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이 손을 뻗어 그녀 손에 있던 크리스탈 장식품을 빼앗았고 그대로 벽에 던져버렸다.쨍그랑!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 장식품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고 깜짝 놀란 윤혜인이 비명을 지르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턱을 꽉 잡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기억해,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만나면 난 그 놈을 서울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말을 마친 이준혁이 문을 쾅 닫은 채 화장실을 나섰고 윤혜인은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꼭 끌어안고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아랫배에서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윤혜인은 힘겹게 배를 꼭 끌어안았다.이때, 문이 벌컥 열렸고 다급하게 뛰어들어온 도우미 아주머니는 엉망진창이 된 화장실 바닥을 보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재빨리 부축했다.“여기에 왜 피가 있어요? 사모님 어디 다치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걱정된 듯 묻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제 피가 아니에요.”“그럼…”도우미 아주머니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더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사모님, 일단 방에 가서 좀 쉬세요.”윤혜인을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온 아주머니가 윤혜인을 침대에 눕힌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조금 전에 제가 쌍화차를 끓였는데 한 잔 드릴까요?”“고마워요, 아주머니. 근데 전 지금 별로 입맛이 없네요. 누워서 좀 쉬고 싶어요.”윤혜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힘겹게 대답했고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서서 방을 나서던 아주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전했다.“사모님, 요즘 도련님이 매일 사람을 시켜 산삼이며 녹용이며 귀한 송이까지 보내오십니다. 이 약재들을 끓이는 방법까지 친히 배워 오셔서 주방장에게 가르치셨어요. 사모님 안색이 안 좋다고 저희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예전에 두 분은 서로를 많이 아끼고 좋아하셨잖아요. 옛정을 많이 돌이켜 보시고 작은 다툼 때문에 그 정까지 잃지는 마세요.”“네, 알겠어요.”윤혜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
휴게실에서 나온 남자는 다름아닌 한구운이었다. 카키색 바람막이를 입고 금색 테두리 안경을 낀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점잖고 잘생겨 보였다.“혜인이는 누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확실해요.”한구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와 임수향은 사촌누나와 남동생으로 평소에 사이가 꽤 좋았다.그의 말에 임수향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법이다.“조금 전에 나와서 인사하지 왜 숨어 있었어?”임수향의 물음에 한구운이 다정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한구운은 윤혜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설마 저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린 거야?”임수향이 그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구운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 여자 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러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이력서를 보니까 기혼이라고 적혀 있던데, 설마 남의 가정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지?”조금 전에 한구운이 휴게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윤혜인은 아직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듯했기에 임수향이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타일렀다.“구운아, 네 조건으로 어떤 여자도 찾을 수 있어. 절대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내연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아니에요.”한구운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대답했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윤혜인에 대한 그의 마음은 아직 겉으로 드러내서는 절대 안 된다.임수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가지 않았다. 한구운은 겉으론 점잖고 온순해 보이지만 사실상 꽤 사악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결심한 일은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남의 가정에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임수향도 굳이 나서서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한편, 작업실에서 나온 윤혜인은 이 좋은 소식을 외할머니에게 제일 먼저 전하려고 병원에 찾아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저녁밥을 두 공
로비로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2층으로 올라갔다. 문현미의 외할아버지는 올해 백세가 되셨지만 여전히 정정하셨으며 말도 잘 알아들었다.축복의 말을 올린 윤혜인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문현미의 외할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바로 윤혜인에게 옥패 하나를 선물했다.그 옥패는 색깔도 예쁘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기에 윤혜인이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문현미가 계속 그녀에게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윤혜인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 옥패를 받게 되었다.그 뒤로 문현미와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집안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대충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함부로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길을 잃을까 봐 윤혜인은 2층 거실만 조용하게 둘러보고 있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은 윤혜인은 옆에 있던 난간에 기대 수다를 떨고 있던 두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오늘밤 이씨 가문 그 남자도 온다고 하던데 반드시 이 기회를 잘 잡아야 돼. 그 남자는 어떤 여자를 좋아할까?”“됐거든, 넌 기회도 없어. 듣는 소문에 의하면 그 남자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를 좋아한대.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중간에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계속 반복했대. 임씨 가문 아가씨가 요 근래 귀국했는데 두 사람 기사만 해도 엄청 많이 났어.”“임씨 가문 그 비실대는 여자는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그런 남자를 손에 넣은 거지?”“그 여자가 첫사랑이래. 근데 이씨 가문 그 남자가 꽤 많이 좋아하나 봐.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나거나 연애설이 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에휴, 참 부럽네. 저런 남자에게 시집만 갈 수 있다면 타이틀만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난 좋아.”“야, 꿈도 꾸지 마. 하하하, 이씨 가문 사모님의 타이틀을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두 사람의 대화에 윤혜인은 왠지 씁쓸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이씨 가문 사모님 타이틀을 원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절대 다른 여자와 그 남자를 공유하고 싶어
