을 시켜 산삼이며 녹용이며 귀한 송이까지 보내오십니다. 이 약재들을 끓이는 방법까지 친히 배워 오셔서 주방장에게 가르치셨어요. 사모님 안색이 안 좋다고 저희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예전에 두 분은 서로를 많이 아끼고 좋아하셨잖아요. 옛정을 많이 돌이켜 보시고 작은 다툼 때문에 그 정까지 잃지는 마세요.”“네, 알겠어요.”윤혜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
휴게실에서 나온 남자는 다름아닌 한구운이었다. 카키색 바람막이를 입고 금색 테두리 안경을 낀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점잖고 잘생겨 보였다.“혜인이는 누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확실해요.”한구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와 임수향은 사촌누나와 남동생으로 평소에 사이가 꽤 좋았다.그의 말에 임수향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법이다.“조금 전에 나와서 인사하지 왜 숨어 있었어?”임수향의 물음에 한구운이 다정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한구운은 윤혜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설마 저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린 거야?”임수향이 그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구운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 여자 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러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이력서를 보니까 기혼이라고 적혀 있던데, 설마 남의 가정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지?”조금 전에 한구운이 휴게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윤혜인은 아직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듯했기에 임수향이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타일렀다.“구운아, 네 조건으로 어떤 여자도 찾을 수 있어. 절대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내연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아니에요.”한구운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대답했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윤혜인에 대한 그의 마음은 아직 겉으로 드러내서는 절대 안 된다.임수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가지 않았다. 한구운은 겉으론 점잖고 온순해 보이지만 사실상 꽤 사악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결심한 일은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남의 가정에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임수향도 굳이 나서서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한편, 작업실에서 나온 윤혜인은 이 좋은 소식을 외할머니에게 제일 먼저 전하려고 병원에 찾아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저녁밥을 두 공
로비로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2층으로 올라갔다. 문현미의 외할아버지는 올해 백세가 되셨지만 여전히 정정하셨으며 말도 잘 알아들었다.축복의 말을 올린 윤혜인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문현미의 외할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바로 윤혜인에게 옥패 하나를 선물했다.그 옥패는 색깔도 예쁘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기에 윤혜인이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문현미가 계속 그녀에게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윤혜인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 옥패를 받게 되었다.그 뒤로 문현미와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집안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대충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함부로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길을 잃을까 봐 윤혜인은 2층 거실만 조용하게 둘러보고 있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은 윤혜인은 옆에 있던 난간에 기대 수다를 떨고 있던 두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오늘밤 이씨 가문 그 남자도 온다고 하던데 반드시 이 기회를 잘 잡아야 돼. 그 남자는 어떤 여자를 좋아할까?”“됐거든, 넌 기회도 없어. 듣는 소문에 의하면 그 남자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를 좋아한대.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중간에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계속 반복했대. 임씨 가문 아가씨가 요 근래 귀국했는데 두 사람 기사만 해도 엄청 많이 났어.”“임씨 가문 그 비실대는 여자는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그런 남자를 손에 넣은 거지?”“그 여자가 첫사랑이래. 근데 이씨 가문 그 남자가 꽤 많이 좋아하나 봐.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나거나 연애설이 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에휴, 참 부럽네. 저런 남자에게 시집만 갈 수 있다면 타이틀만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난 좋아.”“야, 꿈도 꾸지 마. 하하하, 이씨 가문 사모님의 타이틀을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두 사람의 대화에 윤혜인은 왠지 씁쓸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이씨 가문 사모님 타이틀을 원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절대 다른 여자와 그 남자를 공유하고 싶어
윤혜인이 송소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보니 정장을 입은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함께 서있는 두 사람은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한눈에 봐도 완벽한 커플이었다.순간, 윤혜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이준혁이 지금 임세희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건가?분명 어제까지 윤혜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경고했는데 그럼 지금 그의 행동은 대체 뭘까?이준혁은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한 건가?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첫사랑을 데리고 참석하는 건 두 사람 사이를 공개하겠다는 뜻인데.윤혜인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왠지 웃을 힘조차도 남지 않았다.이준혁, 참 대단한 사람이네!곁에 서있던 송소미도 윤혜인의 표정 변화를 발견했고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비웃었다.“참 불쌍해. 네 표정을 보니 오늘밤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데리고 참석할 줄은 몰랐나 보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속으로 자신에게 괜찮다고, 어차피 저 두 사람은 언젠가 서로를 공개할 거라고 위로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너무 아프고 쓸쓸했다.그녀는 여전히 두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고 곁에서 망연자실한 윤혜인을 지켜보던 송소미가 신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했다고 뭐가 달라져? 넌 영원히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해. 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한 건, 할아버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거야.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준혁 오빠와 세희 언니를 좀 봐,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넌 지금 뭐 같은 지 알아? 못난이 같아. 그것도 자기 분수를 모르는 못난이!”송소미의 비웃음이 이어지던 그때, 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누구에게 분수를 모른다고 지껄이는 거야?”의기양양하던 송소미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 목소리에 대꾸했다.“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이 천박한…”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게 뺨을 한 대 맞았고 순간 휘청거리던 송소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감히 어떤 놈
이준혁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윤혜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작은 흉터가 있는 걸 보니 그래도 상처는 처치한 듯했다.문현미가 아들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내가 일찍 와서 혜인이 좀 챙기라고 했잖아!”“일이 생겨서 좀 늦었어요.”“어떤 일인데 네 아내보다 중요해? 근데 그 이마는 왜 그렇게 된 거야?”퉁명스럽게 말을 하던 문현미가 이준혁 이마에 난 상처를 발견했고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고양이한테 긁혔어요.”순간 움찔한 윤혜인이 이준혁을 힐끗 쳐다보았고 이준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의미심장하게 윤혜인을 주시했다.두 사람의 눈짓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문현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고양이는 갑자기 어디서 났어? 파상풍 주사는 맞았어?”“얼마 전에 키우기 시작했어요. 아직 더 길들여야 할 거 같아요.”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이준혁은 드레스를 입은 윤혜인의 모습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드레스 색깔과 디자인이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렸기에 오늘 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아름답긴 했지만 허리 부분에 속살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가 조금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무뚝뚝하게 서있던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윤혜인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누가 이런 드레스를 골라준 거야?”“안 예뻐요?”윤혜인은 별 기대 없이 대충 되물었지만 그녀의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이 몇 초 정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예뻐.”예뻤다. 솔직히 그녀를 주머니에 넣고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반면, 갑자기 돌직구를 날리는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심장이 움찔했다. 조금 전에 그녀는 홧김에 일부러 그에게 되물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혜인은 이런
이지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트집을 잡았다.그러나 사건의 경과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무작정 소원을 내연녀라고 생각했다.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소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이를 본 이지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늘 기필코 소원을 짓밟으리라 다짐했다.그녀는 계속하여 소리쳤다.“빈말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 간수 잘해요. 한동네 살다가는 이 여자한테 홀랑 넘어갈 수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조심하세요. 계속 이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고소할 겁니다.”소원이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이지애는 단번에 핸드폰을 쳐냈다. 소원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만큼 절대 경찰에 신고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던 소원은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그 타이밍에 이지애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밀었다.계단에 서 있던 소원은 이지애가 손을 뻗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짚었다.그러고선 자신의 본능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내가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그녀의 몸은 이미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비록 소원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지만 본능이 이렇게 행동하게끔 그녀를 이끌었다.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타고난 모성애일까?이지애는 죄책감을 느낀 소원이 겁을 먹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착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더욱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다들 봤죠? 겁먹었잖아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겠어요?”“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남자에 환장한 X이에요. 천박한 것.”주변 사람들은 이지애의 말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우리 동네에 이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네요.”“이래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저 예쁜 얼굴로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남의
“우리 연주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뻔뻔스럽게 무슨 일로 왔냐는 말이 나와요?”이지애의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밝은 미래를 가진 그녀의 딸은 구타 사건으로 인해 30일간의 구속 처분을 받았고 석방된 후에는 정신 상태에 큰 타격을 입었다.소문에 의하면 구치소 동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늘 부잣집 아가씨로만 살아왔던 육연주는 구치소에 들어가도 모든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구치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러다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말았다.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지켜주니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 일 없었지만 그 버릇을 구치소에서 똑같이 하는 건 죽자고 덤비는 거나 다름없다.게다가 이미 구치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누굴 무서워하겠는가?육경한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기어코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이지애는 모든 자원이 국내에 있다. 해외로 나간다해서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세상에 그녀보다 잘나가고 부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해외로 나가면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텐데, 엄마와 딸이 억울함을 당하고만 있겠는가?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지 않았고 이혼도 혼자서 처리했다. 서한 그룹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지었다.게다가 이혼했음에도 육연주를 해외로 보냈기에 이지애는 분노와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모든 걸 알게 된 소원은 그저 이 상황이 우스웠다.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쪽 따님이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괴롭혔다면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은 저였겠죠.”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우리 사위한테 치근덕거리지 않았다면 연주가 때렸겠어요? 당신 같은 인간은 맞아도 싸죠. 얌치도 모르는 천박한 주제에.”소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증거 있으세요? 제가 서현재