윤혜인이 송소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보니 정장을 입은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함께 서있는 두 사람은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한눈에 봐도 완벽한 커플이었다.순간, 윤혜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이준혁이 지금 임세희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건가?분명 어제까지 윤혜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경고했는데 그럼 지금 그의 행동은 대체 뭘까?이준혁은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한 건가?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첫사랑을 데리고 참석하는 건 두 사람 사이를 공개하겠다는 뜻인데.윤혜인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왠지 웃을 힘조차도 남지 않았다.이준혁, 참 대단한 사람이네!곁에 서있던 송소미도 윤혜인의 표정 변화를 발견했고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비웃었다.“참 불쌍해. 네 표정을 보니 오늘밤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데리고 참석할 줄은 몰랐나 보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속으로 자신에게 괜찮다고, 어차피 저 두 사람은 언젠가 서로를 공개할 거라고 위로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너무 아프고 쓸쓸했다.그녀는 여전히 두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고 곁에서 망연자실한 윤혜인을 지켜보던 송소미가 신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했다고 뭐가 달라져? 넌 영원히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해. 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한 건, 할아버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거야.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준혁 오빠와 세희 언니를 좀 봐,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넌 지금 뭐 같은 지 알아? 못난이 같아. 그것도 자기 분수를 모르는 못난이!”송소미의 비웃음이 이어지던 그때, 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누구에게 분수를 모른다고 지껄이는 거야?”의기양양하던 송소미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 목소리에 대꾸했다.“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이 천박한…”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게 뺨을 한 대 맞았고 순간 휘청거리던 송소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감히 어떤 놈
이준혁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윤혜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작은 흉터가 있는 걸 보니 그래도 상처는 처치한 듯했다.문현미가 아들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내가 일찍 와서 혜인이 좀 챙기라고 했잖아!”“일이 생겨서 좀 늦었어요.”“어떤 일인데 네 아내보다 중요해? 근데 그 이마는 왜 그렇게 된 거야?”퉁명스럽게 말을 하던 문현미가 이준혁 이마에 난 상처를 발견했고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고양이한테 긁혔어요.”순간 움찔한 윤혜인이 이준혁을 힐끗 쳐다보았고 이준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의미심장하게 윤혜인을 주시했다.두 사람의 눈짓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문현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고양이는 갑자기 어디서 났어? 파상풍 주사는 맞았어?”“얼마 전에 키우기 시작했어요. 아직 더 길들여야 할 거 같아요.”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이준혁은 드레스를 입은 윤혜인의 모습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드레스 색깔과 디자인이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렸기에 오늘 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아름답긴 했지만 허리 부분에 속살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가 조금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무뚝뚝하게 서있던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윤혜인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누가 이런 드레스를 골라준 거야?”“안 예뻐요?”윤혜인은 별 기대 없이 대충 되물었지만 그녀의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이 몇 초 정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예뻐.”예뻤다. 솔직히 그녀를 주머니에 넣고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반면, 갑자기 돌직구를 날리는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심장이 움찔했다. 조금 전에 그녀는 홧김에 일부러 그에게 되물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혜인은 이런
독한 계모 밑에서 자란 문현미는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예전에 그녀라면 이기려고 아옹다옹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겉과 속이 다르고 낯까지 두꺼운 사람은 찍소리도 할 수 없게 무찔러버려야 한다.그녀는 손을 뻗어 임세희를 잡으며 비꼬았다.“적당히 하고 얼른 일어나지 못해?”하지만 그녀의 손이 임세희에 닿기도 전에 임세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줌마, 때리지 마세요...”임세희는 이준혁의 다리를 끌어안고 애원하고 있었다. 문현미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인 것처럼 말이다.문현미는 단단히 화가 났다.“그 손을 놓지 못해? 감히 유부남의 다리를 잡아? 미쳤어?”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이미 다른 이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어머님.”윤혜인은 재빨리 문현미를 불렀다. 그녀는 천식을 앓고 있어서 흥분하면 안 된다.“엄마!”눈살을 찌푸린 이준혁도 손을 뻗어 문현미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그때 임세희가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그렇게 그의 손이 방향을 잃더니 그대로 윤혜인을 밀치고 말았다.