소원이 이야기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육경한은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요양원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자세히 말해줬다.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임신중절 약은 소원의 손에 있었기에 그녀가 약을 먹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하고 불안했다.비록 위협을 한 거나 다름없지만 그 속에 섞인 두려움을 소원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고 고작 이런 협박으로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다.어쩌면 더욱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수 있다.이러한 끈기가 보통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분명 빛날 테지만, 소원은 육경한에 의해 거듭 억압당해 모든 자존심이 닳아 없어졌다.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래전에 시들었을 텐데도 소원은 여전히 끝없는 황야에서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썼다.육경한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지키는것 뿐이다.한편으로는 전미영이 빨리 호전되길 원했다. 어머님의 호전이 소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마음을 약하게 하고 이로부터 순진한 아이를 지켜내길 바랐다....소원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 한 통을 받았다.지난번 진찰받았던 의사였다.“선생님, 안녕하세요.”“소원 씨, 오늘 병원에 안 오셔서 연락드린 거예요. 3일 동안 약 다 먹으면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위험할 거예요.”의사의 말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는데 약을 먹은 후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서 출혈이 발생하고서야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이 많았다.“아직 약을 안 먹었어요.”소원이 말했다.“안 먹었다면 다행이네요. 아이를 지키기로 결정하셨나요?”의사가 물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민 중이라면 검사를 받는
전미영은 소원의 행동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녀는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점점 멍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소원의 복부를 가리키며 여전히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꽃이야... 꽃이 피었어...”소원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셔츠 단추에는 하얀 데이지 한송이가 있었다.전미영은 복부 쪽 단추에 달린 작은 데이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꽃...”소원의 외침은 간병인의 주의를 끌었고, 부랴부랴 달려온 간병인은 말하는 진미영을 보고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재빨리 달려가 요양원의 의사를 모셔 왔다.소원은 의사가 살펴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했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검사를 해보니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런 반응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좋은 징조이기도 합니다. 만약 간단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한다면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다만 기억 회복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때때로 많은 기억이 환자의 뇌에 부담을 주어 과부하를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겠죠?”의사는 전미영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남아있는 기억 또한 부담일 수 있으니 간단하게 사는 게 최고다.소원은 검사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만신창이된 그들에게는 최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전미영이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다.병실로 돌아온 소원은 전미영의 곁을 지켰지만 처음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소원은 전미영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병실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는 게 아니라 주차된 은색의 승용차로 향했다.창문을 두드리자 차장이 내려가며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는데 다름 아닌 육경한이다.육경한은 놀라지 않은듯하다. 비서의 차를 타고 있다 한들 예민하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
육경한은 소원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이미 구제 불능의 상태였다.게다가 무곡산의 일은 소원이 그에게 아무 사랑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생사가 달린 일이라도 다시 육경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소원의 눈빛은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줬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육경한은 처음으로 삶에 대한 절망감을 처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소원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싶었는데 하느님은 장난이라도 치는 듯 아이를 선물해 줬다.육경한은 소원의 변호사에게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진실을 알게 된 순간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왔고 어쩌면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기쁨 뒤에는 늘 그렇듯 두려움이 찾아온다.육경한은 아이를 놓칠까 봐 두려웠고 그 아이가 유진과 같은 고통을 겪을까 봐 무서웠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두려워했다.손에 넣기도 전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를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때의 경험한 두려움이 다시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육경한은 간절히 기도했다.‘소원아, 제발 잔인한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한테 기회를 줘. 나한테도...’저녁.퇴근한 육경한은 소원이네 집 아래에 머물며 위층에 켜져 있는 불빛을 오랫동안 바라봤다.밤새 잠을 못 잤고 낮에 눈을 붙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피곤했다.3일 연속으로 육경한은 감시를 붙여놓은 사람을 찾아와 교대했다. 지금껏 보고받은 행적을 보면 지난 3일 동안 소원은 유난히 조용했고 누굴 만나기는커녕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아무도 모르겠지만 지난 3일간의 육경한의 삶은 그저 고문이었다. 마치 칼이 머리 위에 걸려있는 듯 언제 떨어져 죽을지 몰랐고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답을 기다리고 있