“악-!”그녀의 뒤에는 바로 계단이었다. 비명 지르는 윤혜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겁에 질린 그녀는 눈앞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그가 잡아주길 바랐다.이준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도 손을 내밀고 싶었다...하지만 임세희가 그를 너무 꽉 안고 있어서 그는 한발 늦었다.불과 몇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닿지 못하고 있다.윤혜인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걸쳤던 겉옷이 떨어지고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자신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문현미가 그녀를 잡았다.위험에서 벗어 난 후.문현미를 잡고 있는 윤혜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방금전 화면이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마치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후벼파고 있었다.“준혁이! 너! 켁켁...”문현미는 기침하기 시작했다.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준혁은 자신이 그녀에게 위험을 가하게 될 줄은 몰랐다.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에 그는 마음이 아팠다.품에 안고
진짜 윤혜인을 사랑하게 된 건 아니겠지?임세희 눈에 짙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그때 송소미가 다가와 임세희를 부축했다.“언니, 돌아가서 쉬어.”두 사람은 어느 한 방으로 들어갔고 송소미가 방문을 잠갔다.“언니도 아줌마한테 맞은 거예요?”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송소미의 입술이 터져있었다.임세희도 순간 깨달았다.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너도 아줌마한테 맞았어?”송소미는 이를 갈았다.“모두 윤혜인, 그년 때문이에요.”윤혜인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어떻게 문현미에게 맞을 수 있을까.임세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이제 더 이상 너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말한 투자 방안은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아줌마의 태도가 보다시피 너무 완강하셔. 거기에 혜인 씨는 임신까지 한 상태라 오빠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전에 그녀는 송소미를 불렀고 그녀의 투자방안에 흥미를 느끼는 척하며 그녀에게 계약금 2억을 주면서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여야지만 투자할 수 있다고 했다.“임신했다고요?”“응, 하지만 오빠는 모르고 있어. 아마 아이를 낳은 다음 오빠를 협박하려는 건 가봐...”송소미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내가 뜻대로 되게 하지 않을 거야.”윤혜인과는 악연이었던 송소미기에 그녀가 이씨 가문의 손자를 낳게 된다면 송소미에게 이로울 게 없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언니는 포기하면 안 돼요. 오빠가 언니를 좋아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임세희는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아줌마는 혜인 씨와 배 속의 아이만 예뻐하잖아.”그때 송소미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는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 거예요.”임세희는 너무 기뻤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보람이 있다.하지만 겉으로는 속내를 숨기며 순진한 얼굴을 했다.“그게 무슨 뜻이야?”송소미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냉소를 지었다.“언니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해요. 내가 꼭 사모님이 되게 해줄게요.”임세희
문고리를 잡은 그의 기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에 차디찬 서리가 끼었다.그러다 결국 손을 놓고 돌아서 자리를 떴다.방 안.문현미는 설득해 보려 했지만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랐다.화해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들이 돌이킬 수 없이 막 나와 버렸으니.거기에 임세희까지 덤비고 있으니 윤혜인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갔다.“혜인아, 네가 속상한 걸 알고 있어. 할아버지만 아니면 나도 허락했을 거야. 한 달만 더 참아줄 수 있겠니? 할아버지는 막 약을 바꾸고 있는 단계라 차질이 생기면 안 돼.”“네. 고마워요. 어머님.”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제가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할게요.”문을 열고 나온 윤혜인은 도우미를 찾았고 문현미에게 식사를 올리라고 했다.그녀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또 문현미가 걱정되어 하는 수 없이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그녀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고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누군가가 윤혜인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그렇게 다행히 기둥에 머리를 박지 않았다.인사하려고 한발 물러서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구운 선배? 여기는 어떻게?”“아버지 심부름하러 왔어.”한구운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다정함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뭘 생각하느라 기둥을 못 봐?”윤혜인은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아무 것도 아니에요. 고마워요. 선배...”“고맙긴...”한구운은 손을 뻗어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멈칫하던 윤혜인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그녀의 행동에 한구운의 손이 경직되었다.그는 재빨리 사과했다.“미안, 너를 보면 동생이 생각나서... 그 애도 너처럼 귀여웠거든.”한구운의 말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상대는 그저 동생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자신이 과민 반응했다.이준혁에게 너무 많이 물든 것 같다.선배가 어떻게 자신을 좋아한단 말인가?그녀는 미소를