생각할 것도 없다. 소원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니까..하지만 육경한이 제안한 조건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진을 만날 수도 있고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있다.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조건을 생각해 보면 삼킬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어길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를 안전하게 낳을 수만 있다면 임신 중에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아. 내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 건 알지?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지만...”육경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겠다고 고집한다면 우리에게 협상의 여지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소송을 진행하면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이 줄어들 거야.”소원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육경한은 그의 스타일대로 이런 결정을 내렸고 의외는 아니었다.“육경한, 아이를 꼭 낳으라고 하는 이유는 뭐야?”육경한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너랑 나 사이의 아이니까.”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육경한이 이번에는 명확하게 의견을 표현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그는 임신한 소원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이러면 예전에 유진을 임신했을 때 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달래질 것만 같았다.그러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꼭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소원은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생각해 보고 연락할게.”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황 비서가 데려다 줄거야.”육경한은 소원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아무리 걱정되어도 직접 배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매 순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물론 거절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지금 이 순간 소원은 혼자 있고 싶었다.“괜찮아. 혼자 가면 돼.”육경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그래.”소원이 문에 다다르자 육경한도 그녀를
“육경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잘 들어, 난 반드시 아이를 지울 거야.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날 감시할 수 있어? 내가 화장실에 갈 때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아이를 지울 방법이 백 가지나 있어. 아이로 날 통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소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제발 현실을 직시해. 아이를 낳으라고? 네가 내 아이의 아빠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육경한은 얼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있었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차분했다.“소원아,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은 건 알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혼하지 않을 거야. 이혼하고 나서도 유진을 보고 싶으면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으면 돼.”차분한 표정과 달리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일었다.원래는 정말 놓아주려고 했다. 이준혁의 말대로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묶어두는 건 두 사람에게 모두 상처가 되니까.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런 충동적인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이 아이를 임신한 이상 절대 지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알고 있다. 이 아이가 그들의 관계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소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꿈 깨라고.”다만 절대로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란 확신은 변함없었다.육경한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비서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일단 이것 좀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소원은 위에 적힌 조항을 주의 깊게 읽어봤다.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은 혼인 관계를 끊을 수 있다. 그 후에도 양측 모두 아이를 만날 수 있으며 누구랑 함께 살지는 아이의 결정에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조건이다. 육경한은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 함께 키우는 것을 택했다.그러나 상대는 교활함이 몸에 배인 육경한이니 소원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지? 협박하려고 이러는
이건 소원에 대한 시험이다. 육경한은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아이를 볼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이미 큰 양보를 한 거나 다름없다.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약 소원이 결혼할 계획이 있다면 아이를 못 보게 할 생각이었다.그는 절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그리고...육경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소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렇게 할게.”어차피 처음부터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 결혼에 대한 마음은 진작에 접었다.육경한은 흔쾌히 승낙하는 소원을 보고선 마음속의 불편한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이때 소원이 물었다.“또 있어?”“응.”육경한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청천벽력 같은 그의 말에 소원은 자리에 얼어붙은 채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의 눈빛은 초점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육경한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소원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아이를 낳으라고.”“나... 임신 안 했어.”누군가가 가슴을 움켜쥐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던 소원은 힘겹게 답했다.유진은 처음부터 우연이었다. 아이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체념했는데 기적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았다.하지만 그 뒤로 육경한과 얽혔고 그들의 관계는 소원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이가 그녀의 약점이라는 걸 육경한은 분명히 알고 있다.그러므로 소원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육경한은 진료 기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선 소원에게 다가가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소원아, 난 아무런 조사 없이 막연한 추측으로 단정 짓는 사람이 아니야.”그 위에는 소원의 검사 기록과 약 처방 기록이 명확하게 쓰여있었다.육경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는 건 절대 안 돼.”그는 진료 기록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