‘이건 협박이잖아. 전부 육경한이 이미 써먹고 남긴 수작일 뿐이지.’그는 사람과 협박을 주고받으며 말싸움으로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실질적인 상업 전쟁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말 몇 마디로 강한 척하며 겁을 주는 방식은 방현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역시나 방현수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지?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도 모자라 내 자식들까지 망하게 하겠다는 건가?”‘돌봐주긴 뭘!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육경한 이 녀석, 결국 내 자식과 손주들을 협박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성대하게 열어주겠다고? 파렴치한 놈, 칼로 사람의 가슴에 직접 찔러 넣는 것처럼 아픈 곳만 골라 찌르다니!’분노한 방현수는 가슴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이놈의 자식, 내가 못할 줄 알아? 내 나이에 이 늙은 뼈다귀가 뭘 더 아끼겠어? 네가 그 여자 때문에 친척이고 뭐고 다 끊겠다면 난 자네 미우 그룹 대문 앞에서 죽어버리겠어! 정말 나한테 망신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벌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정말 모든 사람들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하지만 육경한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번 해보시죠. 다만 그 뒤로는 대표님의 사생자들조차 돌볼 수 없게 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방현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가 알기로만 해도 서울에 세 명, 아르틴국과 리셀국에도 각각 있고 유학 중인 손주들도 세 명이 있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결혼하고 자식 낳는 걸 지켜보지도 못하고 떠나실 건가요?”그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아마 대표님께선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육경한이 자신의 속내를 샅샅이 조사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방현수는 말을 잃었다.심지어 사생자들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니, 육경한은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육경한! 자네 정말 그 미친 여자를 위해 우리 방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거야?”방현수는 분노에
육경한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다.방현수의 말은 듣는 사람을 우롱하는 태도로 육경한을 바보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오랜 시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단단히 단련된 육경한은 누구보다도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제가 대표님을 존경하는 건 사실입니다. 대표님은 저희보다 먼저 사업을 시작하셨고 경험도 풍부하시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시 대표님께서도 충분히 이익과 손실을 따져본 후 결정을 내리신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때 대표님께서 그 프로젝트를 받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제 죄책감을 조금 더 이용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프로젝트를 수락하신 순간, 저희 관계는 돈과 물건이 모두 깨끗이 정리된 상태가 된 겁니다. 방씨 가문이 그동안 가져간 이익은 투자 대비 몇 배, 아니 몇십 배나 됩니다. 지금 와서 이 일을 다시 꺼내 드시는 건 저로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 문제를 거론하신다면 저도 공공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할 겁니다. 상관없거든요.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육경한의 긴 발언은 방현수를 완전히 말문 막히게 만들었다.그는 육경한이 평소 강단 있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침착한 목소리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하지만 방현수도 노련한 사람이었다.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그는 표정을 비틀며 말을 꺼냈다.“육경한, 자네 말은 내가 잘못했다는 뜻인가? 내가 늙은 몸으로 직접 찾아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나온다니... 나더러 죽으라는 건가?”목소리가 떨리는 채로 방현수는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려쳤다.그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카드는 바로 죽음을 빌미로 하는 협박이었다.그는 자신의 나이를 무기로 삼아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방씨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방현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민기는 어찌 됐
육경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통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키가 큰 체구와 균형 잡힌 몸은 우뚝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서른 살이라는 남자의 가장 좋은 시기에 성숙함과 재력, 자신감까지 더해져 그의 매력은 한층 빛났다.그는 알고 있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또 하나의 배은망덕하다는 낙인이 찍힐 거라는 것을.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왜냐하면 방씨 가문을 등지는 또 다른 한쪽에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남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그의 곧은 자세와 당당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응접실 안에서 방현수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육 대표, 요즘은 당신 얼굴 보기가 이렇게나 힘들어졌네.”육경한은 그에게 다가가며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찾아오시니 미우 그룹으로서는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언제든 들러주시면 좋겠습니다.”방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여기 앉아 있는다고 해서 방씨 가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우리 방씨 가문에는 고작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는데... 둘 다 감옥에 들어갔어. 이봐, 육 대표.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육경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전 방씨 가문을 직접적으로 해칠 이유도, 의도도 없습니다.”하지만 방현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그 여자가 한 짓이나 네가 한 짓이나 뭐가 다르단 말이야? 자네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 여자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겠어? 자네는 그냥 작게라도 손을 써서 그 여자가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야 했어.”육경한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그 영상을 경찰에 넘길 거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이 말은 완
소원은 진아연의 방 한가운데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 사진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진이었다.게다가 사진 위에는 자신을 저주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이로써 소원은 선미가 진아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게 아니면 두 사람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고 원한도 없는데 왜 소원을 저주했겠는가?밖에서 집주인 아주머니는 계속 분노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던 중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아! 귀신이다! 아아아악!”소원은 놀라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비명 소리가 난 곳은 화장실이었다.화장실로 다가간 소원은 욕조 안에 누워 있는 선미를 발견했다.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선미의 손목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고 욕조의 물은 그녀의 입술 바로 아래까지 차 있었다.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물이 코까지 차올라 익사할 뻔한 상황이었다.그 끔찍한 장면은 누구라도 충격과 공포를 느낄 만큼 끔찍했다.하지만 소원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며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그리고 집주인 아주머니를 부축해 집 밖으로 나왔다.집 안은 발을 딛을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소원은 아주머니를 계단에 앉혔다.아주머니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셔츠의 단추를 풀어준 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소원은 진아연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어 숨을 확인했다.미약하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이 상황을 보며 소원은 진아연 스스로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대체 누구의 원한을 샀길래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걸까?’소원은 진아연을 미워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다룬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악인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과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경찰은 현장을 조사했고 진아연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소원과 집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차를 타고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했다.한편, 미우 그룹.
‘만약 현재가 날 모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앞쪽에서 택시 기사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소원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고 서현재와 관련된 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의문점이 드러나리라.택시에서 내린 소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선미가 살고 있는 곳은 고급스럽지 않은 낡은 아파트 단지였다. 건물은 오래된 데다 주변 환경도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영숙이 준 주소를 따라 1층에 있는 선미의 집을 찾은 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다시 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선미 출근한 거예요?”“아니야. 그 애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사흘째 안 나왔어.”영숙이 물었다.“거기 아무도 없니?”소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네, 조금 전부터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도 없어요.”“저 죽일 놈의 계집애 혹시 도망친 거 아냐?”영숙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나한테 1억 6000만 원 갚지 않았거든.”과거 선미가 저지른 사고로 생긴 빚의 일부는 방민기를 잘 구슬려 덜어냈다.방민기는 몸이 불편해도 마음은 따뜻했고 선미가 그의 취향을 잘 맞춰준 덕분에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었다.하지만 선미가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여권과 신분증이 모두 영숙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더욱이 선미의 성형미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만큼의 가치는 없었기에 그녀를 위해 헌신하려는 남자도 없었다.소원은 말했다.“그럼 제가 더 알아볼게요.”그녀는 선미의 직장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고 집 안에서도 전화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때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단으로 올라오다가 소원이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아가씨, 여기 사는 여자 찾으시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아줌마, 혹시 아세요?”“알죠. 여기 집도 내가 세 준 거니까요
소원이 집을 나선 후,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영숙에게 연락해 선미의 거처를 물었다.주소를 받은 소원은 택시를 타고 선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차 안에서 소원은 내내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것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기 때문이다.사실 처음에는 소진용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소진용은 늘 강인한 사람이었다.한이 그룹이 그동안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겪었지만 소진용은 늘 이를 버텨냈었다.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한 번은 큰 실수가 발생해 회사가 파산하고 수십억대의 빚을 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그때 아버지는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었다.“걱정하지 마라.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일 뿐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있잖아. 파산하면 어때? 천천히 갚으면 되고 집을 팔고 전세로 가도 괜찮아. 결국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결국 그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었고 소진용의 뛰어난 스트레스 대처 능력과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큰 힘이 되었다.그런 소진용이 왜 그때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소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파산과 청산을 맞닥뜨린다 해도 과거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게다가 그녀와 전미영에게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은 소진용답지 않은 행동이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문투성이였다.머리가 터질 듯 아픈 소원은 눈을 감고 천천히 진정하려고 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겠다고.잠시 후 소원은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차량이 멈춰 있는 순간, 옆 차선의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서현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소원은 깜짝 놀라 입을 열었지만 ‘현재야’하고 나지막한
“알겠어요, 언니. 꼭 그렇게 할게요.”강민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둘은 어느새 안상철의 집 근처까지 도착했다.이곳은 20년 넘게 재개발되지 않은 오래된 동네였다. 현재는 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만약 철거가 시작되고 나서 이곳에 왔다면 안상철의 집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안상철의 집은 매우 낡은 삼층짜리 오래된 건물 안에 있었다.소원은 3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과연 안상철이 여전히 여기 살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게다가 안상철이 정말로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었다.잠시 후 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나타났다.노인은 물었다.“누구를 찾으시는 겁니까?”소원은 노인을 알아보지 못했고 집 안을 둘러봤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르신, 혹시 여기가 안상철 아저씨 댁인가요?”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상철? 그런 사람 모르오.”소원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어르신, 이 집에 새로 이사 오셨나요?”그러나 노인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우리 집에는 나랑 아내밖에 없소.”소원은 다시 물었다.“그럼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노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곧 소원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어르신,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돈 달라는 거요? 돈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찾으시오.”그러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소원은 한숨을 쉬었다.“...”안상철은 이미 이사 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단서가 끊긴 것이다.강민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제가 나중에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안상철 가족의 출입국 기록을 한번 확인해볼게요.”하지만 강민혜는 팀장이 아니라 일반 경찰관이었기에 이런 일은 정식 절차를 거쳐야 했다.이번에는 주소를 얻은 후 바로 오긴 했지만 그녀
“찾을 수 있을 거예요.”소원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그건 예전에 안상철의 딸 덕분이었다.한 번은 그 아이가 병을 앓던 날, 폭우까지 내리던 날씨 속에서 안상철이 딸을 데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마침 그때 소지용이 안상철에게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걸었고 통화 중 안상철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소진용은 사정을 듣고 바로 차를 몰아 그 아이를 병원까지 데려다줬다.소원 역시 그때 차에 동승했으며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이를 돌봐줬던 기억이 있었다.“그럼 다행이네요.”강민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그녀는 당찬 성격으로 팀에서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소원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수줍음을 타는 모습이었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민혜 씨, 괜찮으면 저를 언니라고 불러요. 소원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게 들리잖아요.”강민혜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했다.“그럼 제가 소원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강민혜는 소원과 자신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소원은 명문가의 장녀였고 자신은 후원이 필요했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생활 방식부터 교육까지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하지만 다른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공적인 태도로 대할 수 있었던 그녀도 소원만큼은 다르게 느꼈다.직접 만나본 소원은 소진용처럼 정직하고 선하며 강한 사람이었다.소원 가족은 강민혜에게 은인이었고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민혜 씨 같은 동생 있었으면 참 좋았겠어요.”만약 동생이 있었다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렇게나 버거운 시간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더 안정적이었을 것이다.소원은 강민혜를 보며 어릴 적 부모님이 동생을 낳으셨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난 아기가 떠올랐다.그 사건으로 온 가족이 한동안 큰 슬픔에 잠겼었다.비록 아무도 그 아기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잊지 못하
“알겠어요, 여보.”윤혜인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아, 그리고 다음 주에 센디오로 출장 가야 해.”윤혜인은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비록 이씨 집안은 재력이 풍부했지만 윤혜인은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산후 우울증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이다.일은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다행히 이준혁은 그녀의 복직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다른 남편들처럼 집이 넉넉하니 아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며 남편을 보살피라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윤혜인의 복직을 먼저 제안한 사람도 이준혁이었다.그는 그녀의 감정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말했다.“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일하러 나가도 돼.”윤혜인은 그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다음 주?”이준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일정 조정해서 데려다줄게.”“괜찮아요. 당신 일도 중요한데요.”윤혜인은 남편이 자신의 일을 제쳐 두는 게 부담스러웠다.“걱정 마. 잘 조정할 테니까. 내 아내만큼 중요한 건 없어.”이 말에 윤혜인의 가슴은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알겠어요. 내 일도 이틀 정도 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 이번 기회에 휴가처럼 보내요.”아이가 생긴 이후로 둘이 함께 여행을 간 건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게다가 집에는 문현미와 홍승희를 비롯한 여러 도우미들이 있어 아이들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좋아. 벌써 기대돼.”이준혁은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여보, 지난번에 내가 사준 그 잠옷 가져갈 수 있어?”“그거요?”윤혜인의 얼굴이 빨개졌다.그 잠옷은 일종의 코스튬 같은 옷이었다.그녀가 과거 이선 그룹에서 이준혁의 비서로 일했을 때 입던 정장을 변형한 스타일이었다.하지만 원래 정장보다 훨씬 노출이 심했고 필요한 부분이 다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응. 난 당신이 그거 입은 모습이 너무 좋아.”그는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그 잠옷을 입은 윤혜인을 보면 그는 스스로를